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세탁선  - 박정대 
 
 
 내가 사는 세탁선 아파트에 가을이 왔어요
가늘고 긴 목조 건물의 복도를 따라 걸으면
삐걱삐걱 가을이 소리나요
세상이 온통 출렁이는 물결 같아서
나는 세탁선 아파트에서 추억을 세탁하며 한 시절을 보내요
내가 사는 낡은 세탁선 아파트에 가을이 왔어요
당신을 잊기 위해 지난 여름 무작정 나는 이곳으로 왔지요
테르트르 광장을 지나 구릉을 한참 걸어 올라가면
내가 사는 낡은 세탁선 아파트가 있어요

세탁선 아파트,
걸으면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는 가늘고 긴 목조 건물 세탁선
그 모양이 마치 세느강 위에 떠 있던 세탁선 같아서
시인 막스 자콥이 붙인 이름이라지요
피카소가 연인 올리비에와 4년간 살았던 목조 아파트 세탁선
원래 세탁선 아파트는 에밀 구도 광장 쪽에 있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목조 아파트 세탁선은
테르트르 광장에서 라펭 아질 쪽으로 올라가는 구릉에 있어요
나는 그냥 내가 사는 목조 건물을 세탁선이라고 부른답니다
내가 걸어온 길들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기 때문이지요

나의 아름다운 세탁선에 가을이 왔어요
세탁물들이 베란다에 걸려 돛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요
턴테이블에 음악을 걸어놓지 않아도 유리창들은 음악 소리를 내요
한 무리의 새들이 나의 아름다운 세탁선을 물고 바람 속을 항해해요
추억이 없으니 미래가 없어요, 미래가 없는 곳에도 밤이 오고
별들이 떠요, 나의 아름다운 세탁선에 가을의 별들이 떴어요
나의 세탁선 아래로는 긴 망각의 운하를 따라 추억이 물고기처럼 흘러가요
흘러가는 한 세월의 강물 위에서 나의 낡고 아름다운 세탁선은
그냥 그렇게 홀로 흘러갑니다, 가을처럼 깊게
겨울보다 더 깊은 곳으로, 안녕
그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