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관 룸메이트들과 살면서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잘자’였다. 학교로 출근했으나 아르바이트 직장을 거쳐 퇴근해 돌아오면 언제나 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대충 씻고 늦게까지 과제를 했다.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을지 계산하는 날들을 반복하며 노동시간만큼만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면이 극도로 부족했다.

사실 진짜 부족한 것은 시간이라는 자원이었다. 다음 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질 좋은 식사를 할 시간, 질 좋은 수면을 할 시간, 질 좋은 대인관계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되찾을 시간이 없었고, 미래를 계획할 시간도 없었다.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도 돈과 시간은 필수다. 내가 각종 행사를 거절하는 상용구는 하나였다. 시간이 없어서요. 이 말은 곧 돈이 없어서요, 와 동의어였다.

청년의 빈곤에 대해 질적 방법론을 시도한 연구는 매우 적은데, 연구 대상자들은 하나같이 시간 자원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은 누구보다 강력하게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현실에 묶여 있다. 살기 위해 했던 학원 일로 이력을 채워온 나는 언젠가 학원을 창업하겠다고 생각한다. 이 계획이 의외로 자연스러워서 깜짝깜짝 놀란다. 학원 일이 언제부터 나의 장래 희망이 되었나.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사람으로 살지 고민을 이어갈 시간이 없다. 내가 미래를 고민하다가 써버린 시간에 돈을 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13시간씩 일했던 주말엔 버거도 씹지 않고 삼켜야 했다. 나가기조차 귀찮으면 학원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학원강사의 주식은 사실 컵라면이다. 스물부터 스물한 살까지 1년을 이렇게 지냈더니 「생로병사의 비밀」에 섭외될 몸뚱이가 됐다. "빈곤한 식사는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질병이라는 청구서로 날아"왔다. "배만 채우는 식사는 건강을 담보로 잡힌 후불 결제"35였던 것이다.

10킬로그램이 쪘고 생리가 끊겼다. 다낭성난소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젊음은 수면 부족, 불규칙적이고 질 낮은 식사, 과로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설상가상 성대결절까지 왔다. 그런데 성대결절인 줄도 몰랐다. 매일 6~7시간 연강을 해서 그냥 목이 쉰 줄로만 알았다. 어릴 때부터 달고 살던 편도염이 재발할 우려가 있어 편도 수술을 했는데, 대신 강의를 해줄 강사가 없어서 수술 후 2일차에 9시간 연강을 한 것이 목에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살과 병을 얻고도 나는 가난했으므로 쉬지 않았다. 학업을 그만두지 않았고 학원도 그만두지 않았다. 생리불순이 심각해서 어쩌다 한 번 하는 생리는 거의 하혈 수준이다. 10대 때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생리통도 극심해져 응급실에 가 링거를 맞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체력과 정신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지금은 믿을 만한 자원이 아니게 됐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싶어 과외를 하나둘 정리했다. 마지막 과외를 갔는데 학생이 자기가 다니는 영어학원의 원장님이 심정지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 주 일요일, 학원 수업과 수업 사이에 잠깐 외출을 했는데 갑자기 구토가 올라왔다.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토악질을 하다가 13시까지만 진료한다는 병원에 사정해 링거를 맞았다. 13시 반에는 수업을 다시 시작해야 해서 13시 20분까지, 3분의 2만 맞고 나왔다. 링거를 끝까지 맞는 것이 사는 쪽인지, 학원에서 잘리지 않는 것이 사는 쪽인지 저울질해볼 틈도 없었다.

대학(원)생과 학원강사, 과외 선생을 병행하던 6년의 최근 2년에는 이 책을 쓰는 일이 추가되었다.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 메모장에라도 몇 줄씩 썼다. 생명수가 될 줄 알았는데, 글쓰기까지 겸하면서 시름시름 앓는 일이 늘었다.

무기력했다. 나는 새는 중이었다.36 돈을 벌어도 벌어도 불안해서 나를 몰아붙이며 일했던 날을 버티게 한 것이 정신력이라고 믿었기에 이 무기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글을 쓰려고 퇴사한 후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무기력, 퇴사, 하기 싫어 등을 검색하니 번아웃이 나왔다.

뇌파 검사상 나는 번아웃이 맞았다. 우울증도 있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했다.

나의 뇌가 감정적 회로보다 이성적 회로를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사가 상담의 피치를 올렸다.환자분은 비범한 사람이에요. 괴로움을 처리하는 방식이 남들과는 달라요. 덜 슬픈 거죠. 적당히 기쁜 겁니다. 스스로를 달랠 줄 알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왜 저는 덜 슬픕니까. 덜 슬프고 적당히 기쁜 것이 좋은 겁니까. 제가 대단히 슬프고 끝장나게 기쁜 것을 잘 모르는 게 좋은 것이냔 말입니다. 의사의 어깨를 흔들며 묻고 싶었다.

노동 환경이나 강도를 차치하고 연봉 숫자로만 보면, 나는 꽤 잘 버는 축에 속하는 6년차 학원강사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먹방 유튜버에게 대리를 맡길 수 있는 여유분의 만족감이란 것이 별로 없다. 누텔라를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이 없는 것처럼, 가난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번 맛보면 가난의 맛은 잊히지 않는다. 그 정도 수입이면 넉넉한 편이라고 주위에서 날 추어올려도 내 기분은 전혀 넉넉하지가 않다. "가난은 헤어나기 힘든 것이다. 그 인력에서 벗어나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그것은 헤어날 길 없이 우리를 집어삼킨다."40

만약 통장에 찍히는 0이 총탄이 되어 가난의 공포를 쏴 죽여줄 수 있다면 몇 개의 0이 필요할지 따지며 탄창이 넉넉하기만을 빈다. 연 1억을 벌어도 총알은 여덟 발뿐이니 가난의 공포는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같잖은 위안거리가 있다면, 그 빌런을 상대하는 내가 하릴없이 버텨낸 히어로라는 점이랄까. 오늘도 이 액션 스릴러 시리즈는 절찬 상영 중이다. 폐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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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10대가 됐을 무렵, 열음네 사정이 확 나빠져 금곡주공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 탈출이었다. 가족으로부터, 이 동네로부터,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먼저 탈출한 사람은 나였다. 두 살 많은 내가 먼저 대학에 진학하며 대구로 도망쳤다. 남은 열음은 종종 내게 전화했다.언니, 나 여기 싫다. 나도 나갈래. 언니, 거긴 좋나.

