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백야 문학과지성 시인선 487
이윤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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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고, 사람이 변하기도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내가 어떤 면에서 변했는지도 알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어렸을 때와 여전히 같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이게 정말 일관성이 있는 분야가 아니라서 그때그때마다 눈치껏 경험으로 알아차려야 하는데, 내 일임에도 나를 잘 모르겠다. 이래서야 세상 어느 일에 대해서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워지는데. 


이 시인의 시를 좋다고 느꼈다고 기억한다. 다시 들춰보지는 않았지만 맞을 것이다. 이 시집도 그래서 펼쳐본 것인데, 아, 이랬던가,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변한 쪽이 누구인지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변한 건지, 작가가 변한 건지, 혹은 내가 변하지 않은 건지. 작가의 예전 시집과 이 시집을 나란히 놓고 비교까지 해 볼 생각은 전혀 없고 오로지 내 인상에 남은 기억만으로 비교하는 건데 나는 안 변하고 작가는 변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에 이르게 된다.(맞고 안 맞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쨌든 이 시집에 내가 빠지지 못했다는 말이니까.)


이 시집의 시들은 우리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노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세상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시가 마음에 들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아닌가?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모름지기 시라면 소설과 달리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물러나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던가? 이렇게 쓰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의 고단한 문제에서 물러나 있는 시들을 더 좋아하면서 아닌 척 나를 속이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변하지 않는 위선 하나.  


개운하지 않은 독서다. 나를 만나는 일은 때로 이렇게 쓴 맛이다. (y에서 옮김20181216)

저 강물을 어루만지는 햇볕의 잔상이
그대 마음을 떠나온 지 오래 - P15

연잎에 흩어진 물방울
연꽃잎이 감싸 안은 허공을 보았다 - P20

정상이 되기를 포기하면
아픔이 사라지는 이상한 밤이 찾아오지
각자의 간격을 침범하지 않는 구름들이
서로의 기억에 경계를 구분 짓고
머물러왔지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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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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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남자의 복식 문화에서 모자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될지.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가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이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남자의 모자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이건 꽤 아쉬운 부분이다. 모자의 속성을 모르니 모자에 대한 추리가 전혀 안 된다.(다른 쪽 추리가 된다는 말은 또 아니고) 심지어는 인물들이 설명하는 내용을 읽고도 미처 이해를 못하기도 했으니.  


이번 책에서는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있는 로마 극장이 사건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연극 도중에 객석에서 시체를 발견하게 만들었으니, 작가는 퍽 난감한 사정으로 소설을 전개시킨다. 관람객을 비롯하여 극장 안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용의자가 되는 상황, 퀸 경감과 아들 엘러리는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도 끝내 잘 풀어 낸다. 그것도 모자를 들먹이면서. 모자 안에 무언가를 넣을 수 있다는 게 나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되지만. 고급 남성복만큼이나 대접을 받는다는 그런 모자를 실제로 한번 보면 대충이나마 알아챌 수 있을 것인지.   


일반적으로 나쁜 평판을 받는 사람이 살인의 희생자가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평판이 나빴으니 그에 따라 의심 가는 용의자는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희생자가 살아서 사람들을 더 많이 괴롭혔을수록 범인을 찾는 쪽에서는 마음이 무거울 법도 한데.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한가? 글쎄, 그렇다고 잘 죽었다고 덮어 둘 수도 없는 노릇, 여러 모로 딱한 사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갇힌 공간에서 범인을 찾도록 유도하는 작가의 서술 방식은 상당히 흥미롭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느꼈던 새로움을 이 작가의 글에서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1920~30년대에 쓴 소설이라는 게 더더욱 신기하게 여겨진다. 요즘의 추리소설 작가들 작품에서 받았던 놀라움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지경이다. 추리 기법은 발전하는 게 아닌 모양이군 싶은 인상마저 받았기에.   


더울 때는 역시 추리소설이다. 이것저것 현실을 잊고 작품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 주니까. (y에서 옮김202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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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문학동네 시집 22
이윤학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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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읽으면 촌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정작 촌스러운 표현을 찾을 수 없는 시들, 그래서 도시적인가 싶어 굳이 도시스러운 표현을 찾으려고 하면 또 숨어버리고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의 애달픈 목숨들이 시집 곳곳에서 떨고 있는 것만 같다. 강한 것보다는 약하고 여린 것들, 싸워 이기고 싶기보다는 보듬고 안아주면서 오로지 보살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숨어사는 것들의 작은 목소리를 대신하며.


시집 표지의 시인은 밝게 웃고 있는데 나는 시집을 읽으면서 세상의 여린 목숨들만 자꾸 생각했다. 강하고 힘센 것들은 시인이 노래할 수 있는 소재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의아해 하면서, 왜 이토록 아프고 지치고 슬픈 영혼들만 눈에 띄는 것일까 새삼스러워하면서. 시는 본질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인 것일까 체념조차 하면서.

