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속의 치요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박상희 그림 / 예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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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읽은 오기와라 히로시의 책은 이 번이 두 번째인데, 처음으로 읽은 것은 <네 번째 빙하기>였다.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따뜻한 성장소설이었다.

 두 번째로 읽은 <벽장 속의 치요>는 처음 발간되었을 때부터 찜을 해두었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게다가, <네 번째 빙하기>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같은 작가인줄도 몰랐었다...
그러나 지금 두 권의 책을 읽고난 후 난 완전히 오기와라 히로시의 팬이 되고야 말았다.

벽장속의 치요는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이다.
전체적인 느낌은 굉장히 오싹하면서도 웃기고, 애달프고 또 한편으로는 황당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책 한권을 읽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감정들을 맛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건 이 책이 처음이기도 하다.

<벽장 속의 치요>는 한 샐러리맨이 퇴사한 후 새로운 집을 얻으면서 만나게 된 어린 유령 치요와의 기묘한 우정이야기이다. 왠지 유령이라고 하기엔 너무 순진하고, 귀엽고,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치요.
칼피스를 마시고, 육포를 뜯으며, 관상을 보는 어린 유령의 모습.
치요의 과거는 너무도 가슴아팠다. 치요는 무사히 성불할 수 있을까?
아참, 이 이야기 속에는 진짜 악령도 등장한다..
누굴까~~요?

<call>은 반쯤 읽어 가다가 깜짝 놀랐다..
아, 그렇다고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 단편은 대학 시절 우정을 나눈 세 남녀의 이야기인데, 그들과 사랑의 우정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간에 들어서야 화자의 정체를 눈채채게 된 나는 급반전에 깜짝 놀라고 말았던 것이었다.. 오호라, 이런 트릭도 있구나 하고 무릎을 쳤던 작품이다.
그리고, 굉장히 따뜻함을 느낀 작품이기도 하다..
지금도 내 눈에는 이미와 귀가 빨개진 유우지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엄마의 러시아 수프>는 어린 소녀가 화자로 등장하며, 전체적인 줄거리는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후 중국으로 건너온 러시아인 엄마와 두 딸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동화같은 귀엽고 따뜻한 이야기는 어느새 기묘한 이야기로 흘러 간다.

하지만, 엄마가 딸들을 위해 치른 희생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수프와 쌍둥이 딸들의 정체를 안 순간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감정보다는 결국 전쟁의 피해자였던 세 모녀의 처지가 가슴 아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예기치 못한 방문자>는 프랑스 영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가 떠올랐던 작품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 예기치 못한 방문자, 예기치 못한 결말....
이게 분명히 잔혹한 일인데, 자꾸만 꼬여들어가는 그 상황에 결국 큭큭대고 웃고 말았다.
 
<살인 레시피>는 제목 그대로이다.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는 부부의 이야기로, 이야기의 1/2 은 남편이 화자가 되고, 1/2는 아내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서로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 서로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국 마지막에 웃게 만들어 버렸다.

나를 포함해 세사람이 미친듯이 웃었던 단편이다.
(이 말뜻은 책을 읽어 보시면 알게 될 것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씁쓸한 맛이 남았던 단편이기도 하다.

<냉혹한 간병인>은 아홉편의 단편중 가장 잔혹한 이야기였다. 이건 웃음의 전혀 여지가 없다.
시어머니를 치매로 보내고, 시아버지마저 치매에 걸린 상황에서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소름이 끼쳤고, 그에 대한 보복은 잔혹하고 냉혹했다. 특히 화장실 거울의 "원통함을 풀리라"라는 글귀는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극악무도해질 수 있는지, 사람의 악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인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더불어 생각하게 만든 단편이기도 했다. 

<늙은 고양이>는 이른바 고양이에 관한 속설에 관련한 단편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섬뜩하다기 보다는, 이 단편을 읽고 고양이를 사람들이 더 싫어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 자체로만 보자면, 고양이의 습성과 고양이에 대한 속설을 소설로 훌륭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딱히 무엇을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사람이 그렇게 된 것뿐.
 
<어두운 나무그늘>은 15년전 숨바꼭질을 하다가 실종된 여동생을 찾아서 예전에 살던 마을로 다시 돌아온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커다란 녹나무에 감춰진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

단 두 명만이 등장하지만, 결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신이치의 자전거>는 죽은 자와 산자의 교감이 돋보인 작품이다. <벽장속의 치요>에 나오는 치요는 메이지 시대의 여자 아이 유령이었다면, <신이치의 자전거>에 나오는 신이치는 화자의 어린 시절 친구이다.