열음과 내가 끈끈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빠들이었다.24 눈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알코올중독에 빠진 경훈과, 벌이는 사업마다 족족 말아먹은 영창은 간헐적 폭력배였다. 경훈의 조준 실력은 형편없어서 나는 날아오는 소주병을 더러 피할 수 있었으나, 열음은 무지막지하고 무식하게 주먹질을 해대는 제 아빠 영창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가 흘린 피가 우리를 피를 나눈 자매보다 더 자매 같은 사이로 만들어주었다.

언젠가 열음이 말했다.언니, 우리를 아는 건 우리뿐이야. 마치 전쟁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가난을 수군거리며 서로를 껴안는다.

여전히 담이와 태주와 나는 공통의 고통과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질투와 박탈감을 함께 나눈다. 담이와 나는 유년 시절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어른’에 대해서, 태주와 담이는 취업 준비 기간이 주는 비참함에 대해서, 나와 태주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명확한 한계를 표현할 수 없는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 토로(때론 토론)했다. ‘20대 청년’이라든가 ‘MZ세대’ 같은 용어의 기본값에 우리가 포함될까. ‘청년’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20대’에서 가난이 고려되지 않고, ‘MZ’를 ‘고생’을 모르는 세대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열음이 한 말이 백번 옳다. 우리를 아는 건 우리뿐이다.

20대는 왜 이렇게 해야 할 일이 많을까. 돈이 부족해도 마음은 충만해야 하고, 최저임금을 받아도 사서 고생을 해야 하며, 학점에 취업 걱정을 하면서 연애도 해야 하고, 마른 지갑을 쥐어짜서 애인과의 기념일도 챙겨야 하고… 차라리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29 알게 된 편이 낫다.

스물한 살의 가을에 캐리어를 끌고 본가에 들러 책들을 챙겼다. 어차피 내 짐이라고는 책뿐이었다. 살림 집기가 아빠의 외상값으로 하나둘 처분되는 동안, 돈으로 바꾸기엔 헐했던 책들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끝내자, 이제.

전에 없이 아빠를 오래도록 응시하며 속으로 말했다.

아빠가 내 피아노를 버렸듯 나도 아빠를 버려야겠어.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겨울 계절학기에 ‘희곡의 이해’를 듣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아빠가 잘못된 것 같아. 교실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택시에 올라타 아빠가 남긴 음성메시지들을 연이어 들었던 순간만은 선명하다. 다 잘못했으니 제발 전화를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아빠의 목소리. 나는 대성통곡했다.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었으니 아빠의 부재에 대한 슬픔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눈물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꺽꺽 숨넘어가게 우는 내게 택시 기사님이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울음을 참는 끅과 끅 사이에아, 빠가, 돌아, 가셨, 나봐요, 라고 글자를 끼워 넣어 답했다. 기차역에 날 내려주며 기사님은 택시비를 받지 않으셨다. 그날은 12월 21일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이자 아빠의 생일이 3일 남은 보통의 날이었다.

장례식은 치르지 않았다. 문상객들에게 아빠의 죽음을 설명하기가 괴로워서였다. 아내와 딸이 나간 집에서 혼자 지내다가 술 한 병을 비우고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구분하기에는 너무도 약한 시력이라 손에 잡히는 대로 털어넣고는 미안하다, 사랑했다, 라는 메모인지 유언인지를 남기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어요, 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와는 한집에서 살 수 없다던 할아버지에게 부고를 전하며 송곳 같은 말을 뱉었다.죽어도 같이 못 산다던 당신 아들이 죽었습니다.

염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어서 엄마만 들어갔다. 내가 태어나면서 시작된 우리 집의 불운이 한 명씩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끝나는 데스게임처럼 느껴졌다. 할머니, 아빠. 다음은 나일까. 화장하는 것은 볼 수밖에 없었다. 화장을 마친 자리에 하얗게 마른 정강이뼈가 보였다. 반바지를 입고 앙상한 정강이를 드러낸 채 앉아 있던 술 취한 아빠가 떠올랐다.
장례라는 것은 식을 치르지 않으면 정말 짧고 간단했다. 할머니의 무덤 옆이 아빠의 묫자리였다. 아빠를 묻고 나니, 날 괴롭히던 아빠가 이제 편안했으면 좋겠는 아빠, 그간 질리도록 괴롭혔으니 하늘에서는 부디 나와 엄마를 굽어 살펴주면 좋겠는 아빠가 되었다.

계절학기 수강과 학원 일을 하면서 이 건을 처리했다. 한겨울에 시내를 쏘다니며 손발이 시렸을 텐데 감각이 고장 났는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한 달 반을 매달린 끝에 법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정승인이 완료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문득 귀가 엄청 시렸다. 아, 쌍꺼풀만이 아니었네. 귀도 아빠를 닮았지. 코도 아니고 정수리도 아니고 하필 귀가 시려서 짜증이 났다. 왜, 나는, 아빠가 이런 식으로 죽어서. 왜, 하필 이 겨울에 아빠가 죽어서. 어째서 나는 혼자 이렇게. 뼈가 삭을 것처럼 아팠다. 가혹했다.

