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교제가 혼자보다 괴롭다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면 나중에 큰 후회가 남지 않는 것 같다. 혹시 후회스러운 경험을 하더라도 본인의 선택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감당이 된다. 문제는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사회적인 시선이나 편견 때문에 억지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데서 생긴다.
‘모두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강요하는 일은 반드시 의심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싸우지 않는 상대를 고른다

결혼할 상대를 고르는 기준으로 딱 하나를 정해야 한다면 뭘 택하겠는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재정 상태, 능력, 외모, 가치관 등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준이 저마다 있겠지만, 내가 첫 번째로 삼는 기준은 조금 다르다. 특히 멘탈이 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기준이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상대’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싫은 사람은 나와 한창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그 전에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는 상관없다. 당신에게 어떻게 잘해주었든, 다툼이 반복해서 생긴다면 더 이상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가까이에서 당신에게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단 호의로 대할 것

인간관계의 법칙에 대한 글을 쓰게 된 이상 꼭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상대에게 호의로 대하면 호의가 돌아오고, 악의로 대하면 악의가 돌아온다. 그러니까 사람을 대할 때는 우선 호의로 대해야 한다.’

단순한 법칙이지만, 이걸 고려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다툼을 쉽게 만든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면, 당신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상대에게 어디까지 호의로 대해야 할지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상대가 악의로 대하는가, 아닌가를 기준 삼으면 된다. 악의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호의로 답례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인간의 존엄은 이렇게 유지된다.

기본적 인권은 몰라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개념은 아이들도 안다. 이 또한 대등의 원리이다.
연쇄 악의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볍게 싸움을 시작하지 말 것. 계기를 만들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할 것. 기본 중의 기본인 이 인간관계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정말로 많다.

‘상호 대등 원칙’에 대한 의식이 희박할수록 자신의 분노나 고집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당연히 싸움도 잘 일어난다. 결혼 상대나 연인은 쉽게 연을 끊기 어려운 관계 중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이런 상대로 싸움이 너무 쉽게 일어나는 사람을 고름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 내밀한 관계뿐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때 역시 이러한 조건을 절대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혼자서 행복한 삶도 충분히 좋다

결혼은 그야말로 ‘가정을 이루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회 전반에 고정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던 시대였다. 그런 인생을 동경하면서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최근 눈에 띄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평생 방황하고 싶다. 방황하면서 여유롭게 행복해지고 싶다. 마음 편히 그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것 같다. 당신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을 오롯이 당신이게 하는 것, 하루를 기쁨으로 채우는 것이 있다면 이미 충분히 충만한 인생이다.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협박

나는 고등학생 때 공부를 잘해서 도쿄대에 들어갔다. 공부뿐 아니라 운동도 제법 잘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너무 잘했던 것이 지나친 인간관계와 과로를 초래해서 마음을 병들게 한 원인이 되었다. 마음의 병은 이후 오래 계속되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로 자리 잡았다.

나답지도 않게 그렇게 열심히 했던 이유가 있다. 어렸을 때 공부와 운동(아니면 동아리 활동)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말을 세뇌당하듯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공부와 운동을 안 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했던 것을 평생 후회하게 되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내 평생의 후회는 사회가 강요하는 무책임한 인생 조언을 지나치게 믿은 것이었다.

결혼과 연애 등 인생의 모든 수순에 이러한 사회적 압력이 존재해왔다. 지금은 많이 느슨해진 듯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분위기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탓에 지나치게 자신을 억제하는 사람도 많다. 사회가 강요하는 인생 조언은 당신을 위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인생의 방식이란 모두에게 딱 맞는 대량생산 기성복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맞춤옷을 지어 입듯이 살아가야 한다.