신이치가 유령이 되어 나타나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신사와 연못에 가서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알콩달콩 너무나 귀여웠다.

신이치의 마지막 부탁, 그리고 나의 대답은 라져!
유령이 나오는 이야기가 이렇게 훈훈해도 되는 거야???!!!!

오싹하고 무서운 유령 이야기가 아니라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며, 애달프기도 한 유령이야기.
그에 반해 너무나도 무섭고 잔인하고 냉혹한 악의와 광기에 사로 잡힌 인간들의 이야기.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만나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요즘 세상에 인간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고 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유령이나 귀신들이 오히려 사람을 무서워하고 피하게 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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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빙하기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좋은생각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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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기와라 히로시의 작품은 요번이 처음이다.
책 표지의 작가 소개를 보고, <벽장 속의 치요>를 쓴 작가란 것을 알게 되었는데, 예전부터 관심있던 작가라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난 그렇게 그의 신작인 <네 번째 빙하기>를 읽게 되었다.

네 번째 빙하기.
사실 지구의 네 번째 빙하기인 뷔름 빙기는 이미 1만년전에 끝났고, 지금은 네 번째 간빙기이다.
그렇다면, 제목의 네 번째 빙하기란 무엇일까?

소설의 주인공 와타루는 유전학 연구실의 조수이자 싱글맘인 엄마와 둘이서 산다.
생긴 것도 성격도 사고 방식도 그를 둘러싼 세계의 사람과 다른 와타루는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적대 속에 살아 간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다가, 일본인처럼 생기지 않은 와타루는 속칭 '튀기'라 불리며 친구조차 없다.

어릴 때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실내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집중을 잘 못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녀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장애)라는 진단을 받지만, 엄마의 긍정적 사고방식과 사랑으로 와타루는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러던 어느 날 와타루는 책을 보다가 크로마뇽인에 대한 자료를 보게 되고, 자신의 생김새나 행동등이 크로마뇽인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크로마뇽인의 후예라 생각한다. 그리고 크로마뇽인들이 살었던 습성대로 돌도끼를 만든다거나 돌칼, 창, 낚시 바늘등을 만드는 등 점점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얼핏 보면 엄청 황당한 내용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동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책을 차근차근 읽으면서 내 생각이 틀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비밀로 부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비밀.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의문.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 받고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입장은 와타루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크로마뇽인의 후예라 납득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게 한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와타루는 쿠로라는 버려진 개를 만나 친구가 되고, 사치라는 여학생을 만나 사치와도 친구가 된다.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던 와타루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게 된다. 와타루에게도 드디어 친구가 생긴 것이다.

사치는 부모님과 살고 있지만,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폭력을 행사하고, 어머니가 돈을 벌고 있다. 따라서 전학생인 사치 역시 그 마을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존재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 둘이 친구가 된 건 그 이방인이란 공통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와타루는 자기와 사치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치에게 동료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가 없어서 고민하고 사치는 있어서 고민한다. 우리는 자신의 껍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달팽이와 소라게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소라게와 달팽이는 껍데기를 서루 바꿀 수도 없다. (148p)

와타루는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육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와타루에게 또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러면서 와타루는 조금씩 학교라는 조그마한 사회에 적응해 나간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고, 와타루는 달리기에서 창던지기라는 종목으로 변경한 후 선수로서 자신을 조금씩 조금씩 단련해 나간다.

그렇게 조금씩 친구도 생기고 자신의 능력도 인정받아 갈 무렵, 어머니가 말기암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그때 밝혀진 아버지의 비밀... 와타루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의 정체에 대해 듣고는 아연실색한다.

고교 졸업 전 어머니의 사망 후 와타루는 러시아로 가서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와 재회하지만, 그것은 와타루에게 실망만을 안겨주었다. 와타루에게는 차라리 크로마뇽인이 아버지라고 여기거나 아이스맨이 아버지라고 여겼던 시기가 더 좋았던 것이다.

와타루는 박물관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아이스맨을 훔쳐, 눈덮인 산으로 가서 그가 있어야 할 원래 자리로 되돌아 가게 한다.
이 행위는 와타루가 이제껏 품고 왔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결별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오기와라 히로시의 <네번째 빙하기>는 성장 소설임과 동시에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와타루가 기억하는 네 살때의 일부터 열일곱살이 될 때까지 와타루가 세상에 대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때로는 유머스럽게 때로는 담담하게 서술해 나간다.

