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하는 여자들 - 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장영은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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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자기서사라는 일관된 주제 안에서 20세기의 한국 여성 지식인의 삶과 글쓰기를 아주 객관적인 시점과 아주 주관적인 시점에서 간접 경험 해볼수 있는 밀도 높은 콘텐츠이다. 그녀들의 삶은 말 못할 고충으로 가득했을지라도, 어떻게든 말하고자 했던 그 삶을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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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하는 여자들 - 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장영은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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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인의 정의를 진정으로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시대와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나혜석과 부바네스와리는 "진정으로 자신의 시대에" 속했던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시대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그 시대의 본질을 파악했다.
-16p, 출판인과 승려: 김일엽의 고백

여성 지식인에게 글쓰기 혹은 문학이란 사상을 매개하고 실천하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여성에 글쓰기란, 더 나아가 문학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사상이었다.
-23p, 출판인과 승려: 김일엽의 고백

사회주의는 남성 지식인들의 영역이었고, 여성 지식인들이 그 영역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여성성 혹은 여성 문제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야 했다.
-47p, 배우와 소설가: 최정희의 다짐

"아직까지 진실한 자서전을 쓴 여성은 거의 없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 속에는 "왜 아직까지 진실한 자서전을 쓴 여성이 나타날 수 없었는자?"라는 질문이 내재되어 있다. 최정희는 진실한 자서전이 여성에게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53p, 배우와 소설가: 최정희의 다짐

여성 지식인이 공적 영역에서 차지할 수 있는 지위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식민지 시기에 시를 쓰고, 강의를 하고, 방송국 작가와 잡지 기자로 글을 썼던 모윤숙은 훗날 "불란서 같은 나라에서는 정치평론을 대개 문화인들이 써서 여론에 호소하는 반면 정치가들도 문화 활동에 적극 참가합니다. 소설 한 줄 안 읽고 '휴매니티'라곤 티끌만치도 없는 정치가가 어떻게 국민을 지도합니까"라는 말로 정치와 문화 활동의 상관성을 주장했다.
-81p, 시인과 로비스트: 모윤숙의 변명

김활란은 40세의 나이에 "이 나라 유일의 여성 최고 학부를, 이제 최초로 우리나라 여성인 내가 책임"지게 되었다는 점에 사명감을 느낀다. 하지만 총독부는 김활란을 "요시찰 인물로 규정짓고 교장직을 박탈하려" 했고, 미국 선교사들이 부재한 이화여전에서 김활란이 교장이라는 지위 하나로 총독부를 상대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121p, 총장과 특사: 김활란의 회한

임영신은 자신이 '여성인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것을 자서전에서 시인하고야 말았다.
-170p, 장관과 당수, 임영신의 자찬

이화학당 2년 후배인 김활란이 독신 여성이자 이화여전의 교수로 여성 지식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해가고 있었던 데 반해, 박인덕은 파란 많았던 결혼 생활과 이혼녀라는 낙인으로 어쩔 수 없이 해외로 취업을 떠나야 했다.
-188p, 연설가와 농촌운동가: 박인덕의 재기

이화림의 남편은 사회주의 지식인으로 "종종 음식을 만들고 아이를 돌봐"주었지만, 이화림이 "집 밖의 활동"을 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226p, 저격수와 의사: 이화림의 증언

허정숙은 "붉은 연애"라고 불린 동지적 사랑을 일관되게 추구했고, 전향을 하지 않은 이상 결별 이후에도 전남편들과 동지로 지냈다. 하지만 숙청 과정은 잔인했다.
-255p, 혁명가와 관료: 허정숙의 침묵

슥청의 설계자들은 콜론타이와 허정숙과 같은 여성 정치인이 혁명 이후 별달리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261p, 혁명가와 관료: 허정숙의 침묵

여성의 자기서사라는 일관된 주제 안에서 20세기의 한국 여성 지식인의 삶과 글쓰기를 아주 객관적인 시점과 아주 주관적인 시점에서 간접 경험 해볼수 있는 밀도 높은 콘텐츠이다.

