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한 예민과 청결은 어느 곳에서는 예능이, 또 어떤 곳에서는 질병이 됐다. 왜 이리 해석이 다를까. 며칠을 고민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 어떤 문제는 뒤집으면 능력이 된다."

<청소광>에서는 예민함의 긍정적 측면을, <금쪽 상담소>에서는 부정적 측면을 보다 굵게 비췄다. 같은 대상이어도 비추는 조명의 위치에 따라 다름은 틀림도 특별함도 될 수 있었다. 상대적인 것이었다.

사람의 얼굴은 조명의 위치에 따라 천차만별로 보인다. 뚜렷했던 턱선도 빛이 조금만 틀어지면 왕주걱턱으로 왜곡되고 귀여웠던 콧망울도 빛이 어긋나면 호박코로 변신한다. 성격이라고 다를까. 성격의 장단도 그 자체보단 그걸 비춰보는 나에 의해 결정된다.

성격은 동전의 양면처럼 장단이 붙어 있다. 예쁘게 놓인 양말 자수도 뒤집으면 괴물로 보이는 것처럼 내가 보고 신고 입고 뒤집는 방향에 따라 못난 성격 역시 얼마든지 예쁜 그림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단점을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부정적이다 ↔ 신중하다’ ‘예민하다 ↔ 섬세하다’ ‘성급하다 ↔ 추진력 있다’ ‘냉정하다 ↔ 객관적이다’ ‘겁이 많다 ↔ 안정적이다’

무엇이 되었든 생각보다 훨씬 더 근사한 면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Call Phobia)란 쉽게 말해 타인과의 통화가 두려워지는 현상을 말한다. 가수 아이유 씨가 고백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증상으로 주로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왜 유독 젊은 세대에게 많이 나타날까? 통화보단 문자에 익숙해서?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세대는 유독 ‘작은 실패’에 더 큰 수치심을 느낀다. ‘되’와 ‘돼’ 같은 맞춤법을 틀린다거나 옆 나라의 수도가 어디인지 맞히지 못할 때 우린 상상 이상의 조롱을 만나게 된다. 회사 일도 비슷하다. 뜬구름 잡는 기획은 참아줄 수 있다. 말 그대로 신입이니까. 그런데 복사를 못하는 건 뭐랄까… 어딘가 급이 다른 한심함을 느끼게 한달까?

콜포비아, 소셜포비아, 발음하는 것조차 어려운 디다스칼리아이노포비아(Didaskaleinophobia). 해마다 별의별 포비아가 출시되는 이유도 다 거기 있을 것이다. 남들은 잘만 하는 걸 나만 못할 때 우린 더 큰 자존감의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자란 건 해학이 되지만 나만 모자란 건 조롱이 된다. 그래서 우린 그럴듯한 포비아를 끊임없이 생산하며 말해왔다.

가만 보면 세상은 내가 아프길 원하는 것 같다. 콜포비아이길 바라고 번아웃이 오길 바라고 등교가 어려운 심약한 사람으로 지칭되길 바란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명명되는 순간, 내 단점은 오히려 보살핌의 이유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과 우리가 원하는 그 보살핌이 혹시 매 순간 조롱받을까 걱정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편안히 살 수 있는 상태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정확하고 어려운 진단명이 아니다. ‘따뜻한 무관심’이다. 통화가 불편하다는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콜포비아라는 감정 없는 진단명이 아니라, "그래? 그럼 문자로 하자."라는 다정한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 우리가 병이라고 지칭하는 것들 중 대부분은 사는 데 지장 없는 성격이나 개성인 경우가 더 많고, 진짜로 치료가 필요한 건 오히려 그토록 작은 것조차 쉽게 넘어가지 않는 사회적 시선이다.

별것 아닌 것은 별것 아니게 둬야 한다.
늘려야 할 건 포비아가 아닌 성향이다.

우린 그렇게 많은 곳이 아프지 않다.

학교폭력의 진짜 무서움은 고통의 강도가 아닌 아무도 내 고통에 관심이 없다는 것에서 오는 적막함이라고 한다.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내고 잘 보이는 곳에 피멍울이 져도 사람들은 웃으면서 잘 산다. 내 폭력은 오직 나에게만 당연하지 않다.
뉴스에선 친구들끼리 합심해 "멈춰!"라고 크게 외쳐주라 말하지만, 그랬다면 외친 모두가 그날 로우킥을 맞았을 것이다. 학교폭력은 절대 피해자가 멈출 수 없다. 가해자도 멈추지 않는다. <더 글로리> 연진의 말처럼 너는 그래도 되는 애고, 나는 이래도 되는 애니까.

