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사 별전 - 나마나리 아가씨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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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전 TV를 보다가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한 남자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애인의 집으로 찾아가 폭탄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였다. 동반자살이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혼자 죽으려 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남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랑을 했기에 그 사랑이 결국 자기파괴적인 사랑으로 끝났을까. 어리석은 사람이다라고만도, 안타까운 사람이다라고만은 할 수 없었던 그 남자의 사연.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누군가를 엄청나게 미워했던 적이 있다. 믿었고 사랑했던 사람인데 나에게 그런 배신감을 주다니. 많이 사랑했던 만큼 많이 증오했었다. 사랑이란 감정이 1g도 남지 않았을 때, 난 해괴한 생각을 했었다. 그것 역시 한 TV프로그램을 통한 것이었다. 일본에 가면 저주를 대신 실행해주는 신사가 있단다. 축시참배를 비롯해 다양한 저주를 보내는 곳으로 누군가에게 저주를 걸면 그것이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아준다고 했다. 옳거니, 그래 저런 방법도 있었구나 하면서 그 신사가 어딘지 찾아본 적이 있었다.

당시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신 아버지께선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자신을 다치게 하는 거라며 그냥 잊어버리라고 하셨다. 처음엔 그 말이 썩 와닿진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법 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미워하든 저주를 걸고 싶어하든 상대는 아무것도 모를 것 아닌가. 결국 그것은 혼자 빈방에 들어 앉아 나쁜 마음을 먹고 나쁜 말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닌가. 결국 미움도 욕도 나에게만 머무르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을 용서는 하지 않는다. 대신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자신을 미워했던 마음을 용서하기로 했다. 사랑의 아픔을 넘어 증오만 남게 되었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게 아니다. 먼저 자신을 용서하고 다독이는 게 먼저란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지금은 그때의 날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마 그때 내 모습은 귀축에 가깝지 않았을까. 증오로 똘똘 뭉쳐있는...

책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과 꽤 많이 상관이 있단 생각이 들어서이다.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나마나리 아가씨'가 어쩌면 그때의 나와 비슷한 마음을 먹고 있지 않았나 싶다.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의 친구 미나모토노 히로마사는 12년 전 어느 밤 피리를 불다 한 여인을 만난다. 그의 피리 소리를 좋아하던 그 여인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고, 히로마사는 그 아가씨에 대한 그리움을 오랜기간 간직해 왔다. 그렇게 12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헤이안경은 이상한 일로 술렁이기 시작한다. 기부네 신사에서 못박힌 인형이 발견되고, 얼굴에 주사를 바르고 머리에 쇠고랑을 쓴 귀신같은 여인이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건 인간인가, 귀신인가.

세이메이와 히로마사는 이 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귀신처럼 돌아다니는 그 여인이 히로마사가 여전히 연심을 품고 있는 12년 전의 그 아가씨란 것을. 그녀는 도대체 왜 그런 모습으로 축시참배를 다니는 것인가. 조사가 진행될수록 그 아가씨에 대한 안타까운 속사정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랑이 도대체 뭐길래. 정말로 사랑이 도대체 뭐길래. 사람을 그토록 변화시키는 것일까.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만큼 배신감이 크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대와 그녀가 당한 모든 수모와 아픔을 생각하면 그녀의 입장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도를 넘어 그 여인은 귀신도 사람도 아닌 그 중간 존재인 나마나리가 되었다. 원망과 원념이 마음을 모두 집어삼켰던 것이겠지.

세이메이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귀신이 산다고 한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원망할 때 그 귀신이 움직인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그 귀신을 잘 다스려 스스로 귀신이 되지는 않는다. 이 아가씨는 그 귀신을 다스리지 못해 완전히 마음이 먹혀 나마나리가 된 것이다. 얼마나 원통하면, 얼마나 슬펐으면 그랬을꼬.

그 아가씨가 그런 남자만 만나지 않았어도 좋았을지 모른다. 히로마사같은 남자와 맺어졌다면 행복해질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가씨가 선택한 것은 다른 남자였고, 그 결과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사랑이란 건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느냐도 중요하다. 그렇게 보자면 이 아가씨의 사랑은 첫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단 생각도 든다. 그러나 결국 그 남자를 선택한 것도, 원망과 원념에 마음을 내주고 스스로 귀신이 되어간 것은 역시 아가씨 자신이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이다.