이제 그만 죽어야겠다고 결심할 즈음마다 외할아버지가 날 보러 왔다. 구포시장이나 화명동 어딘가에서 밥을 한 끼 같이 먹고 헤어지곤 했다. 노쇠한 몸을 일으켜 날 찾아온 외할아버지를 만나면, 삶의 게이지가 조금 올라갔다.
그러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2 겨울방학에 학교에 나가 자율학습을 하던 중이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받으면 교실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외할아버지 돌아가셨으니까 빨리 가방 챙겨서 나와.

고모와 연락이 닿은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아빠가 죽고 난 뒤에도 할아버지께 철마다 안부 전화를 드렸지만, 언젠가부터 내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 하시는 기미가 보여 그 뒤로 연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부고를 듣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가족으로 묶은 실은 너무 닳고 닳아서 끊어지기 직전이었고, 아마 우리가 모르는 새에 투둑 미약한 소리를 내며 이미 끊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억지로 잇고 싶진 않았다.

고모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아빠를 앞세우고 1년쯤 지나서부터 치매 증세를 보였다.

술에 절어 쓰러진 아빠의 사진을 보낸 이후 메신저에서 차단당한 전력이 있지만, 엄마가 그 집과 계속 엮이는 꼴을 볼 수 없어 고모에게 바로 문자를 보냈다.엄마와 연락하지 마시고 앞으로의 일은 저와 의논해주십시오. 성인이 된 조카를 상상할 수 없었던 고모는 건성으로 알았다고 답장한 후 모든 논의에서 날 제했다.

고모를 계속 미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도와달라는 내 말에 손을 내밀어줬다면, 내 번호를 차단하지 않았다면, 아빠의 입원 수속에 함께 서명을 해주었다면, 내가 돈을 벌 수 없었을 때 알코올중독 치료비를 다만 얼마라도 지원해줬다면… 아빠가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고모도 아빠 죽음에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지만 며칠 뒤 할아버지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에 가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할아버지,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제가 어른이 될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어떤 어른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처받은 아이였던 시절을 체로 한 번은 거른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께 원망은 하지 않겠습니다. 갓난쟁이였던 제게 주셨던 사랑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겪은 가난과 폭력을 방관하거나 공모했던 어른과 가족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왜 용서했나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봅니다. 가족이 문드러지는 동안 저를 구해주었던 것들이 가족 밖에 있었으므로,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 괜찮습니다. 또 오진 않을 겁니다. 노여워 마세요. 저를 지켜보시다가 혹 제가 이상한 결혼을 할 것 같으면 하늘에서 벼락을 쳐주세요. 할아버지도 그 정도는 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

3대째 자살한 사람이 되면 기사에 날까. 이대로 천장이 내려앉으면 좋겠다. 잠들었다가 아빠처럼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최고의 죽음이네. 완전 날로 죽는 거지. 방바닥의 번개탄 자국은 지워졌나. 연기가 풀풀 나지 않았을까. 아무도 연기를 못 본 건가. 계절학기 망함. 재난 문자. 아빠가 잘못된 것 같아. 이른 폭염 경보. 아빠가 잘못된 것 같아. 1학기도 망함. 미안하다 사랑했다. 아빠의 유서가 드라마 제목이랑 비슷해서 우습다. "이상한 유언을 쓰다가 / 부끄러워 살고 싶어"31졌을 법도 한데. 휴학. 잘못된 아빠에게 들어간 돈. 아빠 병원비가 될 줄 알았던 돈. 수의도 싸게 하고 관도 싸게 했는데. 너무 싸구려였나. 엄마랑 갔던 세부 여행은 후회 말자. 아빠가 남겼던 음성메시지를 안 들어서 후회를 했던가. 무연고자면 좋겠다. 아무데서나 죽게. 학원. 월급. 삶을 영위하다. 땡. 삶을 마감하다. 딩동댕. 일어나기 싫다. 일어날 수 없어. 침대 매트리스랑 프레임 사이에 압착돼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싫다. 죽고 싶다. 억울하다.

씩씩거리며 한정승인 절차까지 혼자 처리했지만, 나는 망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자살 생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비자발적 빈곤과 알코올중독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하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친구가 교내 심리상담센터에서 10회 무료 상담을 해주니 가보라고 했다.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으면 무지하게 억울할 것 같아서 상담을 받으러 갔다. 친절하게 날 맞아준 센터 직원은 진로, 연애, 학업, 취업, 심리 상담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심리 상담을 받고 싶어요.어떤 종류의 심리 상담을 원해요?가족 관계요. 대답과 동시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사전 질문 단계에서 통곡하자 직원이 서둘러 날 상담실로 안내했다. 나는 보온 머그컵에 둥굴레차를 우려 마시던 여자 상담 선생님과 마주 앉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무엇을 털어내야 하는지 익히 알았던 것처럼 네 살 때 기억부터 흘려보냈다.

막상 입을 열자 남 얘기하듯 술술 말이 나왔다. 상담 선생님은 내 상태를 이렇게 정의했다.자신의 상황에 대해 감정적 표출을 하기 전에, 그것을 일단 해결해야 했기에 감정과 유리된 선택의 순간을 끝없이 마주하느라 남의 일처럼 자신의 일을 판단하게 된 거예요. 부드러운 말투로 상담을 이어가던 선생님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생선 바르듯 낱낱이 내 기분과 내 생을 분석해주길 바랐으므로 쉼표마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다음 분석은 대단히 짧고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생했어요.

누가 머리 위에서 양동이로 눈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생이 아닌 생이 있기는 했나. 휴지 한 통을 비우며 눈물 콧물을 닦는 나를 선생님은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러고는 하얀 도자기 머그에 둥굴레차를 우려 내주었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선생님은 매주 차 한 잔을 마시러 오라며,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무료 10회 상담이 끝날 때까지 상담실에 갔다. 나는 무언가를 고백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질문했다.미성년 자녀에게 성인 부모가 응당 해야 하는 의무란 무엇인가요? 제가 선택한 것이 없으니 제겐 잘못이 없다는 선생님의 말을 믿어도 되나요? 가족에 대한 제 로망은 이미 일그러졌겠죠? 아빠를 그만 원망하고 용서해야 할까요? 저의 불안은 가족에 대한 것일까요. 가난에 대한 것일까요? 왜 가족의 가난이 저의 가난이 될까요?