요즘도 그날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때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맞아 죽더라도 뜯어서 말렸어야 했을까. 날아간 어금니의 주인이 나였다면 속이라도 좀 편했을까. 모르겠다. 그때도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불합리한 폭력을 멈출 세련된 방법을. 2005년의 그날, 맞고 있던 친구를 바라보던 나를 의자에서 일으키게 할 묘안을.
잊지 않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고작 그것밖에 할 일이 없어서 무력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매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폭력보다 무관심이 더 아프니까.

꼭 돈이 많은 사람만이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정한 경제력이 없이 결혼을 완성하는 사람을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보지 못했다. 말쑥한 아파트와 브랜드 있는 결혼반지가 최소한의 행복이 된 요즘, 일정 수준의 경제력은 필요충분조건을 넘어 핵심 그 자체가 되었다. 가족은 점점 더 부와 여유의 상징으로 변질되어 갔다.

행복에는 개별성이란 것이 존재했다.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저마다 자신만의 행복 한 줌쯤은 잃어버리지 않고 살았다. 행복은 신념과도 같아서 타인이 건들 수 없는 고유의 영역으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모두가 공장에서 찍어낸 규격화된 행복만을 원하며 그 컨베이어 벨트에서 이탈한 인생은 각종 멸칭으로 멸시를 받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불행한 우리들에 의해서. 우린 서로의 행복을 야금야금 빼앗아 먹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나만 불행한 건 아니라는 슬픈 위안을 덮고.

사회 보장은 좀 더 디테일한 부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혐오와 멸시를 퍼뜨리는 콘텐츠의 제작자들도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돈이 전부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날 힘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고작 20년 전만 해도 가난한 행복은 전설이 아닌 실제였으니까.

어린 시절 할머니는 말했다. 살다 보니 세상에서 젤로 힘든 게 성공이 아닌 만족이라고.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던 그 말이 이제 와 사무친다. 그 뜻을 좀 더 빨리 이해했으면 좋으련만. 어린 날의 나는 그저 흔한 자장가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눈이 다 감길 때쯤 할머니는 더 작게 독백했다.

"그러니께 이담에 키가 훌쩍 자라도 너무 높은 곳만 보고 살지는 말어. 너는 위, 아래가 아니라 앞, 뒤를 보고 사는 거야. 네가 살아온 거, 그리고 살아갈 거. 그렇게 눈을 돌려야 보이더라고.

내 인생에도 이쁜 것이 참 많았다는 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라고들 한다. 기업들은 자신만의 특징을 정의할 줄 아는 지원자를 원하고 철학자들은 진정한 행복이 나를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린 명사들을 찾는다. 나도 남도 단순하게 이해하여 세상에 대한 불안감을 쉽게 지우려 한다.
하지만 그 단순함에 ‘이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20대 땐 자신을 명확히 정의할 줄 아는 선배들이 멋져 보였다. 하지만 그때 선배들의 나이가 어느새 까마득한 후배로 보이는 지금, 나는 스스로에 대한 궁금증을 잃지 않는 어른들이 멋지다. 여전히 나에 대해 잘 모르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되려 하는 변화무쌍한 변덕쟁이들에게서 나는 멋을 느낀다.

우린 고작 몇 개의 단어들로 결코 정의될 수 없는,
개성 가득한 존재들이기에.

지식은 때때로 저주가 된다. 철학자는 인간에 대해 너무 많이 이해하다 정신병을 앓고 투자자는 돈을 극한까지 이해하여 세상이 숫자로 보인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많이 알고 많이 겪는 것이 꼭 더 많은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될 수만 있다면 내 자식에게 더 많은 부와 더 많은 자산, 더 많은 욕심을 물려주기에 앞서 ‘적당한 무지’를 물려주고 싶다. 인생을 딱 절반만 알아서, 인간을 너무 많이 미워하지도 세상에 대한 환멸을 너무 많이 느끼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몰라도 되는 것은 모를 수 있는 적당한 안온함을 물려주고 싶다.

똑똑한 우울증보단 차라리 행복한 바보로 살았으면 좋겠다.
당신도, 나도.

노력이 미련해진 시대라고들 한다. 듣는 것만으로도 넌덜머리가 나서 노오력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지 않곤 입에 가시가 돋는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노력이 정말로 싫어진 건 아니다. 싫은 건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질 것 없는 현실일 뿐이다. 우린 노력에 지친 것이 아니라 노력이 노력으로만 끝나는 현실에 지친 것이다.

나는 바로 그게 내가 그의 성공에 박수를 보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내 노력이 보상받기 위해선 남의 노력 역시 정당하게 보상받을 수 있어야 하니까. 당장에야 그의 성공이 너무 빛나 내가 조금 더 어두워 보일지 모르지만, 어찌 됐든 틈이 생긴 것 아닌가. 아직 내 차례의 희망이 오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아주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마음으로 당신의 성공을 응원하겠다.
나를 위해. 내 노력 역시 올바르게 보상받게 될 날을 위해.

