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누구나 그렇다는 인생의 물음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마주한 철학자들의 이야기와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이끈 방식과 흐름이 내 인생의 고민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근엄한 그들의 생각 방식이 우리 고민을 자유롭게 풀어볼 기회, 자유롭게 생각해도 될 기회를 열어주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생각을 발판 삼아 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깊이 잠수하여 내 안에서 유영할 수 있는 틈을 찾기를. 나를 위해 숨을 고르고, 깊이 숨 쉬는 시간이기를.

1. 나만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걸까요?
with 에리히 프롬

외로움의 가장 놀라운 점은 ‘침투력’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어떤 상태이든 외로울 수 있거든요. 우리는 여러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생일파티를 하고 있을 때도, 사람을 만날 틈조차 없이 일에 치이며 살 때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외로울 정신도 없는 듯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그 바쁜 와중에도 밀려오는 깊은 헛헛함이 있습니다.
흔히 ‘인간은 누구나 외로우니 별달리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지요. 저명한 철학자들에게도 인간은 본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입니다.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라서 외로울 뿐만 아니라, 너무 막연해서 외롭다고요. 막연해서 불안하고, 불안해서 외로워지는 것이라고요.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오늘 잘 나가다가도 내일 당장 넘어질 수 있거든요. 그나마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인생의 끝, 죽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끝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내게 찾아올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막연한가요.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지금 무엇을 갖고 있든,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든 전혀 안정적이지 않은 게 우리네 인생이지요.

안 그래도 내 인생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 혼자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는데 뭐가 어떻게 될지도 몰라 막연하고 불안하기까지 하다니, 이쯤 되면 외로움은 거의 자연재해급입니다. 딱 짚어 무엇이, 언제 어떻게 되는지를 알면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지만 뭐라 딱 꼬집을 수 없는 게 불안이니,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거든요. 게다가 내 삶이 미리 다 정해지지 않아서, 자유가 있어서 외로운 것이라고 하니 더욱 더 할 말이 없지요.

해결책이 없다니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할 때의 장점은 내가 외로움을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임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나의 외로움 자체를 부정하고 억누르게 되잖아요. 괜히 내가 엄살부리는 것 같고, 이런 감정을 느끼거나 빠져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고요. 그러나 외로움이 누구에게나 인생의 그림자처럼 반드시 따라붙는 것이라면 외로울 때는 그냥 외로워해도 괜찮겠죠. 내 감정 때문에 굳이 나를 탓하지는 말고요.

본래 외롭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누군가가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연결감과 소속감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을 느끼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강렬한 감각에 빠지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느낌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런 활동은 강렬한 만큼 지속 시간이 짧고 건강을 해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업무, 종교, 온라인 커뮤니티 등 자신보다 큰 무엇인가에 소속되려 합니다. 조금 더 온건하고 지속 가능한 일을 찾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방식 역시 건강을 해치는 중독적인 것이 되기 쉽고, 외로움을 단지 회피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냥 잠깐 나를 잊고 지우는 일이죠.

좋은 연결의 방법으로 창작과 사랑을 추천합니다. 창작은 사물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들은 너무 자극적이지도, 일시적이지도 않고 나를 지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활성화하지요.

지독히 외로운 지금의 나에게는 그 어떤 사랑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현재 외로움 때문에 너무 가난한 상태라면,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사랑, 창작, 그 무엇이든 내가 나서서 ‘하는’ 일에 엄두가 나지 않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의외로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힘을 빼고 긴장을 푸는 일이요.

신경을 곤두세우고 읽는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흡수되지는 않습니다. 곧, 책과 내가 연결되지는 않는 것이죠. 무엇인가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빈틈이 있어야 합니다. 외로워서 너무 괴로울 때는 얼른, 한시라도 빨리 이 순간을 넘어서고 싶고, 그래서 빨리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외로움에 쫓기는 마음만 내 안에 가득 차버리죠. 이 외로움을 달래줄 다른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는 중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외로움에만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것과 잘 연결되려면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것과의 연결에 나의 힘을 쏟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죠. 힘을 쓰기는 쓰는데, 다른 것과의 연결을 만드는 ‘활동’이 아니라 외로움에 쫓기며 도망치는 ‘고생’ 중인 셈입니다.