취미로는 근처에도 가기 힘든, 다소 묻혀진 역사 그리고 각 챕터의 주인공에 대한 디테일을 이렇게 취미삼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한때는 식민지 조선에서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던 여성들이 가진 행운에 대한 모종의 질투심마저 느꼈지만 그때보다 두 배 정도 살아보니 삶은 길고, 그 점을 활용할 수 있어야 진짜 행운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오랜 덕질에 대한 보답으로 그 행운을 누리고 있는 지금이 소중하다. 끊임없이 지난 세기의 여성들을 재조명해주시는 장영은 선생님을 더 많은 지금의 여성들이 읽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그녀들의 삶은 말 못할 고충으로 가득했을지라도, 어떻게든 말하고자 했던 그 삶을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감사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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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테임드 - 나는 길들지 않겠다 뒤란에서 에세이 읽기 2
글레넌 도일 지음, 이진경 옮김 / 뒤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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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면밀하게 분석한 사회 구조의 기만적인 성차별과 구속, 스스로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 여성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 어떤 근현대 철학의 명저도 능가할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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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테임드 - 나는 길들지 않겠다 뒤란에서 에세이 읽기 2
글레넌 도일 지음, 이진경 옮김 / 뒤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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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면밀하게 분석한 사회 구조의 기만적인 성차별과 구속, 스스로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 여성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 어떤 근현대 철학의 명저도 능가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저자 글레넌은 열 살 때, '소녀의 덕목'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폭식과 폭음으로 회피합니다. 하지만 16년이라는 오랜 암흑기를 거치고, 알콜중독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각성과 재탄생의 고통과 기쁨을 온몸으로 끌어안게 됩니다.

글레넌이 금주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첫 아이의 임신이었어요. 결국 결혼과 세 번의 출산, 양육의 삶이 이어집니다. 아이가 셋이라는 이야기가 초반에 등장했기 때문에, 아주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한국과는 비슷하면서도 좀더 지독한 맥락에서 '슈퍼맘 컴플렉스'가 성행하고 있는 미국에서, 엘리트 엄마들이 상상이상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미드의 주요 클리셰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에 대한 그 모든 '뿌리 깊은' 억압들이 글레넌 자신을 망칠 뻔 했지만, 결국 그녀가 각성하게 된 계기도 되었습니다. 미국 엄마들 클리셰를 볼때마다 드는 생각은, 일종의 '정신적인 덫'에 걸려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어요. 글레넌은 그 덫을 파괴하려고 하는 사람인 것이죠. 혼자가 아니라, 세상 모든 여성과 함께.

자신을 중독에서 꺼낸, 자녀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 정신력으로, 글레넌은 본인의 자아 또한 쉴새없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내 자녀들은 케이지에 갇힌 삶을 살게 할 수 없다는 의지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힘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녀를 위해서도 엄마인 자신이 자아에 충실한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좋은 엄마에 집착하기보다는 좋은 사람이 좋은 엄마이자, 좋은 친구일 수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자아 성찰을 투철하게 하고 있는 사상가이자 동기부여가가 된 것이죠. 2부에서는 탈출 프로토콜이 등장합니다.

글레넌을 읽는 동안, 저의 해묵은 고통과 원죄!! 그리고 한계없음이라는 스스로와의 약속, 매일 마주치는 자아와의 고통스러운 조우를 겪어내야만 했어요. 2부를 읽던 시점에서는 그녀의 뼈때리는 충고에 카타르시스를 느껴서 밤낮없이 무언가를 계속 하게 됐었는데요. 예민하고 불안정한 자아에 충실하기로 한, 저자의 민낯이 상당부분 드러나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합니다.

