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을이 상가(喪家)였다. 안산은 250여명의 아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슬픈 도시가 되었다. 가슴에 통증이 계속 몰려왔다. 그 순간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도 영혼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자들과 우리 하나하나는 뿌리가 같은 영혼의 나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 한 사회에서 함께 산다는 건 이렇게 서로 깊게 연결되는 것이구나.’ 아이들의 영혼과 다른 희생자 분들의 영혼을 위해 우리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울음을 울었다. 사진 속 아이들을 보면서 작가들은 서서히 큰 사건과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 세월호 참사는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작가 한둘이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영상팀과 사진팀, 구술과 기록관리를 위한 학자팀들이 함께 모였다. 그분들과 함께 시민기록위원회를 만들었고 그 안에 작가기록단을 꾸렸다. 우리는 부모들이 자식을 잃은 후 그 순간순간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그 떨리는 숨소리까지 기록하려 노력했다. 몸부림치면서 겪은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

부모들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더이상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외면했던,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실은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진실을 통렬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부모들이 평범한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회의 문제를 외면할 때 결국 화살이 돌아오는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침묵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터득한 이 성찰 이후 부모들은 우리의 가장 밑바닥인 ‘영혼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번 인터뷰는 유가족들뿐 아니라 이 사회의 평범한 이들을 위한 작업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이토록 쉽게 또다른 ‘유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유가족들의 삶을 깊게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들은 가고 없지만 유가족들의 몸부림이 헛된 기다림만은 아니었음을 약속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부모들이 많이 아픈데 기록하는 우리가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인터뷰 내내 울다가 한 글자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많았다. 아픔을 견디는 부모들이 있었기에 우리도 견딜 수 있었다. 이 세상 포기하지 않고 살아도 좋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 부모들은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해오면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긍정적인 가치들을 많이 얻었다. 모두 그분들의 인터뷰 안에 촘촘히 박혀 있다. 우리에게 남은 건 그 진실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이 인터뷰 기록이 마찬가지로 평범한 이웃들에게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여기 적은 것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그 이야기와 마음을 어찌 종이 몇 장의 기록에 담아낼 수 있을까. 그래도 활자의 한계를 넘어 적어보고자 애쓰는 것은 어머님 혼자 건우를 기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 모두가 같이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 식구가 다 그래. ‘나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건우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교통사고라거나 병이라면 운명이라고 하겠는데, 이건 사고라지만 국가가 죽인 거죠. 그리고 어떻게 한 학교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한날 한시에 죽는 운명이 있을 수 있겠어요. 말이 안 되죠. 이번 사고에 김건우만도 세명이에요. 세명의 김건우가 같은 운명이라구요? 그걸 받아들이라구요? 말도 안 되지요. (단원고 김건우 셋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도 사무치게 마음 아픈 게, 생존자 아이들이 전하는 말이 아이들이 서로 밀치지도 않고 구해줄 줄 알고 줄 서서 있었다고 그래요. 그 말 들으니까 애들은 다 자신들이 구해질 줄 알았는데, 게다가 그 애들이 얼마나 성숙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오라는 정보도 안 주고… 아이들이 어려서, 말 잘 들어서 그랬다는 거 들으면 억울하고 분하고…

그때 아직 구조 안 됐다고 누구 하나만 말했어도 좀더 구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정말 그전까지 기자들이 현장에서 발로 뛰고 그걸 보도하는 걸로 알았어요. 그런데 그때 처음 알았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인터뷰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 말만 담는 것 같아요. 뉴스가 진실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이번에 여실히 알았지요. 이 나라가 얼마나 무능한지. 아니 무책임한지. 못 구한 게 아니구 안 구했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가 않는데 이게 현실인 거죠. 이런 세상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내가 너무 몰랐다는 것이…

다른 실종자 가족들한테 우리 아들 나와서 간다고 하는데… 미안한 거예요. 우리 아들이 이렇게 나와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기도 하고. 그러다 내가 미쳤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들이 이렇게 나온 것이 감사할 일인가요. 실은 거기(팽목항)서 우리가 마지막이 될까봐 너무 힘들었어요. 나만 남으면 어떡하지. 우리 아들만 못 찾으면 어떡하지… 죽었어도 좋으니 못 찾는 거보다는 찾아서 몸뚱이라도 찾아 만났으면 좋겠다 이 생각밖에 없었어요. 포기하고 나니까, 나온 것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하더라구요. 그래서 짐 챙기면서 그랬어요. "하느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돌아와줘서, 아들, 고마워." 옆에서 다들 부러워하더라구요. 이게 부러워할 일인지. 그런데 그게 부러워요, 거기에선. 그리고 서로 축하를 해요. 이게 말이 돼요? 그런데 그래요. 그러니 내가 미치겠는 거예요. 내가 왜 이게 감사해요? 도대체 왜? 그런데 감사하다고 하고, 아 미쳤구나. 뭐가 감사해. 애가 죽어서 나오는데 뭐가 감사할 일이야. 이게 미친 세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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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물론 우리는 죽은 자들을 기리지만 그렇게 기리면서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을 훨씬 더 죽어 있게 만든다. 하지만 죽은 자들을 기쁘게 하면 그들이 다시 살아난다. 그게 말이 될까? 내가 EF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것은 옳았고 나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건 옳았다. 그리고 나는 약속을 지켰다. 다음이 내가 쓴 것이다.