내가 너무 힘이 들 때는 굳이 나로부터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또 다른 감정이, 세계가 당신에게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조금만 긴장을 풀어봅시다

외로움은 이겨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반려감정 같은 것입니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평생 같이 살아가는 거죠. 그러나 우리의 삶에 들어 있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이 외로움만은 아닙니다. 삶이 본래 외로운 것이라 하여도, 삶의 모든 순간이 온통 외로움만으로 칠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요. 기쁨, 놀라움, 즐거움, 애틋함, 감사함, 뒤늦게 찾아드는 깨달음에 대한 수많은 감정들… 삶이라는 캔버스에는 외로움 외에도 다양한 색깔의 감정이 이미 섞여 있습니다. 외로움의 무게에 짓눌려 문득문득 잊곤 하지만요. 다시 말해, 우리는 늘 외로움과 함께 살지만 이따금 외롭지 않은 순간도 있고, 외롭다 하여도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타인과 나, 비교의 중심 잡기
with 프리드리히 헤겔

마음이 조급하고 초조해져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습니다. 나만 이 자리 그대로인 것 같아서요. 처음에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나 동료 등 다른 사람이 나보다 빠르고 능숙하게 잘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저 진득하게 시간을 보내며 쌓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불안해집니다.

나는 한없이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지다 못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은 그사이 앞으로 더 나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꾸만 가슴이 무겁고 막막해집니다. 때로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처럼 두려워지기도 하고요.

비교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말을 자주 본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고요.

비교를 때려치워야 할까요? 하지만 그게 쉬웠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겠죠. 살면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어쩌면 거의 매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항상 비교를 하며 살아갑니다.

비교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닌 거죠. 설령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요.

문제는 비교 자체가 아니라 ‘나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입니다.

우리가 비교 때문에 힘들 때는 자기를 낮추게 될 때입니다. 저 사람보다 못하는, 저 사람보다 느리고 서투른 내가 못난 사람처럼 느껴지고,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그 순간에는 내가 엄청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지면서 나 자신을 좋아하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는 노력을 해도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왜소해 보일수록 내 과제는 더욱 무겁게 느껴지죠. 결국은 그 안에 빠져 나아가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요. 기왕 비교를 할 것이라면, 어차피 비교를 그만둘 수 없다면 나를 자꾸 작게 만드는 비교 말고 나를 더 잘하게 도와주는 비교를 할 수는 없을까요?

나의 자유로운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무엇보다 이 열등감, 초조함, 불안감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나 자신에 대해 의식하는 것,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곧 자기의식입니다. 우리는 자기의식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은 내 선택에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그 사람과 부딪히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의식합니다.

자기의식이 생기면 그 뒤에 바로 따라붙는 것이 있거든요. 바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인정 욕구입니다. ‘자의식이 있다면, 그런 자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 같은 느낌이죠.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인정 욕구는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성취해낸 것에 대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평가할 때도 이 같은 노력과 성취는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노력의 시간과 과정은 본인이 제일 잘 알테니까요.

우리가 남들과 비교하면서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잘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비교 또한 이 같은 인정 욕구와 닿아 있습니다. 이런 인정 욕구를 채우려면 우리는 쉴 수가 없습니다. 매번 이전의 나를 갱신하며 더 나아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매번 지난번의 나보다 나아질 수 있겠어요. 지금 이 상태도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것인데, 더 나아지려면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노력의 결과로써 얻은 성취가 내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잘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하면 삶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서바이벌 오디션이 됩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항상 지금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매번 더 잘하고 더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합니다. 내 성취에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은 아주 잠시뿐입니다. 뭔가를 이루어내더라도 내 마음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의 노력이 지금보다, 그리고 남들보다 나은 결과를 낳지 않으면, 그 노력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항상 초조하고, 항상 불안하겠죠.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 보람도 자부심도 느끼기 어렵고요.

