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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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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만난 낯선 친구에게서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에 대한 욕구를 전해들었을 때 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거의 소리를 질렀을 겁니다. 그 친구는 19살이었기 때문이에요. 속으로 소리를 내지르고는 곧이어 코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살, 그 나이를 곰곰이 따져보면서 말이지요. 저는 분명히 그 나이를 지나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그 나이가 얼마나 어리지 않은지, 그 나이를 먹으며 겪어낸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불안하며 혼란스러운지 잘 알았으면서도 마치 그 나이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듯 그 친구를 대상화시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이 가장 지향하는 바로 현재의 저는 그것에 가장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 친구는 그런 말을 해서 안 됐다는 듯이 소리 씩이나 질렀던지. 사람이란 이렇게나 어리석고 교만합니다. 


애써 저와 낯설고 어린 친구가 가진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를 적은 것은 이 이야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무척이나 아찔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죠. 그렇지만 잠시도 쉬지 못했습니다. (또 다시)최근에 아주 슬프고 화가 나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에서 도망쳐야 했거든요. 저는 이 이야기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놀라운 도피처였어요. 다만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놀랍긴 하지만 말입니다. 


"수줍음 많고 순진하면서도 묘하게 아는 것이 많은" 수수께끼 같은 모린, 애정과 책임감과 기민함을 양손에 가득 쥐고 외줄타기를 하는 줄스, 그들의 울타리자 감옥인 로레타. 이 인물들, '그들'의 통제불가의 삶은 그대로 '오츠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줄스의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됩니다. 

세상은 제멋대로 미쳐 돌아갑니다.(453쪽)

도시적이고, 흥미로운 삶을 원했던 로레타가 통제하지 못한 그의 삶이나 
넉넉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을 원했던 줄스가 통제하지 못한 그의 삶이나
예의바르고, 안정적인 삶을 원했던 모린이 통제하지 못한 그의 삶이나 
혹은 각각의 '그들'이 부대끼느라 통제하지 못한 그들의 삶은 어찌할 수 없어 무기력하고 애처롭습니다. 개인이면서 가족인 제 각기의 정체성에 얽매여 정체를 찾지 못하는 이들의 여정이 너무나 거대하고 엄청나서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살아내야 했던 세기, 시간, 그 순간들의 증명이기도 하죠. 


많은 것이 결정된 세기, 변할 것이 많지 않은 세기, 형이하적 불안보다 형이상적 불안에 더 적극적으로 노출된 세기에 이것과는 무척이나 달랐던, 모든 것이 가능하고 거칠고 알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한 지난 세기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 소설이 있다는 것 역시 엄청난 일이에요. 20세기 중반, 미국 디트로이트를 관통하는 삶의 뜨거운 에너지는 낯설고 두렵습니다. 거친 사람들, 거친 언어가, 거친 정서가 난무하는 곳은 그대로 하나의 폭력처럼 느껴집니다. 지구 한쪽 구석에 숨어 글로만 만나는 세상인데도 그렇네요. 한편 그것이 생생한 현실이란 짐작을 하면 이 두려움은 거짓도 아닐 겁니다. 


이 소설은 로레타, 모린, 줄스 세 사람 각각의 시선에서 진행되는데요. 꼭 처음부터 이 세 사람의 시선을 다 따라가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은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지 않아도 좋을 거예요. 이 소설이 좋은 이유는 그저 치열하게 제멋대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파고, 또 파서 들어가고 치열하게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사는 개인의 미친 삶을 파헤친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디트로이트의 어둡고 끈적하고 매캐한 공기를 잔뜩 들이마신 것 같네요. 정말 멋집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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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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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라고도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겉모습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말을 한마디도 못하고 심지어 아주 원시적인 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에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 (9쪽)

이것은 근래 읽은 소설 중 가장 재치있는 첫 문장입니다. 다시 떠올려도 입꼬리가 삐죽삐죽, 웃음이 튀어나올 요량인가 몸이 먼저 반응하네요. 이 문장은 바로 뒤에 오는 "에덴동산에는 이 심각한 과실을 두고 달리 탓할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와도 아주 잘 어울리며 심지어 이 두 번째 문장을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기가 막힌 수식이었어요.

