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4
김선욱 지음 / 자음과모음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자이야기, 고전으로 가는 우회로

 

 

 이것은 책 한 권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권의 책,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일 것 없이 고전은 위대하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아무 책이나 짧게는 몇 십 년, 길게는 몇 백 년 동안 꾸준히 회자되고 읽힐 수 없다.

 이제 막 책에 흥미를 붙인 사람을 다시 책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고전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고전의 가장 큰 문제는 읽기 어렵다는 것이다. 고전에 대한 농담으로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읽어보지 않은(못한) 책이라는 말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경외감이 느껴지는 표지와 제목, 웬만한 책 몇 권에 버금가는 쪽수와 무게, 읽기를 도전할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우회로.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것이다. 실제로 해설서를 먼저 읽고 그 다음 원저를 읽는 일은 바로 원저를 읽는 일보다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원저로 가는 길이 산적들이 우글거리는 높은 산을 넘어야만 하는 험난한 길이라면 해설서를 통한 우회로는 중간에 쉴 곳도 많고 깔끔하게 잘 닦인 길이다. 오랜 수련으로 내공이 쌓인 사람이라면 첫 번째 길로 가도 괜찮겠지만 초심자라면 두 번째 길로 가는 것이 훨씬 좋은 선택이다.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시리즈는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일상생활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심오한 이론의 핵심을 쉽게 풀어냈다.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는 표지와,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선뜻 이 책을 들기 망설였던 사람이라면 잠시 조금 배웠다는, 대학생이라는 허영심 혹은 자존심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 중에는 필히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라고 공자는 말했다. 이 말인즉슨 그 중에는 어린이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모르면 어린이에게라도 배우면 되는 것이다.

 잠시 겸손한 마음으로 고전으로 가는 우회로,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를 펴보면 어떨까. ,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고전은 확실히 어렵긴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삐끕인생론, 싸구려 댄스를 추자

 

 며칠 전, 친구 필호가 아는 형에게 나를 소개할 때 얘 글 많이 써요. 약간 삐끕느낌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하지만 담담한 느낌을 지향하는 나에게 삐끕이라니, 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향은 지향일 뿐 엄밀한 사실이다. 나는 삐끕이다. 정확히는, ‘B이다. 하지만 B급을 비급이라고 발음하면 안 된다. ‘자장면보다 짜장면돈가스보다 돈까쓰가 왠지 더 맛있게 느껴지듯, ‘B특유의 싼 맛과 부족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삐끕이라고 말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된소리는 강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삐끕은 전혀 강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B급 아비투스를 갖고 있다. 흔히 고급문화라고 일컬어지는 클래식과 추상적인 미술을 감상하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고 그나마 중간예술인 사진과 영화를 볼 뿐이다. 영화 중에서도 A급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B급에 머물러있는데, 가끔 A급 흉내를 내볼 요량으로 타르코프스키나 히치콕 같은 거장의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지만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B급 본능이 올라와 하품이 나오고 딴짓을 하고 만다.

 B급 성향은 예술에 대한 취향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 깊숙이 퍼져 있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탁월하게 잘하는 것은 아니고, 책을 좋아하지만 고전은 어려워 읽지 못하고, 심지어 얼굴과 키마저도 딱히 잘생기지도 크지도 않은 그저 어중간한 B급이다. 태어날 때 이미 B급으로 운명지워진 것일까.