모든 인정 욕구의 토대이기도 한 이 욕구는, 피라미드로 치면 윗단을 놓기 위해 먼저 놓아야 하는 밑받침입니다. 바로 ‘그냥 나’에 대한 인정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이뤄내지 않은 그냥 나, 나 자신에 대한 인정이요.
이러한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수많은 성취를 이루고 그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타인에게 인정받아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성취도, 거기에 들인 노력도, 성취로 이뤄낸 결과물도 나 자체는 아니니까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되어야 하는 평가와 인정은 자연체인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과 긍정입니다.
여기서 인정은 그리 거창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니? 아, 그렇구나~’ 하고 그 상태를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것이 인정입니다.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일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인정입니다. 이것이 충분히 충족될 때, 우리의 토대는 단단해지고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정받을 목표를 세우는 것도, 노력을 하는 것도 나름의 자기의식을 지닌 내가 있지 않으면 시작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자기의식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자기의식을 계속 변화시키고 새롭게 선택할 수 있고, 계속 스스로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갈 힘을 이미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성취가 없이도 이미 인정할, 인정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비교는 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입니다. 나에게 아직 없는 것을 가진 사람,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죠. 그러나 흔들려야 비로소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비교를 하는 주인공도 나, 그 비교 끝에 다시 돌아오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내가 잘하고 싶은 건 나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비교의 중심이 나한테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더라도 결국은 나에게서 시작하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얼마만큼 많이 그리고 얼마만큼 빠르게 성취해야 인정할 만한 나인지를 타인의 관점과 시선에서 출발하고, 다시 타인의 평가로 마무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기의식의 중심에, 그리고 내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이겠죠. 당신의 모든 노력과 비교의 중심에 당신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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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멀어질수록 행복해진다 - 관계 지옥에서 해방되는 개인주의 연습
쓰루미 와타루 지음, 배조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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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질수록 행복해진다?!
과연 무엇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행복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인간관계에서의 모든 문제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온다고 해요~ 적당한 거리두기는 코로나같은 바이러스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조금 떨어진 거리, 적당한 거리가 가장 어려운 거리이지만 나, 너, 우리 모두를 위한 거리라면 두고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개인주의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참고하시라고 책의 일부를 공유해 봅니다.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상태란 어느 정도를 말할까? 최소한 자신의 의지로 하고자 하는 일에 매사 걸림돌이 되는 정도라면, 남은 인생을 위해서라도 돌파할 필요가 있다. 꼭 과거의 나처럼 불안장애가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문제다.
- 19p

시끌벅적한 단체의 세상에서 도망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끌벅적한 단체 사진을 보고 부러워하는 마음 역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나이가 되고도, 게다가 직접 꽤 큰 모임을 운영하면서도 역시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단체 생활의 중요성이 얼마나 뿌리 깊이 세뇌된 건가 싶어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친구 수를 늘리려고 하거나, 나 역시 모임에서 단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의 미학은 떠벌리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소통하는 데 있다.
진짜 우정은 과시하지 않는다.
- 48p

마음을 계속 괴롭게 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길 권한다. 한 명, 한 명을 이름으로 떠올려보는 것이다.
- 75p

당신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도 괜찮다.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집에서 자랐다고 한들, 그것은 결코 당신의 부족함이나 결핍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미디어의 허상과 당신의 삶을 견주며 가뜩이나 힘든 삶에 절망할 거리를 하나 더 더하지 않길 바란다.
- 81p

애착의 대상은 어째서 이렇게 남자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들만 있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껏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태도는 자립한 개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 기준이 한층 더 엄격하게 적용된 대상이 어른, 그리고 남자였다. 그러나 성적소수자가 용인되는 분위기와 더불어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더 이상 남자가 남자답지 않아도 된다.
그다음으로 깨뜨려야 할 압박은 ‘어른스러움’이어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자립을 중시하는 환경 속에 자란 사람은 타인과 건강한 애착 관계를 만드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거기에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더해지면 더더욱 회피적인 성향이 되고, 비자발적으로 외로운 삶을 살아가기 쉽다.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
- 85p

