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세계사 - 문명의 탄생부터 국제 정세까지 거침없이 내달린다
김도형(별별역사) 지음, 김봉중 감수 / 빅피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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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역사는 빛바랜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라는 데에 동의하시나요? 예전에는 지루한 수업, 외워야 할 게 많은 과목으로만 여겼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역사의 현장이라는 인식을 한 뒤로는 달라졌네요.

우리는 실시간으로 세계 곳곳의 뉴스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일어나는 주요 뉴스들이 세계로 전파되고 있어요. 과거에 비해 모든 면에서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세계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어요. 바로 그 때문에 역사 공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해요. 역사 스토리텔러, 별별역사의 김도형 님의 《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세계사》는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네요. 저자는 인류 문명의 거대한 흐름을 바꾼 다섯 가지 힘, 즉 지리, 전쟁, 종교, 자원, 욕망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세계사 이야기를 드려주고 있네요.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지리의 힘에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의 역사를, 전쟁 관련해서는 이탈리아, 일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하마스, 종교가 만든 문명과 갈등의 역사에서는 영국, 스페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역사를, 부와 파멸을 동시에 가져온 자원 분야에서는 네덜란드와 아프리카 역사를, 가장 원초적인 욕망에서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몽골제국과 북한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각 나라마다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사건 연표가 나와 있어서 시대 배경과 특정 사건을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어요.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기에 나오는 세계사 이야기를 통해 판단할 수 있네요. 우리가 매일 접하는 모든 뉴스와 이슈의 뿌리는 결국 역사라는 것, 저자의 말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멀리, 더 깊이 보는 눈이며, 그건 역사 공부를 통해 가능하네요.

"'이탈리아군'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역사, 특히 제2차 세계대전사에 관심이 있다면 이런 이미지가 떠오를 겁니다.

'못 싸우기로 유명한 군대', '당나라 군대의 유럽판.' 그렇습니다. 군사적 능력이 떨어지기로 알려져 있죠. 이를 처음 듣는다면 '어? 이상하다. 지금 이탈리아는 나름 잘 싸우는 국가 아닌가?' 할 것입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이름만 왕국이었을 뿐 사실 왕은 물러나 있고 베니토 무솔리니라는 독재자가 통치하는 전체주의 파시즘 국가였습니다. 그는 사실상 파시스트의 원조로, 독일의 히틀러보다도 이른 1922년부터 독재자로 군림했죠. 1930년대 유럽,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나치 독일이 성림되면서 독일은 파죽지세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고, 이를 본 무솔리니는 '히틀러, 기세가 좋네? 나도 독일 편에 서서 로마를 재건해 보겠다!'라고 생각했대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이를 본 무솔리니는 프랑스를 점령할 기회라고 여기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합니다." (79p)

저자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무능한 왕 위의 무능한 독재자' (80p)라고 깔끔하게 요약해주네요. 무솔리니의 어리석은 바보 전략으로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항복했고, 2년 뒤 연합군의 공세로 추축국인 독일, 일본이 차례로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무솔리니는 훗날 분노한 시민군인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총살형으로 사망했네요. 근데 요즘 네오파시즘 성향의 극우 정당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일들은 매우 우려스럽네요. 독재자 무솔리니와 히틀러에서 파생된 파시즘이 인류 역사에 남긴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 해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 파시즘의 흐름을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차별과 혐오, 갈등을 부추기며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려는 활동 일체는 엄중히 금지시켜야 해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광기는 천황의 인간 선언으로 막을 내렸으나 최근 일본 정부가 극우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평화헌법 개정 논의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은 예의주시해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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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너머 한 시간
헤르만 헤세 지음, 신동화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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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열아홉, 스물, 스물 하나... 그 무렵의 헤르만 헤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자정 너머 한 시간》은 1899년 발표된 헤르만 헤세의 첫 산문집이에요.

