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학문•철학/수중 고고학

육상 고고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바다나 강을 탐사하는 고고학을 말한다. 보통고고학은 지층을 파고 들어가서 유물과 유적을 발굴한다. 하지만 기술 발전에 힘입어 해저 탐사선이 만들어지는 등 수중 고고학도 큰 발전을 이루고 있다. 지진으로 사라진 도시 헤라클 리온이 알레산드리아 연안으로부터 3km 떨어진 아부키르만에서 발견된 사례가 수중고고학의 대표적인 성과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고대부터 중국, 왜와 활발한 교류가 펼쳐진 지역이다. 해상 교역뿐 아니라 조운 제도 등으로 연근 해안에서 수많은 배가 다녔기 때문에 수중 고고학이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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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가족보다 예의를 지키는 남

설 명절이 지나고 첫 기획회의에서는 여지없이 ‘가족’이 취재 아이템의 하나로 올라왔다. 두 아이의 엄마인 동기는 힘든 명절 연휴를 보낸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명절로 대표되는 ‘구시대’가 안녕을 고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한편에 여전히 고집 센 전통이 존재한다. 1984년생인 선배의 엄마는 시어머니에게 ‘맞으면서’ 시집살이를 했다고 했다. 불과 40여 년 전 얘기다. 도무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한국에 노예제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여, 고개를 들어 당신의 ‘어머니’를 보라.
우리 시대 며느리들이야 더 이상 맞고는 안 살지만, 차라리 맞으면 문제 제기하기 편하겠다 싶은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막상 결혼하고 보니 ‘미세먼지’ 같은 불편과 불쾌는 좀체 언어화하기 쉽지 않았다. 인스타그램 웹툰으로 먼저 연재됐던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큰 화제를 모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나 역시 같이 살고 있는 짝꿍과 갈등했던 가장 큰 이슈가 ‘시댁’ 문제였다. 가해자는 딱히 없는데 나는 기분이 정말 너무 나쁜, 애매하고 묘한 상황에 놓일 적을 지날 때마다 무참했다. 악을 쓰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아닐 줄 알았다. ‘그런’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대단히 착각했다.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주 많아."

나는 어머니와 헤어진 직후 줄담배를 피우며 짝꿍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네 엄마’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어쨌든 그 후 1년은 이상한 시어머니와 이상한 며느리가 서로 가족이 되느라 애쓴 시간이었다. 아무리 싸워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말로 하기엔 너무 하찮은 자잘한 분노가 수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모든 게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연민이 생겼다. 내가 며느리가 처음이듯이, 어머니도 시어머니 역할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 만난 날 그랬듯, 나는 이 관계에서 최대한 나의 감정과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짝꿍의 도움이 컸다. 그는 시어머니-며느리 관계에서 무조건 내가 약자라는 걸 ‘결과적으로’ 이해했고 지지하며 온전히 내 편에 섰다. 무엇보다 우리는 ‘효도는 셀프’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며느리나 사위로서 할 일의 목록에 효도를 넣지 않으면 서운함이나 다툼의 여지가 정말이지 아주 많이 줄어든다. 우리가 예의를 지켜야 하는 ‘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어머니와 나는 이제 서로에게 적정 거리가 있음을 이해하고 꽤 잘 지킨다. 심지어 나는 어머니를 알아갈수록 좋아하게 됐다. 물론 여전히 시어머니로서는 물음표가 있지만, 여자로서 연대하는 마음이 있다.

수신지 작가는 《노땡큐: 며느라기 코멘터리》에서 《며느라기》를 읽은 가족과 인터뷰를 했다. 수신지 작가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네 나이를 겪어 봤으니까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완벽하게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그 반대보다는 쉬울 거야. 그러니까 윗세대가 이해하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의 시어머니’도 그 이해의 첫발을 뗐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좋은 시댁을,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걸 ‘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싸워서 얻어 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싸울 수 있었던 건 동료 여성들 덕분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결혼’이 ‘착취’의 동의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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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문화/정주영

현대그룹 창시자로, 삼성그룹 이병철과 더불어 한국 기업사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통령 후보로도 출마했고, 1998년에는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키며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자네. 해봤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유명한 어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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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유적•유물/공편도시 유적전시관

종로 일대에는 매장 문화재 전시관이 많다. 청진지구 유적전시장, 공평도시 유적전시관 등이 그것이다.

공평도시 유적전시관은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별한 공간이다. 종로타워 뒤편에 위치하고, 26층 고층 빌딩의 지하 전체를 현장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무려 108개 동의 건물지 그리고 건물을 둘러싼 길과 천여 점이 넘는 생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아예 권역 전체를 보존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도시의 생활 문화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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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이
망해 볼까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그 안에 포함된 사람은 물론이고 벗어난 사람에게도 특정 삶의 형태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무엇보다 이성애 핵가족으로 상상되는 전형적인 생애 모델은 통계상으로도 더는 유의미하지 않다. 이른바 가족 하면 흔히 떠올리는 4인 가족 형태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기혼자가 되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흔 즈음에 파티를 열 계획이었다. 파티의 이름도 진작 정해 둔 터였다. ‘혼자라도 괜찮아, 당신들이 있잖아.’
그동안 뿌린 축의금을 회수하는 이벤트랄까. 마흔까지 살아온 나를 격려하고, 비혼으로 사는 것도 썩 괜찮다는 걸 전시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결혼 제도 안에 편입된 건 결혼식을 치르고도 한참 후였다. 알면서도 모른 척, 미루고 미루다 제도 안에 진짜로 편입됐을 때, 그 일은 그 문서에 적힌 그대로 ‘사건’이었다. 짝꿍이 들고 온 혼인신고 증명서에는 ‘사건명: 혼인신고’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이제 헤어지려면 법정을 가야 하는 몹시 귀찮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누구나 특별한 사람을
가질 권리

