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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이 세워놓은 벽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게 너무 견고하잖아요, 지금 우리나라는. 그 바깥의 것들에 대한 여유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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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결혼이 하고 싶던 날도 있었다. 그때는 결혼보단 타인의 삶에 무임승차를 하고 싶었다. 나보다 조금 더 책임감 있고, 경제관념을 갖춘 사람이라면 혼자보다 둘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아내보단 나 자신이고 싶다. 아직 그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는 나를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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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스물한 살에, 엄마 나이 마흔다섯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지주막 아래에 있는 뇌 대동맥이 파열되는 심각한 뇌출혈이었고, 보통은, 그러니까 병의 통상적인 결과가 대부분 사망이라는 그 병에서 엄마는 죽지 않고 살았다. 뇌 일부분이 죽어 감정 조절, 기억, 인지능력 등이 갓난아이와 다름없었지만. 사람들은 엄마가 젊어서 버틴 거라고 했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뇌 질환 병동에 똘망똘망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엄마를 보면 사람들은 젊어 아파서 어쩌냐며 입을 모았다. 맞아, 엄마는 젊지. 젊을 때 아파서 산 거지. 그런데 이제 조금씩 엄마가 아픈 나이가 되어가 보니 알겠다. 엄마는 이번에도 젊은 게 아니라 어렸다.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보는 엄마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면 중 단 몇 개에 불과할 테니까. 내게 그 많은 면을 설명해줄 엄마가 이제 없다는, 그 인지능력을 가진 엄마가 없다는 걸 느낄 때 서럽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 가끔 지금의 엄마를 붙잡고 묻는다. 지금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금의 엄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중이니까. 느리게, 아주 느리게.

우울해서 살기 싫다는 나에게, 남몰래 죽음을 결심하던 나에게 엄마는 소주를 건넸다. 돌이켜 보건대 아마 물이었을 것이다. 하나도 쓰지 않고 밍밍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때 나는 그게 정말 소주인 줄 알아서, 하나도 쓰지 않다고 했더니 엄마는 "그만큼 지금 네 삶이 쓰다는 거야. 너 정말 힘들구나" 했다. 그 뒤로는 그 힘으로 성인까지 버텼다. 나는 소주가 달게 느껴질 만큼 힘든 미성년자다, 하고.

감정 조절이 어려운 엄마는 쉽게 짜증을 내고, 사람을 꼬집고, 식기를 던지거나 우리를 때린다. 간병4년 차까지는 엄마랑 싸우기도 하고, 앞에서 서럽게도 울어보고, 다 놓고 집에 가버리기도 했는데 이제 언니랑 나는9년 차 간병인이라 엄마가 때려도 깔깔 웃고, 엄마가 늘어나도록 잡아도 되는 옷들을 입으며 엄마가 식사를 거부하면 우리 먼저 밥을 빠르게 먹는다. 내가 화를 낼 때, 같이 화를 내는 엄마였다면 마음이 좀 편했으려나. 그런데 엄마는 도통 그런 엄마가 아니어서, 우리 자매도 결국 엄마 같은 어른이 되어간다. 엄마가 화를 내면 휠체어를 끌고 세 시간씩 공원을 돌고, 어느 곳이든 휠체어를 민다. 끈질기게 엄마의 지구를 넓히기 위해.

할머니는 엄마가 쓰러진 이후로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더니3년 뒤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은, 어려진 엄마에게 하지 않았다. 지금도. 엄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를 보면 울고, 삼촌들을 보면 울고, 우리를 보면 웃는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사랑해"라는 말은 잘 한다. 엄마의 뇌는 잊었을지언정 엄마의 몸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자주 엄마의 이마에, 뺨에, 손등에 입을 맞춘다. 버텨줘서 고마워, 기억해줘서 고마워, 엄마 몸아, 그런 의미로.