자칫하면 어둡고 우울하게 흐를 수 있는 싱글맘과 혼혈아의 이야기를 이렇게 산뜻하게 묘사해 내기란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가녀린 엄마가 와타루를 키워낸 과정은 눈물 겹지만, 오히려 와타루가 자신을 크로마뇽인의 후예라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얻는 부분이 솔직히 더욱 가슴 아팠다. 

어린 아이에서 소년이 되어 사춘기를 겪고, 어른이 되기까지의 와타루는 참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그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막상 현실과 부딪혔을 때의 와타루의 반응,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에 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 와타루가 살아 왔던 네 번째 빙하기는 끝났지만, 와타루의 말처럼 내일 다시 빙하기가 찾아 온다해도 와타루는 사치와 함께라면 얼마든지 다시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난 와타루뿐만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각각의 빙하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고 해빙기를 맞이할 때까지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은 스스로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와타루가 스스로 정답을 구하려는 노력을 했듯이.

<기억에 남는 한마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 주제를 알아라. 그래도 좋아. 내 주제는 어른이 된 후에 알면 돼. 내가 알고 싶은 건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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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노스케 이야기 오늘의 일본문학 7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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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 <요노스케 이야기>

이 책은 요노스케가 고향인 규슈를 떠나 도쿄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도쿄로 상경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후 1년간 요노스케가 도쿄란 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비롯해 고향 친구들, 부모님등등의 수많은 등장 인물들과의 만남과 사귐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된 소설의 구성을 그때로 따온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간중간 적은 분량으로 한 번씩 줄띄움이 들어가 있다. 그 내용들은 이어지는 내용도 있고, 며칠의 시간 간격이 있거나, 갑자기 다른 내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1년이란 시간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대로 묘사하고 있다.

좀 특이한 것은 5월, 8월, 11월, 2월에 이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현재와 과거 회상 부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5월달에서 갑자기 다른 이야기가 툭 튀어 나왔을 때는 약간 혼란스러웠으나, 그것이 20년 후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는, 그후에 다시 나올 20년후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해지기도 했다.

요노스케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청년이다.
낙천적이고, 게으르기도 하고, 친구에게 빈대를 붙기도 하고...
학교 수업에 지각을 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 동아리, 연애, 취업과 미래에 대한 고민 등등 우리들이 대학시절 거쳤을 법한, 그리고 지금의 대학생들이 살아갈 법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청년이다.

그런 요노스케가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대학교 1학년에 여자친구를 임신시켜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잡아 어엿한 한 사람의 가장으로 살아가는 친구(구라모치), 늘 쿨한 표정의 동성애자 친구(가토), 바닷가에 놀러가는 게 크루즈 여행이란 부잣집 아가씨가 베트남에서 건너온 보트 피플 여자의 아기를 만나, 먼 훗날 아프리카 난민 캠프에서 일하게 된 이야기(쇼코), 유명인사나 재벌가 아들과 어울리며 인생을 허비하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여성(지하루), 우연히 자신의 우체통에 들어 있던 발렌타인 초콜렛의 진짜 주인을 만나 보도 사진작가의 길을 걷게 된 요노스케.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이지만 각각의 의미를 가진 만남들.
그 수없이 많은 만남 속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나아간다.

대학 시절이란 어쩌면 인생의 황금기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다닐 때의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사회와의 경계선에 서게 되는 시기이며, 처음으로 어른으로 인정 받고 책임감을 배워나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처음으로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시기가 대학 시절이며,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따르게 되는 시기도 대학 시절이란 것을 알게 된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유를 느끼게 되지만, 그 자유는 책임과 의무를 다 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요노스케가 만났던 사람들이 요노스케 덕분에 인생의 방향이 바뀌고 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요노스케는 그들의 인생의 한 부분이었고, 작은 영향을 주었지만, 사실 누군가의 인생에 작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요노스케가 참 좋아졌다. 그래서 11월달의 지하루의 회상과 현재에서 요노스케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문장이 나왔을 때, 그만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요노스케가 쇼코에게 남긴 사진의 의미가 뭔지 알았을때도.
이 책을 읽는 몇 시간 동안 나 역시 요노스케의 친구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큭큭거리다가 와하하핫하고 웃다가, 어느새 숙연해지는, 그 이야기들 속에 담긴 많은 메세지들..
이 소설은 단순히 청춘을 찬미하는 소설이 아니다. 성장 소설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 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줄 꺼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책들 속에서 대중성과 문학성을 함께 겸비한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지만, 난 오늘 그런 책을 만났다.

