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그 안에 포함된 사람은 물론이고 벗어난 사람에게도 특정 삶의 형태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무엇보다 이성애 핵가족으로 상상되는 전형적인 생애 모델은 통계상으로도 더는 유의미하지 않다. 이른바 가족 하면 흔히 떠올리는 4인 가족 형태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기혼자가 되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흔 즈음에 파티를 열 계획이었다. 파티의 이름도 진작 정해 둔 터였다. ‘혼자라도 괜찮아, 당신들이 있잖아.’ 그동안 뿌린 축의금을 회수하는 이벤트랄까. 마흔까지 살아온 나를 격려하고, 비혼으로 사는 것도 썩 괜찮다는 걸 전시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결혼 제도 안에 편입된 건 결혼식을 치르고도 한참 후였다. 알면서도 모른 척, 미루고 미루다 제도 안에 진짜로 편입됐을 때, 그 일은 그 문서에 적힌 그대로 ‘사건’이었다. 짝꿍이 들고 온 혼인신고 증명서에는 ‘사건명: 혼인신고’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이제 헤어지려면 법정을 가야 하는 몹시 귀찮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따지고 보면 고작 4만 원 때문이었다. 짝꿍은 공무원 조직 안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이다. 결혼을 증명하는 문서를 가져가면 가족수당 4만 원을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상하고 섭섭한 마음을 애써 돌려 말했다. "가족수당 4만 원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자고 말하지 말고, 좀 더 근사한 핑계를 대 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결혼을 정식으로 축하해." 마지막 말은 내가 나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온갖 수선을 떨며 가족 결혼식도 하고, 친구들과 결혼 파티도 따로 하고, 신혼여행이라는 걸 다녀오고, 같이 살면서도 결혼이 실감 나지 않았던 터였다. 그 어떤 형식보다도 ‘법적 구속력’이라는 게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실은 조금 감탄했다. 하지만 ‘증빙’하지 않는 이상, 그놈의 복지 혜택마저도 받을 수 없다는 건 역시 이상했다. 4만 원을 복지라고 불러도 좋을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다.
생애 주기가 길어지면서 다양한 결합을 경험하며 살 가능성도 이전보다 높아졌다. ‘정상가족’으로 엮이지 않으면서 함께 살기를 고민하고 시도하는 여러 실험들 역시 계속되고 있다. 그런 관계에서 가장 높은 허들은 결국 제도다. 국민의 삶이 변해 간다면 국가도 응당 그 변화에 응답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의 나는 왜 조심하거나 배려하는 사람이 됐을까.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건 우연일까.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심하라’는 당부를 듣고 자랐다. 그 결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다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 됐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나 때문일까" 먼저 자책했다. "좀 조심하지"라는 타인의 말에 담긴 염려를 모르지 않지만 그건 따져 보면 ‘내 잘못’이라는 소리였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사고는 생겼고, 살아갈수록 ‘살아남았다’는 감각만 자꾸 선명해졌다. 그저 운이 좋아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삶에 쌓였다.
대학시절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는 나와 내 주변 여성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할 언어를 얻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적당히’ 정체화하고 10년 넘게 살아온 나 역시 강남역 사건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내 뒤에 오는 여성들이 나보다는 덜 울퉁불퉁한 길을 걷길 바라게 됐다. 그러려면 지금 내 몫으로 주어진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됐다.
우리는 여자애들이 야망을 가질 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꺾어 버리고 길들여 왔는지 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고 나니까. 나는 유력 정치인과 바람 난 적 없고, 과도한 사이버 불링을 당한 적도 없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일을 무수히 겪으며 깎여 나가고 작아졌다. 실수나 실패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실패나 실수를 이전보다 덜 두려워하게 됐다. ‘내가 해도 될까’ ‘잘할 수 있을까’ ‘못 할 것 같아’라는 생각을 물리치는 데 저 문장만 한 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래희망도 생겼다. 모건 부인처럼 ‘같이 망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실패하고 실수해야 잘하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된다고, 두렵다면 함께 망해 주겠다고, 그러니 우리 더는 조심하지 말자고 손 내밀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이 먹는다면 뒤에 오는 여성들에게 지금보다는 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
태어나기 전부터 종교가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교가 있는데 왜 엄마는 하필 개신교를 택했을까. 왜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종교를 믿어야 할까. 다만, 그런 마음이 당장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교회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다정했으며, 그때의 나에게는 그 울타리가 필요했다. 나는 ‘우리’를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연약한 믿음을 탓하며 기도하는 일이었다. 의심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사람들의 믿음과 맹목이 부러웠다.
교회라는 건물 밖에 ‘진짜 믿음’이 있다면?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면? 나의 질문 역시 자꾸만 교회 바깥을 향해 뻗어 나갔다. 습관으로 믿음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관계 때문에 믿는 ‘척’을 한다는 사실이 점점 용납하기 힘들어졌다. 앎은 실천되어야 했다. 삶이 내게 준 충동 앞에 똑바로 서자고 마음먹었다.
교회와의 단절은 예상보다 쉬웠지만 그로 인해 생긴 엄마와의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내게 조금의 무슨 일이 생겨도, 엄마는 그게 내가 교회에 가지 않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퍼부었다. 정확히 내가 교회를 벗어난 그 이유로, 엄마는 나를 비난했다. 지긋지긋한 기복신앙이었다. 나는 교회라는 껍데기를 버린 거지 신앙을 포기한 게 아니라는데도 엄마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도 엄마의 ‘무지’를 나무라며 함께 퍼부었다. 그땐 돌려줄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인 것 같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경 구절을 줄줄 외던 딸, 성가대에 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딸의 난데없는 변심과 반항 앞에 엄마도 당황하지 않았을까. 교회와 교회 커뮤니티는 엄마에게 예나 지금이나 전부와 다름없었다. 그걸 부정하는 딸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엄마의 괴로움과 상실감을 못됐지만 조금은 즐겼다.
신앙이 엄마를 버티게 했다는 건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할머니 덕분이었다. 2011년 최저 생계비 취재를 위해 한 달간 서울 달동네에 들어가 살았을 때였다. 바로 옆방인 노부부의 집에서는 자주 나지막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얇디얇은 벽을 타고 무람없이 공유되는 소리야말로 가난의 맨얼굴이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한 달 간의 취재가 끝나고 짐을 싸던 내게 할머니는 미숫가루 한 사발을 들고 왔다. "아가씨, 교회 다녀? 교회 다녔으면 좋겠다." 대답 대신 나는 물었다. 엄마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 맥이 풀렸다. 그 할머니도, 어쩌면 엄마도 교회가 아니었다면 삶의 비참을 견딜 수 없었겠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 대신 "저도 예수를 믿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