헤이안 시대는 귀족들의 시대였고, 남자들의 시대였다. 그래서 귀족 남자라면 자신의 신분보다 높지 않은 여자라면 누구라도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시대였다. <겐지 모노가타리>를 읽어 봐도 그런 여인들이 차고 넘친다. 크게 보자면 이 아가씨 역시 그 시대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음양사 별전 - 나마나리 아가씨』는 세이메이에 관한 이야기, 히로마사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스모 경기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순서대로 나오지만 결국 모든 것은 나마나리 아가씨 이야기로 귀결된다. 어찌 보면 각각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이며, 앞서 나온 이야기는 복선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내가 나마나리 아가씨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이제까지 나온 음양사 이야기에도 이런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는 많았다. 그들 역시 이 시대에 희생당한 여인들이었고, 그 정점을 나마나리 아가씨가 찍었다고 볼 수 있다.

결말부를 보면 자기파괴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파멸시켜간 아가씨가 히로마사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같은, 약간은 식상한 결말을 보이지만, 그래도 난 구원받지 못한 것보다 구원받는 쪽의 결말이 좋았다. 비록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리 보자면 최고의 음양사라 일컬어지는 세이메이의 역할이 별로 없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 수 있다. 대개 구원은 세이메이의 역할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일 역시 히로마사 혼자 힘으로는 힘들었을 것이다. 세이메이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겠지. 세이메이는 귀신을 퇴치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원념을 풀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아가씨를 해하려 했던 음양사를 떠올리면 세이메이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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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6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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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이스 잼잼 - 경이로운 일상음식 이야기 오무라이스 잼잼 1
조경규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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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얼마나 많이 존재할까? 일단 먼저 떠오르는 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겠지. 그다음으로는 스스로 맛있게 만들어 먹는 것이거나, 누군가가 맛있게 만들어준 음식을 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닐까. 그 음식은 눈이 휘둥그레지게 비싼 풀코스 음식이 아니어도 좋다. 간단하게 만들어 먹는 것이라도, 비교적 저렴한 재료로 만든 것이라 해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이라 할 지라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먹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라고 생각한다)

조경규 작가의『오무라이스 잼잼』에는 거창한 음식따윈 나오지 않는다. (물론 불도장이 있긴 했지만, 그건 예외) 간단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종류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 뿐만 아니라 간식이나 디저트라고 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예외로 활명수는 요리에도, 간식에도, 디저트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음식에 관한 이야기만 있다는 건 아니다. 음식 자체에 대한 이야기, 그 음식이 태어난 배경 등과 더불어 그 음식과 관련된 추억담이라든지, 아이를 키워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 등 일상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일상을 더욱 빛내주는 음식 이야기라고 하면 되려나?

이렇듯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들이 연달아 줄지어 나오니 군침이 스윽 도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저자의 연령대와 비슷한 또래이다 보니 나 역시 여기에 소개되는 음식들에 관한 추억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부터는 제 추억담을 좀 풀어볼까요. 거창한 건 없지만요.(笑)
난 지금도 샌드위치를 좋아하지만 이건 어린 시절부터 자주 먹어서 그런 것이지 싶다. 속재료나 빵만 바꿔도 맛이 달라지는 샌드위치들. 요즘은 고구마 샌드위치를 즐겨 먹는데, 역시 오리지널은 달걀 샌드위치가 아닐까 싶다. 쉽게 뚝딱 만들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 밖에서 사먹으면 편리하긴 하지만 역시 집에서 만든 홈메이드 샌드위치맛은 따라잡을 수 없다.

카스테라의 경우, 어린 시절 엄마가 자주 구워주셨다. 작은 오븐이 있었는데, 요즘 것과는 다른 동그란 오븐이었다. 어떻게 보면 참 촌시럽게 생겼지만 그 안에서 구워지는 카스테라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난 지금도 카스테라만 보면 어린 시절 엄마가 구워주시던 카스테라의 맛과 무심코 비교하고 마는데 그게 바로 추억의 힘일지도 모르지.

시골 할머니께서 만들어주시던 꼬들꼬들 무말랭이(내가 사는 곳에선 곤지라 부른다. 왜인지는 물어보셔도 잘 모릅니다)는 겨울 반찬으로 최고였다. 할머니의 깻잎 장아찌도 일품이었고. 벌써 돌아가신지 몇년되었지만 여전히 난 할머니의 장아찌가 그립다.

뼈다귀 해장국, 요즘같은 계절엔 그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돈다. 첨엔 뭐 저런 걸 먹나 싶었는데 먹어 보니 의외로 무척 맛있었달까. 그래서 이와 비슷한 감자탕도 즐겨 먹는다.