나도 내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요노스케 같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 이 소설속에는 한국과 관련된 몇몇 이야기가 나온다.
칼기 폭파 사건, 한국의 민주화 운동, 유학생 김군, 그리고 古 이수현씨 이야기까지.
지나가는 식으로 가볍게 언급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나쁜 의도로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요시다 슈이치가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이라 보는 쪽이 무방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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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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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제목과 강렬한 표지 그림.
그리고 재니스 리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에 난 이 책을 골랐다.
작가가 한국인 2세라는 것과 이것이 그녀의 데뷔작이며, 사랑 이야기란 단순한 정보만을 가지고 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홍콩의 상류층이라...
그럼,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일수도 있겠군 이라는 편견을 가진 건 사실이다.
도입부도 그런 분위기였고.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난 책에 점점 집중하게 되었고, 빠른 전개와 독특한 구조, 특이한 소재라는 것에 푹 빠져 버렸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3부는 1950년대와 1940년대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며, 2부는 1940년대 정확히 말하면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그 전쟁의 여파가 홍콩에 밀려들어 오는 시기의 이야기이다.

등장인물은 꽤 많지만, 주인공은 3명으로 집약할 수 있다.
1950년대, 즉 소설에서 현재의 주인공은 클레어와 윌이고, 1940년대의 주인공은 트루디와 윌이다.

클레어는 영국인으로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과 결혼해 홍콩으로 오게된 여자로, 홍콩의 거물 빅터 첸의 집에서 그의 딸 로켓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게 된다. 그녀는 홍콩 상류 사회를 경험하면서, 그들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되고, 그녀는 그날 이후 조금씩 변해가게 된다. 

클레어는 빅터첸의 아내 멜로디의 물건을 훔치면서 그들과 비슷해지고 싶어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사회에서 이방인일 뿐이다. 그리고 남편이 아닌 남자인 윌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도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고 파경을 맞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후 홍콩의 상류층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나와 완차이라는 조그만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고, 그곳의 평범한 삶이 진정한 행복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트루디는 포르투갈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유라시아 혼혈계로 홍콩 사교계의 꽃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와 윌을 서로 사랑을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 모든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그녀는 생존과 사랑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윌에게 버림받은 후 희망을 잃었고, 당시 홍콩의 점령군이었던 일본군인에게 살해된 듯 하다.

윌은 영국인으로 트루디와 클레어의 연인이 된 남자다. 트루디와 만날때는 트루디가 주도권을 쥐었지만, 클레어와의 만남에서는 윌이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도 그는 여전히 트루디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트루디에게서 등을 돌린 죄악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듯하다.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교차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얼핏 보면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과거와 현재는 끊임없이 교차한다. 
이건 읽다가 느낀 점인데, 클레어는 결국 윌과 트루디 그리고 그들의 과거의 일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끼어든 인물이다.
결국 과거는 청산되지 않았고, 여전히 현재에 영항력을 주고 있으며, 공교롭게도 그 사이에 클레어가 끼어들게 된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의 홍콩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여러가지 묘사가 워낙 섬세해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홍콩 상류 게급들의 생활을 비롯해 전쟁 중의 상황, 즉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벌어지는 약탈과 살육,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 그리고 홍콩 사회에 있던 상류층인 외국인들과 중국인들의 모습, 그리고 살아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음모와 배신, 상류층 사람들의 독특한 세계관과 가치관등등.
이 책 한 권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피아노 교사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다. 전쟁이란 극단의 상황을 지나가면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인한 사람들의 변화는 처절한 정도였다.
홍콩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영국 정부가 일본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묘사는 참혹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쟁과 관련되어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묘사가 많았다.  
하지만 계속 읽다 보면, 전쟁이란 소재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간의 대립을 극도로 몰아가는 하나의 구성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전쟁에 대한 묘사는 또한 제 2차 세계 대전이 홍콩이란 작은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우리가 잘 몰랐던 부분이기도 하다.

전쟁 이야기와 더불어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트루디가 침략자가 영국 정부에서 일본 군대로 바뀌어 버린 홍콩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모습이다. 죽음이냐 생존이냐의 문제에서 트루디는 생존하고, 또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쳤지만, 윌은 영국인의 도덕심과 자존심을 들어 트루디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윌은 그당시 자존심을 세워가면서 트루디를 저버렸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1940년대를 묘사한 부분은 전부 현재형으로 서술된다. 즉, 그에게 있어서 1940년대에 있었던 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트루디는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 살아 남아 존재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전쟁이란 것이 없었더라면 트루디와 윌은 행복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가정일뿐...
전쟁은 두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다.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야 하는 게 옳았을까, 아니면 생존과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옳았을까.