혈연주의는 상당히 배타적이다. 혈연이 가장 중요한 세상에서는 친부모가 아니면 아이를 좀처럼 접할 수가 없다. 아이와 만나려면 자신이 낳은 아이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상식이 되었다. 모 아니면 도다. ‘도’일 때도 싫지만 ‘모’일 때도 너무 책임이 막중해서 거부감이 든다. 출산율이 매해 더 떨어지는 것도 그 막중한 책임 때문인 듯하다. 그동안 우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혈연을 중시했다. 그러나 묻고 싶다.
핏줄로 이어져서 뭐가 좋은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부부처럼 부모와 자식도 헤어지거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편이 낫다. 같은 핏줄끼리 사이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금 자기 가족을 바라보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 89p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족에 대한 상식은 아마도 화목한 가정 속에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아니, 인간관계에 대한 상식 대부분이 그렇다. 사이좋은 가족이라면 그 상태로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오랫동안 함께 지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기준은 ‘지금까지 사이가 좋았는지 아닌지’다. 그것밖에 없다.
- 95p

누구나 언젠가는 파트너를 잃는다. 자신에게 그날이 언제 올지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누군가와 함께 산다고 해도, 자립심을 잃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잊지 말자. 거리를 두지 않으면 함께 멀리 갈 수 없다.
- 120p

애초에 도망칠 수 없는 곳은 지옥이 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거리를 두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렇게 쉽게 지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충성’보다 ‘자유’에 방점이 찍히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선택은 달라졌다. 한 회사에 충성을 맹세했던 사원이 이직을 하거나 프리랜서를 택한다. 평생의 해로를 꿈꾸었던 사람들이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다. ‘힘들어도 참고 살아야지’라는 해묵은 압박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 123p

성실하고 근면적인 삶의 태도를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국가에 사는 사람일수록,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술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는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성실함도 지나치면 불행해지고, 때때로 죽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대충대충 적당히 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므로 어쩔 수 없다.
- 128p

괴로움으로부터 편안해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아주 당연한 한 가지 방법은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때 의지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길은 극복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물론 포기했으므로 문제는 그대로 존재한다. 아쉬움과 미련이 두고두고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기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좋은 점도 있다. 바로 흠뻑 젖은 사람이 얻는 일종의 강인함이다.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단념한 사람은 강하다. 안 좋은 일이 수없이 거듭된 끝에 도달하는 무외(無畏)의 경지를 나는 오래도록 믿어왔다.
- 131p

당장 화가 솟구치는데 꼭 해야 할 말만 담백하게 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든 이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
‘감정이 앞설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138p

분노는 일단 지나갈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만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만 화를 입지 않는다.
- 138p

인피니티 미러도 SNS도, 안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 세상은 사라지고 점차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려 나로 돌아올 수 있다.
- 147p

‘개인주의’란 자신과 타인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태도를 말한다. 결코 제멋대로 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이기주의다. 진정한 개인주의란 모든 개인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남을 배려하고,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굳건할 때, 건강하고 대등한 관계 맺기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 150p

마지막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이 몇 없는 일본 속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속담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 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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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1-06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계에서 ‘벽‘과 ‘거리‘를 두는 게 개인주의가 심한 것인가?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것은 나와 너를 존중하는 마음이 강한 것이로군요.
음… 큰 깨달음입니다.^^

억울한홍합 2025-01-0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알고 계셨을 것 같은데 알기 쉽게 콕콕 꼬집어 말씀해 주시는 센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람과 서로를 의식하고, 영향을 주고받거나 비교하면서 살아간다. 타인의 지나친 간섭이나 집착 때문에 난처해하기도 하고, 반대로 타인의 언행이 끊임없이 신경 쓰여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행복과 마음의 평화가 강조되는 시대이지만, 아직도 자기 마음보다 주변 사람 시선만 살피느라 주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매 순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존감을 잃어간다.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리를 반드시 끊어내야만 한다. 현명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잃어버린 삶의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

