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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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를 읽은 후 서점에서 산 세 권의 책 중 첫 번째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몇 권 소개했는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함께 사랑을 해부해 보여주는 시리즈라고 한다. 한 권은 남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내가 읽은 <우리는 사랑일까>는 여자의 입장을 보여준다.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같은 커플의 스토리를 화자를 달리해서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 두 책은 서로 다른 커플에서 남, 여의 입장을 보여준다.

 

 

“연애의 시나리오에서 필요한 장치는 모두 갖추어졌다.” (79p)

“다른 사람이 가치를 알아주고 탐낸다는 점이 그녀의 욕망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93p)

 

앨리스는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사랑은 평범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드라마 같은 그럴듯한 계기로 시작하여 모두가 탐낼만한 남자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롤빵을 잘 굽는 빵집 점원의 용기는 이 조건을 갖추지 못 한 듯하다.

 

 

 “신성한 거리감” (186p)

“읽기 힘든 책일수록 더 진리에 가깝다” (190p)

 

앨리스는 헌신적으로 에릭을 사랑했다. 에릭은 앨리스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주었는데, 사랑의 구덩이에 깊이 빠져버린 앨리스에게는 무심한 에릭의 모습에서도 눈 부신 빛이 보인다.

 

 

“사랑의 영속성 시나리오는 현수교에 비유할 수도 있다. 다릿기둥은 사랑의 확인을 상징하고, 냉담한 기간은 기둥 사이에 몇 미터씩 늘어진 케이블이다.” (162p)

“왜 실제 여행 경험은 그토록 기대와 다른지…….” (283p)

 

앨리스와 에릭의 사랑은 균형이 맞지 않았다. 앨리스는 에릭과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에릭이 가지고 있는 현수교의 도면은 앨리스의 것과 크게 달랐다. 에릭은 꿈 같은 여행지마냥 앨리스의 상상 속에서 한껏 부풀려 있었다. 앨리스는 그런 상상에 사로잡혀 에릭을 혹은 그 허상을 사랑했다. 하지만 이내 그 허상은 현실 속에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312p)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어할 수 있는 것까지 타인이 결정한다는 증거다.” (317p)

 

에릭과 앨리스의 심리적인 소통은 차갑게 얼어갔다. 앨리스는 진지하게 대화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에릭은 받아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 앨리스는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자신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게 자연스레 이끌어주는 필립을 알게 된다. 필립은 첫 만남부터 앨리스를 폭넓게 이해했고, 앨리스는 에릭의 사려가 닿지 않는 지역까지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한동안 합치되었던 것은, 넓고 갈림길이 많은 길에서 일어난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378p)

“에릭은 그를 둘러싼 희망 사항들이 투사하는 신기루였다.” (384p)

 

앨리스가 상상하던 여행지는 에릭에게 덧씌울 수 없었다. 잠시간 앨리스가 원하던 방향에 있는 장소를 골라 떠났지만, 실제 여행지는 그 장소에 없었다. 앨리스는 실망했지만 이내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한다.

 

 

“그 남자는 무방비적으로 사랑하는 그녀의 방식이 두려웠다.” (194p)

 

에릭의 입장은 어땠을까. 앨리스의 사랑이 부담스러워서 밀어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에릭은 앨리스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어렵거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사랑에 부담을 느끼면 보답하기보다는 밀어낼 수밖에 없으니까.

 

 

앨리스는 종교인이 신을 사랑하듯 헌신적인 사랑을 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돈, 직업, 매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그런 것을 모두 제외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또한 서로 부단히 소통하여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오래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나 역시 서로의 소통에 문제가 없는 사랑을 원한다. 나에게 헌신적인, 혹은 내가 상대에게 헌신적인 것의 정도는 바라는 점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실제로 어떻게 그 사람을 대하게 될지 가늠이 안 간다. 나에게는 앨리스가 한 것처럼 상대방의 사랑을,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려 노력하는 모습도 있다. 반면 에릭처럼 퉁명스런 태도로 앨리스만큼 노력하지는 않으려는 모습 역시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방과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해야겠다.