함께 살아도 거리를 둔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함께 살지만 너무 가까워지지 않았던 것이 동거를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가보면 우리의 생활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부모님은 하루 종일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함께 잠자리에 든다. 마치 두 분이서 하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듯 보인다. 바로 그 부분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애정도 너무 가까우면 민폐가 된다

여기에는 인간관계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진실이 있다. 바로 ‘아무리 애정을 갖고 한 일이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악의로 괴롭히는 것과 같다’라는 사실이다.

관계가 가까울수록 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저 사람이 더 잘되길 원하는 마음도 같이 커지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대로 상대방이 움직인다면 그의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라는 생각이 들면 참견을 하지 않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고 조언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답답함은 더욱 커진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놓는 것이 최선이다. 상대방이 선택한 것이 그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건 그의 몫이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이 관계를 위한 최선이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함께 멀리 갈 수 없다

결혼 생활을 갈등 없이 지속해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태도 중의 하나는, 파트너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파트너를 잃는다. 자신에게 그날이 언제 올지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누군가와 함께 산다고 해도, 자립심을 잃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잊지 말자. 거리를 두지 않으면 함께 멀리 갈 수 없다.

충성보다 자유가 낫다

애초에 도망칠 수 없는 곳은 지옥이 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거리를 두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렇게 쉽게 지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충성’보다 ‘자유’에 방점이 찍히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선택은 달라졌다. 한 회사에 충성을 맹세했던 사원이 이직을 하거나 프리랜서를 택한다. 평생의 해로를 꿈꾸었던 사람들이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다. ‘힘들어도 참고 살아야지’라는 해묵은 압박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로 돌아가는 이별도 괜찮다

더 이상 당신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지 않는 관계라면 헤어져도 괜찮다. 이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평생 헤어지지 않고 산다면 그것대로 훌륭한 일이겠지만, 역시 자연스럽지는 않다.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별을 절대 실패나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던 ‘사람은 가까이 붙어 있을수록 싫어진다’라는 원칙을 떠올려보자. 서로 상처 주는 관계를 오래 끌어서 인생 최악의 괴로운 기억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똑같은 갈등이 계속 반복되는 관계는 남은 생을 위해 하루빨리 정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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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이 하나 더 있다는 구원

인간관계가 어려웠던 어린 시절 내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미션은 집이나 회사, 학교가 내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는 라디오를 즐겨 듣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라디오를 들으러 내 방으로 향했다. 늦은 밤까지 진행자가 선곡한 음악을 들려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는 젊은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야 방송이 전성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진행자가 방송하는 시간이면 가족이 모두 잠든 조용한 시간에 볼륨을 낮춰서 듣고는 했다.

나의 진짜 인생은 이 라디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에 추구해온 것, 표현해온 것은 모두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나에게 집은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라디오는 내가 있을 곳도, 사람도 아니었지만, 또 다른 세상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 나를 살게 했다.

서드 플레이스

‘서드 플레이스thirdplace’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정이 제1의 장소, 회사나 학교가 제2의 장소라면 그와는 다른 곳이 바로 제3의 장소, 서드 플레이스다.

사이좋은 가족이라고 해도 집에만 계속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세상과 접해야 숨이 트이고, 각자의 세상을 넓은 시야로 비교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지킬 수 있다. 서드 플레이스가 없는 세상에서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면,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가족과 평생 떨어져 살아도 괜찮다

가족과 계속 떨어져 살아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이미 오래 떨어져 살았는데 부모의 병간호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고민은 더 깊어진다. 그러나 함께 지낼 때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계속 따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같이 있어서 즐거웠다면 기회가 될 때 다시 함께 살면 된다. 반면 마음이 잘 맞지도 않을뿐더러 위압적이거나 폭력을 계속 휘두르는 사람이 있었다면 물어보고 싶다. 단지 ‘가족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과 다시 가까이에서 지내는 것이 과연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남은 인생에 좋은 일일까?

