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전 -박정대


 

아주 늦은 저녁

다시 아비정전을 보네

늘 상 그렇듯이, 불을 끄고 누워

저 홀로 반짝이는 화면을 보네

야자수 정글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면서 영화는 시작되네.

코끼리도 보이지 않은 그 야자수 정글은 필리핀이었을까?

두만강변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속 비 내리는 숲이었을까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나는 끝내 코끼리처럼 말이 없네

비 내리는 화요일의 기억들, 기억들이 부슬부슬 비 내리는 화요일

화요일에 비가 내리는데 존 레논은 왜 오노 요코를 사랑했던 걸까

존 레논은 어디에서 죽었지, 정글이었나

삼류 영화 같은 내 기억의 한구석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어디에서 죽었지

필리핀의 야자수 정글 속이었나

햇살 가득한 내 청춘의 뒤뜰이었나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한 잔의 술을 홀짝거리네

왜 죽었지, 취하지도 않는 저녁 아비는 열차에서 죽어가고

열차는 야자수 정글 사이를 통과해 가는데

불 꺼진 내 마음이 멀리서 반짝이는 혹성 하나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는

, 비 내리는

정전이 씌어지는 음악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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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의 생 - 전동균



아파트 뒤 공터에

나무상자 하나 버러져 있다 


과일이 담겼을 땐 향기를 내뿜다가 

쓰레기가 담겼을 땐

악취를 내뿜으며

햇빛과 비바람에 부서져 가는

나무상자의 사랑과 

슬픔과

굴욕, 


어느 날은 천사가 다녀가고 

또 어느 날은 

악마가 다녀가는 나의 몸

내 생의 상자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겨 있는지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바람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묻고 싶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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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강 - 박정대

 

 

 

생강이란 김치소의 일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다

일시적으론 맵지만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생강을 향한, 생강을 생각하는 이의 열정이다

청춘에서 생강맛이 난다면 그것은 청춘이 인생을 잘 통과하고 잇다는 투박하고도 아름다운 증거

 

청춘이란 생강을 씨을 수 잇는 용기

입안의 생강을 뱉어 내지 않고 끝까지 맛볼 수 잇는 모험심

때로는 스무 살 청년이 일흔 노인보다 당연히 더 젊어야 한다

생강을 먹고 오래도록 생각을 해야 사람은 늙지 않는다

평생 생강을 먹는 이는 생각이 늙지 않는다

앵과 앙(1)의 아름다운 시니피앙 사이를 걸어본 자는 안다

생과 강 사이를 건너  본 자는 안다

아름다운 상념 속으로의 산책이 사람을 얼마나 건강하게 만드는지

 

생각의 산책이 사라질 때

불안은 끊임없이 영혼을 잠식하고

영혼은 무게를 상실한 채 먼지가 되어 간다

 

일흔이든 스무 살이든 인간의 가슴 속에는

생강에 끌리는 마음

생강을 씹었을 때 느끼는 고통과 환희에 대한 감각

그것을 탐구하려는 열정이 있다

우리 모두는 가슴 속에 잇는 우체국에 들려

한 박스의 생강을 신에게 택배로 보내야 한다

신으로부터 조만간 답신이 오리라

아름다운 영혼이여, 생강은 맛있다

그대의 생각은 여전히 참 맛있다

 

생강차가 끓고 잇다

인적이 끊긴 산골의 다락방이 눈에 덮여 갈 때

참매는 두 눈을 부릎뜨고 겨울의 한복판을 날고 있다

고립은 고독이 아니라 생강차의 여유이며

생강의 청춘을 지나온 자가 마시는 한잔의 휴식이다

눈발은 여전히 날리는데 광활한 생각의 영토에서

여전히 생강차는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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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아래 또 내가 앉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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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밭을 지나며 - 나희덕


 

가을엔 나비조차 낮게 나는가

내려놓을 것이 있다는 듯

부려야 할 몸이 무겁다는 듯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달았던 사과나무,

열매를 다 내려놓고 난 뒤에도

그 휘어진 빈 가지는 펴지지 않는

아직 짊어질 게 남았다는 듯

그에겐 허공이, 열매의 자리마다 비어 있는

허공이 열배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빈 가지에 나비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다

무슨 축복처럼 눈 앞이 환해진다

, 네가, 네가, 어디선가 나를 내려놓았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사과나무 그늘이 환해질 수 있을까

꿰맨 자국 하나 없는 나비의 날개보다

오늘은 내 百結백결의 옷이 한결 가볍구나

아주 뒤늦게 툭, 떨어지는 사과 한알

사과 한알을 내려놓는 데

오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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