그리고, 앨리스에게 필립처럼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같이 있으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운 사람. 나도 상대방도 서로를 이렇게 여기는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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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펭귄클래식 19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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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르다.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면 서운해 하실테니 늦은 저녁을 먹었더니 소화가 잘 안된다. 졸리지만, 잘 수가 없으니 전에 읽었던 책 중 하나를 골라 간단하게 글을 써보려한다.


이 책은 '로쟈'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현우 씨의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보고 알게 되었다. 먼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읽게 된 경위 부터 봐야겠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다음 봄학기에 들을 수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동기들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수업을 듣는 것처럼 제 2외국어를 하나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 하나씩 짚어가다가 선택한 것이 러시아어였다. 처음보는 키릴문자가 신기해보였고 이상하게 그냥 끌렸었다. 그리고 직접 배워보니 문법이 너무 어렵긴 했지만 필기체 쓰는 맛은 만족스러웠다. 


러시아어 공부하는 동안 관련 네이버 카페에 가입했는데, 거기서 이벤트를 하나 했다. 새로운 책이 하나 출간되는데, 책을 증정 받는 대신 서평을 쓰는 것이었다. 응모하여 책을 받았고 그게 로쟈님의 책이다.


이 책에서 투르게네프를 사실주의 작가로 소개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에 매력을 느껴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런 이유로 선택한 책이 <첫사랑>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 등이 시대를 보여주는 작품인 반면, <첫사랑>은 대표적인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2014년 여름 당시 나에게는 이 책이 꽤 맘에 들었었다. 주에 3~4일 씩은 지방에 내려가서 조사를 하던 때였는데, 이 책이 작고 얇아서 가방에 넣어도 부담이 안 됐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같은 이유로 이 책을 골라 늦은 리뷰를 하고 있다.


이 책은 아저씨들이 서로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투르게네프 본인을 그린 듯한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본인은 말솜씨가 없으니 노트에 적어서 읽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트에 적힌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찌 보면 많이 봐온 전개 일 수도 있지만, 미묘한 이유로 아주 적합한 방식이라 생각한다. 먼저 블라디미르가 투르게네프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기에 말솜씨가 없어 글로 보여준다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말주변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 노트에 적힌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문장을 읽으면서 마치 그 노트 속으로 휘리릭 빨려들어가서 어릴적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미지를 상상 할 수 있었다. 꽤 마음에 드는 도입부였다.


내용 자체는 블라디미르의 어릴 적 첫사랑 이야기. 로쟈님은 이 작품을 가지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니, 그래서 아직 블라디미르가 독신인 것이니... 설명을 하셨다. 나는 그런 건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지나이다가 아주 남자를 잘 다루는 여자라는 것. 자신과 가까워 질 수 있는 상과 복종을 요하는 벌을 잘 활용하여 남자들의 애를 태운다. 벌칙 혹은 지나이다 손에 키스를 할 기회가 주어지는 제비뽑기를 하는 벌칙게임이 그 예가 되겠다.


그리고 심리묘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지나이다의 얼굴은 어둠속에서 내 앞에 조용히 떠다녔다. 떠다니고 또 떠다녔다." (p. 66)


"그저 낮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기에 바빴다 ...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그러나 나는 지나이다를 피할 수는 없었다 ..." (p. 133)


블라디미르가 자신이 지나이다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자각한 밤에 잠을 못 이루는 상황. 그리고 후에 지나이다가 사랑에 빠졌음을 직감한 후 지나이다와 함께 있는 다른 남자들을 유심히 살피는 모습, 그리고 그 연적의 정체를 알았을 때의 충격. 이런 순간에서 어린 블라디미르의 심리 상태를 아주 공감되게 묘사했다. 읽는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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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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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한 건,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써 놓은 글을 찾고 있을 때였다. 당시 발견한 책 중 무엇을 읽을지 고민했던 두 권의 책이 있었다 (둘 다 읽기는 싫었나 보다). 하나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박웅현 씨의 <책은 도끼다> 이다.