<느끼다>의 high상태를 계속 기대한다면, 이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 우울해질 수도 있어요. 우와! 너무 좋았어! 내 속이 다 시원해! 라는 기분이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죠. 일단 이 책을 다 읽어보긴 해야겠는데, 모든 글이 같은 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 당황했고, 그동안 책의 일부로 작가를 평가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들었어요.

그러나 글레넌이 대단한 것은 사실입니다. 적어도 2부 만큼은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은 작품들이었어요. 끊임없이 고통받고 형성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공유하고 싶구요. 이 책에는 그녀의 연설가다운 모습과 아주 사적인 고충이 함께 담겨있어서, 한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할 때 감당해야 하는 희노애락을 책 한권에 겪을 수 있습니다.

혁명가에게 상상력이 왜 중요한지를, 가장 논리적이면서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글레넌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특히나 가방 끈 길고 엉덩이가 무거운 남자가 했다면! 남이 쓴 글을 짜집기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시대별 번역 차이도 있었겠지만요.

글래넌의 글은 권위적인 텍스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마력이 있었습니다. 규율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자신의 내면에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는 것 같은 글을 썼죠.

<언테임드>에는 명언과 인용문이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짧고 굵은 한마디를 빌어와 충격요법으로 동기부여를 합니다.

"꿈꾼다는 것은 계획 한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글로리아 스테이넘도, 책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어요. 몽상가인 동시에 계획주의자인 저에게 힘을 팍팍 실어주는 명언과 함께.

글레넌은 꿈꾸고 상상하고 계획하라고 합니다. 그녀가 탁상공론자가 아니란 것은 3부에 등장하는 다양한 투쟁과 일상에 대한 성찰에서도 충분히 드러나있습니다.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투게더 라이징>의 활동은 과도기에 시작했음에도 그녀의 진정성과 행동력에 감탄하고 존경할 수 밖에 없네요.

행동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글에 담긴 그 모든 에너지가 기존의 책들과 다른 결이었을까요?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 술을 끊고 육아를 한 지 18년 만에, 그녀는 결혼의 위기에서 일생의 사랑을 만나, 자신의 종교생활 마저도 위기에 빠뜨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동안 자아와의 화해를 위한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도 여전히 삶은 고통스럽고 자신은 케이지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죠.

아마도 또한번 인생을 리셋해야하는 시점에서 언테임드라는 제목이 탄생한 것 같네요. 글레넌의 새로운 가족을 중심으로 그녀의 삶이 그녀의 본질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비록 사랑이 서투르고 타인의 자유에 불편함을 느낄지라도 말입니다. 그녀는 계속 불태우고 다시 태어날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셰계적으로 엄격한 외모 기준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여성의 입장에서, 그녀의 바비인형 신드롬은 뜻밖이기도 하지만 아주 익숙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재미로 흘려봤던 2000년대 하이틴 로맨스 중에는 배경이 미국인데도 '또래문화'가 지배적이고 '외모'는 우열을 가르는 가장 원초적이고 결정적인 기준인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바비인형과 자신을 비교해야 하는 걸까요? 왜 한국사람들은 '살쪘네', '살빠졌네'를 안부인사랍시고 건네는 걸까요? 각자의 외모를 더 만족스럽게 꾸미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바비인형을 지향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의 '개인의 취향'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나요?

요즘 다시 화두가 되고있는 한국의 '장녀 컴플렉스'와 맞물리는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언테임드>는 글레넌 자신의 이야기이자, 세상 모든 여성과 마이너리티의 이야기이자, 글레넌의 두 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사람으로 지목당하는 저와 같은 사람도, 종종 타인의 기대에 스스로의 기대까지 더하고 역할 갈등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여성이 권력은 바라지도 않고 내조만 하기를 바라거나,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 인자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에서도 여성들 자신이 외모나 성격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서열화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해묵은 논의지만, 저와 이 논점을 공유했던 최소한의 공동체가 해소된 이후로 저 또한 이 사회에 길들여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여성에게 '되어야 하는, 보여야 하는' 형용사가 아닌 '움직이다, 실천하다'의 동사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물건을 구매하거나, 집안을 장식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성에게 허용된 범주의 동사가 아닌 것을 해보자고 할 생각입니다.