 그 때문인지(라고 핑계를 대며) 대학교도 B급이고 성적마저도 A+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B+만 받아도 감지덕지한 실정이다. 취업을 할 때 학점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이라면 다행이다(제가 본 회사에 최적화된 B급 인재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나의 한심함에 혀를 차거나 불쌍함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조금 잔인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한참 못난 녀석이네하고 스스로를 뿌듯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이런 B급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B급인 나의 깜냥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은 나름의 장점이 있는데, 현실은 씨끕인데 삐끕을 꿈꾸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사회학자들의 표현의 빌리자면 계급의식, ‘본인의 계급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B급을 넘어설 수 없는 걸 알기 때문에 목표를 정할 때도 B급으로 정한다. 사실 학점 A+을 못 받는 게 아니라 안 받는 것이다(사실 받고 싶어요). A+을 받기 위해 앞으로의 인생에 별로 도움 될 것 같지 않은 책의 구석에 있는 말까지 외우느라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다른 책을 보자는 것이 학점에 관한 나의 우스꽝스러운 철학이다.

 “포기하면 편해”, <슬램덩크>의 안감독님 한 말이다.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A급을 포기하면 편하다. A+ 학점을 포기하고 B+을 목표로 하면 시험기간에도 보고 싶었던 책을 볼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다. A급은 아예 포기했으니, B급으로 어떻게 하면 알차고 재미있게 B+로 지낼까 고민만 하면 된다.

 옷도 마찬가지여서 명품 옷을 사는 일을 포기하는(정확히는 포기 당하는) 순간 다양한 디자인에 가격도 싼 구제 옷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품 옷 한 개 조차 사기 힘든 십 만원으로 구제 옷을 사면 집에 들고 오기 힘들만큼 많은 옷을 살 수 있다. 이제 그 많은 옷들을 어울리게 잘 조합해서 입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 하다가 가랑이 찢어진다고 삐끕이 함부로 에이끕흉내를 내려고 하면 쓸데없고 골치 아픈 일만 생길 뿐이다. 그저 싸구려 댄스를 추고, 싸구려 인생을 살면그만이다. 그러고 보니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홍상수 역시 어떻게 보면 B급이다. 정말 촌스럽게도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고 역시 B급이 최고야라고 조용히 말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취향, 차별의 또 다른 말

 

 취향은 사전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흔히 취향이라고 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제목 <개인의 취향>처럼 취향은 개인과 항상 붙어 다닌다. 누구는 아디다스보다 나이키를 좋아하고, 누구는 트로트보다 클래식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개인의 취향이다. 좋아서 좋다는데 다른 반박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나이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아디다스를 좋아하는 사람,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과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혹자는 나이키가 더 예쁘니까…”, “클래식은 아무래도 트로트보다 고상하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쁘고 고상한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과거에는 안 예쁘고 천박하다고 외면 받던 것이 지금은 예쁘고 고상한 것으로 환영 일이 부지기수인데 말이다.      

 취향은 사회적 산물이다. 취향은 시대, 지역, 교육수준, 경제적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나이키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아디다스보다 좋은지 판단 할 수 없고 트로트와 클래식 역시 마찬가지다. 부르디외는 아름다운 것/추한 것, 탁월한 것/천박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사회적 구도 안에서 가능하며, 이 과정에서 각 주체는 객관적 분류 체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게 되고. 그 자리에서 높음/낮음의 형식으로 지배관계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홍성민, 2012: 41) 미학적 취향이 사회적 주체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고 다시 고급 취향/대중 취향으로 나누는 것이다. , 취향은 차별의 또 다른 말이다.

 하지만 그 차별은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개인적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다. 예술에 대한 취향은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전통적인 대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 가구, 패션 등도 여기에 속한다. 클래식 공연장과 유명 호텔의 식당에서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아마 출입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르메질도 제냐 양복을 입고 롤렉스 시계를 찬 사람은 햄버거 가게와 힙합 공연장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서로 간에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일상의 모습들이 사실은 매우 밀접한 취향의 논리로 이어져 있고 일상의 문화가 사람들의 쾌락과 감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의 형성 과정은 사회적 분류 체계로 작동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강화시키고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억압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홍성민, 2012: 42)   

 

문제는 교육이다

 

 부르디외는 교육이, 문화 활동이 지배관계로 이어지는데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예술적인 그림을 보았을 때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할 때는 나름의 해독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해독능력은 공부를 통해서, 예술작픔에 자주 노출되면서 길러진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안목은 바로 교육의 산물이다. (홍성민, 2012: 42)