 

누구 탓도 못하고 자신에게 짜증내고 있는 하나님이라니. 정말 통쾌하지 않은가요?

 

저는 읽는 내내 이 통쾌함을 한 번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고, 실제로 펼쳐지는 꽤 새로운, 어느 면에서는 도끼 같은 고찰을 담은 다른 시선에 대한 만족이기도 했어요. 기독교 신자도, 성경에 대한 지식도, 신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는데 이 정도 만족을 느낄 수 있다니 어떤 면에서는 참 희한합니다. 다만 이것은 아주 지적인 냉소, 이성적인 왜곡 같은 것일 텐데 나란 독자는 언제나 그런 것에 감동하므로...

그러니까 앞서 적은 첫 문장은 뒤에 올 소설 전체를 수식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오면 그 예감은 확실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카인이자 아벨, 그의 목소리에 박수를 보내며 말이죠.

 

하나님이 자신의 과실 때문에(혹은 인간의 과실 때문에) 분노하고, 처벌을 하려 하거나 시험에 들게 하는 짓(!)은 태초, 아담과 하와과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열받고, 이들에게 저주를 내리고, 어리석은 존재들에 대해 답답해 합니다. 어쩌면 이때부터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존재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의심하고, 괴롭힐 작정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제부터 너희는 이 편한 생활에 작별을 고할 것이다. 너, 하와, 너는 아침의 헛구역질을 포함하여 임신의 모든 불편을 겪고 고통을 겪으며 아이를 낳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내 꼴이 한심하구나, 하와가 말했다. 이 얼마나 나쁜 출발이냐. 내 운명은 어찌 이리도 슬픈 것이냐. 진작 그런 생각을 했어야지, 그리고 너, 아담, 땅이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으니, 너는 네 평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 (20쪽)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은 어김없이 하나님의 시험에 들죠. 카인은 동생을 죽입니다. 하나님은 나타나고 카인은 그때부터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해요. 카인의 여정에서, 그 의심은 점차 확신이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운명이기도 할 거예요.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106쪽)에 말이지요.

 

이어 많은 순간, 카인이 발견하는 하나님의 괴짜스런 면과 그로 인한 불필요한 죽음들을 봅니다. 갑자기 조금 진지해보자면 이 세기에 신의 존재가 이토록 회의적이고 불확실해진 데에는 어느 정도, 아주 조금이라도, 신의 부덕 탓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물론 불완전하고, 그들이 모이면 더욱 어리석은 짓들을 하게 마련이죠. 그래서 인간은 반성하고 신을 향해 걸어갑니다. 하지만 인간을 만든 신은? 그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주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결론 아닌가? 어째서 그 무수한 생명이 그런 이유로 스러지고, 그런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고, 그런 이유로 버려져도 괜찮단 말이지? 이 소설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꽤 그럴 듯하고도 재치있는 뒷받침인 것입니다.

 

문득 중학교 때 읽었던 <람세스>가 생각납니다. 저는 어렸고, 람세스에 푹 빠졌고, 네페르타리와의 사랑 이야기, 이집트를 수호하는 신적인 존재이자 누구보다 인간적인 람세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모세는, 모세의 기적은 좀, 별로였어요. 그런 날이었는데 하루는 집에 신을 믿으라는 신실한 눈빛의 여러 분이 찾아왔더랬습니다. <람세스>를 읽기 전, 그러니까 한 달만 일찍 그들이 찾아왔다면 어찌 됐을지 몰라도 그들은 그 이후 찾아왔고, 저는 그것이, 역설적이게도, 신의 계시라고 느꼈습니다. 제가 경험한 신실한 눈빛과의 접촉은 그 정도고, 그것만으로도 <카인>이 통쾌할진대 혹 다른 더 '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어떨까, 그런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앞서 말한 여러 이유로, 한 작품으로써 이 소설이 저는 참 좋습니다. 신나는 책읽기였어요. 좀 심심할 때, 또 꺼내보게 될 것 같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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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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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비겁함 때문에 그를 미워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가 살아남았고 또한 다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물론 다행이었다. 모든 게 모순으로 가득하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내가 원하는 만큼 간단하지가 않아.

