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 류인서

 

 

늑골 가운데에다 나 활 하나 숨겨두고 있네

심장에서 파낸 석촉의 화살

팽팽한 시위에 메워 이제 당기려 하네

 

하늘은 오래 명치끝에 매달려

이슬보다 더 고요하네

나의 과녁은

별이나 꽃처럼 눈부신 것이 아니네

빛살만 골라 밟던 바람이나

그늘 비껴가는 어둠 또한 겨누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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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무릇 - 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는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 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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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 연구 1 - 고정희

 


꽃은 누구에게나 아름답습니다
호박꽃보다야 장미가 아름답고요
감꽃보다야 백목련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우아하게 어우러진 꽃밭 앞에서
누군들 살의를 떠올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의 적이 숨어 있다면
그곳은 아름다운 꽃밭 속일 것입니다

어여쁜 말들을 고르고 나서도 저는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모나고 미운 말
건방지게 개성이 강한 말
누구에게나 익숙치 못한 말
서릿발 서린 말들이란 죄다
자르고 자르고 자르다보니
남은 건 다름아닌
미끄럼타기 쉬운 말
찬양하기 좋은 말
포장하기 편한 말뿐이었습니다
썩기로 작정한 뜻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에도
몹쓸 괴질이 숨을 수 있다면
그것은 통과된 말들이 모인 글밭일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데 서른 다섯 해가 걸렸다니 원

 

호박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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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시간 -김재진


내 생의 남은 시간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라.
그러고도 더 남는 것 있다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앉아 있고만 싶어라.
앉아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적막한 호수처럼 깊어지고 싶어라.
부질없는 이름과 실없는 다툼
상처준 이 있으면 용서받고 싶어라.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할 시간 허용된다면
아낌없이 주기만 하리라.
주고서 행여 돌려받지 못해도
준 것에 만족하며 침묵하리라

 

 

 다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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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을 파는 꽃집 - 용혜원

 

 

꽃집에서

가을을 팔고 있습니다

 

가을 연인같은 갈대와

마른 나무가지

그리고 가을 꽃들

가을이 다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가을 바람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거리에서 가슴으로 느껴 보세요

사람들 속에서도 불어 오니까요

어느 사이에

그대 가슴에도 불고 있지 않나요

 

가을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

가을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가을을 파는 꽃집으로

다 찾아오세요

 

가을을 팝니다

원하는 만큼 팔고 있습니다

고독은 덤으로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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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1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랑 사진이랑 참 잘 어울리는것 같아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