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한 방에 홀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
_블레즈 파스칼BlaisePascal

집단에서 멀어지자
병이 나았다

수많은 시선으로 둘러싸인 고등학교 교실 속에서 나는 지독한 마음의 병을 얻었다.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병이었다.

프리랜서 작가가 되고 나서는 사무실과 같이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에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살면서 처음 해본 선택이었다. 책이 팔리고, 원고 집필에 몰두하거나 인터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찾기도 훨씬 쉬워졌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병은 사라졌다.

사회는 당신이
모두와 똑같아지기를 원한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사회 집단은 크게든 작게든 ‘표준화’를 강요한다. 개인에 대한 구속이 심한 집단 내에서 다른 사람과 똑같아지려고 해봤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때일수록 집단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더불어 소속 집단을 쉽게 바꿀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두면 좋다.

사람으로 꽉 찬 상자는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상자 속 인생에 지친 사람을 위한 다른 선택권이 있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상자에 들어가 있던 시간은 인생의 절반 정도였다. 상자에서 나온다고 해서 누구나 무조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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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축제만큼 설레게 하는 것도 없다. 따분한 날들을 보내는 어린 학생들은 학교 축제를 기다린다. 그때만 잠시 예외적인 자유와 창의적인 생각을 폭죽처럼 터트릴 기회가 찾아온다.

왜 사람들은 축제를 원하며, 공동체는 축제를 자신의 소중한 자산으로 간직하려는 걸까? 축제의 사전적 뜻은 ‘축하하여 벌이는 큰 행사’이다. ‘제사’의 의미 또한 지닌다. 세속적 삶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은 고대 세계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곧 축제였다. 축제는 성스럽고도 세속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축제에는 노래와 춤,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다. 즉 일상의 기분을 바꾸어줄 즐거움이 있다. 이는 축제가 노동으로부터의 방면을 뜻한다는 것, 축제란 곧 ‘놀이’임을 알려준다.

축제의 또 다른 얼굴이라 해도 좋을 ‘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놀이를 주체와 동떨어진 어떤 대상처럼 여길 수 없다. 놀이를 즐기려면 하나의 고립된 주체가 대상을 멀거니 바라보듯 해서는 안 되고, 놀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놀이 속에는 놀이의 고유한 법칙이 있을 뿐, 자신의 독자성을 고집하는 주체는 사라진다. 여럿이 함께 넘는 줄넘기나 강강술래 같은 놀이에는 놀이 자체의 법칙이 있지, 주체의 독자적인 의지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축제는 해마다 다르고 새로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축제의 시간은 우리의 통상적인 직선적 시간을 통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축제는 ‘회상’이 아니다.

축제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으로 찾아온다. 그것이 축제의 시간, 반복의 본질이다. 반복은 이미 존재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반복이다.

인간에게 축제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축제는 인간이 하루하루를 잃어가며 늙어가는 운명을 벗어나 매번 새로 태어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축제 속에서 삶은 되찾을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실현된다.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축제를 기다린다면, 축제가 시작과 삶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쓰다듬는 손길

모든 삶은 위안을 필요로 한다. 강한 이에게도 약한 이에게도 삶은 끌고 가기 힘든 수레인 까닭이다.
우리는 무엇에 위로받는가? 어떤 이들은 희망이나 미래나 발전 같은 말이 우리를 지탱해준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개념들은 물론 의미 있으나, 위안을 준다기보다는 우리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것 같다. 희망이나 미래나 발전을 어떤 내용으로 꼭꼭 채워 넣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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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마니아 또는 수집가

그는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회색 점퍼, 흰 운동화 차림으로 뭔가 가득 찬 백팩 하나만을 메고서 중고 완구점 구석을 기웃거린다. 흔히 ‘오타쿠’라 불리는 자, 그는 ‘레어(희귀) 아이템’을 쫓고 있는 수집가다. 오타쿠의 역사는 깊다.

그들은 수집이라는 꿈속의 길만을 걸어간다. 세상의 어떤 사물에 몰두하지만, 동시에 세상 바깥에서 기존의 세상이 바라보는 방향과 정반대 편에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 같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런 허무한 재테크로서의 수집이 아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작업’으로서 수집이다. 발자크가 그의 형편없는 수집 취향을 소설 속으로 가져와 수집물들에 투영했을 때 그것들은 한 시대의 진실을 새기는 유물들이 되었다. 그렇다. 어떤 진실은 역사가의 공식적인 기록에 남지만, 그보다 더욱 귀중한 진실은 어쩌면 개인적인 수집품들 속에 남을 것이다. 하나하나 모은 수집품들은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와 같은 효과가 있다. 잊힌 과거를 갑자기 의미심장한 보석으로 만드는 효과 말이다.