두 책에 대한 정보는 간략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많이 읽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박웅현 씨는 권 수를 따지지 않고 한 문장 한 문장 깊게 읽고 감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때 나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선택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철저히 읽는다는 것과 '도끼', 그리고 책 표지의 이미지가 어우러져서 매우 딱딱하고 골치 아픈, 처절한 독서가 될 것 같다는 기분 때문이었다.


그렇게 읽게 된 다치바나의 책에서는 아쉽게도 독서법에 대해 특별히 와 닿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직접 디자인한 고양이 형상의 건물이 신기했을 뿐이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눠 최대한 많은 책을 넣을 뿐만 아니라 분야별로, 용도별 구분까지 고려하여 동선을 줄이고 빠르게 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을 뿐이다.


그러고 몇 년 후에 다시 이 책을 접했다. 네이버 포스트의 어떤 글에서 봤는데, 책 내용을 직접 인용해 놓았었다. 문장을 읽고서 기존의 "딱딱한" 이미지가 단숨에 없어졌다. 마침 읽을 책이 필요하던 터라 머지않아 서점에 갔다. 책 목차를 보니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중 하나기 때문에 어떻게 소개할 지가 매우 궁금하여 더욱 읽고 싶어졌다. 게다가 운 좋게도 100쇄 기념 양장판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양장판이라 그런지 책을 펴면 흰 종이가 더욱 쫙 펴져서 잘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종이도 가벼운 종류가 아니어서 붕 뜨는 것이 없었다. 쫙쫙 잘 펴지니 읽는 데 집중이 잘 됐다.


탐정 만화에서 주인공이 무언가 깨달았을 때 한 줄기 섬광이 관자놀이를 스쳐 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 관자놀이가 여러 번 공격 당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무엇이었는지 정리가 되지 않아서 나답지 않게 책을 두 번 더 훑어봤다. 조금이나마 더 정리한 결과로 두 가지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1. 책을 읽는 방법과 2. 들여다보기의 중요성이다.


이 책은 박웅현 씨가 '책 들여다보기'라는 주제로 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부수적 목표로 자신이 소개한 책을 수강생과 독자들이 구매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천명하고 나니 '직업병이다', '광고인이라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중요하게 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심술이 나서 '난 넘어가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결과적으로 책 소개를 너무 잘해놓아서 지금은 '내가 이 책을 사도 이 사람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는 없을 거야'라며 읽고 싶은 책 리스트를 줄여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박웅현 씨의 책 소개는 한 모금의 농축액 같은 느낌을 준다. 매우 진한. 책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책을 몇 번이고 읽는데 그때마다 감동한 구절에 밑줄을 긋는다고 한다. 다 읽고 나서는 밑줄 그은 부분을 메모, 노트, 컴퓨터 등에 기록하면서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감동하였는지 정리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 거치면서 밑줄 그은 부분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뽑아낼 수 있게 되는 듯하다. 책을 소개할 때는 역으로 이 메시지와 함께 그와 관련된 책의 구절을 다양하게 인용하고 설명을 덧붙여준다. 책 소개가 꽉꽉 차 있어 보이고 다 읽지 않았음에도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든다. 타인이 처음 접하는 것을 이렇게 와 닿게 설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박웅현 씨는 몇 권이나 책 광고에 성공했다. 오히려 소개를 잘했기 때문에 어떤 책은 박웅현 씨가 소개한 부분 외에는 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이렇게 책 소개하는 것을 보면 자연히 자아 성찰이 시작된다. 나는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여긴 책을 이렇게 남이 읽고 싶어질 만큼 소개해줄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을 독서라고 칭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제목으로 지은 카프카의 말, “책은 도끼’여야 한다’"를 “도끼’다’"라고 바꿔 제목을 붙인 이유가 있었다. 모든 책은 실제로 도끼였다. 내가 장님이었을 뿐.