헤르만 헤세는 1941년, 라이프치히의 오이겐 디더리히스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된 《자정 너머 한 시간》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자정 너머 한 시간》의 산문 습작들에서 나는 자신을 위해 예술가의 꿈나라를, 미(美)의 섬을 창조했고, 그 시적 특정은 낮 세계의 풍파와 저속함에서 밤과 꿈과 아름다운 고독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 내가 보기에 《자정 너머 한 시간》은 나의 길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적어도 라우셔와 카멘친트와 똑같이 중요한 것 같다." (13-15p)

이 작은 책에는 아홉 편의 짧은 산문들이 실려 있어요. 산문의 제목만 나열하자면, 섬 꿈, 엘리제를 위한 알붐블라트, 열병의 뮤즈,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왕의 축제, 말 없는 이와의 대화, 게르트루트 부인에게, 야상곡, 이삭 여문 들판 꿈으로 작가의 내면 세계를 꿈의 장면처럼 묘사하고 있어요. 독자들을 염두에 둔 작품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 이것은 오직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탐구하고 있다고 봐야 해요. '나의 길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라고 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작지만 매우 깊고 심오한 세계를 담고 있네요.

여왕이 오렌지 꽃가지 하나를 부러뜨려 그것을 보트 안으로 던진 뒤 나를 부드러이 아래로 밀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여행 잘하길! 작별이란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는 예술이죠. 당신이 언젠가 돌아와 내게서 빛을 얻어 갈 걸 나는 알아요. 언젠가 당신에게 더 이상 노가 필요 없을 때 말이에요." _ 「섬 꿈」 (48p)

첫사랑의 봄과도 같은 꿈속에서는 아름다운 여인들과 여왕의 환대를 받고 있어요. 그곳에서 게르트루트 부인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따뜻한 위안과 조언을 해주는 존재, 가장 이상적인 여인이니까요. 그의 뮤즈는 게르트루트 부인이 아니라 꿈나라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네요. 젊은이가 꿈꾸는 모든 것, 절망한 순간조차도 너를 사랑했노라가 말해주는 꿈의 여인들 덕분에 어두운 청춘 환상곡이 울려퍼지네요.

"나는 내 슬픔을 나른한 시의 박자로 흔들고 어두운 압운에 반영하는 법을 배웠다. ... 우리는 마치 저주의 거울 속처럼 모든 삶이 뒤집혀 있어 사람이 노인으로 태어나 젊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어린아이가 되어 불안하게 마지막을 직시하는 우화들을, 불행한 사랑의 운명들을, 그리고 잔혹함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나중에 내가 어느 불안한 밤에 나의 뮤즈를 저버리고 달아나 양지의 푸른 평야로 가버리고 난 뒤에도 그녀는 오늘처럼 가끔 나를 찾아와... " _ 「열병의 뮤즈」 (61p)

자정 너머 한 시간은 고요한 밤의 시간인 동시에 불안에 떨며 뮤즈를 저버리고 도망가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네요. 헤세는 살짝, 단테의 『신곡』의 장면들을 언급하면서 불타는 영혼의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들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전에 꾸던 꿈들을 되살릴 수 있을까요.

"그때 나는 추위에 떨면서 내 청춘 세계의 폐허들 아래를 걸으며 부서진 생각들과 팔다리가 경련하는 일그러진 꿈들을 지났고, 내가 바라보는 것은 먼지로 흩날리고 살아 있기를 멈추었다. ... 모든 것이 내게서 멀어졌고, 나는 곧 엄청난 공허와 무풍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 고독의 밑바닥을 본 적이 있는 자가 있을까? 체념의 땅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내가 심연 위로 몸을 숙이자 시야가 아찔해지며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 고요한 슬픈 밤이 나를 위로하고 잠재우며 내 위에 궁륭처럼 떠 있었다. 마치 친구들이 귀향자에게 찾아가듯 잠과 꿈이 내게로 찾아와 죽을 것만 같은 무게를 내 어깨에서 여행 보따리처럼 내려주었다. ... 구조된 사람과 회복하는 사람처럼 감사와 평온과 빛과 행복의 소용돌이가 나를 휩쌌다. ...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고, 나 자신에게는 또 기적이 되었다. 쉬는 동시에 활동하고, 받으면서 베푸는. 나는 재산의 주인이 되었는데, 그 중 가장 값진 것을 나는 어쩌면 아직 알지 못한다." _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65-67p)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단테의 『새로운 삶 (La Vita Nuova)』 에 나오는 첫 문장이라고 하네요. 난파 당한 배, 파수꾼 잠든 땅, 사막과 같이 길을 잃은 그에게 새로운 별들이 나타나 빛을 내고 있네요. 그를 일으켜 세운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내게는 당신이 먼 옛날 황홀경에 빠진 단테를 스쳐 지나간 여인이었던 듯, 그리고 나의 동경 가득한 청춘의 그늘 속에서 딱 한 번 더 지상을 거닐었던 듯 여겨질 때가 많아요. ... 잠든 나의 꿈속에서 자주 당신 몸의 형체가 보이고 당신의 고상한 손에서 마디가 섬세한 흰 손가락들이 그랜드피아노의 건반에 놓인 것이 보여요. 혹은 당신이 저녁 무렵 서서 창백해지는 하늘의 변화하는 색을 지켜보는 모습이 보여요.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로운 앎으로 인해 깊은 광채로 가득한 눈으로 말이에요. 그 눈은 내게서 셀 수 없이 많은 예술가 꿈을 불러일으키고 이끌어주었죠. 그 눈은 어쩌면 내 삶에 주어졌던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지도 몰라요." _ 「게르트루트 부인에게」 (107-108p)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아련한 꿈속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가의 꿈, 예술의 세계를 짐작해보네요.