상담을 하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고모, 엄마, 아빠에게서 한 발씩 멀어졌다. 11회째부터는 상담료를 낼 수 없어서 상담을 받지 못한 내게 아직 해소하지 못한 질문이 있다. 2,000원이면 샀을 번개탄으로 죽은 아빠와 죽지 않고 입원해 월 80만 원짜리 치료를 받았을 아빠 중 내게 더 깊은 가난을 안겨줬을 아빠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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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했더라도 나는 떨었을 것이다. 분해서. 떨리더라도 말해야만 하는 것이 세상엔 많다. 젠더와 가난이 그렇다. 내 입술에 이소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걸린 이유일 것이다. 나는 이소호의 시집이 나오는 족족 읽었다. 아니, 섭취했던 것 같다. 가끔은 신물이 올라왔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 제사는 꼭 지내야 해서 소고기 한 줌을 사던 엄마의 옆에 서서 느꼈던 체증이 다시 느껴져서.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이소호는 첫 시집에서 한국의 가부장제와 가난 사이를 사실적 장면으로 보여주었다. 두 번째 시집에서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다다이즘을 시도했다. 실험적 기법이 엮인 시상은 우리 현실이 시보다 충격적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했다. 올해 4월, 이소호는 세 번째 시집을 냈다. 젠더-가난-예술이 혹처럼, 종양처럼, 열매처럼 서로를 증식시키는 이 시집에서 내가 제일로 꼽는 시는 「손 없는 날」이다. 엄마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한 구절 한 구절 정성스럽게 타이핑해 문자로 보냈다. 엄마의 답장은 빨랐다.앞의 절반은 다 내가 했던 말이네. 시인이 여자가?

열네 살의 나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했다. 이토록 다른 세계가 있다면 좀 더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살고 싶어서 살았던 날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살아보고 싶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나는 미국에 와 있었다.

2009년 여름,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 뜬금없이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부산지역본부에 가서 영어 시험을 쳐보라고 권했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이나 한부모가정, 차상위계층 중에 영어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7박 8일의 미국 동부 여행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전달된 온갖 복지 공문을 내게 알려주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날 유독 들떠 있었다. 해외여행이라는 것은 못 갈 줄 알았는데.

빼곡한 여행 일정표를 받아 들고 돌아와 한동안 분주했다. 엄마 친구에게서 신혼여행 이후로 한 번도 쓴 적 없다는 대형 여행가방을 빌렸고, 일주일 치 비염 약을 타 왔다. 엄마는 입국 심사 때 이 약에 대해 물어보면 영어로 대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채근했다. 떠나는 날이 2주 정도 남았을 즈음, 신종플루가 유행하더니 여행이 취소되었다. 가난한 애한테 어쩐지 잘해주더라니. 나의 기대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미국 여행을 가보겠다고 같이 영어 시험을 치렀던 한 아이가 여행을 다시 진행해줄 수 없겠느냐고 재단에 손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재단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어른이라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과 함께 미국 서부 여행 계획서를 내밀었다. 담임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제 능력으로 미국 여행을 가는 애라면서 교무실 청소를 하러 간 나를 치켜세웠다. 가난하고 어린 사람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와 온도는 이렇게 요동치곤 했다. 취소했다가 사과했다가, 깔보았다가 추어올렸다. 사무적이었다가 다정했다가, 냉했다가 끓어올랐다. 끓어오른 자신에게 도취되었을 뿐, 사실 가난하고 어린 사람에겐 관심이 없었다.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은 착실했다. 좀 모나고 건방져도 좋았을 텐데. 행운의 수정 구슬이나 디즈니 캐릭터가 크게 박힌 후드 티를 갖고 싶어 하면 보호자로 동행한 멘토 선생님이 선뜻 용돈을 주셨지만, 정작 그것을 사는 아이는 없었다. 여행 막바지에 들른 월마트에 가서야 할머니께 드릴 영양제와 동생에게 줄 초콜릿과 노트, 그리고 미국이 훨씬 싸다는 생활용품을 담았다. 멘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디즈니 후드 티를 선물해주자, 몇몇 아이가 울먹였다. 선생님께 뭔가 보답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이들은 일주일 전보다 강인해진 입매로 한마디씩 했다. 꼭 가족과 다시 오겠다, 나중에 나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 선생님이, 의사가, 작가가 되겠다. 그들은 그때의 다부진 약속들을 지켜냈을까.

아빠가 죽고 스물한 살의 나는 적금 통장을 탈탈 털었다. 나만 다녀왔던 미국 서부 여행을 엄마와 함께 가기 위해 찔끔찔끔 모으던 자금이었다. 7-8년 모아야 할 돈이었는데, 아빠의 돌연한 죽음에 상처 입은 모녀관계를 돌보는 이벤트가 필요해 깨버렸다. 엄마도 비상금 100만 원을 내놓았다. 우리 모녀는 필리핀 세부 여행 패키지를 끊었다.

세부 여행이 달콤했던 것만은 아니다. 패키지여행 버스가 지나는 도로 옆으로 판잣집이 빼곡했다. 버스가 신호에 걸려 서면, 아이들이 버스에 다닥다닥 붙어 여행객들을 향해 손가락 욕을 했다.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 모양이 적나라하게 Fk You를 그렸다. 그들 사이에서 어릴 적 내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화명주공이 재개발되기만을 기다리며 수시로 찾아오던 양복쟁이들에게 내가 눈을 흘겼던가. 디즈니랜드 기념품 가게에서 품 안의 달러를 만지작거리면서 한숨을 쉬었었나, 욕을 삼켰었나. 순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저 아이들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내 피해의식이었다. 그저 욕을 달고 사는 10대 청소년일지 누가 알까. 차창에 비친 내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까무룩 잠이 든 엄마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평화로웠다.