내가 봐 왔던 다른 독서법 관련 서적들이 하는 말을 고스란히, 그 이상으로 행한 결과가 바로 박웅현 씨의 독서이다. 행하며 읽고 정리하고. 기억에서 지워질 수가 없는 혹은 남는 게 없을 수 없는 독서다. 독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과연 이렇게 독서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내 촉수는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꽃이나 건물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지 못 할지도 모르고, 남이 포착하여 감탄해 놓은 것도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 또한, 박웅현 씨가 다른 책, 철학자, 미술 평론가 등의 말을 인용해서 해석하는 것도 내 배경지식으로는 무리다. 여기 소개한 책도 막상 읽으면 박웅현 씨가 한껏 부풀려놓은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예로, 몇 년 전에 김훈의 책 <칼의 노래>를 읽으며 한 글자 한 글자 고뇌하여 문장을 구성한 것이 보여 감탄하기는 했지만, 담백한 맛은 부족해서 내 취향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김훈의 관찰력과 이를 가감 없이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문장력을 예찬하니 나 역시 동요하였다. 그래서 <자전거 여행>을 읽고 싶어졌지만, 막상 서점에서 훑어보면 다시 책장에 놓아두게 된다. 다만, 나 나름대로 생각하고 음미하려 노력하며 천천히 읽어나갈 따름이겠다 (반복해서 읽을지는 역시 모르겠다만).


또한, 나는 책에 밑줄 긋고 귀퉁이를 접는 등 적극적으로 표시하며 읽어오지 않았다. 수업을 들을 때는 따로 노트에 적는 것보다 교재에 필기하고 나중에 본문과 함께 읽으며 공부했기 때문에 박웅현 씨의 독서 방식과 비슷하게 해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교재가 아닌 책은 깨끗하게 보는 것을 좋아해 왔다.


그래도 반전의 여지는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읽었던 책을 몇 권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밑줄 긋는 것은 다음번 혹시 그 책을 다시 보게 되면 더 재미있고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독서 방법은 독서뿐만 아니라 다른 텍스트에도 똑같이 실천할 수 있다. 내가 공부해온 방법이 그 첫 번째 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책에, 노트에 끄적이고 다양한 색깔로 표시하며 공부를 한다. 하지만 독서를 그렇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랫동안 해왔고, 충분히 할 줄 앎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지 대답을 찾아온 것이 참 웃기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논문도 마찬가지다. 논문을 읽고 감수성에 파묻히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대신 이성과 호기심에 파묻히면 된다. 그리고 밑줄 긋고 정리하고. 하지만 실천이 쉬웠다면 <책은 도끼다>가 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겠지. 내 학점도 이렇지 않았겠지. 말이 쉬울 뿐이다.