 부모의 교육 수준과 경제적 수준이 높은 가정의 아이는 어릴 때부터 흔히 고급 취향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모의 높은 경제적 수준과 문화적 수준이 필요하고 이에 더해 습득하기 까지 오래 걸리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음악으로는 클래식, 그 중에서도 부르주아 계급은 설문지에서 좋아하는 음악으로 주로 <평균율 피아노곡집>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꼽았다. (홍성민, 2012: 73)   

 이것들은 오랫동안 피아노 수업을 받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피아노곡들이고 작곡가도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다. 집단운동, 신체적 접촉이 많은 운동 보다는 골프, 테니스, 요트, 승마, 스키, 펜싱 등을 즐긴다. 이 운동들은 혼자서 운동할 수 있는 장소와 운동용품을 구매하기 위한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페어플레이가 엄격히 요구되는데, 이것은 통제된 인간 관계의 양상(큰 소리를 내거나, 거친 동작을 할 수 없다)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스럽게 고급 취향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홍성민, 2012: 72)

 그리고 교육이 전환 전략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학력 자격을 부여하는 학교 제도는 계급 간 경계와 사회적 이동을 결정짓는 핵심이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통해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물려준다. (홍성민, 2012: 125) 돈으로만 자녀에게 물려줄 경우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고 사람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본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경제적 자본을 문화적 자본과 상징적 자본으로 전환해서 재생산을 할 경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돈을 물려 받은 것에 대한 비난과 지탄이 개인적인 노력의 성과에 대한 찬사와 칭찬으로 바뀐다.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유학을 하고 해외의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사회의 문화소비 형태가 다양할수록 이러한 전환 전략, 은폐 전략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은 권위와 명예의 재생산에 투입되는 의례(儀禮)와 전략(戰略)등을 포함하는 매우 유동적인 성질의 자본을 지칭한다. 경제적 계산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자본으로서, 가령 지명도가 높은 예술가의 작품가격, 개런티 등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 유형의 자본은 기본적으로 신뢰도의 척도가 되기도 하며, 때때로 부인되기도 용인되기도 하는 불확실한 자본유형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경제자본이 상징자본으로 전환되어 표면상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자본의 전환 및 은폐현상은 문화소비양식이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그 가능성이 높다. (Bourdieu, 1997: 33)

 

예체능 교육의 필요성

 

해결책은 있을까. 물론 경제적 자본이 문화적〮상징적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은 막을 수 없고 민중계급이 고급 취향을 익힌다고 해도 그들의 계급적 위치가 변할 가능성은 요원하고 심지어 학력 인플레이션처럼 자신은 어느 정도 높은 학력 수준을 갖고 있다는 착각의 함정에 빠져 자신의 기대치가 억압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 허위의식에 빠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공교육에서 예체능 교육의 비율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는 가정교육에서 고급 취향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취향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클래식과 미술작품은 내가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하고 체념하는 것보다는 학교에서 어느 정도 배운 후 나는 클래식 보다 락이 좋고, 순수미술보다 팝아트가 좋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을까.

 현재 한국의 모든 교육의 목표는 수능에 수렴되고 있다.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까지 예체능 교육은 수능에 반영이 안되기 때문에 예체능 교육이 최소화 되기를 원한다. 아예 없어져 버린다면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수능 점수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현실에 처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사고다. 수능은 상대평가다. 따라서 다 같이 체육수업을 많이 하고 음악수업을 많이 하면 자신의 점수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 가정교육에서 쌓을 수 없는 문화적 소양을 기를 수 있다.