모녀가 아껴 먹는 사탕의 끝 맛은 쓰고 맵고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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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과 스타킹 사이’는 내가 잘하는 연기였다. 2010년대 중후반, 부산의 중·고등학생들은 가을, 겨울에 살구색 스타킹을 고집했다. 검정색 기모 스타킹은 소위 ‘재미없는’ 애들이 신는 것이란 분위기가 다분했다. ‘재미있는’ 친구 역을 맡기 위해 나도 살구색 스타킹만 신었다.

어쩌다 한 번씩 엄마는 내게 ‘교양’을 전수했다. 김밥천국 돈가스를 두고 포크와 나이프 쥐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허연 각질이 들고 일어나지 않게 얼굴에 바르고 남은 로션을 팔꿈치나 무릎에 바르라고 일러주었다. 가난이 표가 날까 봐 그런 것들로 얼기설기 기웠다.

석사(수료)에 대한 변
대학 졸업 후 부산 집으로 내려가 취업하는 것과 대학원생이 되어 공부를 더 하는 선택지가 내게 있었다. 대학원이라니. 2+1 삼각김밥을 기다리며 버티는 대학 생활에 신물이 났지만, 가난해도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경험이 용기를 불어넣었다. 박사까지 필요한 추정 학비 3,000만 원은 없었지만 학석사 연계과정을 신청하여 일단 대학원에 진학했다.

연기
나는 스타킹이 없었을 뿐인데 맨살을 내놓고 다니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애가 되었고, 아빠의 편지는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그 사실을 발화하면 불행한 애가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나의 연기는 끝날 줄 몰랐다. 무엇에 눌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주눅 들지 않으려고 이런 말, 저런 제스처를 꾸며냈다. 만사에 무관심하게 굴면 차라리 가난한 티가 덜 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세상 쿨한 연기자가 되었다. 나는 가난도 부끄러웠지만, 그렇게 애쓰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숱한 제도적·실천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결핍이란 지워내야 할 불운, 수치, 숙명"23으로 통용된다. 가난한 이들은 불운과 수치, 숙명에 묶인다.

나는 가난한 내 삶을 지독하게 원망했다. 왜 하필 이런 가족일까, 왜 하필 이런 방구석일까, 왜 하필 딸일까, 왜 하필 1997년에 태어났을까, 왜 하필 부산이었을까, 왜 하필 나일까. 왜, 도대체 내가 왜, 가난을 베개로 베고 비참함을 이불로 덮어야 할까. 가난은 이유 없는 벌이다.

석사 첫 학기를 맞은 나는 교수님과 석사 동료들로부터 인상적인 질문 세 개를 받았다.

Q1. 부모님이 학업을 도와줄 수 있는가?
Q2. 남자친구가 있는가? 있다면 직업이 무엇인가?
Q3. 결혼 및 임신 계획이 있는가?

내 대답은 이랬다.

A1. 도와줄 수 없다.
A2. 지금은 없다.
A3. 결혼 생각도 없고 임신 계획도 없지만 아예 없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것은 나의 기도문이 되었다.

가난한, 여자, 대학원생은 냉정하게 따져 수지타산이 안 맞는 계획이었다. 백석 시로 박사 논문을 쓰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차라리 수강생을 주말에만 몰아서 받고 월 200만 원을 받는 파트타임 학원강사를 하는 게 글 쓸 시간을 보장해주지 않을까? 주 7일 몸을 혹사하면서 2년 바짝 돈 벌어서 학원을 차릴까?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치자, 내가 박사를 하는 걸 어떻게 생각할까? 내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엄마가 남들에게 우리 애는 공부한다며 뒤끝을 흐리는 걸 참을 수 있을까? 한 학기가 지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글쎄, 나는 행복과 현명이 저토록 부드럽게 연결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 과연 행복과 현명이 있는지는 해보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렇게 멈춘 나의 최종 학력에는 필히 괄호가 붙는다. 문학 석사(수료).

허리띠에 손이 닿기 전, 농담처럼 백석 시집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책장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더라니, 기어이. 책이 나뒹굴며 종이가 구겨졌다. 죽고 싶은 와중에도 책이 구겨진 것이 신경 쓰여서 인상을 찌푸린 채 책을 문댔다. 이 시는 그러다 읽게 됐다. 손가락으로 시구들을 매만지며 입 안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새로 취임한 젊은 남자 정교수는 석사논문을 쓰지 않고 수료를 택한 나를 못마땅해하며 충고했다.다들 힘들어도 학위논문까지는 씁니다. 수료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에요. 열심히 일과 공부를 병행해서 ‘겨우’ 수료하는 것을 전부 ‘의미 없는 짓’으로 눙치는 그가 야속했다.
한 번도 차려입고 수업에 가지 못했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멀쩡한 원피스를 입고 간 날은 종강일이었다. 갖춰 입은 모습이 보기 좋다던 그에게 일을 해야 해서 결국 학업을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자 그가 물었다.그쪽을 선택하는 게 행복하고 현명한 선택입니까? (그는 늘 돈 버는 일을 그쪽 또는 그런 방법이라며 지시 대명사로 칭했다. 돈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에도 저어된다는 듯이.)

아빠가 알코올중독자에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함구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재빨리 가족 예능 프로그램 속 아빠들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애정의 스킨십을 했는지 떠올리곤 했다. 하루는 친구가 아빠에게 생일 축하 카드를 받았다며 자랑을 했는데, 아빠가 그렇게 다정한 선물을 한 데에 깜짝 놀란 마음을 누르고 명랑하게 말했다.