시대를 앞서갔던 여성들이, 악처와 헤픈 여자라는 오명을 썼습니다. 권력을 추구했던 여성들이, 폭정으로 평가되기보다는 남편의 명예실추로 욕을 먹었습니다. 독신으로 예술이라는 불멸의 인생을 창조한 여성들이 그래봐야 노처녀라고 불렸습니다. 저는 여성들이 불명예의 두려움과 싸우기를 바랍니다. 제 입으로 '강해지기 바란다'고 말했다가 여성들에게 거부당한 적도 있습니다. 강한 여성들은 길을 열어주거나 위로를 하고 때로는 대신 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강한 여성의 존재가 박탈감을 주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80-90년대생을 밀레니얼, 또는 '캣니스 에버딘'세대라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약자를 위해 싸우다가 밈(meme)이 되어버린 여전사를 보고 사랑에 빠진 이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캣니스 에버딘이 활약한 <헝거게임> 시리즈가 흥행을 하지 못했지만, 저는 <반도>의 이정현 배우와 <승리호>의 김태리 배우에게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강해질 수 없다, 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분명, 캐릭터가 대표하는 여전사에게도 사연이 있습니다. <킹덤; 아신전>에서 전지현 배우가 극도의 수모를 겪고 흑화하는 것을 보고 대리만족을 하는 사람이 있고 대신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강한 여성들은 타고나야 하는 걸까요?

전쟁이 사라져도 군대는 사라지지 않기에, 남성들이 겪어야 하는 맨박스는 여성들의 케이지만큼 굳건합니다. 권력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적 속성을 '여성스러운'이라 부르고 비인간적 남성을 진정한 인간상으로 제시하며 여성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혐오하게 합니다. 여성은, 너무 여성스러워도 욕먹고 너무 여성스럽지 않아도 욕먹습니다.

소위 '여성스러운' 남성은 자신을 발현할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여성들은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사회의 검열을 겪어야 하는 반면, 남성들은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었던 유년기를 거쳐 위계서열이 엄격한 군대생활, 이미 군필자가 주도하는 사회생활을 합니다. 강약약강의 법칙을 체득한 남성이라면 손 닿는 곳에 있는 여성과 약자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남성이라면 어느시점에 부러지거나 여느 여성과 마찬가지로 속이 곪아 있을 것입니다.

글레넌은 인종차별에 반대한답시고 '온건한' 반인종차별 투쟁만을 멀리서 지지하는 것은 사실상 묵인에 가까운 비열함이라는 고발도 해버립니다. 그녀의 적극성이 백인여성으로는 부적절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유색인 여성의 입장에서 글레넌의 뒤늦은 깨달음에 안도를 하는 한편, 안도해야 하는 입장인 것은 분명 화가 나는 사실입니다. 왜 모욕감은 나의 몫?

아마도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한 어떤 남성이 갑자기 여성운동까지 주도하려 들 때의 아찔함이 느껴졌다고 해야할까요? 글레넌은 끊임없이 각성하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백인이라는 특권'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자, 그녀 자신이 더욱 각성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한국 여성들과 나누고 싶은 쟁점 중에서, 특히 저는 같은 아시안끼리의 인종차별(인근 외국인 혐오), 성소수자 차별이 가장 민감하고 시급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세계인의 관점에서 한국인에게 바라고 싶은 부분이라면, 미국 등의 서구권에서 흑인들의 아시안 차별에 관한 것인데요.

흑인들이 (백인이 아닌) 아시안에게 화풀이하는 것도 당연히 인종차별이지만, 그것은 인종간의 혐오를 조장한 사회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아시안의 폐쇄적 연대를 추구하기보다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열린 토론과 전략적 연대를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어를 잘하시는 분들은 이미 하고 계시겠지만, 저도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기를 더욱 섬세하게 해서 더 많은 동지들과 소통하고 싶네요.