주위에 널린 흑인 시체들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놀랐다.(263쪽)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 그런 것'은 결코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에 담긴 폭력이 너무나 가깝게 느껴집니다. 거의 몸에 대한 물리적 가해가 느껴질 정도라 간혹 소스라치게 놀라 두려움에 떨 때도 있습니다. 과민하달지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역시 무감한 것보다 훨씬 안전한 쪽이니까요.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르고요.

한나 렌스트룀이 자신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의 땅, 뜨거운 그 땅에 도착해 만난 아나 돌로레스. 그의 말을 한 번 들어볼까요.

 

흑인들은 우리들의 그림자에 불과해요. 그들에겐 색깔이 없어요. 우리가 어둠속에서 그들을 보지 않아도 되게 신은 그들을 검게 만드셨어요. 그리고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결코 잊어서는 안돼요.(135쪽)

세뇨르 바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한나에게 흑인은 거짓말을 한다, 그들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나는 그런 말들에 곤혹스러움을 느끼죠. 고향에서 그 자신이 '가난한 노동자와 하인들 중 하나'였듯 이곳에서 흑인들은 '단지 피부색 때문에' 열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그 뜨거운 땅에 대대로 살아왔던 사람들은 그들대로 고향을 등지고 이 낯선 땅으로 이주한 저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을 찾아 헤매고, 중요한 것을 쉽게 내버리는 존재들을 말이죠.

 

모든 게 모순으로 가득해요. 세상이란 그런 곳이네요. 도무지 간단한 것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원래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저는 두렵습니다.

 

한나가 정착하게 되는 정반대의 공간, 추위를 떠나온 곳의 더위, 희고 창백한 곳을 떠나온 곳의 진하고 검은 공간에서 카를루스라는 이름의 침팬지는 가장 놀라운 존재입니다. 카를루스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곤 하는 한나의 독백 또한 놀랍죠.

 

카를루스는 이미 오래전에 침팬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으며 이제 인간과 여타 동물 사이의 중간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카를루스의 집은 숲이 아니라 천장에 매달린 등이라는 것을.(289~290쪽)

중간 세계의 존재. 여기에 생각이 머무른 것은 사실 우리 모두가 그런 세계에 사는 존재들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그런 것'이라고 믿었던 세상을 떠나온 한나의 깨달음, 인간 세상에서 자신을 찾은 침팬지의 깨달음이 참으로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함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모호한 상태가 삶인 것은 아닌지.

 

<불안한 낙원>에서 한나가 곡절의 시간을 건너고 지나 자신의 두 발로 똑바로 선 채 자신의 삶을 직시한 끝에 마침내 아나 네그라가 되기까지의 이 모든 이야기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아나 네그라가 모세스를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나 네그라로 원하는 것을 하며 남은 생을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꿈 같은 이야기라 희망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희망하고 싶습니다. 세상 모든 아나 네그라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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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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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초겨울, 아마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을 겁니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자리였어요. 그들은 "한국어로 쓴다는 자각"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작가가 아닌 입장이라 그 자각을 오롯이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독자로서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했더랬습니다. 아마 몇 번의 실망과 냉담을 거쳐 그럼에도 다시 또 한국소설을 집어들게 되는 이유와도 비슷하겠지요. 동시대를 사는 작가와 독자, 그 사이에만 유효한 긴장과 공감이 분명 존재할 테니까요.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 부지런히 읽는 작가들은 그와 같은 이유로 냉담하지 않고 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강명 작가를 이야기하느라 이렇게까지 갔네요.