이삿짐센터를 부를 양도 아니거니와 돈도 없어서 택시를 불러 짐을 트렁크에 쑤셔 넣었다. 기사님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붙였다.아이고, 아가씨가 고생하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까 힘내요. 그 전형적인 위로가 신산한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정말 싫어했는데도.

이어진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A: 박사 학위를 따려면 여자는 결혼을 안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나: 왜요?
A: 결혼하면 내조도 해야 하고, 애라도 낳으면 공부가 뒷전이 되니까.
나: 그건 남자 대학원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A:에이, 남자들은 안 그래. 남자가 임신하는 것도 아니고. 보통 남자는 결혼해도 박사 따는 데에 5년이면 돼.
여자는 결혼만 하면 흐지부지하다가 7년은 걸리지.
나: 아….

또 다른 대화.

B: 부모님이 못 도와준다는 말, 앓는 소리 아냐?
나: 아닌데요.
B:부모님이 말씀만 그렇지 결국 도와주실걸.
온 씨가 가계 사정을 다 몰라서 그렇지.
나: 아….


2022년 6월, 나는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동안 1,000만 원가량의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서 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료 전 마지막 학기에는 부산 기장군에서 대구 산격동으로 기차 통학을 하며 극악의 스케줄을 견뎌야 했다.

술에 취해 거실 겸 큰방에서 잠든 아빠를 피해 나는 유일한 안식처인 작은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가구라고는 책상이 전부였고, 이부자리는 방바닥 한 귀퉁이에 쌓여 있었다. 베개가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벽의 모서리를 응시하다가 벽면에 걸린 아빠의 옷과 허리띠에 시선이 닿았다. 합성피혁 허리띠가 목에 감기면 풀리지 않을 것처럼 질겨 보였다. 누구는 문고리에도 허리띠를 걸고 자살했다던데.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H관을 탈출한 내가 몹시 대견했다.

이사 다음 날, 전입신고를 위해 주민센터에 들렀다. 본적지가 부산에서 대구로 바뀌었고, 주민등록등본에 ‘세대주’라는 신분이 적혔다. 화명주공과 금곡주공의 공주가 H관의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LH라는 호박마차를 타고 G힐의 신데렐라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신고서였다.샬라카둘라 매치카둘라 비비디바비디부~ 다음 집은 어디가 될까, G힐 다음엔 힐스테이트일까.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비비디바비디부~ 주문처럼 철지난 CM송을 흥얼거렸다.

그래도 시 공부는 계속하고 싶었다. 나는 공부하기를 사랑했다. 과제용 소논문을 쓰기 위해 선행연구를 뒤적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모르는 한자를 옥편에서 찾아가며 백석의 옛 시들을 읽을 때면 마음에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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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금곡주공에 살았어도 복도 가장 끝 호에 사는 아이들은 곧 탈출할 애들이었다. 끝 호에는 방이 하나 더 있었고, 그 평수에 사는 이들은 대체로 1년을 넘기지 않고 주공을 떠났다. 오래도록 남게 된 아이들은 고통의 서열을 셈하는 데에 점점 능숙해지고 익숙해졌다. 전세 사는 아이가 월세 사는 아이를 깔봤고, 아파트 평수로 최고의 상태와 최악의 처지를 따졌다. 악한 어른이 아이들을 조종한 결과가 아니었다. 주위의 평범한 어른들을 보며 자연히 터득한 아이들 나름의 ‘지혜’였다.

몇 년 후 성인이 되어 ‘휴거’(‘휴먼시아 거지’의 준말. LH 공공임대아파트 휴먼시아 거주자에 대한 멸시이자 ‘거지’로 멸칭되는 빈곤층에 대한 낙인과 혐오를 동시에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10)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출입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혐오가 탄생하는 데 일조한 것 같아서. 이 죄책감이 모두의 것이 될 때쯤엔 세상이 바뀔까. 나는 회의적이다.

금곡주공으로 이사를 오고부터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겼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잘 벌려면 학력이 높아야 한다고 믿었다. 나를 위해 나보다 더 가난하게 사는 엄마를 건사하려면 2인분의 생활비는 너끈히 벌어야 하고, 알코올중독자인 아빠를 입원이라도 시키려면 3인분 이상의 돈이 수중에 있어야 했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학력이 살 길인 것 같았다.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떠미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엄마도 날 닦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험 기간에 밤을 새우는 내게 공부 그만하고 제발 일찍 자라고 잔소리를 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무언가를 끝까지 배워본 적 없는 것이 한이었는지, 깨달음이었는지, 엄마는 형편없는 생활비를 쪼개 나를 학원에 보냈다.

세 식구의 생활비는 수급비로 충당하고, 엄마가 버는 월급의 상당액이 나의 학원비로 쓰였다.11 엄마는 나를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엄마의 결핍을 채워보려는 악다구니였을까? 나중에 들어보니 최루성 사연은 전혀 없었다. 그냥 별나게 기억력이 좋은 자식에게 쏟아지는 주위의 잔잔한 시기심과 지나친 관심에 엄마의 자존심이 반응한 결과였다.

수급비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은 늘 딜레마에 빠진다. 수급비는 생활의 최저 수준을 가정한다. 이보다 더 가난하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일정 금액 이상의 수입이 생기면 수급비가 낮아지고, 그러면 보탬이 되던 월급은 줄어든 수급비를 채우는 수단이 되어버려 결국 생활의 수준이 빠르게 떨어진다. 엄마는 수급비를 받지 않아도 되니 돈을 더 벌길 원했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경력단절 여성에게 허락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 눈에 엄마의 노동은 엄마의 팔꿈치나 무릎 그 자체로 보였다. 그런 엄마의 뼈를 갈아 넣은 시간 속에서 나는 부지런해야 했다.