개인주의는 ‘제멋대로’가 아니다

‘개인주의’란 자신과 타인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태도를 말한다. 결코 제멋대로 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이기주의다. 진정한 개인주의란 모든 개인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남을 배려하고,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굳건할 때, 건강하고 대등한 관계 맺기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건전하게 서로 대등한 관계와 한쪽이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는 확연히 다르다. 한 개인으로서 어떻게든 제 역할을 하는 사람끼리라면 어느 정도 의존 관계가 형성되어도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의존한다면 위험하다.

멈춰야 한다. 행동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상대와 확실하게 맞설 줄도 알아야 한다.
어렵다면 마음속으로라도 반복해서 이렇게 말해보자.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상처를 주지?"
타인의 말을 존중하기 전에 당신 자신의 가치를 먼저 존중하라. 당신 앞에서 온갖 잘난 척과 대단한 척을 하는 그가 알고 보면 부족한 것투성이인 나약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적당히 대충 해도 괜찮다

애초에 다수에게 주의를 주는 이유는 지극히 일부 부주의한 사람을 위해서다.

이제 더 이상 경고할 필요 없다 해도 ‘부주의한 사람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뭐라 할 말도 없다. 하지만 이미 걱정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는 날은 오지 않는다. 지나치게 걱정하는 사람의 괴로움은 결국 아무도 헤아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스로 "좀 더 적당히 해도 돼"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좀 더 느긋하게 살아가는 지역이 많다. 특히 따뜻한 지역에서는 개방적인 성격이 많다고 한다.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지역의 여유로운 음악을 들어보는 방법도 좋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이 몇 없는 일본 속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속담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마음의 시력 교정하기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문제를 맞닥뜨려 고민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고민 없는 삶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괴로운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끼리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도 있다.

한 발 물러나 사물을 전망하듯 의식해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우리가 어딘가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관찰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야를 넓힐수록 여유가 생기고, 좁은 시야에 갇혀 빠져들수록 작은 문제에도 무섭게 압도되어버린다는 점을 기억하자.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은 넓은 세계 그 자체, 긴 시간 그 자체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거듭 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느 정도 편안해진다.

절망의 끝에는 웃음이 있다

궁지에 몰렸을 때는 웃음으로 승화할 수밖에 없다. 긴장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른 어딘가에서라도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 지금 고민하는 일은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조금 여유를 갖고 다시 들여다보면 ‘뭐, 별거 아니네’ 싶어질 수 있다.
마음이 긴장된 날들에는 웃음이 가장 강력한 약이 된다. 유튜브 개그 채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인터넷상에 차고 넘친다.
별일 아닌 고민에 짓눌린 나 자신까지, 함께 웃음으로 넘겨버리자.

에필로그

지금의 세상과 다른 세상을 하나 더 만든다면, 그 세상은 반드시 인간에게 친절해야만 한다. 이 세상은 원래 친절하지 않은 곳이므로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것을 굳이 하나 더 만들 필요는 없다. 어딜 가도 비판, 악의, 조롱, 대립이 넘치는 세상에서 마음 편히 기댈 곳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사회 구석구석에 친절한 세상을 만들어나가보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 번이라도 죽음을 떠올려본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얘기다.

이 세상은 잔혹한 곳이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세상의 비정함에 마음이 꺾이기 전에, 이 진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고 이 불친절한 세상에서 우리만큼은 좀 더 친절해지길 바란다. 친절을 베풀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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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지친다

나는 언제나 문제가 있으면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똑바로 마주하고 해결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인간관계를 비롯한 문제를 하나하나 늘어놓고 해결책을 생각했다. 문제가 눈앞에 있는데 보고도 못 본 척 도망치는 태도를 경멸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거짓말이나 가식을 유독 싫어했다. 실속 없이 남이 듣기에만 좋은 말을 하는 것도 ‘도망치는 짓’이라고 여겼다. 마음에 없는 인사치레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것도 가식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꺼렸다. 그렇게 점차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교감의 폭이 적어지다 보니 대화가 재밌기는커녕 긴장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황이 더 나빠지면 한층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극복해야 한다며 힘을 쏟았다.