 

랑시에르와 보편적 가르침

 

 부르디외는 학교를 통해 상속이 이루어지고 재생산이 된다고 했다. 따라서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면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문제는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학교의 신화, 즉 학교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을 뒤집는다. 학교는 중립적 기구며 성공과 실패는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과 재능에 달린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출신계급의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준다고 믿기 때문에 학교는 지배의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노동자의 자식들이 결코 학교에 진학할 수 없도록 만드는 동어반복적인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형일, 2012: 233) 부르디외의 논리를 따르면 노동자의 자식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문화적 자본이 없기 때문에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학교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문화적 자본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의 자식은 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계급적 취향의 차이가 사회적 신분을 구분한다고 분석해냈다. , 문화적 취향의 차이가 신분적 위계질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 대한 분석과 동일한 논리가 『구별짓기』에서도 반복된다.

 

 부르디외는 미적 판단과 취향이 계급이 가진 자본들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것들이 지배계급은 지배자의 자리에, 피지배계급은 피지배자의 자리에 머물도록 하는 상징적 폭력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 그리고 각 계급은 이 미적 판단과 취향을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계급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민중계급은 순수한 미학을 자신의 미학으로 갖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순수 미학을 자신의 미학으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 예술작품을 즐기면서 문화적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 결국 민중계급은 문화와 예술의 장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주형일, 2012: 234)

 

 지배의 구조를 밝혀서 그 논리를 깨뜨리고자 하는 이론이 반대로 지배의 구조를 탄탄히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할당한 자리에서 계속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다른 계급의 언어와 시간과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사회가 그들에게 정해 놓은 계급, 정체성, 문화, 취향, 지식의 경계들을 무너뜨리려 했다. 즉 랑시에르가 보기에 노동 해방은 우선 미적 해방이었다. 그것은 조건에 의해 강요된감각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주형일, 2012, 235)

 

 다시 말해 말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그들이 말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불가능(한 것)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말하는 노동자 시인들의 경우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구술과 산문 밖에 모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글을 쓴다. 그들은 운문으로 글을 쓴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통속적인’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의 시를 쓴다. 내가 보기에 이런 개인적인 실천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임금은 개별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교섭하는 일이 아니라 공적 토론과 시위에 속하는 집단적인 일이라고 결정하게 하는 집단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것들의 질서에 대한 단절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실천은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채 생산할 능력이 있다고 노동자들 스스로 선언하게 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단절과 일맥상통한다. 불가능한 것은 사실상 이중의 지위를 가진다. 한편으로 불가능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한 것의 영역을 선험적으로 한정하는 데 사용된다. 다시 말해 평민이 말하거나 노동자가 주인 없이 생산하는 것은 지배적인 논리로 가능하지 않다. 다른 한편 불가능한 것의 의미는 가능한 것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이택광, 2013: 120)

 

 랑시에르는 문제는 분할 즉, 모든 것에 대해 각자의 자리를 정하고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분할을 부수고 넘어서는 것이 곧 해방이다. 그는 자코토의 교육 원리에서 그 근거를 발견했다. 자코토는 보편적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것의 핵심은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졌으며 그 능력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공부하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다. 그리고 랑시에르는 아무 평민이나 스스로를 인간이라 느끼고,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이 지능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해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구나 똑같이 시인의 글을 쓸 수 있고,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순수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명도 멸시와 차별을 받지 않고 쉽고 편하게 이러한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학교 교육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랑시에르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이란 보이는 것의 질서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인데, 혁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역량들을 표명함으로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들을 지워버린다.” (이택광, 2013: 102) , 제대로 된 교육과 공부는 지배/피지배를 나누는 경계와 그것을 지속시키는 구별짓기를 뛰어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참고문헌

 

Bourdieu,, Pierre,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정일준 역, 서울, 새물결

주형일,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이택광,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 서울, 자음과 모음

