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다 - 나희덕


 

 좋아하는 동사를 묻자 그는

 흐르다, 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 동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가 흘러내리다, 의 동의어라는 것을

 

 그저 수평적 움직임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눈물의 수직성을

 

 눈에서 입술로, 상류에서 하류로, 젊음에서 늙음으로,

 아 있음에서 죽음으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어제에

 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최초의 순간에서 점점 멀어지는

 방식으로,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방향으로, 기억

 의 밀도가 높은 시간에서 낮은 시간으로

 

 흐르는 모든 존재는

 흐르는 동시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흘러오르다, 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고여 있거나

 갇혀 있지 않는 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물과 흙

 피와 눈물

 세포와 원소

 사랑과 우정

 또는 시간과 기억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끝내 우리를 데려다 부려놓는 곳

 어떤 하류의 퇴적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라는 동사는 흐르지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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