사이좋은 가족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부모를 봉양하며 같이 산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사이가 나쁜데 병간호 때문에 억지로 같이 살게 된다면 더 큰 불행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족에 대한 상식은 아마도 화목한 가정 속에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아니, 인간관계에 대한 상식 대부분이 그렇다. 사이좋은 가족이라면 그 상태로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오랫동안 함께 지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기준은 ‘지금까지 사이가 좋았는지 아닌지’다.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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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은 자신의 좋은 부분만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전체라고 생각하고 일일이 비교하고 낙담할 필요가 없다.
SNS에 누군가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 올라온다면 이렇게 생각하자.
‘아, 이게 이 사람이 가진 행복의 단면이구나.’
어떤 인생이든 좋은 부분만 잘라내서 보여줄 수 있다. 한없이 고되고 불운한 삶일지라도 말이다. 유년 시절 불행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자란 나도 작정하면 좋은 부분만 편집해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의 형태를 원하지 않는다면 부러워할 것도, 고집할 것도 없이 포기하면 된다. 수시로 마음을 괴롭히는 가족과 지내면서 줄곧 원망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 가족 없는 자유로운 삶도 그 자체로 편해서 좋고, 원한다면 전혀 다른 형태의 가정을 구성할 수도 있다.

가족이든 아니든, 인간은 가까워질수록 애정이 커질 수도 있지만 싫어하는 감정도 그만큼 커지기 쉽다.

마음의 거리는 물리적인 관계를 떠나,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횟수에 비례한다는 얘기다. 이 거리가 가까울수록 ‘싫다’라는 부정적인 감정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반대로 멀어질수록 좋아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무감해진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가족이란 어쩌다 보니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같이 있게 된 특수한 관계일 뿐이다.

평생 자식 없이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2010년 통계 조사에 따르면 남성의 30퍼센트, 여성의 20퍼센트가 이에 해당했다. 그리고 2035년이 되면 남성은 40퍼센트, 여성은 30퍼센트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30~40퍼센트라는 숫자를 보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식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저출생률 국가인데, 대만, 홍콩, 싱가포르도 비슷한 수준이다. 놀라지 말라. 이 지역들은 모두 2018년 전 세계 출생률 워스트 5위에 들었다. 출생률이 낮기로 유명한 일본은 그보다는 조금 높은 저출생률 19위이다. 유럽 선진국과 미국도 하위권에 슬쩍 끼어 있고, 상위 100위 이내에는 개발도상국밖에 없다.
부유한 국가에서는 점차 아이를 낳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아이가 없는 사람은 이제 상당히 많다. 그러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에, ‘자식이 없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라고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것 같다. 행복을 결정하는 건 자녀의 유무가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아는가에 달렸다. 아이 없는 삶이 불안하다면 ‘내가 원하는 행복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한번 적어보기 바란다. 그 기준이 거짓 없고 정확하려면, 사회적 압력과 편견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잔혹한 생물이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지 않으면 얼마든지 남을 괴롭히고 폭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누군가 보고 있는 곳에서는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친구 집단에서도 남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심한 따돌림이 벌어진다. 아이들의 따돌림 문제 전문가도 따돌림의 원인 중 하나로 학교의 폐쇄성을 자주 언급한다.

다른 많은 집단 중에서 가정만큼 쉽게 폐쇄성을 띠는 집단도 없다. 경찰도 가정 내 다툼에는 ‘민사 불개입’이라며 거의 손대지 않는다. 이 또한 폐쇄성을 높이는 원인이다. 가정은 그렇지 않아도 나쁜 일이 발생하기 쉬운 장소다. 가정 내 안전을 지키고 싶다면 무조건 은폐되는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는 좀처럼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가본 적 없는 장소에 가보는 것은 간단하지만, 처음 어떤 집단에 들어가기란 상당히 망설여진다. 하지만 한 번 시도해본 뒤에는 큰 변화를 느낀다.
은둔형 외톨이인 자식을 살해한 전직 고위 관료의 가정도, 그리고 내가 자란 우리 집도, 바깥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면 불행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신의 가족은 좋은 가족인가, 나쁜 가족인가?
쉽사리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가족은 너무나 가까운 존재라, 사회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을 볼 때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힘들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모두 확대 렌즈를 대고 보듯 가깝게 보여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다. 명백하게 나쁜 부모, 나쁜 형제였다고 해도 지나치게 미워하면 도리어 자기만 피곤해질 뿐이다.

