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자무시 67 행성 -박정대


 

25

그녀가 나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네, 나의 집은 그대, 나의 집은 가난한 그대, 혀 속에 꿈꾸는 말들을 간직한 그대, 눈동자 속에 이 세상에서 가장 맑은 물방울을 가진 그대, 밤이면 꿈꾸는 말들을 타고 달빛 아래 초원을 달리는 그대, 밤새 초원을 말달리며 영혼의 국경을 돌아보다 새벽이면 다시 나의 숨결 속으로 돌아오는 그대, 발칸의 슬픈 전설 같은 그대, 흉노족 같은 그대, 나밖에 가진 게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그대, 그대가 나의 집이라고 나는 감히 심장의 불꽃으로 대답했네


27

낙타는 사막의 배라고 했던가요, 그러나 낙타에 앉아 흑맥주를 홀짝거리는 검은 밤이면 나는 고비와 타클라마칸을 지나 아프리카의 사하라로 가요, 내 혈액형의 일부는 그곳으로부터 왔어요, 뜨거운 모래의 심장으로부터, 한밤에도 식지 않는 태양의 기억으로부터, 사막을 횡단하던 낙타의 뜨거운 발바닥 그 견딜 수 없는 생으로부터요, 낙타가 사막의 배라고요, 낙타는 사막의 시예요, 온몸으로 온 발바닥으로 이번 생을 횡단하는 가장 뜨거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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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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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대하여 이성복


 

때로 나무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

이다 나무의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도 잎새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

어서가 아니라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왼종일 마냥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아래로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

을 것이다 몸통과 가지와 잎새를 고스란히 제 뿌리

밑에 묻어 두고언젠가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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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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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몇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未知修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 신년!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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