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전 -박정대


 

아주 늦은 저녁

다시 아비정전을 보네

늘 상 그렇듯이, 불을 끄고 누워

저 홀로 반짝이는 화면을 보네

야자수 정글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면서 영화는 시작되네.

코끼리도 보이지 않은 그 야자수 정글은 필리핀이었을까?

두만강변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속 비 내리는 숲이었을까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나는 끝내 코끼리처럼 말이 없네

비 내리는 화요일의 기억들, 기억들이 부슬부슬 비 내리는 화요일

화요일에 비가 내리는데 존 레논은 왜 오노 요코를 사랑했던 걸까

존 레논은 어디에서 죽었지, 정글이었나

삼류 영화 같은 내 기억의 한구석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어디에서 죽었지

필리핀의 야자수 정글 속이었나

햇살 가득한 내 청춘의 뒤뜰이었나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한 잔의 술을 홀짝거리네

왜 죽었지, 취하지도 않는 저녁 아비는 열차에서 죽어가고

열차는 야자수 정글 사이를 통과해 가는데

불 꺼진 내 마음이 멀리서 반짝이는 혹성 하나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는

, 비 내리는

정전이 씌어지는 음악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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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책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아,

하지만 책들은 은밀히 그대 자신으로 되돌아가도록 가르쳐주지.

 

왜 사람들은 책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

책은 때때로 사람들만큼이나 현명하고 재미있지만,

사람들처럼 강요하지는 않는다.

    헤르만 헤세의 문장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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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의 생 - 전동균



아파트 뒤 공터에

나무상자 하나 버러져 있다 


과일이 담겼을 땐 향기를 내뿜다가 

쓰레기가 담겼을 땐

악취를 내뿜으며

햇빛과 비바람에 부서져 가는

나무상자의 사랑과 

슬픔과

굴욕, 


어느 날은 천사가 다녀가고 

또 어느 날은 

악마가 다녀가는 나의 몸

내 생의 상자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겨 있는지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바람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묻고 싶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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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깊이는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많고,

모두 이기심과 연관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가 우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크리스티앙 보앵의 가벼운 마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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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강 - 박정대

 

 

 

생강이란 김치소의 일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다

일시적으론 맵지만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생강을 향한, 생강을 생각하는 이의 열정이다

청춘에서 생강맛이 난다면 그것은 청춘이 인생을 잘 통과하고 잇다는 투박하고도 아름다운 증거

 

청춘이란 생강을 씨을 수 잇는 용기

입안의 생강을 뱉어 내지 않고 끝까지 맛볼 수 잇는 모험심

때로는 스무 살 청년이 일흔 노인보다 당연히 더 젊어야 한다

생강을 먹고 오래도록 생각을 해야 사람은 늙지 않는다

평생 생강을 먹는 이는 생각이 늙지 않는다

앵과 앙(1)의 아름다운 시니피앙 사이를 걸어본 자는 안다

생과 강 사이를 건너  본 자는 안다

아름다운 상념 속으로의 산책이 사람을 얼마나 건강하게 만드는지

 

생각의 산책이 사라질 때

불안은 끊임없이 영혼을 잠식하고

영혼은 무게를 상실한 채 먼지가 되어 간다

 

일흔이든 스무 살이든 인간의 가슴 속에는

생강에 끌리는 마음

생강을 씹었을 때 느끼는 고통과 환희에 대한 감각

그것을 탐구하려는 열정이 있다

우리 모두는 가슴 속에 잇는 우체국에 들려

한 박스의 생강을 신에게 택배로 보내야 한다

신으로부터 조만간 답신이 오리라

아름다운 영혼이여, 생강은 맛있다

그대의 생각은 여전히 참 맛있다

 

생강차가 끓고 잇다

인적이 끊긴 산골의 다락방이 눈에 덮여 갈 때

참매는 두 눈을 부릎뜨고 겨울의 한복판을 날고 있다

고립은 고독이 아니라 생강차의 여유이며

생강의 청춘을 지나온 자가 마시는 한잔의 휴식이다

눈발은 여전히 날리는데 광활한 생각의 영토에서

여전히 생강차는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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