율리아누스는 공개적으로 폭력적 방법에 반대했다. "나는 갈릴리인들을 인도적으로 부드럽게 상대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식으로든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금한다……. 사람을 설득하고 가르치는 일은 주먹질이나 모욕이나 고문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성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에서 잘못을 범하는 불운한 사람들에게는 증오보다는 연민을 느껴야 한다".
이것은 원칙인 동시에 실용주의이기도 했다. 기적과 순교는 초대 기독교가 잘 팔리게 한 두 가지 중요한 장점이었다. 종교를 위해 죽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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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점심은 거의 20년 동안 계속되어 내 삶의 고요하고 빛나는 지점이 되었다. 그녀가 날짜를 제안하면 나는 늘 그 시간을 비우곤 했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 아, 우리 둘 다 나이가 들면서 ― 흔한 병과 작은 사고에 시달렸으나 늘 그것은 가볍게 넘겼다. 나에게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옷에서나 대화에서나 식욕에서나(소식이었다) 흡연에서나(굳건했다). 내가 도착하고, 그녀는 늘 이미 와 있고, 내가 앉으면 그녀는 묻곤 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소식을 가져왔나요?" 그러면 나는 미소를 짓고 그녀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게 하고, 실패한 결혼과 성공한 자식과 옮겨 다니는 직업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소식을 전하려고 최선을 다하곤 했다. 그녀의 지적 관심은 시간을 초월했다. 그리고 늘 그녀가 점심값을 냈다.

나는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작별도, 소환도, 마지막 메시지도 없었다. 나는 그녀가 불평 없이, 스토아학파답게, 소리 없이, 거의 은밀하게 죽었다고 상상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 이런 것이 수십 년 동안 오늘의 만트라 역할을 해왔다. 안이한 진술이다. 오히려 개인적인 것은 역사적인historical 것이다. (또 개인적인 것은, 잊지 않기 위해 말해두는데, 히스테리적hysterical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것은 어떨까. "현재의 과제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교정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과거를 교정할 수 없을 때 더 긴요하다." 이건 EF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또 지난 200년 내의 유럽의 어떤 철학자-역사학자가 한 말의 번역일 수도 있다.
어떤 항목은 한 문단 길이고, 어떤 것들은 한 페이지 길이고, 어떤 것들은 출처가 밝혀져 있고, 다수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스크랩, 또는 즉흥적인 기록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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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제출하지 못했다. 거창한 관념 몇 가지 ― 역사적 진실의 허약성, 인격의 허약성, 종교적 믿음의 허약성 등 ― 를 산만하게 집적거렸지만 한두 문단 이상을 쓴 기억은 없다. 그런 것 대신 나의 관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인간관계의 허약성과 결혼의 허약성이었다. 나는 이혼한 지 두 해쯤 되어가고 있었으며 깨끗한 법적 결별이라는 관념이 미망임을 발견하고 있었다. 상처, 원한, 경제적 고통 ― 이 모든 것은 계속된다. 또 아무리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 해도 변호사의 간단한 편지 한 통, 새 상담사와 한 번의 만남, 아이의 장래를 두고 어른스럽게 토론하기로 하고 한 번 만난 것으로도 강박에 사로잡히고 복수심에 불타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 ― 다른 말로 제정신을 잃기 ― 십상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고통은 덜어주겠다. 나 자신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는 고통을 덜어주고 싶기 때문에.

나는 대담한 사람이 아니다. 내 인생에서 대담한 걸로 오해될 수도 있는 결정들(결혼, 이혼, 혼외자를 둔 것, 한동안 외국에서 산 것)은 사실 신경과민이나 겁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우리 삶에서, 그 철학자가 선포한 대로,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어떻게 해볼 수 없으며, 자유와 행복이 이 두 범주의 차이를 인식하는 데 달려 있다면 내 인생은 그런 철학적인 방식과는 정반대였다. 나는 나 자신이 통제하에 있다는 생각과 모든 것이 가망 없고 나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 버렸다, 이해와 삶 양쪽에서 그렇게 되었다는 깨달음 사이에서 시소를 타고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그래,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아마도.

앞서 말한 대로 그녀는 어떤 면에서도 공적 인물이 아니었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기질로 보나 적성으로 보나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우리 동기들이 처음에 그녀에게 어떻게 반응했는지 돌아보았다. 어떤 경외감, 초기의 꽤 많은 침묵과 어색함, 어떤 말로 표현되지 않는 재미. 그 모든 것이 곧 진짜 온기로 바뀌었다. 또 그녀를 보호하는 듯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세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고결함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심 쓰는 척하는 태도와는 상관없었다.

그녀와 직선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제 알겠는가? 아니, 이것도 모욕이다, 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내 말은, 나에게, 또 나 같은 사람들에게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 그것을 주도하거나, 심지어 동등한 자리에 서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제 알겠느냐는 거다. 그녀가 그걸 교묘하게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 그녀는 내가 만나본 여자 가운데 그런 교묘한 조종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 더 넓게, 다른 지평과 초점으로 사물을 검토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바라건대는, 내가 왜 그녀를 흠모했는지 알게 되었기를 바란다. 또 나는 그녀가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사실을 흠모했다. 내가 이런 말을 안나에게 했을 때 ― 딱 그대로 ― 그녀는 나를 지적인 마조히스트라고 불렀다. 나는그 딱지가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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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우리에게 한 가지 가르쳐준 게 있다면 역사는 길게 보아야 한다는 것, 나아가서 역사는 무기력하게 혼수상태로 누워 우리가 크고 작은 망원경을 들이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활동적이고 들끓고 가끔 화산처럼 폭발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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