따지고 보면 고작 4만 원 때문이었다. 짝꿍은 공무원 조직 안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이다. 결혼을 증명하는 문서를 가져가면 가족수당 4만 원을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상하고 섭섭한 마음을 애써 돌려 말했다. "가족수당 4만 원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자고 말하지 말고, 좀 더 근사한 핑계를 대 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결혼을 정식으로 축하해."
마지막 말은 내가 나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온갖 수선을 떨며 가족 결혼식도 하고, 친구들과 결혼 파티도 따로 하고, 신혼여행이라는 걸 다녀오고, 같이 살면서도 결혼이 실감 나지 않았던 터였다. 그 어떤 형식보다도 ‘법적 구속력’이라는 게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실은 조금 감탄했다. 하지만 ‘증빙’하지 않는 이상, 그놈의 복지 혜택마저도 받을 수 없다는 건 역시 이상했다. 4만 원을 복지라고 불러도 좋을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다.

생애 주기가 길어지면서 다양한 결합을 경험하며 살 가능성도 이전보다 높아졌다. ‘정상가족’으로 엮이지 않으면서 함께 살기를 고민하고 시도하는 여러 실험들 역시 계속되고 있다. 그런 관계에서 가장 높은 허들은 결국 제도다. 국민의 삶이 변해 간다면 국가도 응당 그 변화에 응답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의 나는 왜 조심하거나 배려하는 사람이 됐을까.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건 우연일까.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심하라’는 당부를 듣고 자랐다. 그 결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다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 됐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나 때문일까" 먼저 자책했다. "좀 조심하지"라는 타인의 말에 담긴 염려를 모르지 않지만 그건 따져 보면 ‘내 잘못’이라는 소리였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사고는 생겼고, 살아갈수록 ‘살아남았다’는 감각만 자꾸 선명해졌다. 그저 운이 좋아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삶에 쌓였다.

대학시절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는 나와 내 주변 여성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할 언어를 얻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적당히’ 정체화하고 10년 넘게 살아온 나 역시 강남역 사건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내 뒤에 오는 여성들이 나보다는 덜 울퉁불퉁한 길을 걷길 바라게 됐다. 그러려면 지금 내 몫으로 주어진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됐다.

우리는 여자애들이 야망을 가질 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꺾어 버리고 길들여 왔는지 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고 나니까. 나는 유력 정치인과 바람 난 적 없고, 과도한 사이버 불링을 당한 적도 없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일을 무수히 겪으며 깎여 나가고 작아졌다. 실수나 실패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실패나 실수를 이전보다 덜 두려워하게 됐다. ‘내가 해도 될까’ ‘잘할 수 있을까’ ‘못 할 것 같아’라는 생각을 물리치는 데 저 문장만 한 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래희망도 생겼다. 모건 부인처럼 ‘같이 망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실패하고 실수해야 잘하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된다고, 두렵다면 함께 망해 주겠다고, 그러니 우리 더는 조심하지 말자고 손 내밀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이 먹는다면 뒤에 오는 여성들에게 지금보다는 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

여러 개의
진실 앞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종교가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교가 있는데 왜 엄마는 하필 개신교를 택했을까. 왜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종교를 믿어야 할까. 다만, 그런 마음이 당장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교회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다정했으며, 그때의 나에게는 그 울타리가 필요했다. 나는 ‘우리’를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연약한 믿음을 탓하며 기도하는 일이었다. 의심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사람들의 믿음과 맹목이 부러웠다.

교회라는 건물 밖에 ‘진짜 믿음’이 있다면?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면? 나의 질문 역시 자꾸만 교회 바깥을 향해 뻗어 나갔다. 습관으로 믿음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관계 때문에 믿는 ‘척’을 한다는 사실이 점점 용납하기 힘들어졌다. 앎은 실천되어야 했다. 삶이 내게 준 충동 앞에 똑바로 서자고 마음먹었다.

교회와의 단절은 예상보다 쉬웠지만 그로 인해 생긴 엄마와의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내게 조금의 무슨 일이 생겨도, 엄마는 그게 내가 교회에 가지 않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퍼부었다. 정확히 내가 교회를 벗어난 그 이유로, 엄마는 나를 비난했다. 지긋지긋한 기복신앙이었다. 나는 교회라는 껍데기를 버린 거지 신앙을 포기한 게 아니라는데도 엄마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도 엄마의 ‘무지’를 나무라며 함께 퍼부었다. 그땐 돌려줄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인 것 같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경 구절을 줄줄 외던 딸, 성가대에 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딸의 난데없는 변심과 반항 앞에 엄마도 당황하지 않았을까. 교회와 교회 커뮤니티는 엄마에게 예나 지금이나 전부와 다름없었다. 그걸 부정하는 딸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엄마의 괴로움과 상실감을 못됐지만 조금은 즐겼다.

신앙이 엄마를 버티게 했다는 건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할머니 덕분이었다. 2011년 최저 생계비 취재를 위해 한 달간 서울 달동네에 들어가 살았을 때였다.
바로 옆방인 노부부의 집에서는 자주 나지막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얇디얇은 벽을 타고 무람없이 공유되는 소리야말로 가난의 맨얼굴이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한 달 간의 취재가 끝나고 짐을 싸던 내게 할머니는 미숫가루 한 사발을 들고 왔다. "아가씨, 교회 다녀? 교회 다녔으면 좋겠다." 대답 대신 나는 물었다. 엄마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 맥이 풀렸다. 그 할머니도, 어쩌면 엄마도 교회가 아니었다면 삶의 비참을 견딜 수 없었겠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 대신 "저도 예수를 믿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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