"나는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ㅡ 그 모든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성을 지키며 고요한 저녁 내내 나의 층계에 앉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잘 아는 얘기겠죠. 당신은 나를 이름으로 불렀고 천년 전부터 이 피난처에 출입한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그분의 방들을 여는 열쇠도 가지고 있잖아요! 들어갈 건가요?" 우리는 등 뒤로 문을 닫는다. 파수꾼이 고리에서 횃불을 집어 위쪽 층계를 밝혀준다. _ 「야상곡」 (119p)

고통스럽지만 사랑했노라고, 이 고백을 통해 작가 자신이 어떠한 마음으로 본인의 길을 걸어왔는가를 알 수 있네요. 삶의 파수꾼이자 주인으로서 횃불을 밝혀야 해요. 젊은 출판인 오이겐 디더리히스는 헤세의 산문집을 '스케치'라고 표현하면서, '스케치들에 해방적인 면이 없어 아쉽다'라면서도,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저는 이 책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리라고는 별로 믿지 않지만 그 문학적 가치를 그만큼 더 확신합니다." (12p)라고 했는데,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네요.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초기 습작 산문에 대해, '내가 살던 왕국, 내가 시적인 시간과 나날을 보낸 꿈나라', '시간과 공간 사이의 어딘가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그곳' ,'밤과 꿈과 아름다운 고독으로 물러나는 것' (13p)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 같아요. 비밀스러운 꿈의 나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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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장례 여행 - 기묘하고 아름다운 죽음과 애도의 문화사
YY 리악 지음, 홍석윤 옮김 / 시그마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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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낮과 밤처럼 우리의 삶에는 죽음이 늘 곁에 있어요.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죽음에 관한 것들은 뭔가 공포스럽고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달갑지 않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이 책은 비교적 편안하게, 매우 흥미롭게 볼 수 있었네요.

《세계 장례 여행》은 중국계 싱가포르인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 YY 리악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죽음과 애도의 문화사' 책이네요.

저자는 아버지 때문에, 어쩌면 아버지를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하네요.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죽음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된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저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쓰기 시작해서 집필 과정이 일종의 탈출구였던 것 같다고, 그러나 깨달은 것은 죽음에서도, 두려움에서도, 슬픔에서도 탈출구는 없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네요.

"당신이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연구해보라." (169p)

이 책에서는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를 저자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함께 설명해주고 있어요.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간략한 역사로 시작해 사람이 죽으면, 우리가 죽으면 일어나는 일을 네 개의 파트로 나누어 매장, 화장, 섭취, 보존 순으로 세계 각국의 풍습과 문화를 알려주고, 죽은 이를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식과 죽음에 관한 기록을 다루고 있어요.