진정한 수집가란 이미 공적으로 가치가 정해진 물건의 뒤를 쫓아다니는 자가 아니다. 그의 독창성이란 니체처럼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이 기분 나쁜 주제를 외면할 수 없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가지 않는다. 죽음은 얌전히 오지 않으며 기분 나쁜 폭력을 데리고 온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간혹 영웅들은 죽음을 하찮게 보는 듯도 하다.

사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우리와 같이 있지 않고, 죽음이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산 사람도 만날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없다. 인간은 영원히 승리하는 숨바꼭질 놀이 속에 들어선 듯 죽음과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멸하는 영혼 없이 소멸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흔히 우리는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며,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자아를 열망한다.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해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일, 즉 삶이 있으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있으면 더 이상 죽음이 공격할 삶이 없다는 생각은 죽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아무리 삶과 죽음은 마주칠 일이 없으며 죽음은 삶을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또 수긍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죽음이 두렵다. 죽음은 논리와 이성적 깨달음이 간신히 세운 수비벽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며 침입한다.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데 그치지 못하고 실제 죽어야 할 운명인 까닭이다.

삶의 ‘경계’로서 죽음을 염두에 둠으로써 우리는 삶의 좌표를 찾을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죽지 않는 자라고 생각해보라. 죽지 않으므로 시간을 다투어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없다. 청춘의 시간을 아껴 쓸 필요도 없다. 왜 아끼겠는가? 죽지 않는 인간에겐 시간이 무한한데.

생명의 뿌리에는 죽음이 있다. 우리 삶은 겉으로 다양한 방식의 쾌락을 추구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쾌락은 긴장이 모두 사라진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성행위일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성행위가 고도로 강화된 흥분의 순간적 소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한 바 있다."6 결국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7이 선택한 수단이 쾌락의 흥분이다. 고조된 긴장 상태로 올라가야만, 긴장이 소멸한 죽음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죽음은 존재 저편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라, 존재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실은 우리의 본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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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의 시회

지금은 유실됐지만, 대학 때 두 문화를 각각 대표하는 《홍루몽》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교하는 글을 즐겁게 쓴 적이 있다. 두 작품은 지금은 사라진 세계, 동양과 유럽의 귀족 사회를 우아한 필치로 다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여자들 틈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고 다소 한심한 구석이 없지 않은 두 아이, 가보옥과 마르셀 각자의 이야기인 소설들은 모두 저자들이 한번 가졌다가 상실한 세계에 대한 추억 속에서 쓰였다.

비극은 언제 생겨나는가? 자연의 테크닉에 맞추어 인간의 테크닉이 일하지 않고, 거꾸로 인간의 테크닉에 자연을 맞추려 할 때 생긴다. 온갖 환경문제의 모습으로 자신을 알려오는 이 비극을 오늘날 우리는 실수투성이의 개발들에서 체험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테크닉이 자연의 테크닉을 압도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태어난 비극이다.

차이가 우리를 보호한다

‘차이’는 너무도 깊이 삶 속에 스며들어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삶은 늘 차이의 보호를 받는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나감에 있어서, 그리고 창조적인 생각을 꾸며나감에 있어서 말이다.

우리가 학습을 통해서 무엇인가로부터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을 때 이 아이디어는 어떻게 기능하는지 생각해보라. 학습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원형대로 유지하려 할 때 정신은 낡은 것을 수동적으로 보존하는 박물관이 되며, 수분을 빨아들이지 못하는 식물처럼 새로운 꽃을 틔우지 못한 채 말라 죽고 만다. A라는 것이 학습을 통해 주어졌을 때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기능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B와 C, 그리고 D라는 듣도 보도 못한, 서로 차이 나는 새로운 창조물들이 A로부터 ‘분화’되어 나왔다는 뜻이다.
이때 A란 흔적도 남지 않으며, 오로지 B, C, D라는 새로운 산물을 분화시키는 ‘차이’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이렇게 ‘차이’란 바로 창조적 사유가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생각하는 힘의 원천이다.

느려질 권리

느림만이 붙잡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긴다.