아내에겐 변명이 없었다. 타고난 저질 체력임에도, 선천적으로 아픈 곳이 많음에도, 그게 뭐? 아내는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해냈다.

가끔은 글 쓰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 아니 솔직히 자주 때려치우고 싶다. 자극적이지도 효용적이지도 않은 내 글이 보이는 성과에 지쳐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로 옆에서 자신의 길을 우직이 걸어가는 사람을 본다. 아내는 타인의 훈수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스스로 정한 일을 별다른 불평 없이 해낸다. 아쉬운 결과에 후회를 길게 하지 않는다.

아내는 미련해서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기에 꾸준히 할 수 있다.

세상에는 메달이 없는 레이스가 더 많다. 누군가는 그딴 걸 왜 하냐고 묻고 또 누군가는 그래서 뭐가 남았냐고 따진다. 매 순간 효용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이기에 우린 점점 더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미련해서 꾸준한 게 아니라 흔들리지 않아서 꾸준할 수 있다. 무언가를 남겨야 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에 열심히 산다. 그렇기에 꾸준함이란 미련함이 아닌 단단함이다. 요란한 세상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을 사는 튼튼한 태도다.

무언가를 지속할 수 있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단단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명의 어른은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고 한다. 인생의 지혜는 세월의 깊이와 비례하기에 어른의 삶 속에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철학이 많다는 의미다. 그러나 요즘은 도서관이 가장 느리다. 새로운 정보는 언제나 인터넷에서 시작되고 단물 다 빠진 뒤 뼈만 남을 때쯤 도서관에 도착한다. 그래서 요즘 어른들은 아는 것도 많지만 모르는 것 또한 너무 많다. 그날 아빠의 말이 유독 소년 같았던 이유다. 그런 연유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아빠의 아빠가 되어줘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만 19세가 넘은 모두를 어른이라 공인하기에 세상은 너무 빠르고, 어렵다. 심지어 더 가파른 속도로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서로가 서로의 어른이 되어줘야 한다. 다시 한 번 소년 같은 아빠가 될 기회를 줘야 하고 신입사원 같은 부장이 될 용기도 가져야 한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책임지기에
나는, 아빠는,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너무 어리다.

"행복에도 자격이 필요하다."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은 불행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

뉴턴의 작용 반작용의 법칙처럼 강한 불행은 그만큼의 행복은 아니어도 적당량의 행복은 반드시 돌려준다. 그러나 우린 그걸 인위적으로 막는다.

어느새 누군가가 대신 벌을 줄 수 있는 나이가 지났다.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만나도 인생에 대해 논할 수 있는 나이가 됐고 작은 잘못조차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성인이 됐다. 그러나 나는 잘 혼나는 법은 배웠어도 제대로 벌주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오랜 시간 깊이 우울해한다고 달라지는 건 조금 더 망가진 내 마음밖에 없었다.

요즘은 기록적인 실패를 해도 그냥 내가 웃게 둔다. 불행에 적정 기간 따윈 두지 않고 행복이 새 나올 틈도 기껏 메우지 않는다.

나는 그저 다음 인생을 살 준비가 됐을 뿐이다. 실패는 슬프지만 오늘로 끝낼 것이다. 그게 내가 웃음으로 불행에게 보내는 신호다.

나는 이제 웃으며 다음을 살 것이다.
나는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웃으며 다시 시작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이 비루한 사람들은 솔직함이라는 단어를 무적의 방패 삼아 자신의 분노나 혐오, 질투 같은 감정들을 마구잡이로 배설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솔직하다고 소개하는 사람치고 진짜로 솔직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었다.

지저분한 마음에 솔직함이라는 단어를 덧댄다고 냄새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무례함과 솔직함의 차이 또한 거기에 있었다. 무례함은 타인을 상처 내는 데 쓰이지만 솔직함은 오히려 상처를 고백할 때 쓰였다.

솔직함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상승하고 있다. 모두가 솔직함이라는 단어를 방패 삼아 타인을 상처 내고 자신의 상처는 치사하게 숨긴다. 또한 친절한 사람들을 보며 위선자, 겁쟁이, 진짜 속마음마저 숨기는 겁보라고 격하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타인을 상처 냄으로써 내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내 상처 따위는 오롯이 책임지며 웃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부러운 건 부럽고, 아픈 건 아프다고 세련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해서 청년들이 얻어야 했던 건 무엇일까. 행복일까. 단언컨대 아니었다. 이들은 단순히 행복한 삶이 아니라 ‘너보다’ ‘걔보다’, 혹은 ‘그보다’ 행복한 삶을 원했다. 우위가 없는 행복은 이들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그건 증명할 수가 없으니까.