마음을 계속 괴롭게 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길 권한다. 한 명, 한 명을 이름으로 떠올려보는 것이다.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부모에게는 길러준 은혜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상당히 흔한 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거리를 둬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에 지나치게 매이면, 누구나 평생 부모와 대등하게 맞설 수 없다.

‘길러준 은혜’는 차치하고, 우선 대등한 개인으로 생각해보자. 상대방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의 경우 ‘부모는 부모 자신을 위해서 나를 키웠다’라는 사고방식이 나의 부모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로잡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상하거나 나쁜 방향이 아니라 제대로, 객관적으로 다시 파악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전부 부모가 잘못 키운 탓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전부 부모 탓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더라도, 가족 내에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인가 있다.
만약 부모 탓이라 해도 부모를 항상 미워해서는 마음이 편안해질 수 없다. 어느 쪽이 되었든 가족과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증오도 지나치게 커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가족과의 원근감을 바로잡으면 편안해질 수 있다.

당신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도 괜찮다.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집에서 자랐다고 한들, 그것은 결코 당신의 부족함이나 결핍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미디어의 허상과 당신의 삶을 견주며 가뜩이나 힘든 삶에 절망할 거리를 하나 더 더하지 않길 바란다.

내가 식물에 빠졌던 때는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땐 ‘남자가 꽃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물며 ‘인형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남자가, 심지어 어른이 꺼내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애착의 대상은 어째서 이렇게 남자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들만 있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껏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태도는 자립한 개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 기준이 한층 더 엄격하게 적용된 대상이 어른, 그리고 남자였다. 그러나 성적소수자가 용인되는 분위기와 더불어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더 이상 남자가 남자답지 않아도 된다.

그다음으로 깨뜨려야 할 압박은 ‘어른스러움’이어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자립을 중시하는 환경 속에 자란 사람은 타인과 건강한 애착 관계를 만드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거기에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더해지면 더더욱 회피적인 성향이 되고, 비자발적으로 외로운 삶을 살아가기 쉽다.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혈연이 아닌 부부가 차라리 마음이 더 잘 맞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유전자가 비슷한 것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한 것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서 특별히 슬퍼할 필요도 없다. 최소한 그 정도로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의외의 사실은, 혈연을 중시하는 풍조가 그리 오래된 관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자식’이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를 일컫도록 법률로 정해졌고, 친부모가 책임을 갖고 아이를 기르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물론 관행으로 양자도 허용되었지만, 혼외자를 포함해 혈연이 아닌 자식은 조금씩 설 곳을 잃어갔다. 즉, ‘친자’나 ‘피를 나눈 형제’ 같은 관계를 중시하게 된 것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 분위기가 한 바퀴 돌아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혈연주의는 상당히 배타적이다. 혈연이 가장 중요한 세상에서는 친부모가 아니면 아이를 좀처럼 접할 수가 없다. 아이와 만나려면 자신이 낳은 아이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상식이 되었다. 모 아니면 도다. ‘도’일 때도 싫지만 ‘모’일 때도 너무 책임이 막중해서 거부감이 든다. 출산율이 매해 더 떨어지는 것도 그 막중한 책임 때문인 듯하다.
그동안 우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혈연을 중시했다. 그러나 묻고 싶다.
핏줄로 이어져서 뭐가 좋은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부부처럼 부모와 자식도 헤어지거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편이 낫다. 같은 핏줄끼리 사이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금 자기 가족을 바라보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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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같은 곳을 왕복하는 인생. 그 인생은 지금까지 성실한 인간의 척도로 여겨졌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면에서 수행과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불행을 겪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이 엄청난 질문에 대해 단 한마디의 조언을 해준다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사람에 따라 다양한 조언이 나오겠지만,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나를 공격하는 상대방과 얽히지 말 것.’