국가의 목적이 구성원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 같은 주제넘는 일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그들의 세속적 행복 외에 무엇이겠는가? 결국 정치적 싸움이란 느려질 권리를 얻는 문제이다. 시간이 느려지지 않는다면, 삶은 그저 노동을 거쳐 사망으로 가는 쾌속 열차일 것이다.

쓰레기의 철학

쓰레기장은 해답을 찾기 어려운 절망적인 곳이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절망이 더욱 깊어졌다. 코로나는 한편으로 인간을 땅에 묻고, 다른 한편으로 일회용품 쓰레기의 무덤을 무섭게 쌓아올렸다. 죽은 인간과 죽지 못하고 쌓여 있는 쓰레기가 이 질병의 전리품이다.

어느 날, 이 모든 난관을 뚫고 재활용 쓰레기를 제대로 분리한다고 해도 실제 재활용 업체에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어줄 수 없는 쓰레기가 부지기수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매일 뭔가를 사고, 구매한 상품이 무엇이든 적어도 그 반은 쓰레기인데, 도대체 쓰레기는 어디에 숨겨지는 것일까? 한마디로 쓰레기는 버리는 사람도 치우는 사람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존재’이다.

오래도록 철학도 쓰레기에 대해 무지했다. 쓰레기는 ‘존재’이지만, 인간의 가장 오래된 지혜 가운데 하나인 ‘존재론’은 쓰레기를 사유할 수 없었다. 쓰레기의 존재론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떤 이데아도 모범으로 삼지 못한 것, 정상적인 존재함에서 벗어난 것이 있으니 바로 쓰레기이다.

한 사물의 목적인 용도를 실현하느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파손된 사물이 구원받는 길은 ‘수선’밖에 없다.

이와 다른, ‘쓰레기 자체’를 취급하는 방식이 있다. "빈 병, 납작한 튜브, 오렌지 껍질, 닭의 뼈 등이 남는다.(…) 그 물건들의 무한한 잠재력 앞에서 나는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11 여기서 핵심어는 ‘무한한 잠재력’이다.

그런데 저 구절은 쓰레기 자체가 ‘잠재력’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물이 종말 뒤에 쓰레기로서 잠재력을 지니며,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즉 재활용)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다.

결국 쓰레기의 존재론은, 한 사물의 탄생을 가능케 한 형상과 목적 자체가 ‘쓰레기라는 완성 지점’을 향한다는 것을 사유하는 일을 과제로 삼는다.

디자인, 예술로서의 장식품

장식이 들어가지 않은 생산품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장식품을 만나며, 장식은 생산물이 누리는 인기의 성패를 가름한다. 생산품에 밀착한 이 장식 예술을 ‘디자인’이라는 말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실 장식적인 것을 예술작품과 칼로 잘라내듯 구별할 수는 없다.

예술작품의 본질에 대한 탐색은 ‘장식’, 즉 파레르곤을 제쳐두고는 가능하지 않다. ‘장식은 진정한 예술인 것이다.’ 무엇이 가장 대표적인 장식 예술일까? 바로 건축이다. 실용적인 기능을 지니지 않는 건축이란 없다. 건축에선 실용적 기능과 그 기능을 치장하는 장식적 아름다움이 서로에게 기생한다.

건축은 분명 실용적인 도구이다. 건축은 순수 예술처럼 그 자신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실용적 기능을 목적으로 한다. 아무리 대단한 예술가가 구상했을지라도 실용적 기능이 없다면 건축물은 건설될 수 없다. 어떤 도시도 비실용적인 건축물이 들어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며, 존재하더라도 실용성이 없다면 그것은 건축이라기보다 그냥 수수께끼의 흉물이 되리라.

따라서 건축에서는 순수하게 그 자신의 아름다움에만 머무는 예술작품은 가능하지 않다. 건축물은 먼저 예술이 아닌 실용성과 연결됨으로써만 세워질 수 있다. 건축물은 사무실이든 학교든 박물관이든 실용적 기능이 있어야 한다. 또한 건축물은 그것이 세워지는 공간(도시) 내 다른 시설들과의 조화를 고려해야만 한다. 건축에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이 두 가지, 다시 말해 실용성과 조화는 모두 순수 예술 외적인 것이다. 즉 건축의 예술성은 예술 아닌 것들을 통해서만 성립한다. 그러니까 건축의 아름다움은 실용적인 도구에 붙은 디자인의 아름다움이고, 도시에 부착된 장식의 아름다움이다.