이 물음에 대해 난 이렇게 답을 내리고 싶다.
결국 신념을 지키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결국, 책의 마지막에서는 전쟁과 관련된 트루디의 진실이 모두 밝혀지게 된다. 이미 그녀는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이제서야 그녀는 눈을 편히 감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윌은 트루디를 잃었다는 큰 상실을 겪었으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고, 클레어는 윌과의 사랑과 상실을 통해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난 <피아노 교사>를 읽고 난 후, 전쟁과 상실의 고통을 통해 보여지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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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 길고양이와 함께한 1년 반의 기록 안녕 고양이 시리즈 1
이용한 지음 / 북폴리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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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는 길에서 사는 길고양이(혹은 길냥이)라 불리는 고양이들에 대한 1년 반의 기록이며, 저자가 사는 동네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저자와 나누는 정이 그림과 글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고양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과 더불어 살아 왔고,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에 사는 고양이들이나 어촌에 사는 고양이들은 찬밥 신세에 애물단지다.
이런 저런 이유야 많겠지만, 쓰레기봉투를 뜯는다던가, 발정났을때 기분 나쁘게 운다던가하는 여러가지 이유로 추방되어야 할 존재로까지 여겨지게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럼 고양이가 나쁜 것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애초 도시에 어촌에 고양이를 들여온 게 누군지를 생각해 보자.
바로 사람이다.
그리고 새끼때는 귀엽다고 키우다가 크면 버리는 것도 인간이었다.

도시에서 사는 고양이들의 생활 환경은 열악하다. 먹을 것이 없어 이리저리 방황하다 쓰레기를 뒤지곤 하지만, 쓰레기를 뒤지도록 만든 것 역시 인간이다. 일반 쓰레기 봉투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던지, 그냥 비닐 봉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서는 그걸 고양이 탓으로 돌린다.

고양이들은 인간을 피해 숨어다니면서 음식물 찌꺼기로 연명할 수 밖에 없다. 도시에는 쥐도 없다. 찾아 보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고양이들이 사냥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게 도시 생활이다.
그러다보니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도로를 건너다가 로드킬을 당하기도 한다.

어촌의 경우, 거문도 고양이의 예를 들어보자.
주민들은 생선을 지키기 위해 고양이를 들여 왔다. 생선을 노리는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들여와 놓고는 고양이들이 이젠 피해를 준다고 살처분을 한다. 티비 방송에서 고양이를 무조건 죽여야한다는 주민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에 누가 고양이를 거문도에 들여왔는지 그들은 이미 까맣게 잊어 버렸단 말인가. 그건 둘째치고, 죽인다니. 사람도 고양이도 생명을 가진 존중받아야 할 개체다. 그런데,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죽인다라니.. 그건 인간 입장에서만 생각한 것일 뿐이다.

한국인들은 묘하게 고양이에게 적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지금은 길고양이로 호칭이 많이 순화되었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는 그냥 도둑 고양이였다.
사람을 전혀 따르지 않고 피해 다니며, 음식을 훔쳐 먹는다고 해서 말이다.

호기심에 고양이 새끼를 데려갔다가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고양이를 다시 버리는 아이들.
생명을 버리라는 부모도, 아무 죄책감 없이 그냥 어린 생명을 귀엽다는 이유로 데려가는 아이들도 문제다. 그런 아이들이 생명의 귀중함을 알고 자라게 될까?

고양이들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도, 병균을 퍼뜨리는 존재도, 아무 이유없이 미움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존재도 아니다.
지구라는 곳에 있는 수많은 생명체 중의 하나이며, 당연히 인간과 공존해야할 생명이다.

길고양이들은 하루하루를 목숨을 걸고 살고 있다.
따듯한 햇살 아래 늘어져 잠을 자는 고양이의 모습만 보고, 속편한 녀석들이란 말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치열한 하루를 사는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 뿐이니까.

이 책은 "고양이를 사랑합시다"라는 취지에서 쓰여진 글이 아니다.
길고양의 삶에 대해 좀더 이해하고, 따뜻한 눈길을 보내자고 이야기한다.
물론 고양이가 너무나도 싫다면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대신 아무 죄없는 고양이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일은 말자고 이야기한다.
공존의 길을 모색하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한마디>
누군가는 고양이의 수가 늘어나면 인간이 피해를 입는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다분히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일 뿐이다. 정작 이 지구상에서 개체수 조절에 실패한 건 인간이다. 이건 인간이냐 고양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고양이의 공존의 문제이다. 대상이 고양이라고 해서 모든 폭력과 살생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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