분명 승리가 행복이라고 배워왔는데. 세상은 점점 더 승리를 불가능하게 바꿨다. 미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2-04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 남깁니다. 솔직함을 가장해서 상처주는 사람들이 실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굉장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고맙습니다!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어쩌면 비관적인 사람이다.

하루의 마지막은 그날의 실수를 떠올리는 것으로 마감을 찍는다. 그게 아니라면 어제. 또 그게 아니면 일주일 전에. 그것조차 아니라면… 하고 10년 전의 내 못난 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종류의 인간이다. 이런 내 성격이 좋은 것이 당연히 아니다. 단지 이러고 살지 않는 방법을 모를 뿐.

솔직히 말하면 가급적 빠르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삶이 아름답다는 것에는 여전히 동의하지만, 거기서조차 티끌을 찾고 있는 나를 보면 정말이지 골이 터질 것 같다.

세상에는 오답을 너무 잘 알기에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매일같이 불행하고 실패하고 슬프고 우울하기에 반대로 어떻게 살아야 그러지 않을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그게 부정이 가진 힘이라고 믿는다. 부정으로도 긍정을 쌓을 수 있다. 오답을 너무 잘 알면 오히려 정답을 잘 찾아낼 수 있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는 죽고 싶다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을 뿐. 부정으로 똘똘 뭉친 내 마음을 부술 긍정을 찾아내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을 뿐이다. 이른바 합리적 긍정을 말이다.
부정으로도 긍정을 만들 수 있다. 불행하기에 행복이 무엇인지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나는 부정적인 게 아니야.
합리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이지."

그날 밤, 집에 돌아가는 길 술 취한 김에 모처럼 나에게도 답을 요구해봤다. "넌 잘하는 게 뭐야?" 회사라는 간판을 떼고 네가 보여줄 실력이 있어? 경력을 제외하고 네게 남은 실력이 뭐야. 진득이 고민해봤지만, "아뇨." 없는 것 같았다. 없는 답도 만들어서 대답해야 할 판에 속도 좋은 놈이었다. 젊음을 제외하고 내게 남은 무기가 무엇인지, 그날의 나는 정의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경력이 아닌 실력으로 말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 어떤 사람은 30대에 찾아올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80대에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 시기는 누구에게나 누락 없이 찾아온다. 젊음이라는 말로 애써 덮어왔던 폭력적인 질문과 맞이해야 하는 시기가. 그렇기에 나이가 차오를수록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나 어디 나온 사람이야."라는 텅 빈 허세가 아닌, "나 이거 할 줄 아는 사람이야."라는 알찬 증명이다.

매번 어물쩍 지나쳐버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린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 갖고 있어야 한다.

멈춤은 정지가 아닌 충전이라는 당연한 논리를 우린 자주 까먹는다. ‘쉬는 건 나중에 하면 돼. 다 끝내고 그때 가서 편히 쉬면 돼’라고 말하지만 알다시피 인생이란 도통 끝이 나질 않는다.
학교가 끝나면 직장이, 직장이 끝나면 가정이, 가정이 끝나면 육아가, 육아가 끝나면 노후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이란 뺑뺑이는 놀이터에 있던 것과는 많이 달라 아무리 기다려도 알아서 멈춰주질 않는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조금 더 억척스러운 삶을 요구한다.

그러나 삶이란 고작 5시간 안에 끝나는 42.195킬로미터짜리 마라톤이 아닌 90년짜리 승부기에, 우린 역설적으로 90%로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적당한 열의로 꾸준히 살아내야 한다.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으면 정작 뛰어야 할 때 쉬게 된다. 그러니 다 쓰러져가는 나를 위해, 매일같이 지쳐 사는 나를 위해 부디 한 시간에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종을 울려주자. 어린 날의 학교처럼.

지금은 쉬라고.
지금 쉬지 않으면 분명 수업 시간에 졸 거라고.

침대에만 누우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잊고 살던 후회는 눈을 세게 감을수록 더 선명해지고 30분은 자책을 해야 마침표가 찍힌다.

이젠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다. 도대체 뭐가 달라진 것일까. 오랜 시간 고민해봤지만 생각나는 답은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서울에 자가를 보유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래보다 능력 있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고 천재는 아니어도 교양만은 넉넉한 30대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괴로웠다. 오늘은 언제나 부족한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기에 차마 내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부족해진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오늘을 살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이 하는 생각이란 대부분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기에 생각이 많을수록 오늘을 떠나보내기가 힘들어진다고. 그런 이유로 많은 전문의들은 숙면을 위해 생각 좀 그만하라고 처방 노래를 부르지만 도통 그 방법만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간 완벽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 불면을 한순간에 날려줄 위대한 생각만 떠올리면 지금의 문제도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생각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건 ‘더 완벽한 생각’이 아닌 ‘감각’이었다. 생각이 과거와 미래에 머무르는 시간이라면 감각은 온전히 현재를 느끼는 시간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