그때의 고지식하고 진지한 태도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관계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을 쓰고 있는 만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완전히 버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좀 더 편안해지는 방법, 괴로움으로부터 빠르게 도망치는 법을 추천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도 이제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평생 잊지 못할 괴로움을 느끼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성실함을 강요하는 사회

‘일본인은 성실하다’라는 말은 해외에서도 국내에서도 많이 들어왔다. 성실하다는 말 안에는 집중력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뿌리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마 일본의 교육이나 사회적 풍토와도 관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는 성실함이 너무 많이 주입되었다. 내가 십 대였던 무렵에는 그런 주입식 교육이 더욱 성행했다.

이처럼 성실하고 근면적인 삶의 태도를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국가에 사는 사람일수록,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술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는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성실함도 지나치면 불행해지고, 때때로 죽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대충대충 적당히 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므로 어쩔 수 없다.

포기하면 우울증이 낫는다

어떤 일을 지금보다 더 잘하려고 발버둥 치면 그 과정 내내 마음이 괴롭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괴로움은 필요하다. 성실한 사람일수록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괴로움을 견디며 극복하려고 한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문제는 모든 일의 결과가 노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목표와 점점 더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버둥 치는 건 정신 건강을 생각하면 그리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이미 조금씩 가슴 한구석에서는 포기하려는 마음이 자라나고, 점점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것이다. 그럴 때 절대 포기는 없다는 고집을 계속해서 세우면 양가적인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괴로움만 커진다.

괴로움으로부터 편안해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아주 당연한 한 가지 방법은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때 의지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길은 극복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물론 포기했으므로 문제는 그대로 존재한다. 아쉬움과 미련이 두고두고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기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좋은 점도 있다. 바로 흠뻑 젖은 사람이 얻는 일종의 강인함이다.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단념한 사람은 강하다. 안 좋은 일이 수없이 거듭된 끝에 도달하는 무외(無畏)의 경지를 나는 오래도록 믿어왔다.

죽음이라는 단념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을 상실하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손쓸 방법이 없다. 반면 마음의 평화를 위해 포기할 것은 얼마든지 있다.

분노는 적어도 하룻밤 이상 재운다

분노에 사로잡히면 ‘곧바로 반박하고 싶다’라는 격한 충동이 올라오기 쉽다. 그럴 때일수록 기다려야 한다.
흔히 6초 동안 기다리라고 말하지만, 그건 직접 대화하고 있을 때에 해당된다. 6초로는 너무 짧다. 상대방에게 어떻게 대응할지는 적어도 하룻밤 자고 나서 정하는 것이 낫다. ‘내일 아침이 되기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라고 단호하게 결론지어야 한다.

6초, 이성이 작동하기까지의 시간

화난 직후가 가장 위험하다

신변의 위험에 처한 상황이라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맞다. 또 상대방이 명백하게 잘못된 언행을 일삼을 때도 무조건 참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느끼는 분노의 대부분은 그리 긴급 상황도 아니고, 반론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상황도 많다. 혹 반론이 필요할 때라 해도 어느 정도는 분노를 억눌러야만 현명한 처신이 가능하다.

당장 화가 솟구치는데 꼭 해야 할 말만 담백하게 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든 이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
‘감정이 앞설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분노는 일단 지나갈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만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만 화를 입지 않는다.

분노에도 게으름을 피우자

평상시의 게으름 피우던 모습을 떠올리자.
‘그동안 내가 하기로 맘먹었던 모든 일을 빠뜨리지 않고 했던가?’
‘이 일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할 만큼 내 인생에서 중차대한 일인가?’
아니라면 귀찮은 일은 미루자. ‘무례한 사람은 저 사람이며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내버려두는 연습을 하자. 분노에 관한 한, 게으름은 훌륭한 장점이 된다.