누구한테 털어놓지 못해서 혼자 삭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요. 집안일을 한다든가, 음악을 듣는다거나. 일단 힘들다고 타인을 먼저 찾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바꾸고 싶은 부분 중 하나예요. 누군가한테 기대는 것도 방법으로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약간의 강박증이 있어서 청소를 거의 매일 해요. 근데3일에 한 번 한다? 안 되는 거예요. 최소 이틀에 한 번은 밀대로 바닥을 밀어야 되니까요. 그럼 나는 지금 너무 힘든 상황이거나 일이 과중돼 있는 거죠.

선란 그리고 일기에 관련된 건데 저는 가끔 제가 일기에 써놨던 어떤 사건들을 모른 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이번에도 엄마가 너무 짜증을 내거나 힘들게 하면 저는 손을 쓸 수가 없어요. 엄마의 체구가 언니랑 저보다도 훨씬 크세요. 키도 크시고 체격도 있으셔서 언니는 예전에 엄마를 잘못 들어서 허리가 나갔고 힘쓰는 건 웬만큼 제가 다 해야 되거든요. 너무 부칠 때마다 가끔은 진짜 모른 척하고 싶어요. 내 가족을. 혼자 나가고 싶다 생각하다가도 이것도 내 삶이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다고 꾸역꾸역 인정하고 사는데, 혹시 여러분한테도 부정하고 싶지만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삶의 한 부분이 있는지 궁금해요.

나는 아무리 아름답게 이야기를 꾸며도 단 한 사람 인생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고 믿는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심지어 읽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인생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운 게 있을까. 엄마의 뇌는 잊었지만 엄마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삶을, 나는 자주 들여다본다. 엄마의 손가락, 팔꿈치, 목, 다리, 무릎……. 모든 곳에 틈 없이 새겨진 삶의 흔적을. 나는 나의 빈약한 상상력으로 내가 가진 엄마의 단면 몇 개를 자주 이어붙이며 엄마의 삶을 쓴다. 언젠가 또 내 곁을 떠난 소중한 사람의 삶을 그렇게 쓰겠지. 그렇게 차곡차곡 내 안이 타인의 삶으로 가득 채워졌을 때, 그때 나도 내 삶을 잘 마무리 지어야지.

중증장애인인 엄마는 휠체어 없이 이동할 수 없다. 이 말은 엄마의 지구는 우리가 사는 지구보다 훨씬 작다는 것.

인문계 고등학교를 죽어도 가기 싫다는 나를 데리고 엄마가 간 곳은 놀이동산이었다. 엄마는 롤러코스터를 못 타는데 그날 나를 설득하겠다고 롤러코스터를 탔다.
"엄마도 싫고 무서운데 탔잖아. 그러니까 너도 싫고 무섭지만 한 번 해봐. 아직 안 해봤잖아. 해보고 아니면 말면 되지."
그렇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해보니…… 정말 더 싫고 영 아닌 것 같아서1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예술고등학교로 편입했지만.

케이팝을 들어도 신이 나지 않을 때, 나는 인생이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미래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안에 빠지기 쉽다는데 내가 꼭 그렇다.

‘나 돌보기’에 소홀하면서 일상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보통 잘해내고 싶은 게 많을 때 이런 욕심과 오기가 발동하는데, 도대체 나는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싶은 걸까?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 마음과 별개로, 나는 나의 어떤 실패는 반드시 지지하는 편이다. 나의 굳셈을 과신하지만 동시에 그런 자신을 아슬아슬하게 여기기 때문에 나약함을 들키려거든 부디 안전한 곳에서 무너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여전히 밀어붙이기를 멈추지는 않은 채로 살게 되는 시기가 있다.

생각이 멈추고, 마음도 멈추고. 오직 음악만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공간에 갇힌 것 같은 외딴 기분. 의도적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는 자의적 멍 때리기가 아닌, 갑자기 퓨즈가 나간 느낌이랄까.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지금 힘들구나, 깨닫는다.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듦을 대체로 부정하고 축소시키는 편이지만 이때만큼은 백기를 든다. 인정. 그래, 나 너무 힘들어. 이리저리 플레이리스트를 바꿔가며 기분을 띄울 기력도 없이 버스나 지하철 좌석에 몸을 맡긴다. 눈을 감으면 언덕에서 빠르게 굴러가는 빈 깡통이 그려진다.