처음 <표백>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의구심을 가졌었습니다. 친한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표백>에 관한 감상을 '허무하고, 얇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요. 그러니까 어떤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고, 그가 말하는 '자살', '표백세대'라는 표현에 강렬한 인상을 받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이 꽤나 낯설었던 것 같습니다. 작품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작가의 언어와 인물 간의 대화 등 모든 것이 그랬어요. 만일 <표백>의 주제의식에 비해 제가 이 작품을 다소 '허무하고, 얇다'고 느꼈다면 그런 낯설음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최근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다른' 스타일을 말하기도 했는데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낯선 느낌은 틀린 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었겠다, 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긴 문학에 틀린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 시절 저는 교만한 독자였겠지요. 그리고 지금, 장강명이 많이 읽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생각을 수정해야겠다, 하는 심정을 가졌어요. <한국이 싫어서>와 <댓글부대>로 이어지는 장강명 읽기의 과정입니다.

 

이제 <댓글부대> 이야기를 할까요.

하루, 또는 반나절, 방 한 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일찍부터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 훨씬 노후하다는 말들. 얼마 전 그런 말들을 듣고, 이야기했습니다. 한국 문학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이런 의견 역시 교만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독자의 욕구라고 해두자고요. 바로 그 점을 상기한다면 장강명은 확실히 다른 만족을 줍니다. 특히 <댓글부대>에서 견지하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작가의 진단이라는 것은 확실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선과 악, 흑과 백, 내 편과 네 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문제는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 존재 하나만 해도 그토록 다층적인데, 그 다층의 인간이 다층으로 모인 사회를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어찌 판단할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는 수면 밖으로 드러난 문제 역시 다양한 차원에서 진단해내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데요. 이것은 이 사회가 가장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아닙니까. <댓글부대>에서 다루는 사회 현상에 대한 진단, 참 새롭잖아요? 이런 걸 소설로 읽어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참, 아득해집니다.

 

가령 이런 것들.

 

강사가 자기들의 언어를 썼기 때문이죠. 여기 강사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사람도 기껏해야 삼십 대 중반인 거 눈치채셨습니까? 기성세대가 말하는 건 일단 불신하고 보는 세대입니다. 인터넷에는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 판쳐요. 그런데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쳐준다 싶은 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아이들이에요.(24쪽)

 

 

아니지. 그냥 거대 언론이 하던 나쁜 짓을 아마추어들도 소자본으로 하게 됐을 뿐이야. 거대 언론이 점잖게 기업에 겁을 주며 광고를 따냈다면 인터넷신문들은 대놓고 삥을 뜯지. 블로거들은 동네 식당을 상대로 협찬을 요구하고. 이것도 민주화라면 민주화지. 협박, 공갈, 갈취의 민주화.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민주화.(55쪽)

 

(과문한 탓에, 이미 여러 방면에서 나온 진단들을 뒤늦게 소설에서야 발견했을 수도 있겠죠. 다시 교만이란 녀석 한 번 더 털고 갑니다...)

 

실체가 드러났든 감춰져 있든, 사실이든 음모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상상이 시작된 곳은 현실이었고, 작가가 실현한 풍경 안에도 현실은 아주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이것이 <댓글부대>의 성취가 아닐까요.

 

무엇보다 작품 후반에 등장하는 왕중의 왕, 끝판왕, 이 사회를 조직하는 큰손, 시들어가는 그 노인이 '괴벨스'를 인용하는 장면은 단연 좋습니다. 그 엄청난 존재가 침을 흘리는 모습, 어리고 젊은 여자를 탐하는 모습과 함께 기껏 인용하는 것이 괴벨스라는 점은 작가의 복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그런 존재에게 좌지우지 당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병든 존재들에 대해서도, 아프게 생각합니다.