"흥미로운 관에 묻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흥미로운 장소에 묻히는 사람도 있다. 만약 관이 화장장에서 소각되어 재로 변하지 않고 어딘가에 남겨진다면, 땅에 묻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필리핀 북부 산악 지방 '사가다'에서는 지난 2,000년 동안 죽은 자들이 동굴이나 석회암 절벽의 벽에 묻혔는데, 사람들은 이를 '매달려 있는 관'이라고 부른다. 계곡 곳곳에는 수백 개, 어쩌면 수천 개의 그런 관들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다. 이곳의 토착 부족인 이고로트족은, 죽은 자를 높은 곳에 매달아 놓으면 홍수와 동물로부터 시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조상의 영혼에 더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33p)

소박한 장례부터 과시적인 장례까지 다양한 장례 의식과 세계 여러 나라의 독특한 장례 풍습을 만날 수 있어요. 계급 구조가 있는 모든 사회가 그렇듯, 죽음 역시 모두가 평등하지는 않았네요. 어린이, 노예, 가난한 사람들은 매장 기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아서 우리가 그 시대에 알 수 있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유해에서 얻은 것들이네요. 사람의 시신을 보존한다고 하면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떠올리는데, 근현대에도 정치 지도자와 국가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망자의 시신이 방부 처리되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네요. 특히 독재자들과 공산당 지도자들 사이에서 이런 식의 시신 보존이 유행했는데,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최초로 방부 처리된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이라고 하네요. 추종자들에게 자신을 어머니와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사망 후 오늘날까지 100년 동안 붉은 광장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영묘에 안치되어 있으니, 죽어서도 혁명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네요.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시신을 인공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그나마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간혹 예외도 있었네요. 이탈리아 팔레르모에 위치한 지하 묘지 '카푸친 카타콤베'에는 각계각층의 인물 1,284명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는데, 오랜 세월로 인해 많은 미라가 제 모습을 잃었다고 하네요. 가장 놀라운 건 방부 처리된 시신 중에 1918년 폐렴으로 사망한 어린 아기 로잘리아 롬바르도의 시신이에요. 유리 진열장 속에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보기 위해 매년 수천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고 하네요. 어린 딸의 죽음에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방부 처리를 요청한 아버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만큼 처절한 작별이 또 있을까요. 죽음의 문화에서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질 수 없을 거예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애도 의식은 대부분 표면적으로는 죽은 자에 대한 연민의 표시라고 할 수 있는데, 산 자의 슬픔을 달래며 정화하는 의식이기도 하네요. 공동체가 함께 모여 추모하는 행위는 우리라는 공통된 정체성으로 묶어주고 더 높은 목적으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며,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이해하고 삶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의식이네요. 죽은 자는 산 자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그 삶을 이어가며, 산 자 역시 언젠가는 먼저 죽은 이들과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어요. 저자의 말처럼 수많은 죽음의 의식을 안다고 해서 작별 인사가 더 쉬워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배웠네요.

"죽음은 죽음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기에 상실의 고통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잃을까봐 두려운 사람들이 당신 곁에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1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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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조각들
연여름 지음 / 오리지널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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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참 맛있다!

맛있는 초콜릿은 그냥 꿀꺽 삼키기 아까워서, 최대한 천천히 녹여 먹거든요.

그런 맛이네요, 이 소설은.

책 크기도 작고, 페이지 수도 적어서 금세 읽겠구나 싶었는데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게, 한참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가끔 글들이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질 때가 있어요. 그냥 지켜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이야기 안으로 쑤욱 들어가 버린 듯한 느낌, 그럴 때는 잠시 시공간을 유영하듯 빠져들게 되네요.