싫어하면서도 계속 보는 심리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일수록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싫어하는 대상을 신경 쓰는 일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무서운 것을 보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가도 다시 손을 내리고 힐끔거리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무섭거나 거부감이 드는 대상을 계속 들여다보는 심리 기저엔 ‘좀 더 알고 싶은 욕구’가 깔려 있다. 싫어하는 사람을 계속 관찰하고 그와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는 심리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짧고 불안은 길다

당신이 진심으로 지금 당장 변해보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하지만 행복은 온 마음을 다해야만 붙잡을 수 있다. 딱히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최악의 상태로 10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그 정도로 인생은 무서운 법이다.

내 손 밖의 일에서 생각을 떼어내자

안 좋은 상황을 계속 고민해봤자 좋아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상황이 호전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어느 쪽이든 큰 차이는 없다. 무언가에 무섭게 집착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신경 썼을까’ 생각한 경험이 누구나 한두 번쯤 있을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시야를 먼 미래에 두고 지금을 바라보자.

누가 뭘 했는지에 신경을 끈다

평소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누가 뭘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상당히 강력한 화제가 된다. 몇 사람이 대화하는 자리에서 주의를 끌고 싶으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하면 된다. 우리는 주변 지인이나 유명인처럼 특정한 인물에 대한 화제에 이상할 정도로 빠져든다. SNS도 결국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와 주말에 어디에 놀러 갔는지, 누구는 최근 어디에 빠져 있는지, 끝도 없이 SNS를 보며 관찰하고 신경 쓴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경험과 언행을 주제 삼아 이야기하다 보면 다음 두 가지 심리로 이어지기 쉽다. 부러워하거나, 깔보거나. 타인에 대한 정보를 쉽게 입에 올리고 쉽게 판단할수록 열등감이나 혐오감도 쉽게 생겨난다는 의미다. 인스타그램을 활발히 사용하는 영국과 미국의 십 대 소녀 세 명 중 한 명은 체형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걱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타인과의 잦은 비교로 인해 열등감이 싹튼 것이다.

시선에 갇힐수록 공허해진다

인피니티 미러도 SNS도, 안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 세상은 사라지고 점차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려 나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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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 교제가 혼자보다 괴롭다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면 나중에 큰 후회가 남지 않는 것 같다. 혹시 후회스러운 경험을 하더라도 본인의 선택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감당이 된다. 문제는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사회적인 시선이나 편견 때문에 억지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데서 생긴다.
‘모두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강요하는 일은 반드시 의심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싸우지 않는 상대를 고른다

결혼할 상대를 고르는 기준으로 딱 하나를 정해야 한다면 뭘 택하겠는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재정 상태, 능력, 외모, 가치관 등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준이 저마다 있겠지만, 내가 첫 번째로 삼는 기준은 조금 다르다. 특히 멘탈이 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기준이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상대’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싫은 사람은 나와 한창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그 전에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는 상관없다. 당신에게 어떻게 잘해주었든, 다툼이 반복해서 생긴다면 더 이상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가까이에서 당신에게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단 호의로 대할 것

인간관계의 법칙에 대한 글을 쓰게 된 이상 꼭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상대에게 호의로 대하면 호의가 돌아오고, 악의로 대하면 악의가 돌아온다. 그러니까 사람을 대할 때는 우선 호의로 대해야 한다.’

단순한 법칙이지만, 이걸 고려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다툼을 쉽게 만든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면, 당신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상대에게 어디까지 호의로 대해야 할지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상대가 악의로 대하는가, 아닌가를 기준 삼으면 된다. 악의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호의로 답례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인간의 존엄은 이렇게 유지된다.

기본적 인권은 몰라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개념은 아이들도 안다. 이 또한 대등의 원리이다.
연쇄 악의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볍게 싸움을 시작하지 말 것. 계기를 만들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할 것. 기본 중의 기본인 이 인간관계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정말로 많다.