겉으로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미국 사회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그들이, 왜 목사들의 저주에 작아지고 독실한 부모와 갈등을 하고, 왜 한번뿐인 인생에서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낳고, 왜 입양보낸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등에 대한 무수한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글레넌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성차별적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종교인의 어리둥절함에는 차고 넘치게 응답을 해주었죠. 그녀 자신이 신앙을 버리기 보다는 '믿음'의 가치를 유지하되 '신'의 존재와 대리인의 존재를 분리함으로써 진정한 종교인으로 거듭나는과정이 있었는데요. 이미 종교인 중에서는 가장 설득력있는 접근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복음주의 폭로를 속시원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간섭이, 사랑이 아니라고, 그녀는 정정합니다. 여성을, 성소수자를, 약자를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만큼, 상처가 되는 행위는 바로,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우리의 영혼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 비뚤어진 사랑과 선을 그어야한다면 긋겠어요. 사랑은 교정이 아닙니다.

한국을 예로 들자면, 장유유서와 같은 뿌리깊은 교리가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모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예쁘고 똘똘한 어린이, 젊은이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성장한 이들도 있겠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동의없이 가르치려하고 공손함을 요구하고 같은 보수에 업무가 추가된 적이 있지 않나요? 우리 때 그랬으니까, 라는 말이 지금 통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20대와 40대가 불화를 겪고 있지 않나요?

사람들은 아픔에 공감할 줄 알고, 불의에 저항할 줄 압니다. 눈 앞에 어린아이가 불타고 있는데 자신이 화상을 입을까봐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다시금 인간성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착하기만 한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착한 사람이 이용당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이고, 첫번째 문제는 착한 사람 본인이 자기도 모르게 기울어진 세계를 더 기울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봉사, 라는 단어에 자선을 베푸는 듯한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동등한 입장에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설명에 동의했습니다. 그 후로는 봉사, 라는 단어를 가급적 쓰지 않게 되었구요. 도움이 필요한 약자, 위기에 처한 여성에게 당장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누구나 항상 최전방에 있을 수는 없지만, 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힘이 되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저 또한 제가 목격했거나 요청을 받은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등한 입장에서 공유해야 하는 자매애나 인류애여야 합니다. 권력을 대신하여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권력을 되찾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언테임드>의 3부는 케이지를 탈출한 글레넌이 세상의 부조리와 정면대응을 하는 한편, 자신의 내면과 무의식을 돌아보고 불태우고 재건하는 과정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글은 너무도 속시원하게 조목조목 해결해주는데, 어떤 글은 내내 답답하다가 겨우 결론에서 숨통만 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추리고 재구성하는 동안 계속해서 내면과 무의식을 불태우고 재건해야 했습니다. 흥미진진함도 있었고, 답답하지만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는 부분도 있었는데요. 어쨌든 읽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책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사적이기도 하지만 여지껏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은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입니다.

<언테임드> 원서의 부제는 "stop pleasing, start living"입니다. 글레넌은 강한 여자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각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낱낱히 고발합니다. 자기안의 여성혐오와 자기혐오를 정면돌파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삶이란, 타인의 삶을 보살피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소유, 라는 것만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소년병을 자랑스러운 국가의 아들, 이라고 이름붙여 총알받이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랑스러운 국가의 어머니, 라고 이름붙여 총알받이가 될 아들을 낳아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충성과 가족애를 이용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국가주의는 다만 희생을 요구할 뿐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글레넌의 두번째 결혼생활과 <언테임드>에 포함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녀의 고단했던 젊은 시절은 계속 충격적인 반전을 거듭합니다. 사랑이 처음이라, 신혼의 불꽃이 가라앉고 단단해지는 과정이 두렵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정해진 시간 외의 휴식은 꼴보기 싫다거나, 자신이 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취미생활에 박탈감을 느낀다거나.