연여름 작가님의 《빛의 조각들》은 SF과학소설이에요. 행성 간 여행이 자유롭고, 인체에 생긴 결함이나 문제는 인공 강화하여 인핸서가 되는 미래 세계지만 주인공이 살고 있는 행성 연방에서는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가는 인핸서가 될 수 없어요. 연방 규정상 순수한 신체를 가진 오가닉에게서 탄생한 작품만 예술로 인정하고 있어요. 젊고 유망한 천재 화가 소카는 호흡기와 폐질환 때문에 불편하고 번거로운 산소 헬멧 없이는 오염된 바깥 세상을 나갈 수 없어요. 소카의 저택에 입주 청소부로 일하게 된 뤽셀레는 사고로 아내를 잃었고 눈을 다쳐서 흑백증 환자가 되었어요. 세상을 검거나 희거나 둘 중 하나로밖에 볼 수 없는 눈 때문에 이제껏 살던 세이네 행성을 떠나 이곳 발렌으로 왔고, 10개월 정도 일한 돈으로 인핸서가 될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계획한다고 해서 내 뜻대로 되리란 보장은 없다는 건 지금이나 먼 미래도 똑같네요. 예민하고 무뚝뚝한 소카가 뤽셀레에게 처음 말을 건네면서 두 사람 간에는 은밀한 소통이 이어지는데, 조금은 편해진 뤽셀레가 무심코 소카의 약점을 건드리는 질문을 하면서 한순간 냉랭해지고 말았네요.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고통 없는 삶이 과연 우리에게 완전무결한 행복을 가져다 줄까요.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어요. 무엇을 선택하든, 온전히 본인의 책임이니까요. 불완전함과 결핍은 결코 달가운 조건이 아니라서,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 완벽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먼 미래에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바뀌겠지요.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 아마 그것이 우리 자신이 지키고 싶은 가장 소중한 무언가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제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바라는 방향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법이므로. 그건 오가닉과 인핸서, 화가와 청소부, 세이네 사람과 발렌 사람 구분 없이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고통이었다.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각자가 감내해야 할 몫이 있을 뿐이다." (175-17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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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면을 채워주는 어휘 수업 - 품격 있는 대화를 위한 말 공부
박재용 지음 / 북루덴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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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 오늘을 즐겨라'라는 라틴어 문구인데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뒤로는 마음에 새겨둔 말이 되었네요.

낯선 언어가 주는 신비로움과 그 안에 담긴 뜻이 강렬하게 남았던 것 같아요.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지만, 때로는 언어 자체가 새로운 생각과 상상을 펼치는 날개가 될 때가 있어요.

《나의 내면을 채워주는 어휘 수업》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온 단어들로 나를 다시 세우고, 단단한 내면을 다지는 책이네요.

저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신과 자연, 타인과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만들어 낸 지적 유산이자 마음의 그림이라고 표현하면서 여기에 소개된 단어들을 하나씩 정성껏 소개하고 있어요. 일상 생활에서 수없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라서, 언어가 가진 힘을 간과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무심코 내뱉었던 말들, 만약 언어의 본질과 그 힘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때 입을 다물고 침묵을 선택했을 텐데... 신기하게도 익숙하지 않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단어들을 통해 언어가 만들어내는 사유에 대해 몰입하게 되네요.

프쉬케는 '숨쉬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하여 점차 영혼을 뜻하는 말로 확장되었고, '나비'라는 뜻도 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나비의 변태 과정을 영혼의 여정에 비유하여 나비가 날개를 펴 날아오르는 순간이 자유로운 영혼의 해방, 높은 곳을 향한 비상으로 여겼다고 해요. 그리스어에는 프쉬케와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의 프네우마가 있어요. '불다, 숨 쉬다'라는 뜻의 동사 프네오에서 파생된 말로 숨결, 영, 정신을 뜻하지만 철학적으로 구분되는데, 프쉬케는 개인의 영혼이라면 프네우마는 바람처럼 흐르는 우주적 생명력을 뜻한대요. 우리가 항성을 '별'이라 부르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스테르가 일반적으로 '별'을 의미하는 단어였고, 천체 일반이나 '별자리'를 가리킬 때는 아스트론, 고대 로마에선 아스토론에서 연유한 라틴어 아스트룸이나 stella를 '별'을 지칭하는 단어로 자주 썼다고 하네요. 나만의 언어를 만든다면 '별'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뭘까를 한참 생각했는데 경이로움을 나타내는 감탄사가 제격일 것 같아요.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고, 혼자 마음으로만 외치는 단어로 남을 것 같네요.

처음 글을 배우던 시절로 돌아간 듯,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온 단어들의 의미를 차근차근 곱씹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특별한 사유의 장이 열린 것 같아요. 언어로 통하는 세계, 하나의 단어를 알고 나니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게 되네요. 저자의 말처럼 나를 다시 세우고, 어휘 하나하나를 통해 내면의 질서를 다지는 뜻깊은 언어의 여정을 경험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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