박웅현 씨가 책을 들여다볼 때 사용한 방법을 ‘읽는 것’이 아닌 다른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먼저 가장 쉬운 예로 내 눈에 보이는 물건, 사람, 풍경을 볼 때 '견문'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사실 이런 태도를 가진다고 해서 어느 것이고 볼 때마다 감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심히 바라볼 때보다야 훨씬 풍요로울 수 있다. 책에 나온 헬렌켈러의 예가 참 적절했다. 눈과 귀가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서 충분히 음미해주지 않으면 단순한 전기 신호가 작동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헬렌켈러에게는 숲의 녹음, 새 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 모두가 감상의 대상이 되었다. 이보다 풍요로울 수가 있을까.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무심하게 여기는 대상을 매일 보는 풍경에서 매일 보는 사람으로 바꿔보자. 책을 읽으며 내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 친해지고 매일 서로의 그 자리에서 교류가 반복되면 조금씩 그 사람에게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이런 경향이 있다). 내 사람에게 떠난 관심이 새로운 사람에게 향할 때면 새로운 사람을 신경 쓰느라 내 사람이 서운해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하기가 쉬워진다. 내가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다시 내 주변 사람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내 사람이 서운치 않고 새로운 사람도 챙길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들여다보기는 사랑에서 비롯하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 사랑하면, 어떻게든 그 사람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 눈에 보이면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왜 그랬을지 유심히 본다. 내 눈에 없을 때도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 일정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기도 하고 전에 있던 일이나 했던 행동, 말을 속에다 떠올려 놓고 들여다보기도 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소개에서 토마스의 사랑을 연민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연민은 타인의 불행, 고통, 행복 등 모든 감정을 함께 느끼고 공감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최상의 감정이라고 했다. 상대에 대한 연민 역시 들여다보기의 한 모습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행동이 꼭 사랑을 이루어주는 것은 아니다. 운 좋게도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다른 기적이 힘을 합해야 겨우 이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으로 사랑의 감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가닥을 이룰 수 있다.


들여다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박웅현 씨 같은 사람에게는 일상에서 받은 감동이 하나의 소재가 되어 광고에 쓰일 수 있다. 과학을 하는 사람 같은 경우는, 위에 언급한 논문을 정리하는 습관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다. 아는 분야의 논문을 읽더라도 보통 한 번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고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여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충분히 읽고 정리한 논문이 그 분야에서 여러 편 된다면, 어떻게 연구가 진행됐고 어떤 점을 보완할 수 있을지 보일 것 같다 (그렇다고 한다). 이는 연구실의 한 형이 말해준 것과 같은 맥락이다 (표절인가). 대표적인 논문 한 가지를 완전하게 파악하려 노력하기. 그러려면 그 논문을 여러 번 읽어야 하고, 그와 관련된 참고문헌도 찾아봐야 한다. 역시 그 참고문헌도 여러 번 읽고, 그와 관련된 참고문헌도 찾아보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그 분야 연구가 어떻게 진행됐고 어떤 점에서 보완이 필요할 지 보이게 된다고 하셨다. 다만, 그 과정에서 천천히 들여다보고 정리하고 되새기는 과정이 있다면 형이 말씀하신 전체 과정이 탄탄하게 진행될 수 있겠다 (표절 아니다).


박웅현 씨의 <책은 도끼다>는 책의 도끼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남들에게 소개해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부제를 달아 줘야 할 판이다. <책은 도끼다: 도끼 사용법>. 읽으면서 나 자신도 실천을 하게 됐다. 원래처럼 충분히 무슨 말인지 되새기지 않은 채 글을 읽다가도 스스로 알아차리고 속도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사용된 방법이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만큼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래도, 욕심내지 않고 꾸준히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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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이터널 선샤인 : 일반판
미셸 공드리 감독, 짐 캐리 외 출연 / 노바미디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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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다. 기억을 조작하는 것에 관한 영화라 그런지, 보고 난 후에는 머릿속이 뒤엉켜버린 기분이 든다.


사랑하다 보면 좋은 것 나쁜 것 할 거 없이 다양한 추억이 꾹꾹 쌓이게 된다. 행복한 기억이 많이 쌓이는 시점에는 점점 더 자주 추억을 쌓고 싶게 되고, 그렇게 자주 만나다 보면 다시 또 좋지 않은 기억이 섞여버린다.