그러다 그녀는 뒤늦게 알게됩니다. 나도, 하면 될 것을. 그래서 그녀는 도전합니다. 이 뒤늦은 깨달음과 재빠른 도전에 알 수 없는 전율이 느껴집니다. 오랜기간 케이지에 갇힌 자아를 술로 마비시키고, 육아와 선행으로 자신을 그저 채찍질하며 살아온 여자가 마흔이 넘어서야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취미생활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시도합니다.

글레넌이 덕질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덕질이라면 그럭저럭 남부럽지 않게 해봤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사람으로 소문났지만, 여전히 저는 어떤 재능에 에너지를 투자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능이 조금이나마 있는 것을 덕질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서, 재빠르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만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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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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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표지와 마찬가지로, 아니 에르노의 목소리는 비수가 되어 심장에 날아든다. 어딘가에 얼어붙기 전에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기회가 되어 초판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왜, 어떻게 얼어붙었을지, 짐작이 가면서도 막상 손대기가 두려웠던 책. 우리가 기다려온 소녀의, 소녀들의 진짜 자서전.

화자와 거의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난 내가, 내 또래의 가상 인물이자, 내 또래의 거의 모든 여성의 초상인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최근까지도 어리둥절했던 심리의 이면에는, 그만큼 현실세계에 대한 면역력이 없고 상처받기 쉬운 여자가 있다. 결국 화자는 그 현실에서 산 채로 죽어갔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갔어야 할 길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했다. 이 책은 그 치열한 여정의 살아 숨쉬는 기록이자, 증거이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수기에 가까운 사실주의 소설임을 감안해,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라고 봐도 무방한 화자의 십대와 ‘최근에 얼어붙은’ 김지영들의 십대는 한 세대 이상의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차에서 뚜렷한 변화를 이루어낸 것은 아니다.

21세기가 되고, 호주제와 낙태죄가 폐지되고 일부 지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지영이나 내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90년대 이후에 당한 수모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얼어붙은 여자>의 화자와 같은 늦둥이 외동딸은 우리 시대에 더 많았겠지만, 그렇게 면역력이 없는 소녀들이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결혼제도 속에서 어떻게 산 채로 죽어갔을지는 상상할 자신도 없다. 상상하고 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있다니, 이미 그 삶에 갇혀버린 이들에게는 죄송한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 죄책감이 부당하다. 얼어붙은 엄마들의 삶에 무한한 유감을 가지는 것은 맞다. 어떻게 해서든 하루빨리 엄마를 은퇴시켜보려고 일찌감치 출가해서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데도, 때로는 기혼 여성들이 더 심하게 경멸하는 혼자의 삶을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여성을 말함에 있어서, 결혼 유무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도 말도 안되게 부조리하다. 내가, 다른 독자들과 썸을 탈 것도 아닌데, 내가, 결혼은 하지 않았소! 라고 말을 해야 결혼한척 한게 아니게 될 것이니. 게다가, 이 고백으로 기혼 여성들에게 역시, 넌 몰라! 라는 말을 듣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 몫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도 그 분들에게는 신선놀음이겠지만.

