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들에게 저항하는 건 훨씬 어렵다.

당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하도록 당신을 이끄는 데 있어서

친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크리스티앙 보앵의 가벼운 마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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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아래 또 내가 앉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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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죽으면,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세워지는 앞날의 계획들

(새로운 가구 등등): 미래에 대한 광적인 집착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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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밭을 지나며 - 나희덕


 

가을엔 나비조차 낮게 나는가

내려놓을 것이 있다는 듯

부려야 할 몸이 무겁다는 듯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달았던 사과나무,

열매를 다 내려놓고 난 뒤에도

그 휘어진 빈 가지는 펴지지 않는

아직 짊어질 게 남았다는 듯

그에겐 허공이, 열매의 자리마다 비어 있는

허공이 열배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빈 가지에 나비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다

무슨 축복처럼 눈 앞이 환해진다

, 네가, 네가, 어디선가 나를 내려놓았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사과나무 그늘이 환해질 수 있을까

꿰맨 자국 하나 없는 나비의 날개보다

오늘은 내 百結백결의 옷이 한결 가볍구나

아주 뒤늦게 툭, 떨어지는 사과 한알

사과 한알을 내려놓는 데

오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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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나만의 사전이 있다. 날씨가 나쁘고 불편할 때, 나는 시간을 흘려보낸다.

날씨가 좋을 때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 시간을 다시 어루만지고

시간에 매달린다. 나쁜 날엔 달려야하고, 좋은 날엔 다시 앉아야 한다

    앙투안 콩파뇽의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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