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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푸른 저녁 - <입 속의 검은 잎> 발간 30주년 기념 젊은 시인 88 트리뷰트 시집
강성은 외 87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3월
평점 :
기형도 시인의 시집 발간 기념으로 젊은 시인 88명이 한 편 씩 써 낸 시를 모은 책이다. 시인들이 뜻을 모아 낸 시집을 읽으면 여러 모로 좋다.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보는 것도 몰랐던 시인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도 같은 뜻에 다른 태도를 취하는 방식을 비교해 보는 것도. 아쉬운 게 있기는 하지만 이건 많은 좋은 점으로 그냥 덮자. 굳이 밝히지 않아도 좋을 일이니.
차례에는 시인들을 가나다 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본문에서는 이 차례를 따르지만 각각의 작품에는 시인의 이름을 넣지 않은 채로 두었다. 이 편집 덕분에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로 읽어 나갔다. 이 방법도 편견이 생기지 않아 괜찮게 느껴졌다. 그리고 세 편의 시를 얻었다. 시를 짚어 놓고 차례로 돌아와 시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신철규와 오은, 이렇게 만난 두 이름이 더욱 반가웠다. 이우성은 새로 만나 또 반가웠고.
좋아하는 시인을 기리는 일은 각자 잘하는 것으로 하면 되겠다. 시인은 시를 쓰는 것으로 독자는 시를 읽는 것으로. 소설가들도 이런 방식으로 소설집을 묶어 내기도 하던데 독자로서는 아무려나 좋은 선물로 여겨진다. (y에서 옮김20210908)
86-87
[다른 나라에서]
호텔 지배인이 20년 만에 눈이 내렸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본 사람도 있다고 했다
당신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며 웃었다
우리는 겨울에 눈을 지겹도록 본다고 했다
해변에 닿기 위해서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야 했다
터널을 지나자 눈은 금세 비로 바뀌었다
두 손바닥에 담긴 물처럼 바다가 거기 있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바다는 흘러넘치지 않았다
물새 두 마리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날개를 접고 파도 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내란을 기획하는 밀서에 찍힌 인장처럼 미동도 없이
서로 마주 보다가 등을 돌리기도 했다
생각의 알을 품고
누가 먼저 날아갈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눈 감으면 어디나 고향이었다
눈을 수평선처럼 가늘게 뜨면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수평선에서부터 앉은걸음으로 다가오던 파도
해변에 이르러 무릎을 꿇으며 새하얀 레이스를 펼친다
우리가 무릎 꿇은 자리마다 그림자는 검은 울음을 남겼다
해마다 늘어가는
몸의 구멍들을 담아내지 못하는 그림자는 흐려지기만 한다
젖지 않는 그림자를 앞에 두고 바다는
물거품이 된 그물을 천천히 거두어들인다
우리는 우산을 나눠 쓰고 등을 맞대고 울었다
나는 바다를 보고 너는 육지를 보고 있었다
눈 뜨면 누구나 이방인이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신비롭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았다
편지가 든 평이 해변 쪽으로 계속 밀려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외국어로 쓴 편지가
(신철규)
105-107
[그]
우연찮게 그 길을 지나치게 되었다
우연찮다는 것은
꼭 우연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의도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길 한복판에 그가 서 있었다
필연적인 자세로
반드시의 직립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눈빛으로
사람들은 길가로만 걸었다
자신이 있을 곳은 귀퉁이라는 듯이
언저리에서 맴돌다 사라지겠다는 듯이
하나같이 표정이 없었다
무표정도 표정이다
침묵이 말이듯이
어느 때는 가장 강력한 말이 되기도 하듯이
끈질기게 묵묵했다
묵묵하게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보도블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림자 하나도 빠질 수 없을 만큼 틈이 없었다
견고했다
블록을 들어내면 암호가 있을 것 같았다
해독될 수 없는 암호
마침 아무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암호
마침내 해독되지 않는 암호
때마침 칼바람이 불어왔다
길 한복판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거기에 그가 서 있었다
예외처럼
맥없이 풀려버린 암호처럼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리며
비틀거리며
입체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평면처럼
고개를 수그려
맨홀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맨홀에 빨려 들어갈 듯
지나칠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러나 나는 길로 나아갔다
길 한복판으로
공사 현장으로
전속력으로
흔들리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고
리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구두는 필요하다고
함구한 채로 포효했다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붙들어 맨 풍경이 있었다
지나치되
지나치지만은 않아서 기억이 되었다
(오은)
136-137
[슬픔은 까맣고 까마득하고]
다른 새는 모든 새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합니다
새들에 의지해 방향을 가늠할 때
여행에서 돌아와 없는 새를 찾을 때
다른 새의 기억 속에 어두운 물질이 있었습니다
모호한 살 속으로 부리를 넣으며
다른 새는 몸의 소리를 느껴보았습니다
울음소리가 났어
빛처럼 길었지
그러나 의지를 지우려고 깨닫는 것은 아닐 겁니다
기억해야 할 게 남아 있는 것 같아서
하늘을 보는 것이겠지요
공기를 쪼아 슬픔 앞에 놓아두고
다른 새는 얇아지는 가지를 쥡니다
어둠을 마십니다. 안 보일 때까지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야 할 거야
지워질 때까지
주머니에 넣은 손처럼 어둠을 보고 있습니다
돌아보는 것을 잊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가에 서서 의미 없이 물수제비를 뜨는 마음은 얼마나 서늘한 이별의 언어를 지나온 것입니까
낯선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자유는 무엇을 상상합니까
(이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