홍성민, 취향의 정치학, 서울, 현암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발터 벤야민은 외관상으로는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일정한 방식이 없는 듯 보이는 미세한 문화적인 변동 속에서도 어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징후들을 독특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탐지해낸 철학자였다. 그는 종종 이야기 유형을 뱃사람 이야기와 농사꾼 이야기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우선 뱃사람 유형의 이야기는 결코 아무도 방문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분명 그 누구도 찾아가려 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먼 곳에 대한 이야기이자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괴물과 돌연변이, 마녀와 마법사, 늠름한 기사와 반대로 교활하고 못된 짓을 하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 속에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영웅담을 경청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서로 삐걱대면서 충돌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 특히 마법에 홀린 듯 뱃사람의 이야기에 매혹당한 채 경청하는 그런 사람들은 결코 해보려고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감히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반면에 농사꾼 유형의 이야기는 마치 언제나 되풀이되는 일 년 동안의 계절 순환처럼 또는 집과 농장, 들판에서 매일 벌어지는 지루한 일상들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하고 얼핏 보기에도 친숙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방금 나는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인상 때문에, 그 친숙한 일들에 관해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 또한 하나의 착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은 바로 그 친숙한 것들이 너무 가까이 존재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나 거기 있어서’, ‘결코 변하지않을 듯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만큼 아주 재빠르고 단호하면서도 면밀한 음미의 눈길을 피해가는 것도 없다. 친숙한 것들은 바로 빛 속에 숨어있는데, 결국 그 빛은 친숙함 속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오해하게끔 하는 빛이다! 그러한 친숙한 사물들의 평범성은 모든 음미의 눈길을 방해하는 장막인 셈이다. 그처럼 친숙한 사물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면밀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적으로 무디고 아늑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타락한 판에 박힌 듯 순환하는 일상으로부터 그 사물들을 뜯어내서 분리시켜야 한다. 우선 그 사물들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도록 스캐닝하기 전까진 반드시 무시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그 사물들이 지닌 소위 일상성이라는 의심스러운 장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친숙한 사물들이 숨기고 있는 풍부하고도 심원한 미스터리를 탐구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다. 사실 당신이 그 친숙한 사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곧 그 사물들은 아주 기묘하고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돌변할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p19

 

그래, 역시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아니 역시 발터 벤야민이다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책을 보던 중 이 얘기를 발견하는 순간, '이건 나를 위한 얘기다', '내가 항상 기억해야 할 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는 글은 어떤 글일까?(: 재미도 없고 간지도 없는 그저 그런 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걸까?(: 나만의 시각과 문학적 후까시를 동시에 갖춘 글)' 따위의 질문을 어렴풋이 해왔었다. 질문이 어렴풋한 탓에 답도 어렴풋했다. 그러던 차에 벤야민이 했고 바우만이 멋지게 주석을 달아준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다

 벤야민은 이야기의 유형을 뱃사람의 이야기와 농사꾼의 이야기로 구분했다. 일단 뱃사람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을 발견하고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모험담은 누구라도 매료시킬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하루면 세계의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지금, 뱃사람의 이야기는 과거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힘들다

 농사꾼의 이야기는 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겉으로만 봤을 때 뱃사공 이야기의 매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누구나 겪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이 부분에서'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일들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숙한 일들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착각을 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봄에는 씨 뿌리기, 여름에는 풀 뽑기, 가을에는 수확하기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자체가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비슷한 아침을 먹은 후 똑같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똑같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생활에서 어떤 발견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바우만은 바로 그 익숙함과 친숙함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며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음미해 볼 기회를 뺐어 간다고 말한다. 때문에 평범한 사물을 음미하고 관찰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판에 박힌 일상에서 그것을 떼어내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친숙한 사물들 속에 숨겨졌던 풍부하고 신비로운 미스터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판에 박힌 일상으로부터 떼어내서 친숙한 것을 다시 보라는 바우만의 말은 ‘거리 두기’, ‘낯설게 보기’와 궤를 함께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에서 이야기의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단순히 몸을 씻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면대와 욕조를 우울한 나의 ‘텐션(tension)’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고(<인스턴트 늪>),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어중간한 맛의 라면을 만드는 것에 모자라  어느 커피 전문점보다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서비스로 주는 라면가게(<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제목부터 ‘거리 두기’의 표본이다), 무술로만 생각했던 쿵푸로 축구를 하는 것(<소림축구>), 이 모두는 너무 가까이 있어 뻔해 보이는 것을 ‘낯설게 보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 또한 ‘거리 두기’를 통해서 내가 목표로 하는 ‘나만의 시각과 문학적 후까시를 동시에 갖춘 글’을 쓸 수 있을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기대하시라. 언젠가 블로그 혹은 다른 매체에서 내 글을 보고 ‘이 새끼 봐라. 골 때리는 놈이네’하며 킬킬거릴지도 모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두운 방 안에서 내다본 밝은 세상
김화영 지음 / 현대문학북스 / 1996년 2월
평점 :
절판