읽어 본다면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너무도 친숙한 우리 주위의 풍경들이 조금은 낯선 표정을 지으며 자리하고 있을 시편들을 통해 지금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으로부터 정말 새롭게도 고마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락실이나, 약국이나, 쓰레기통이라고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상깊은구절]

안 보이는 곳의 상처를
날개로 퍼낼 수 있다면

비둘기들은 이제
나뭇가지에 앉아
날갯죽지 속에
고개를 넣고 있다

수은등이,
나뭇가지 위의 거지들을 비추고 있다
거지들은 나무의 상처인 열매들처럼
제 몸으로 둥지를 틀고 있다
 

(y에서 옮김200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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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코와 술 24
신큐 치에 지음, 문기업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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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한 장면 한 장면에 주의하면서 본다. 와카코의 술을 사랑하는 눈빛에도, 술과 어울리는 맛있는 안주에도, 주인공이 되는 여러 종류의 술에도, 무엇보다 한 잔의 술에 하루의 피로를 씻고 새 날을 기대하는 와카코의 독백에도, 어느 하나 빠뜨리고 싶은 것이 없다. 절대로 과음하지 않는, 딱 마셔도 좋을 만큼만 마시고 즐기는, 혼자서도 충분히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살 수 있다는, 작가가 자신을 투영하였을 와카코의 절제하는 자세가 부러울 따름이다. 만화라서 가능한가?


술을 잘 못 마시고, 맛있는 안주에 대한 호기심도 전혀 없는 나로서는 이 만화가 나올 때마다 사서 보는 내가 도로 신기하다. 지금보다 아주 나중에도 다시 꺼내 보아야지 하는 만화 시리즈다. 내 노년의 벗으로, 지금은 눈이 이만큼 밝을 때 좀 더 모아 두어야 하니.  


시리즈가 길어지면서 와카코의 독백에도 작가의 철학이 보인다. 이제야 내가 발견한 것일까? 작가는 진작부터 말해 왔는데? 앞서 본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지금의 발견에만 주목한다. 이전 책을 꺼내어 있나 없나 확인하고 비교해 볼 생각도 없다. 그저 지금의 장면들, 지금의 감상에만 빠져든다. 지금 마시는 술 한잔이 충분하다는 듯이.


봐도 봐도 부러운 장면, 혼자 들어가서 호젓하게 술 한 잔과 안주 한 접시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남의 나라 현실. 이도저도 못하는 나는 이 만화로 달랜다. 이대로 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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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유희경 지음 / 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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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위트 앤 시니컬이라는 시집 서점이 신촌에 있다는 기사를 보고 찾아간 적이 있다. 약도를 보고 몇 바퀴를 돌면서 찾았는데 끝내 보이지 않았다. 곧 알아냈다. 혜화로 옮겼다는 것을. 이후 혜화동에 갔다가 지나가면서 2층에 있다는 이 서점을 봤다. 일정에 쫓겨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고, 언젠가는... 하는 기대감만 품었다. 서울에 살지 않는 나로서는 서점에 들러 보는 이 일마저도 계획과 실행에 상당한 준비가 있어야 하니까. 그런 와중에 코로나 19로 인해 내 서울 나들이는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는데. 마침내 이 책을 보았다. 이제는 더 가 보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생각만 했다. 한번은 가 보고 싶다. 가서 두 시간 정도 머물면서 놀면서 헤매고 싶다. 그러려면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야 하고 또 지하철을 타야 하고 서점에서 머무르겠다고 다짐한 시간과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릴 시간을 합하면 아무래도 하루로는 어려울 것 같은데, 나는 이 여정을 위해 1박 2일 이상의 계획을 정녕 세워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이게 또 뭐라고 못하고 있는 걸까......


서점을 지키는 시인도 모르는 척 살그머니 지켜 보고 싶고, 이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도 고르고 싶고(사인은 꼭 안 받아도 괜찮음),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 중 미처 갖지 못한 책을 찾아내어 카트에 담고 싶고, 그래서 다행히도 한아름이 넘으면 박스에 담아 택배로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내가 보낸 책 택배상자를 내가 받아 풀어 보고 싶다는... 그리고 한 권씩 꺼내어 나란히 줄 세워 놓고 골라서 보고 싶다는... 이런 바람들로.    


내가 지금 시를 읽고 지내는 마음만큼만, 다른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시집을 모으는 일에는 정성을 들이는 만큼만, 시로 내 삶의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같이 지내겠다는 바람만큼만.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본 것이지만 위트 앤 시니컬에 가서 꼭 구해 오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y에서 옮김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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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5 2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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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7 15: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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