내게 공부는 가성비 좋은 행위였다. 적어도 공부를 하는 동안은 가난한 나와 가난하지 않은 남들 사이에 놓였던 벽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타고난 암기력 덕분에 들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가 좋은 편이기도 했다. 공부도 재능이라면, 이 재능은 내가 다른 데에 한눈을 팔지 않고 학생이라는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커다란 원동력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받는 이런저런 국가 지원의 명목이 ‘우수한 학업 성적’인 것이 만족스러웠다. 가구 소득이 대한민국 평균에 한참을 못 미치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부모의 자녀여서가 아니라, 장차 이 나라를 이끌 훌륭한 재목이자 사회에 득이 될 인재여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직 훌륭하지도 득이 되지도 않지만, 그렇게 될 예정이니까 그 값을 당겨서 쓰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곤 했다. 사라져가는 개천 용 신화의 마지막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항상 나일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용이 된다면 내 가난도 신화가 될 것이었다.

수급자 가구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어정쩡하게 수급 기준을 넘는 일자리를 얻어 수급자에서 ‘탈락’하면, 기초생활 급여에서 차감은 되지만 적게나마 보탬이 되었던 수준의 벌이를 할 때보다 한 달 가용 생활비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늘 선택을 계산했다. 플랜 B는 물론이고 플랜 C도 세웠다. 플랜을 짜는 원칙은 ‘가성비’였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확실하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다 보니 평행세계의 나와 이 세계의 나 사이에는 간극이 컸다.

대학 입학 전부터 엄마와 나는 냉전 상태였다. 기껏 합격해둔 부산의 한 사범대학을 뒤로하고 굳이 대구에 있는 대학교를 가겠다는 딸이 못마땅했던 엄마는 자주 성질을 냈다. 그 마음이 나와 떨어진다는 불안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야 솜털로도 감지할 수 있었지만, 나는 나대로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국어교육과를 가지 않고 국어국문과를 선택한 것이 불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도 아빠의 밀린 술값을 다 갚을 수 없는 판에, 열아홉 살의 나는 아주 낭만적인 문장을 날렸다.작가가 되고 싶어. 엄마는 제발 꿈으로 남겨두라고 말렸지만, 나는 몰래 휴대전화 번호를 바꿔버렸다. 부산의 사범대학 예비 1번 합격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작전은 성공해 나는 대구 K대학 국어국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서울에 있는 S대학 문예창작과에도 1차 합격했지만, 국어교육과 대신 국어국문과를 택했으니 국립대라는 가성비는 지켜야 했다. 학교와 엄마에게는 S대 문예창작과를 1차에서 떨어졌다고 속였다. 문예창작과가 1지망이었지만 국립대도 플랜 A에 속했다. 우선순위의 기준은 욕망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이었다.

글밥을 짓는 사람이고 싶었고, 글을 쓰지 않는 삶은 그려본 적도 없었지만, 대학에 와서 글을 쓰는 시간은 극히 적었다. 장학금을 4년 내내 받으려면 일정 점수 이상의 학점을 유지하는 성실성이 요구됐는데,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사정은 양해되지 않았다. 나는 작가 지망생이기 전에 장학생이었고, 장학생이기 전에 아르바이트 노동자였다.

장학금 성적 기준은 4.3 만점에 3.1이었는데,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씩 하며 맞추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학점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등록금과 생활지원비가 끊겼다.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장학금 수혜자인 대학생은 학기당 생활지원금 180만 원을 받았는데, 나는 이 돈을 전부 엄마에게 보냈다. 집안의 생활비이자 내가 대학에 잘 다니고 있다는 자랑스러운 증거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성적이 땅으로 떨어진 원인은 수면 부족에 있었다. 교직 이수를 노리는 학생들이 학점 올리기에 열중할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뺏긴 수면 시간을 중국어 시간에 채웠다. 결국 중국어 학점으로 D 마이너스가 떴고, 학기 평점은 3.12가 나왔다. 장학금 기준이 3.1 이상이라지만, 너무 아슬아슬한 점수였다. 장학생 잘리는 거 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부랴부랴 관계처에 문의하니, 한 번이라도 점수 미달이면 바로 잘릴뿐더러 지금 점수는 절대값만 보면 아슬아슬하게 통과되지만 퍼센트로 변환하면 장담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살아야 했다. 무조건 장학금을 살려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으로 시작하는 긴 메일을 썼다. 어려운 형편과 수업을 듣는 시간보다 노동이 더 많은 스케줄을 낱낱이 쓴 후, 대학생으로서 본분을 잊지 않겠다는 사과와 다짐으로 마무리했다. 교수님의 아량 덕분에 나는 겨우겨우 C 플러스를 받아 아슬아슬하게 학점이 올랐고, 장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누구는 공사장에서 일하면서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던데 나는 왜 이럴까?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아주 세게 질책했다. 돈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국고에서 나오는 장학금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잘해야 나오는 것이니,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이후 나는 시험 기간에 사흘이고 나흘이고 밤을 새워 공부했다. 잠 좀 못 잔다고 까짓것 죽기야 할까. 시험을 보고 멍한 상태로 닭집에 가서 닭을 나르면서도 생각했다. 죽기야 할까. 아, 죽고 싶다. 아니지, 지금 통장에 무려 200만 원이나 있는데, 죽어도 계약한 자취방에서 죽어야지.
피곤에 찌들어 기숙사에서 늦은 잠을 청하면, 평행세계의 내가 유럽 여행을 가는 꿈을 꿨다. 그것조차 싫었다.