요즘 나는 엉망으로 열심히(‘엉망’과 ‘열심’의 위치를 헷갈려서는 안 된다) 살고 있다.

다들 그렇지는 않다는 건 일찍이 알았으므로, 이런 나와 지독히도 불화했던 시절은 어찌어찌 지난 일이 되었다. 다만 내가 충분한 학습과 시간을 들인 끝에 기꺼이 마주 볼 수 있게 된 나의 다른 못난 구석들과 달리, 나를 좀먹는 이 기이한 성실함 앞에서는 가끔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놓을 뿐이다. 지금처럼.

엄마는 스물한 살에 언니를 낳고 스물세 살에 나를 낳았다. 엄마는 내 또래 중에서 젊은 엄마였다. 엄마는 참 젊을 때 나를 낳았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를 훌쩍 넘어 돌아보니, 엄마는 젊은 게 아니라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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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인 나는 좀 어리숙했고 지금처럼 성격이 불같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만 속이 풀리는 나는, 그런 면에서 단체 생활에 최악이었다. 조금 더 솔직했다면,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다면, 속상하고 질투 나고 친해지고 싶고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는 걸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걸 못한다. 아니, 그때는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못하는 거였다. 좋아하는 게 많아서 감정적인 면으로는 누구보다 솔직하고 풍성한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게 많은 것과 표현하는 건 좀 다른가? 그래, 다를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게 많은 건 그저 내 안에 담아두고 쌓아두고 간직하면 되지만 표현하는 건 꺼내야 하니까. 꺼내어 주는 걸, 어릴 때부터 못했던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지만 이십 대의 나는 만남보다 많은 이별을 했고, 누구의 잘못도 없는 다툼을 했으며 그렇게 원망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들었다.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할걸. 이 생각을 대학교 졸업할 즈음에 했다. 괜찮냐는 말들에 그냥 괜찮다 하고 다녔는데, 내가 힘들다고 말해봤자 저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마음의 짐만 얹는 꼴이니 그냥 괜찮다고 하고 다녔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 힘든 걸 나눌 순 없지만 나의 힘듦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힘들지 않도록 바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이제 와 다시 말하자면, 정말 힘들었어요.

물론 이건 후회다. 안다. 돌아가도 나는 못할 거다. 지금도 잘 못하니까. 그러니까 이 부분은 너무 깊게 후회 말자.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는 걸, 뭐.

섬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리운 이름을 마음껏 소리 내어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전 애인, 그, 내가 만났던 사람처럼3인칭으로 에둘러 말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을 꾹꾹 눌러 부르는 것.5년 전, 스물셋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섬으로 도망쳤던 걸까. 그때는 막연히 나를 아는 이도, 그를 아는 이도 없는 곳에 가서 그 이름을 실컷 부르고 오려고 했다. 날이 좋으면 바다 건너 제주가 보이는 범바위 위에서,200년 된 소나무가 있는 지리해수욕장에서,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호 이렇게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던 돌담길에서도 나는 지독하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이후, 누군가 그리운 날이면 섬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고, 더는 내 마음을 아무렇게나 팽개치지 않았다.

그저 섬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알맞은 곳이구나. 그렇게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살아가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은 그리움에서 그리움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까지도.
가을과 겨울 그리고 다시 가을. 청산도에는 총 세 번을 입도했고 그때마다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섬이 꼭 내 것처럼 느껴졌다.

섬에서 섬을 바라보는 풍경은 더는 다다를 데가 없다는 점에서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청산도에 들어왔을 때부터 섬의 끝자락에 와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걷기 시작하자 새로운 끝이 있었다. 자주 오가던 골목에 건물이 들어서고, 나중에 다시 찾으려고 했던 카페가 사라지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어제도 분명 있었을 길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자 나는 섬에 그리워하러 온 게 아니라 누군가를 더 깊이 좋아하기 위해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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