그 종반부가 안 좋은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면, 이러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행복한 기억이 같이 섞여 있기 때문에 더욱 견디기 힘들다. 그 모든 기억을 통째로 지워버리고 싶어질 만큼. 기억을 외면하는 것으로 그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 해방되고 싶은 마음. 충분히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외면하는 태도는 정답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랑과 그 추억을 대하기를 원한다. 괴로움도 행복한 기억이 섞여있기 때문에 생긴다. 소중한 괴로움인 것이다. 사랑에 관한 고통스런 추억을 지울 때는 반드시 행복한 기억을 함께 지우게 된다. 홧김에 한 말실수로 다퉜던 일과 같은 기억을 통해 추억 그대로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되돌아볼 수 있다. 행복한 추억은 버리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 돼버린다. 결국, 행복한 것, 안 좋은 것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다.

또한, 외면하는 것으로는 마음마저 속일 수 없다. 조엘도 클레멘타인도 마리도 기억을 지웠지만, 마음의 성향까지는 지우지 못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준비한 선물과 말투를 가지고 접근한 패트릭과의 연애에서 자신이 지워버린 조엘과의 추억을 다시 만들어간다. 마리 역시 기억을 지운 후에도 같은 직장에 다니며 그 선생님을 다시 사모하게 된다. 결국, 모두가 기억을 지우려 마음먹기 전의 그 괴로움을 어쩌면 더 커져버린 것으로 또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상처가 곪으면 더 아파질 뿐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해주는 달콤한, 듣기 좋은 말과 그 속마음은 다를 수 있다. 당연하다. 어떻게 항상 좋기만 하고 칭찬만 할 수 있을까. 서로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므로 내 앞가림하느라 상대방을 챙겨주지 못할 때도 있고 사랑이 좀 식을 수도 있고 싫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래도 뭐 어때. 괜찮다. 


Change your heart

Look around you

Change your heart

It will astound you

I need your lovin'

Like the sunshine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


마음을 크게 가지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사랑은 충분히 가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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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알고리즘 - 머신러닝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는가
페드로 도밍고스 지음, 강형진 옮김, 최승진 감수 / 비즈니스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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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신러닝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가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지와는 별개로, 그저 개괄만이라도 알아두면 좋겠다 싶었다. 유명한 무료 인터넷 강의도 있고, 누군가 그리 길지 않은 글로 정리한 것도 있겠지만 나는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읽을 책도 정할 필요가 있으니.


머신러닝을 소개하는 책은 수학 기본서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많았다. 배경 이론을 설명한 후 박스 하나가 나오는데 그 안에는 Theorem 1. 블라블라~~ 다음 문단에 추가설명... 이 책도 결국은 이론을 쭉 설명해주는 책에 불과하지만 특별한 점은 이야기를 풀어놓듯이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찬사가 많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해가 잘 안 된다는 의견도 많아서 볼까 말까 고민을 좀 했다. 하지만 머신러닝 자체가 원래 배경지식이 많이 필요한 난해한 분야이기 때문에 구입하면서는 이것 한 권 읽는다고 이해는 되지 않겠지만 첫걸음을 떼보자는 생각을 하였다.


이 생각은 무섭도록 잘 맞아떨어졌다. 분명히 설명을 구절구절 보면 전문용어가 마구 나오는 것도 아니다. 또한 친숙한 언어로 비유를 들어 이해하기 쉽게... 쉬울 것 같이 쓰여 있다. 그런데도 읽다 보면 당최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새 작가는 '이제 설명은 됐다. 한 번 활용 예시를 살펴봅시다.' 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무념 무상한 상태였다. 다섯 개의 종족이 각각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략 살펴본 정도. 유전알고리즘, 퍼센트론 등 머신러닝과 관련된 용어를 들어보게 된 것. 이 정도다. 딱 내가 목적한 정도이다. 기뻐해야 할까. 


이 책은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어느 정도 공부 한 사람이 이해를 탄탄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기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저자가 쉬운 말로 풀어 놓은 비유가 빛을 볼 것 같았다. 이런 이유로 쉽게 설명했다는 찬사와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동시에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머신러닝이라는 분야가 많은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책 한 권으로 이렇게까지 설명한 것은 분명히 잘 썼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난 이해 못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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