그녀보다 40년 뒤에 태어나서 그나마 다행인 것 한가지는, 이제 우리가 더이상 남자들을 위해 치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그렇다. 이제 공작새의 미인대회 같은 것에 가장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여성들이, 건강을 위해, 자기 만족을 위해 몸을 만드는 시대다. 하지만 남성들의 입맛에 맞는 포즈와 앵글이 독립적인 여성 피사체의 자기표현과 겹친다. 새로운 여성상, 더 강한 여성상을 제시하고 싶은데, 이런 시류의 흐름이 걱정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있는 매력과 애교마저도 숨기고 싶을 정도이다. 불특정 다수, 보다 정확히는 잠재적 동료인 동시대 여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자칫하면 남자들의 인기에 취한 모습과 헷갈릴까봐 두려울 때가 있다. 20년 전에도 그랬던가? 그때는 자기 표현을 하는 대담한 여성이 많지 않아서 오히려 관종이 독립된 범주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의심없이 받아들인 이성애적 환상과 그에 따라오는 불길한 운명, 저주받은 미래. 단지 사랑했을 뿐인데, 그 사람이 오래 머무르게 하려고 현모양처 코스프레를 하다가, 결국 망해버린다. 내가 영원히 할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역할놀이를 아무 보상없이 얼마나 하겠는가? 한 계절, 길어야 두 계절이다. 독립적인 남자를 찾아내는 취향과 눈썰미가 없다고 자책해봐야, 그 또한 내 몫이 아니다. 애초에 여성들의 몫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도 의아한 것은 여전히 아들이 개구쟁이어도 아들이니까, 라고 말하는 엄마들이다. 결국 엄마의 책임인건가. 왜 아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나. 그들이 엄마를 진정으로 사랑할 무렵, 그 엄마의 일손을 덜어주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아내이다. 이건 말대로 악순환이다. 나는 이 게임을 할 수가 없다.

독립적인 여성들, 비혼 여성들에게도 당연히 딜레마가 있다. 그보다도, 비혼을 선택한 것도 아닌데 나이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우리가 나이먹는 속도에 비해서, 노처녀의 커트라인이 높아지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화살같은 세월 속에서도 자리 보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싸우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십년 째 아무도 노처녀라고 부르지 않아서 오히려 김빠지는 느낌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른다. 시대가 바뀌기는 했다. 지금은 선택받아 결혼한 여자들이, 여전히 스스로 선택하는 대신, 결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얼어붙지도 않은, 비혼의 삶을 부러워한다. 여전히 일부는 비혼 여성을 비웃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위로하지만 적어도 몇몇은 솔직하다. 토끼같은 자식을 키우고 있는 것을 후회하진 않지만, 자유롭고 싶다고. 엄마 이전에, 사람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 욕망이 이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으면 좋겠다. 죄책감은 당신의 몫이아니니까. 그럼에도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겠지.

아니 에르노의 시대는 가전제품 회사들과 가족임금을 추구하는 회사들의 교묘한 결탁으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셀프감금을 하면서 그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하던 시대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의 저임금 노동, 돌봄 노동, 돌봄의 의무가 없어도 업무 외의 돌봄이 강요되는 사회생활, 자아실현을 위해서 또는 집사람(housewife)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생계가 위태로우면 임금노동과 무임금 가사노동을 병행하는 것이, 이 사회가 ‘엄마’라는 이름에게 강요하는 의무이다. 슈퍼우먼이 많아질수록 현실의 여성들은 말라죽는다. 더구나 돌봄의 유료화가 미천한 우리나라에서는, 결국 슈퍼우먼조차 그녀들의 엄마, 친정모에게 의존한다. 이게 말이 됨?

여성의 기구한 운명을 더 불행한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은 폭력이다. 왜 여성은 기구해야 하나? 아니 에르노가 80년 전에 태어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계속 소환하는 김지영은 고작 한국나이로 40세일 뿐이다. 지금 잘나가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알파걸의 시각에서는 기구하기엔 너무나도 젊다. 그보다는 젊다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 모든 과정을 세밀하게 꺼내놓은 작업은 말 그대로 눈이 부시다. 아직 나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사실적인 언어가 더 많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 에르노를 포함해서, 뼈 때리는 언어로 유명한 여성 작가들을 부지런히 더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진솔하게, 내장까지 꺼내보일 자신은 없지만, 이런 작가들의 언어를 통해서 내면을 정리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픽션의 속시원한 복수는 없지만, 팩트의 속시원한 해장이 기다리는 책, <얼어붙은 여자>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 지원받아 지극히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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