돈까스하면 요즘은 두툼한 일식 돈까스를 주로 먹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땐 경양식집에서 먹는 돈까스가 참 맛있었다. 수프도 주고, 접시에 깔린 얇은 밥에 데미글라스 소스를 듬뿍 올린 얄팍한 돈까스.그러고 보니 그렇게 나오는 돈까스를 먹어 본지 참 오래되었구나.

소세지편에 나오는 소세지 중엔 단연코 으뜸은 분홍소세지가 아닐까. 도시락반찬으로 훌륭한 역할을 했던 분홍소세지. 예전엔 엄청난 굵기와 길이를 자랑했거만 요즘은 그 반정도 사이즈로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맛에는 변함이 없는 분홍소세지. 예전의 맛이 그리우면 한번씩 사서 계란옷 입혀 부쳐 먹는데, 김치랑 요것만 있으면 밥 한그릇 뚝딱!

음식과 관련한 기억은 비교적 오래가는 모양이다. 다른 건 기억을 잘 못해도 음식맛은 꽤나 기억을 잘 한단 말이지. 이건 머릿속으로 집어 넣은 기억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문득문득 옛추억이 떠오르나 보다. 특히 좋은 사람과 맛있게 먹은 음식은 그 기억이 더욱 오래가니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맛있게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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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러브하는건 유라구!
자류 도쿠로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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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겉모습만 봐서는 절대 모른다. 딱 보기엔 무척 온화하고 인상좋은 사람인데 알고 보니 무지 까칠한 사람일 수도 있고, 무지 무섭게 생겼는데 알고 보니 되게 야들야들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란 존재가 재미있는 것 아닐까.

겉보기엔 1등급 날라리 소년 타케우치, 겉보기엔 엄하고 까칠해 보이는 선도부 오노.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니까. 타케우치가 불량소년처럼 보이는 건 겉모습뿐이고, 실제로는 엄청 귀여운 구석이 많다. 순진무구 그 자체랄까. 그건 선도부 오노도 마찬가지.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 를 충실히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평소에는 엄한 선도부원이지만 좋아하는 애앞에만 서면 어쩔줄 몰라하는 게 영락없이 그 또래 소년의 모습이니까.

참 안어울릴 것 같은 두 녀석의 인연은 소꿉친구들의 도움과 응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노의 소꿉친구이자 같은 선도부원인 츠바키는 처음엔 타케우치만 보면 꼼짝 못하는 오노와 타케우치를 맞대면시켜서 정신차리게 할 요량이었던 것 같은데, 의외로 그 순간 오노가 타케우치에게 고백을 해버리게 된다. 의외의 득템!?

어쨌거나 정신연령은 여자애들이 더 높으니 사랑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오노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건 여자애들 몫이다. 타케우치도 그런 쪽으론 아무런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지만, 그런 타케우치보다 오노쪽 공략이 더 쉬워보였겠지.

원래 아기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도 첫걸음을 떼기가 힘들다. 그 첫걸음을 잘 떼면 그다음은 일사천리! 사랑도 그렇다. 사랑을 고백하고, 그 고백을 상대가 받아줄 때까지의 과정이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을 유지하려면 각별한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순진무구한 소년들의 첫사랑을 그린 <아이가 러브하는 건 너라구!>는 정말 풋풋하다. 그래서 때론 그런 모습에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저런 사랑, 참 순수하지 싶어서.

뒷편에 수록된 <사립학교 농땡이부>와 <전일담 첫만남>은 뭐랄까, 미묘하게 심심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그 나름대로 괜찮았다. 좀 이상한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이 작가의 캐릭터들은 조금 유별난 구석이 있나? (笑)

이 작가의 작품은 <야호선>과 이 작품 딱 두가지만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야호선>쪽이 더 마음에 든다. 이건 아무래도 조금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 그런데, 고교생의 이야기라 조금은 가볍게 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떻게 보면 명랑 코미디 쪽에 가까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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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알파 10 - 신장판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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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인간의 삶이란 기억보다 망각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 경험했던 일들은 차곡차곡 기억저장소에 쌓이겠지만 어느 샌가 먼 옛날의 일이 되어 조금씩 잊혀져간다. 아, 그때 그런 일도 있었지, 라고 떠올리면 다행이랄까. 그런 일도 있었나, 하고 반응하게 되는 일도 많다.