오히려 ‘이렇게 평생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도 살 수 있구나’라는 깊은 감격에 젖었다. 어찌 보면 이런 인생도 평범한 것일 텐데 왜 그렇게 직장 생활에 목을 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날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나에게 완벽하게 잘 맞았다. 물론 프리랜서가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방식은 아니다. 단지 나처럼 ‘인생 최대의 불행은 대부분 인간관계 속에서 생겼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딱 어울린다. 게다가 재택근무가 당연해지는 요즘,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는 삶은 더 이상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지금 세상에서도 머릿수가 많을수록 강하다고 할 수 있다. SNS에서 누군가와 언쟁이 벌어졌을 때는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많을수록 힘은 점차 강해진다. 게다가 SNS에서는 팔로우 숫자나 친구 숫자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팔로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은 야생의 세계가 아니다. 친구 수가 많다고 무조건 강한 것도 아니다. 시끌벅적한 무리를 보면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드는 건, 단지 우리 뇌의 오랜 본성이 그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요즘 아무리 재택근무로 일하는 사람이라도 나이 지긋한 남자가 인기척 없는 평일 낮 주택가에서 매일 어슬렁거린다면 여전히 주변에서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소속 없는 인생을 선택하기란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소속이 있는 인간들의 세계에 지친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다른 삶을 선택할’ 기회가 절실하다.

특별활동의 목표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취지’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와서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났다. 우리는 학교에서 ‘인간관계 훈련’을 당한 셈이다.

대부분의 공격은 범죄 수준까지는 아니라서 그만두게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앞으로도 영역을 좁혀가면서 계속 마주칠 수 있다. 이 사회에서는 아직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 있다. 모두가 위험한 정글 속을 어슬렁거리는 듯하다. 따라서 위험을 감지했다면 적극적으로 벗어나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속’이란 것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과거에 내가 했던 생각대로 마치 우주 공간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에 빠졌다. 당시는 아무런 소속이 없는 사람이 드문 시대였다.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렇게 조마조마하고 불안한 상태는 처음이었다.

단지 사이좋게 잘 지내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겉으로만 친하게 지낼 뿐이고 본성을 들키면 모든 게 끝나버릴 관계도 적지 않다. 그런 인간관계 속에서 조마조마한 상태라면 더더욱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SNS상에서도 잘못된 세상으로 빠져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면 그 가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좋아요’와 ‘팔로워’만 염두에 둔 SNS 활동은 위험하다. 만약 그 가면만을 좋아하는 팔로워로 주변 인간관계가 굳어버린다면, 원하든 원치 않든 평생 ‘가면 쓴 나’를 연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게 바로 요즘 흔하게 보이는 ‘자기를 잃어가는 과정’이다. 스스로 그 가면처럼 바뀌고 싶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정한 내 모습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만약 원치 않는 이유로 당신이 아닌 당신을 억지로 연기하고 있다면, 나는 뜯어말리고 싶다. 나답게 있을 수 없는 집단에서 살아간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괴로운 일이다.

회사나 학교와는 다르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인간관계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쉽게 그런 세상이 될 수 있다면 프리랜서도 재택근무도 좀 더 널리 퍼질 것이다.

그렇다면 소속이 없는 생활의 가장 큰 단점은 무엇일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정신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에 빠졌을 때, 그 상황을 끊어줄 계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나쁜 상태에 빠졌을 때 좀처럼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나는 프리랜서가 되고 곧바로 생활 습관을 바꿔 나쁜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은 곧 ‘이곳에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라는 의미다. 어떤 집단이 ‘내가 있을 자리’가 되려면 조건이 있다.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가 있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이라면 ‘내 자리’라고 부를 수 없다.

