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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랑권 전성시대 ㅣ 창비시선 261
윤성학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평점 :
양정규 잠적 해프닝을 돌아보며
얼마 전 친구들
사이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오전 강의 때 친구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강의에 빠지지 않기로 유명한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에게 전화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평소에 자살을 운운했던 터라 친구들은 점점 불안해졌다. 전화는 계속 이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30번은 했을 것이다.
정말 다행히도 오후
세시 무렵 그는 전화를 받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그가 무사한 것은 다행이지만, 이 웃지 못할 소동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건은 그 친구가 오랜 시간 동안 전화를 안 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것에 대한 추측이 계속 확대되었고 실종 혹은 죽음을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실종의 걱정으로 이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 친구가 평소 자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와 비슷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걱정한 일 말이다.
노명우 교수는 『텔레비전 , 또 하나의 가족』에서 미디어를 ‘도구-미디어’와 ‘환경-미디어’로 분류했다. ‘도구-미디어’는 말 그대로 단순히 도구로만 쓰이며 일정한 문화적 형식을
만들지 못한 미디어를 가리킨다. 이와 달리 환경-미디어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형식을 창출하는 미디어를 의미한다.
도구-미디어는 개별 인간이 개인적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만, 환경-미디어는
마치 공기처럼 개별 인간이 선택할 수 없다. 만약 공기라는 환경을 인간이 거부하면 생명체로 살아갈 수
없듯, 환경-미디어화된 도구-미디어는 개인이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되도록 만드는 힘을 지녔다.
노명우,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48쪽
핸드폰과 최근 등장한
스마트폰은 환경-미디어에 가장 적절한 예다. 스마트폰에 의해
바뀐 우리의 모습은 무수히 많겠지만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부분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일 것이다. 스마트폰
속 대화가 때로는 만남을 대신하며 만날 때도 스마트폰을 통해서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인간관계가 스마트폰으로
시작해서 스마트폰으로 끝나는 것이다. 쉴새 없이 울리는 메시지 알람 때문에 스마트폰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해도 쉽사리 스마트폰을 거부할 수 없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없이 하루만 살아봐도 이러한 사실을 체감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곧 나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존재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스마트폰을 끌 수 없다. "외양이 본질보다 더 무겁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이라고 부른다"(주창윤, 『옷걸이에 걸린 양』, '옷걸이에 걸린 양')는 시 한 구절은 더 없이 옳다.
스마트폰이라는 외양에
밀려 나의 본질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스마트폰에 찍혀 있는 전화번호와 카카오톡 아이디가 나를
증명하고, 프로필 사진과 문구가 지금 나의 감정을 보여준다. 이번 소동처럼 그것들에 응답하지 않으면 나는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인지, 내가 싫어하는 계절은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구두를 위한 삼단논법
갈빗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신발 담당과 시비가 붙었다
내 신발을 못 찾길래 내가 내 신발을 찾았고
내가 내 신발을 신으려는데
그가 내 신발이 내 신발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보다
누군가 내가 나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더 참에 가까운 명제였다니
그러므로 나는 말하지 못한다
이 구두의 주름이 왜 나인지
말하지 못한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꽃잎 속에 고인 햇빛을 손에 옮겨담을 때,
강으로 지는 해를 너무 빨리 지나치는 게 두려워
공연히 브레이크 위에 발을 얹을 때,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서며 그의 문지방을 넘어설 때,
손 닿지 않는 곳에 놓인 것을 잡고 싶어
자꾸만 발끝으로 서던 때,
한걸음 한걸음 나를 떠밀고 가야 했을 때
그때마다 구두에 잡힌 이 주름이
나인지
아닌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윤성학, 『당랑권 전성시대』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나임을 나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친구에게는
어떻게 연락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며칠 전 소동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은 내가 실종됐는지
걱정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