경직된 세계와 예술이 알려준 자유

결국 그림은 세상이 하나의 질서와 중심을 가지지 않으며, 서로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다양성만을 지닌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다양성의 인정이란 바로 세상의 ‘자유’에 대한 승인 아닌가? 세계가 경직될수록 우리는 그림이 도달한 그 자유를 더욱더 소중히 바라보게 된다.

인생의 빛나는 한 순간

도대체 한 인간의 삶에서 빛나는 한순간이란 무엇인가? 누구에게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언제인지 사람들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중요한 줄도 모른 채 지나쳐버린다.

최고의 순간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다. 그 이후에 흘러가는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의 의미를 지키고 또 반복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후의 시간, 계속 스쳐 지나가는 ‘현재’는 그 자체로 충족적인 저 최고의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지시해 보이는 ‘기호’일 것이다.
과거의 한순간은 ‘현재’를 빛나게 하고 현재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현재 순간에 대한 존중은 바로 ‘현대’의 특성이기도 하다.

현재라는 순간을 영위하는 것들은 과거의 것들이 변장한 모습이다.

과거는 박제나 골동품처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와 단절한 채 완벽한 새로움 속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지도를 받으면서만 우리는 현재의 사건들을 인지할 수 있다.
만일 과거의 빛나는 한순간이 지금 순간에 개입해서 더할 나위 없이 의미 있고 소중한 현재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벤야민의 말을 빌려 현재의 모든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프루스트가 마들렌과 함께 차 한잔을 마시는 현재의 순간 속으로 과거의 콩브레가 들어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만들 듯이 말이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한 채 다가오기에 우리에게 현재는 늘 새롭고 유일무이하다.

나이 드는 인간을 위한 철학

우리는 나이가 든다. 세월이 삶을 실컷 갈아먹은 뒤 긴 숨바꼭질 놀이를 끝내듯 마주친 너는, 어느 처연한 겨울 앞자락에 선 듯 한두 점 하얀 깃털을 머리카락에 얹은 채 축제일의 밤처럼 환했던 지난 시절의 거리들을 쓸쓸하게 만든다. 거기서 우리는 웃고, 즐거웠지. 약속들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갔는가? 무엇인가 아까운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으나, 지난 세월은 번잡한 거리에 쏟아진 금화들처럼 흩어져 이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렵다. 삶은 쇠락한다. 그러나 철학은 영원한 진리에만 하도 몰두해서 그런지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즐기지 않는다.

인생은 아슬아슬하게 개울을 건너는 종이비행기처럼 유년에서 청년으로, 장년에서 노년으로 어떤 기적이 보호하듯 이어진다. 나이의 강이 흘러가며 하얗게 그려놓은 이 모든 시기의 모래톱들은 각기 독자성을 지닌다. 그러나 모든 시기의 독자성을 철학이 다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 자신이 ‘현재’와 일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현재는 점점 나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어라고 그리움에 잠기는 것, 그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어라고 후회에 빠져드는 것 모두 ‘잃어버린 현재’에 대한 느낌들이다. 나이 든 자에게 현재는 ‘지나간 현재’이다.
그러나 철학은 ‘지금의 현재’ 속에서 ‘나 자신’과 ‘참된 것’의 ‘일치’를 추구해왔다.

이데아를 인식하는 영혼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이데아란 세상 모든 사물들의 모범이고 원형이며 원인이다. 또한 이데아의 중요한 성격은 바로 ‘단순성’이다.

이데아가 늙지도 죽지도 않는 까닭, 영원불변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식으로 단순하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복합물이 분해되는 일이지만, 단순한 것은 분해될 수 없기에 이데아는 변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요컨대 영생을 누린다.

플라톤은 이런 이데아를 인식하는 우리 영혼도 영원불변하다고 믿었다. 영혼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까닭은 영혼이 이데아와 같은 종류의 것, 즉 이데아처럼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데아와 똑같이 영원불멸한다는 것이다. 영혼이란 지나가지 않는 ‘영원한 현재’ 안에서 이데아를 응시하고 있는 의식이다. 그 의식은 이데아를 닮아서 나이 먹을 줄 모른다.

철학에서 ‘현재’는 늘 이렇게 특권적이었다. 철학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인간들은 이런 이상적인 현재의 영원성, 늙지 않음을 탐내왔다.