매일매일 비슷비슷하지만 다른 날들을 살면서 모든 걸 기억할 수는 없다. 나의 삶에 관해서도 이럴진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잊어가는 게 훨씬 빨리 이루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면, 그후 그 사람의 존재를 기억했던 모든 이들이 사라지면 그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마저 잊히겠지.

번성했던 도시가 쇠락하면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후 길도 건물들도 사라지면 미래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문득 떠올리겠지만 금세 잊어버리겠지.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걸.

하지만 작은 언덕 위의 평범한 한 카페에 가면 그 모든 걸 기억해줄 누군가가 있다. 바로 알파. 그녀는 로봇이지만 사람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평범하고 비슷비슷해 보이는 매일이 소중하고, 모든 것을 추억으로 기억하려 한다. 변해가는 주변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그것들을 자신의 마음속에 꼭꼭 담아둔다.

꼬맹이였던 마키와 타카히로가 어느새 성장해 어른이 되고, 선생님이나 할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안계셔도 알파는 그들과 함께 나눈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어쩌면 자신의 주변이 변하는 것,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걸 지켜봐야 하는 것은 큰 고통이 되겠지만, 알파는 슬픔 대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한다.

『신장판 카페 알파』의 완결편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코끝이 찡해져 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세계지만, 사람들의 흔적을 기억하는 자연의 모습, 그리고 알파의 모습.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사실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일인 것이다. 사랑스러운 것이다.

고마워요, 알파씨.
그곳에 있어줘서.
모든 것을 기억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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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호두 속 3 - 뉴 루비코믹스 1084
가와이 토코 지음 / 현대지능개발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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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방에 사는 관계로 1년에 두번쯤 미술관 관람을 하러 간다. 1년에 몇 번 안되는 서울 나들이 중 2번을 미술관 관람으로 할애하는 것이니 딱히 적은 횟수는 아니다. 평상시 미술관에 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미술관련 서적이나 도판같은 걸 사서 집에서 종종 보는데, 딱히 그림에 대해 아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대학시절 교양과목으로 미술의 이해란 수업도 들었지만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지금 기억나는 건 거의 없어 미술관 관람을 하거나 도판을 보면서도 딱히 뭐라고 코멘트를 할 수는 없는 처지이지만, 그저 보는 것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니 그런대로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좋아...(쿨럭)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장황하게 길어져 버렸군.

각설하고!
『갤러리 호두 속』은 미술품 중 그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한 화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화랑에서는 그림매매 뿐만 아니라 복원같은 것도 겸한다. 그것을 도맡아 하는 사람은 화랑의 젊은 주인 타니자키인데, 이 사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수상쩍기만 하다. 게다가 들어오는 물건들 중에는 밝은 세상에는 내놓지 못할 물건이 끼어 있으니 더욱 수상쩍다. 하지만 복원기술만은 뛰어나 그 분야에서 만큼은 인정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3권은 페이크 전(위작 전시회)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드디어 수수께끼의 화랑주인 타니자키의 과거사가 나온다. 어릴땐 꽤 미소년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거참.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복원기술이 뛰어났지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은 부족했던 소년이었다. 그대신 맡게 된 것이 모사작업. 그가 모사한 그림과 관련된 비밀은? 난 위작이란 모사가 똑같은 건 줄 알았는데, 이 에피소드를 읽고 다르단 걸 알았다. 그런 차이가 있었구나.

두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타니자키만큼이나 수상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후지. 아무래도 타니자키 대신 외국을 다니면서 물건을 입수해주는 사람인듯 싶다. 불순한 아우라가 풀풀 풍기지만 묘하게 매력적인 캐릭터의 등장에, 올레!

세번째 에피소드와 네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한 명은 광기에 사로잡힌 화가이고, 또다른 한 명은 까칠한 화가랄까. 두 에피소드 모두 미술계의 어두운 단면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어떻게 잘 팔리는 화가가 만들어지는가였고, 후자는 자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화가가 외국에서 인정받고 돌아온 후 국내에서의 대접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예술계란 곳이 원래 고루한 곳이긴 하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자기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데가 아니던가. 그런 걸 보면 참 쓴 웃음이 나온다.

'갤러리 호두 속'이라는 수상쩍은 화랑과 그보다 더 수상쩍은 젊은 화랑 주인의 이야기가 벌써 세권째이다. 2권에서 끝나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꽤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서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BL물로 분류가 되어 있는데 3권에선 전혀 그런 게 안보인다. 물론 앞권에선 그런 분위기가 좀 났지만... (笑) 그래도 이 작품을 읽는 게 즐거운 건 미술계, 특히 그림과 관련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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