 

괴벨스가 이런 말을 했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국민들에게 낙관적 전망을 심어줘야 한다고. 우리는 전쟁 중이었어.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우고 있었어.(147쪽) 

 

먼 미래도, 다른 공간도, 특별한 사람도 아닌 바로 이곳, 여기, 이 사람들의 고군분투라는 점에서 저는 이 작품이 좋습니다. 비극적인 결말도 좋고요. 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점도 좋습니다. 반나절에 후다닥 읽어버리고 만 이 작품을 지금은 열심히 주변에 추천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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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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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앞에 공터가 있어요. 어느 날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어린 친구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뭔가 놀이 같은 것을 하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창문을 꼭 닫아두었는데도 이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뉴스는 연일 중요한 이야기들을 부러 빼두고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 따위에 대해서만 떠드는 중이었죠. 그에 따라 저는 친구들을 망연히 바라보며 춥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엉덩이가 차가워지는 느꼈습니다. 손톱은 벌써 파래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들은 아마 저보다 춥지는 않았을 겁니다. 발랄한 색감의 겉옷을 입고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요. 그랬으리라고 짐작합니다. 비록 저들의 뒷모습만 창틀 사이로 얼핏 보았지만 말이에요. 그런 짐작들과 상상으로 혼란스러운 중에 창 안에, 담요를 덮고, 방금 만들어 커피가 담긴 약간 뜨거운 듯한 잔을 감싸고 있으면서도 저는 잃어버린 기억이 문득 떠올라 으스스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알았던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선명하진 않고, 그저 잠깐 떠오르는 같은 기억들 때문이었습니다. 거기 있나요? 묻고 싶어졌습니다. 거기 있나요? 어떤 답도 돌아오지는 않고, 기억들이 모습을 내보여주기도 전에 다시 잃어버리는 듯해서 저는 정말이지 낭패감이 들었어요. 그랬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사랑스런 어린 친구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서늘한 세계에서 나만, 오직 나만 같은 심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외딴 세계, 혼자서 끝없는 길을-알고 보면 금방 자리로 돌아오는 둘레를- 계속해서 걸어야만 하는 곳이겠지요. 이것이 어째서 외로운 짓인지 몰라도 되었던, 어린 친구들을 보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세계는 그들을 보기 전과는 닿을 도리 없이 달라져 있으니까요. 늘 곁에 있었던 것 같은 어떤 사람은 존재 여부 조차 확실하지가 않고, 곧 파묻힌 거인이 깨어나면 어린 친구들이 저를 서늘하고 외롭게 것처럼 사람들은 슬프고 화가 나는 기억들을 떠올리며 살육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거인이 어째서 파묻혔었는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서러움에만 집중하며 타인의 서러움을 탓하고 싸우려는 것이겠죠. 이런 짐작 때문에 책을 덮고 저는 여전하고 터무니없이 슬퍼만집니다. 공주와 액슬이라고 서로를 부르던 노부부가 걱정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작가는 답을 알려주지 않고 저는 더욱 외롭습니다. 먼 기억 속에서 오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던 그 허망한 약속을 떠올립니다. 이 약속의 정체도 용의 입김 속에 파묻혀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한 가지 약속해줘요.

 

-무슨 부탁이에요, 액슬?

 

-단순한 거예요, 공주. 케리그가 정말로 죽고 이 안개가 사라지게 되면 말이오. 그래서 기억들이 돌아오고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던 기억들도 생각나면 말이오. 혹은 한때 내가 저질렀던 어두운 소행들이 기억나서, 당신이 날 다시 보게 되고,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오. 이것만은 약속해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요. 안개 속에서 깨어나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결국 서로를 멀리하게 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오? 약속할 거죠, 공주? 안개가 사라지고 나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겠다고 약속해요.

 

-약속할게요, 액슬.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그 말을 들으니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공주.(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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