그러나 인간은 속절없이 나이를 먹는다. 저 빛나는 이데아처럼 영원한 현재 안에 머무를 수도 없고, 아름다운 한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멈출 수도 없다.

나이 드는 자는 결코 영원한 현재 속에서 불멸하는 이데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 들면서 우리는 놀라고 지친 여름이, 사그라든 9월의 정원을 바라보듯 점점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능성이 하나둘 사라진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못하게 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이는 나쁜 게 아니라 당연하며 필연적이다(가령 결혼할 수 있게 되면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지듯).

나이 들어서야 날개를 펼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의 눈으로, 지나간 현재의 진상을 이렇듯 뒤늦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생을 반추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인간은 어리석은 자라서 늘 뒤늦게 세월의 마지막 옷자락을 가까스로 부여잡듯이 배운다.

우리가 과거를 회고하며 참된 것에 대해 깨닫건 그러지 못하건, 인생을 완성하건 완성하지 못하건, 어쨌거나 우리는 나이가 든다. 나이 들며 가능성들을 하나둘 잃어버린다. 그러나 가능성을 지니는 자는 나 자신만이 아니다. 타인들, 단지 젊고 인생을 이제 시작하는 이들뿐 아니라 모든 타인은 저마다의 사연만큼이나 많은 가능성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욕구가 있다.

이제 가능성은 타인의 가능성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낼 시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기회를 얻었다는 뜻일지 모른다.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친지들에게, 젊은이들에게,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가능성 자체로서 자신의 현재를 시험해보는 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가능성이 아닌 타인의 가능성을 돌볼 시간이 오는 것이다.

인간은 수전노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마지막 동전처럼 움켜잡고 홀로 죽지 않는다. 타인이 누릴 미래를 자기의 미래처럼 돌보기에 인간에게 시간은 무한한 것이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미래는 불멸의 고리를 만들며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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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허파와 철학

전염병을 옮기는 바이러스는 무엇에 실려 세상으로 퍼지는가? 비말飛沫이다. 비말의 뜻은 ‘튀거나 날아올라 흩어지는 물거품’이다. 갑작스러운 강풍 같은 허파의 공기를 통해 밖으로 나오는 인간의 물기가 비말인 것이다. 인간은 우물처럼 몸 안에 고요한 물을 숨기고 있지 않다. 인간은 태풍을 간직한 바다처럼 에취, 하며 파도친다. 비말에 해당하는 서양 말 그대로, 인간은 물을 공기에 섞어 사방으로 뿜는 ‘스프레이’다.

이런 단순한 사실에 우리의 모든 삶이 얽매여 있다. 이는 우리 인간 주체가 바로 ‘허파 주체’라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자기의식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보하는 주체도 아니고, 모든 경험을 종합하는 초월적 통각統覺의 주체도 아니다. 우리는 그냥 숨을 쉬는 자, 숨 쉬는 일에 모든 것이 달린 자, 바람을 들이키고 내뿜으며 공기에 비말을 실어 날려 보내는 허파 주체이다.

전염병에 대한 우리 시대의 의학이 이야기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질병을 품고 있는 것은 바로 ‘공기’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폐에서 나오는 공기, 기침이 비말을 싣고 가듯이 말이다. 전염병이 인간을 쓰러트리고, 미세먼지가 인간을 갉아먹는다. 우리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우리가 폐를 통해 공기를 순환시킨다는 피할 수 없는 존재 조건에서 온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란 바람의 존재, 숨을 쉬는 존재인 것이다.

숨 쉬는 인간은 그 숨 쉰다는 사실로부터 타인을 치유하는 힘 또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상처에 입김을 불어넣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상징적 행위이다.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는 가장 근원적인 일, 즉 숨 쉬는 일을 타인의 치유를 위해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상처에 부는 입김을 통해 인간은 무인도에 갇힌 이처럼 혼자 숨 쉬는 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숨 쉬는 자, 타인을 위해 숨을 사용할 수 있는 자임을 알린다.
또한 숨 쉬는 일은 우리가 저 혼자의 발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이질성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존재하는 자임을 알려준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의한 나의 영감(

프네우마라는 말과 더불어 인간의 몸과 정신의 활동 모두를 표현하는 이 낱말은, 우리가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가 말한 ‘창窓 없는 실체’가 아니라, 숙명적으로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면서 존재하는 자임을 알려준다. 프네우마를 지닌 자, 숨 쉬는 자는 홀로 있는 자일 수 없고 타자와 더불어 있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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