‘상호 대등 원칙’에 대한 의식이 희박할수록 자신의 분노나 고집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당연히 싸움도 잘 일어난다. 결혼 상대나 연인은 쉽게 연을 끊기 어려운 관계 중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이런 상대로 싸움이 너무 쉽게 일어나는 사람을 고름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 내밀한 관계뿐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때 역시 이러한 조건을 절대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혼자서 행복한 삶도 충분히 좋다

결혼은 그야말로 ‘가정을 이루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회 전반에 고정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던 시대였다. 그런 인생을 동경하면서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최근 눈에 띄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평생 방황하고 싶다. 방황하면서 여유롭게 행복해지고 싶다. 마음 편히 그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것 같다. 당신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을 오롯이 당신이게 하는 것, 하루를 기쁨으로 채우는 것이 있다면 이미 충분히 충만한 인생이다.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협박

나는 고등학생 때 공부를 잘해서 도쿄대에 들어갔다. 공부뿐 아니라 운동도 제법 잘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너무 잘했던 것이 지나친 인간관계와 과로를 초래해서 마음을 병들게 한 원인이 되었다. 마음의 병은 이후 오래 계속되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로 자리 잡았다.

나답지도 않게 그렇게 열심히 했던 이유가 있다. 어렸을 때 공부와 운동(아니면 동아리 활동)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말을 세뇌당하듯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공부와 운동을 안 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했던 것을 평생 후회하게 되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내 평생의 후회는 사회가 강요하는 무책임한 인생 조언을 지나치게 믿은 것이었다.

결혼과 연애 등 인생의 모든 수순에 이러한 사회적 압력이 존재해왔다. 지금은 많이 느슨해진 듯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분위기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탓에 지나치게 자신을 억제하는 사람도 많다. 사회가 강요하는 인생 조언은 당신을 위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인생의 방식이란 모두에게 딱 맞는 대량생산 기성복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맞춤옷을 지어 입듯이 살아가야 한다.

함께 살아도 거리를 둔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함께 살지만 너무 가까워지지 않았던 것이 동거를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가보면 우리의 생활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부모님은 하루 종일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함께 잠자리에 든다. 마치 두 분이서 하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듯 보인다. 바로 그 부분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애정도 너무 가까우면 민폐가 된다

여기에는 인간관계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진실이 있다. 바로 ‘아무리 애정을 갖고 한 일이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악의로 괴롭히는 것과 같다’라는 사실이다.

관계가 가까울수록 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저 사람이 더 잘되길 원하는 마음도 같이 커지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대로 상대방이 움직인다면 그의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라는 생각이 들면 참견을 하지 않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고 조언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답답함은 더욱 커진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놓는 것이 최선이다. 상대방이 선택한 것이 그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건 그의 몫이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이 관계를 위한 최선이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함께 멀리 갈 수 없다

결혼 생활을 갈등 없이 지속해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태도 중의 하나는, 파트너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파트너를 잃는다. 자신에게 그날이 언제 올지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누군가와 함께 산다고 해도, 자립심을 잃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잊지 말자. 거리를 두지 않으면 함께 멀리 갈 수 없다.

충성보다 자유가 낫다

애초에 도망칠 수 없는 곳은 지옥이 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거리를 두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렇게 쉽게 지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충성’보다 ‘자유’에 방점이 찍히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선택은 달라졌다. 한 회사에 충성을 맹세했던 사원이 이직을 하거나 프리랜서를 택한다. 평생의 해로를 꿈꾸었던 사람들이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다. ‘힘들어도 참고 살아야지’라는 해묵은 압박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로 돌아가는 이별도 괜찮다

더 이상 당신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지 않는 관계라면 헤어져도 괜찮다. 이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평생 헤어지지 않고 산다면 그것대로 훌륭한 일이겠지만, 역시 자연스럽지는 않다.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별을 절대 실패나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던 ‘사람은 가까이 붙어 있을수록 싫어진다’라는 원칙을 떠올려보자. 서로 상처 주는 관계를 오래 끌어서 인생 최악의 괴로운 기억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똑같은 갈등이 계속 반복되는 관계는 남은 생을 위해 하루빨리 정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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