시끌벅적한 단체의 세상에서 도망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끌벅적한 단체 사진을 보고 부러워하는 마음 역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나이가 되고도, 게다가 직접 꽤 큰 모임을 운영하면서도 역시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단체 생활의 중요성이 얼마나 뿌리 깊이 세뇌된 건가 싶어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친구 수를 늘리려고 하거나, 나 역시 모임에서 단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의 미학은 떠벌리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소통하는 데 있다.
진짜 우정은 과시하지 않는다.

그래도 공격이 계속되면 다음은 반격할 수밖에 없다. 반격은 공격과는 완전히 다르며, 나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권리다. 한쪽만 계속 괴로움을 감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직장으로 치면 직장 내 인사팀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무리는 강하다. 우리는 이것을 학교에서 확실히 체험했다.

애초에 타인을 쉽게 공격하는 사람 가까이에 있으면 그 화살이 자신에게 올까 봐 은연중에 신경을 쓰게 된다.

평범한 인간관계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고, 왠지 자신은 상대적으로 인간관계가 좁은 사람이라는 비교의식을 갖게 되기도 한다. 애초에 관계를 맺는 스타일이 다를 뿐인데 말이다.

온라인 미팅의 특징은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가볍게 쓱 끼어들거나 빠져나가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그렇게 되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잡담의 묘미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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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부정당하는 관계에 얽혀 있다면 차라리 친구가 없는 편이 훨씬 낫다. 유쾌하지 않은 인간관계는 차라리 모두 정리해버려도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친구가 아예 없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보편적인 생각은 아니다. 나도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어쨌든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인간관계가 있는 편이 훨씬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인정 욕구의 힘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인정 욕구는 ‘매슬로의 5단계 욕구’ 중 네 번째 단계에 꼽힐 정도로 중요한 욕구이기도 하다. 관계 속에서 인정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는 것만으로 우리는 자존감을 높이며 살아갈 수 있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칭찬이나 추앙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조용히 끄덕여주기만 해도 사람의 인정 욕구는 충족된다.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 속에서 평생 살아갈 수 있다면 행복은 이미 내 것이나 다름없다.

괴로울 때
도망칠 자리를 만든다

당신에게는 ‘나의 자리’라고 말할 만한 공간이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자리’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유대, 교감이 형성되는 곳이라면 특정 장소일 필요도 없다.

가능하다면 여유로운 관계의 장을 두 군데 정도 마련해두면 좋다.

만약 ‘나의 자리’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 관계에만 의존하기 쉽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떠나거나 거리를 두기 힘들다. 거기서 멀어지면 다른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모조리 끊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말하자면 ‘관계에 인질 잡힌’ 모양새다. 한정된 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면 완전히 고립되기 쉬우므로 튀는 행동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과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어렵다.
어떤 조직에서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갈등을 맞닥뜨리거나 누군가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상황적 여건 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유로운 관계의 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나의 자리’를 두 곳 이상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싫어하는 사람과는
마음의 거리를 둔다

우리는 진실 되고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상대에게 진심을 보여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게 모든 상황,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는 아닌 것 같다. 누구든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군다면, 최선을 다해 그에게 진심을 보일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반응하지 않는 연습

인간관계를 ‘마음의 거리’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자.

마음의 거리는 마음속에 떠올리는 시간이나 횟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깝다고 무조건 사이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으로 느끼는 대상이라면 가까운 마음의 거리는 고통이 된다.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전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평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반응하는 이유는 상대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다. 물론,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렇게 반응해도 괜찮다. 하지만 멀어지고 싶은 사람에게까지 굳이 그렇게 반응해줄 필요는 없다.

변화를 일으키는 소수의 역할

모두와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확실한 가치가 있다. 즉, ‘남과 조금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다. 아니, 그것이 가장 좋다. 조금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단이라면 내가 먼저 거절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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