 가끔 서점이나 헌책방을 구경하고 있다 보면, 책장 귀퉁이에 영화일기’, ‘독서일기따위의 제목으로 꽂혀 있는 책들이 왕왕 눈에 띈다. 이런 책을 내는 것이 지식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글 깨나 쓴다는 사람이라면 모두 한 두 권쯤은 출판된 책이 있는 듯 하다. 물론 이렇게 보이는 것도 아등바등해야 간신히 중산층에 들까 말까한 나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기껏해야, 그것도 아주 낮은 수준의 책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소양에서 나온 것이지만 말이다.

 내에게 보이는 것은 영화일기’, ‘독서일기같은 책들뿐이지만, 실제로는 클래식일기’, ‘오페라일기같은 책이 나는 미처 보지 못한 곳에 수십, 수백 권 쌓여있을 지도 모를일이다. 그리고 영화일기’. ‘독서일기같은 책을 쓴 사람들 역시 그들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책 읽기와 영화 보기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책을 쓸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단돈 만원이면 새 책을 살 수 있고 그것마저 없다면 헌책방을 가면 된다. 혹 헌책을 살 여력마저 안 된다면 모든 책을 공짜로 빌릴 수 있는 도서관을 이용하면 된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로 만원이면 한 편을 볼 수 있고, 올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사탕 하나 가격에도 못 미치는 140원으로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을 수 있다.

 김화영 씨가 쓴 책의 제목 <어두운 방안에서 내다본 밝은 세상>은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어두운 방안에서’ (물론 그 분은 이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140원을 내고 영화를 다운 받아 보며 수 많은 감독과 배우와 스텝들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역작이 그려내는 밝은 세상내다본다는 것이다.

 반면에 고급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오페라나 클래식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두운 방안에 있을 필요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앞에 아트 혹은 예술이 꼭 들어가는 휘황찬란한 극장에서 에서 오페라와 클래식 연주를 감상한다. 어릴 때부터 늘 보고 듣고 자라왔고 십 만원을 호가하는 입장권 가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로 밝은 세상, 나에게 오페라를 듣고 갤러리에서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은 전혀 딴 세상의 이야기다. 어릴 때 들은 것이라고는 TV의 가요프로에 출연하는 가수들뿐이었고 지금은 기타를 뚱기고 드럼을 두들기는 밴드들의 노래들뿐이다. 미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린 시절 집에서 클래식을 들어본 적도 없고 오페라는커녕 미술관을 가본 기억이 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 역시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새 따라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과 엄청난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나마 어두운 방안에서 영화나 보고 서점과 헌책방을 기웃거리며 책만 뒤적일 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지게 된 것을. 클래식이니 오페라니 하는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없으니 책과 영화라도 열심히 볼 뿐이다. 그것이 나름의 문화자본을 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비록 누군가 오페라의 유령이나 카라얀 같이 어디선가 한 두 번 주워 들어봤을 뿐인 것들을 물으면, 깨갱하고 주눅들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