과외를 하는 사이사이 무한 리필 고깃집에서 주 4일, 12시간씩 일했다. 내가 해본 일 중 가장 고강도 육체노동이었다. 일 자체는 단순했다. 테이블마다 고기를 구워주고 볶음밥을 볶아준 후 손님이 나가면 상을 치우고 그릇을 설거지했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더워서 기절할 것 같았다. 동료들과 번갈아가며 냉동창고에 들어가 몸을 급랭시켰다. 안에서는 창고 문이 열리지 않는 구조이다 보니 밖에 있는 사람이 까먹지 않고 열어줘야 동사를 면할 수 있었다. 번아웃이 올 대로 온 나는 곧 팔릴 고기들 사이에서 자극적인 상상하기를 즐겼다. 갈고리가 내 모가지를 낚아채고, 마침 동료들이 날 꺼내는 것을 깜빡해 꽁꽁 언 안온맛 갈비. 그렇게 날 죽이고 나면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게 허락된 일탈이 상상 자해였다. 남겨질 엄마가 더 가난해질까 봐 죽을 수는 없었다. 죽지 못해 보내는 하루가 반복될수록 감정이 가라앉았다. 조금 부러웠던 친구들의 여행이 조금도 부럽지 않게 됐다. 최저 수준도 안 되는 기숙사만 탈출하면 행복할 것 같았던 실낱같은 희망도 감각할 수 없었다. 그냥 일어났으니까 일했고 일했으니까 잤다.

어느 날, 과외를 할 때 뿌렸던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에두르는 기색도 없이 그 여자는 내게본론부터 말할게요. 합격하면 두 장 더 드리는 걸로 해서 큰 거 일곱 장으로 삼성 자기소개서 대필 가능하세요? 라고 물었다. 큰 거, 영화에서는 억 단위던데 학원가에서는 100만 원이었으니 700만 원짜리였다. 나는 첨삭 지도는 가능하나 대필은 할 수 없다고 잘라서 거절했다.

내가 쓰는 글이 시도, 소설도, 에세이도 아니고 ‘큰 거 일곱 장’이 돼버리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살아서 이리 된 걸까, 아니면 열심히 살지 않아서 이리 된 걸까. 그 뒤로도 대구 바닥에 뿌려질 대로 뿌려진 내 휴대전화로 대필 의뢰가 들어왔다. 죄다 단칼에 거절했다. 자기소개서 대필은 불법이고, 내 글들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으며, 내 자아를 남의 미래를 위한 자원으로 소진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리 궁할지언정 자존심을 팔 수 없었다. 그때 내가 가진 것이라곤 기숙사에 있는 이불 한 채와 그 이불 아래에 늘 소중히 두고 나오는 자존심뿐이었다. 들고 다니면 쉬이 오염되고 찢어지고 해지는 자존심. 나는 매일 밤 누워 이불 속에서 새근새근 잠든 자존심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묻혀 온 때가 묻진 않았는지, 밖에서 내가 한 짓을 알고 스스로 깨져버리지는 않았는지.
내가 줄기차게 대필을 거절하는 4년, 5년 동안 원장은 계속해서 대필을 하라며 종용하고 윽박질렀다. 필사적으로 거절하며 먹고살기 위해 버텼고, 6년을 채운 후 진저리를 치며 학원을 떠났다.

2016년 4월-6월: 빵집
대구에 올라와서 처음 했던 빵집 아르바이트는 일도 크게 고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동료들이 든든했다. 샌드위치 기사, 케이크 기사, 미성년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경력이 빵빵한 동갑내기, 그리고 나까지 모두 여자였다. 우린 서로를 도왔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어느 날 나타난 Sam이라는 외국인 남자 손님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면,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처음 본 손님도 아니어서 공짜로 영어를 배울 요량으로 카톡 아이디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놈에게서 톡이 왔다. 잘못 봤나 싶어 번역기를 돌려보았다. 너는 인생에서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있니? 너의 보이프렌드와 함께라면 어때?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Sam의 가해에 대해 동료들에게 알리고 빵집을 때려치웠다.

2016년 6월-12월: 빵집
빵집에서 빵판을 닦느라 양팔 인대에 만성 염증이 생겼다. 대충 파스를 붙이고 버텼는데, 팔꿈치까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근육 주사나 물리치료의 일부는 의료급여가 포괄하지 않는 영역이어서 치료를 거의 받지 못했다. 의료급여 수급자의 ‘미충족 의료’ 문제는 일상적으로 발생한다.20 가난한 주제에 무언가를 ‘충족’하려고 하다니, 양심이 없다고 욕먹을 것 같다. 기분 탓이면 좋겠다.

2016년 6월-8월: 닭집
너 왜 화장 안 하고 왔어? 가게 매출 떨어질라. 사장은 지치지도 않고 성차별을 실천했다.

2016년 6월-2017년 8월: 과외
형편이 어렵다고 말한 과외 학생의 과외비를 조금 낮게 받았다. 나로서는 커다란 최선이었다.

H관 호러를 매일 듣던 유리 언니가 내게 LH 대학생 셰어하우스 전형을 알려줬다(유리 언니는 자취방 보증금 300만 원을 마련하려고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 빵집에서 만난 사이였다). 대학생들이 전세 자취방을 구할 수 있게 지원하는 제도라고 했다. 전세라, 전세…. 곱씹을수록 달콤했다. 무미건조하게 굳어버린 희망의 감각이 한 꼬집 살아났다. ‘언니의 조언’은 이 정도 수준은 돼야 한다는 것을 유리 언니에게서 배웠다.
삐걱거리는 기숙사 침대에 누워 LH 전세 임대 공고문을 읽었다. 모르는 단어투성이였다.

전세 지원은 부채비율이 90퍼센트 이하인 주택에 한해 지원이 가능하며, 부채비율은 아래의 방법으로 산정됩니다.

※ 부채비율 : [근저당권 등 금액 + 선순위 임차보증금 등 + LH 지원 전세금] / 주택 가격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부채비율이니 근저당권이니 KB시세니 하는 것을 가르쳐줬다면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교육을 성실히 이행했으나 학교에서 가르친 세상과 내가 마주친 세상은 많이 달랐다. 학교는 기회의 평등이 있다고 가르쳤지만, 사회로 나온 내게 기회는 숨어 있었고 평등은 마음속에만 사는 단어였다. 삶을 비관하는 방법을 스무 개 이상 배워서 스무 살이 된 것 같았다. 공고문을 끝까지 읽기도 전에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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