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권도희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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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기사를 만나는 일이 있다. 범인으로 알고 법 집행을 했는데, 범인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진짜 범인은 따로 있었다는 이야기. 이번 소설은 이것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읽기 시작하면서는 단순히 범인 입장만 생각했다. 범인으로 취급받아 억울했던 자의 심정과 처지, 헤아릴 수 없는 그 막막함만 짐작해 보려 했는데 글을 읽어 나갈수록 그것만 고려할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작가는 도대체 어찌된 사람인가.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하면, 얼마나 논리력이 뛰어나면, 얼마나 사람에 대한 통찰이 깊으면 이런 작품들을 써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추리 소설이 단지 재미로 읽어 보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까지 갖도록 해 준다. 


가족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머니가 살해당했고 아들이 범인이라고 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명백히 끝난 사건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범인인 줄 알았던 아들이 범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억울한 누명을 쓴 아들은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시 처음부터 범인을 찾아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남은 가족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느 누구도 용의자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 가족이라고 하면서도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는 상황, 외롭고 무섭고 이런 게 바로 지옥일 것이다. 작가는 이 상황을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라 그려내면서 집중하게 만든다. 모두 범인일 수 있을 것 같다는 가정, 그게 얼마나 무섭고 기막힌 일일 것인가. 


선의에 대해서도 새로 생각해 본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고 행하는 일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똑같은 무게와 감정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 나로서는 선의였으나 상대에게는 부담이나 강요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따라서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진리 같은 말-나와 너는 같지 않다는 것. 이런 식의 부담이 어떤 이에게는 살의로 커질 수도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 사람이란 존재의 불완전한 면을 짚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느 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인지. 


좋아서 좋다고 하는 말과 행동이나, 싫어서 싫다고 하는 말과 행동이나, 자칫 어떤 사람에게는 무기가 되고 상처가 되기도 한단다. 조심하며 살아야 할 일이다.  (y에서 옮김20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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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혜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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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숨에 값이 있을까? 어떤 사람은 비싸고 어떤 사람은 값싸고 어떤 사람은 귀해서 함부로 죽이면 안 되고 어떤 사람은 죽일 만하니 죽여도 괜찮고...... 그런 게 있을까? 있다면 누가 재단하는 것이지? 신도 조물주도 아닌 같은 입장의 사람이라면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 소설에서는 사건들이 바깥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푸아로 경감은 중간중간 알아챈다고 하고 있는데도 나는 아무런 눈치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얻은 결말, 좀 황당하고 또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랬다고? 죽일 만한 사람이라 죽였고 어쩌다 운이 나빠 죽어야 했다고? 살인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변명도 핑계도 아닌 당당한 변호였다. 자신만큼은 세상에 특히 영국에 너무도 이로운 사람이라는, 그래서 그래도 된다고 여긴다는 그의 생각 자체가 끔찍해 보였다. 요즘에도 이런 뻔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 것인지.


100년 전의 배경이라 아득한 옛날 일일 것 같아도 사람의 본성만큼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는 모양이다. 이기심이라든가 질투와 시기라든가,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라든가. 재미있게 읽고는 매번 절망한다. 


이 작가의 소설 시리즈 중 안 읽은 것으로 한 권(뮤스가의 살인)이 남아 있다. 나란히 세워 놓은 책등의 제목들을 보고 있으면 마냥 흐뭇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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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잔 인생 한입 10
라즈웰 호소키 지음, 이재경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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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는 일도 그러할까. 마셔도 마셔도 외롭고 부족하고 씁쓸한 맛에 애타는 것. 이번 참에서는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어진다. 만화로만 보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구나, 나도 한번 마셔 보고 싶구나, 마시고 먹고 취해도 보고 싶구나. 그 끝이 고단한 숙취일지라도. 괜히 이래 본다. 못할 것을 아니까.


인류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술을 만들어 마셔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만화만 봐도 지역별 문화의 특성을 술로 알아볼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살고 있는 땅과 바다 근처에서 나는 식재료로 만들어 먹고 마셨을 것이니, 지금이야 줄어들고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그 옛날 그 시절에는 흔한 먹거리였을 재료들. 이번 호에서는 일본에서 고래 고기가 익숙한 먹거리였음을 보여 준다. 섬나라였고, 해안에서도 쉽게 잡을 수 있는 물고기였을 것이고, 부피가 컸으니 많은 이들이 먹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런데 이제는 전 세계 환경론자들이 더 이상 잡지 말고 보존하자고 하니 오랜 세월 즐겨 먹었던 입장에서는 서운하기도 하겠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먹거리 문화가 있어 짐작도 되는 바이고.


술과 맛있는 안주에 대한 작가의 지극한 사랑이 귀엽기 그지없다. 그래서 이 만화를 꾸준히 그려 낼 수 있는 것일 테지. 대상은 달라도 자신만의 사랑스러운 탐구 대상을 가지는 것이 삶에 필요한 요소라는 것을, 그것이 오래오래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면 더욱 좋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건강해야겠지, 무엇보다도.  (y에서 옮김202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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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23 소설 보다
김기태.성해나.예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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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상황의 본질이 갈등이라서 읽을 때마다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늘 고달프다. 이런 기분을 얻자고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닌데 주제의 무게가 고달픈 쪽으로 더 기울면 회의가 생기곤 한다. 


세 편의 소설. 작품이 있고 작가와의 인터뷰가 있고. 작가가 작품만으로 다하지 못한 말-혹은 작가는 충분히 말했으나 그래도 독자를 더 돕겠다는 의도로-을 인터뷰로 보충하는 구성인데 이번 호에서는 반가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이 작품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작가로서 어떤 바람을 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건지 등등에 대해 내놓은 말들이 예전 책들에 비해 썩 가까이 다가온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작가 쪽으로 다가선 것일 수도 있고.


김기태의 ‘보편 교양’은 꽤 껄끄러운 맛으로 읽었다. 배경이 낯설지 않아서이다. 곽과 같은 선생님, 은재와 같은 학생. 그리고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실과 수업. 말하고 싶은 것보다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더 강해서 소설은 내내 불편했다. 어느 누구도 살기 쉬운 게 아니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게 속상하기도 했고.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도 오랜 시간 이 수레바퀴 아래를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성해나의 ‘혼모노’. 제목에 쓰인 말이 생소해서 찾아봐야 했다. 인터뷰에서 작가가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는 한데 이 말을 이렇게 알게 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무속이라는 배경과 소재 역시 내가 즐겨 읽는 분야가 아니라 글을 읽는 데에 성실하지 못했다. 


예소연의 ‘우리는 계절마다’도 읽기 편한 소설은 아니었다. 폭력과 불행과 분노를 겪으며 자라는 청소년의 이야기라니. 현실에 이런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소설로 확인하는 일이 달갑지는 않다. 이러다가 우리의 현대 소설 읽기를 고행으로 삼게 되는 건 아닐지. 


금방 읽을 수 있어도 금방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독후감. 나는 그래도 다음 호를 기다린다. 새봄이 된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y에서 옮김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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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3 소설 보다
김지연.이주혜.전하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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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가을호의 소설 세 편을 읽고 보니 입맛이 쓰다. 제목부터 쓴 맛이 느껴졌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그런가, 쓰지 않을 수가 없는가, 세상이 쓴 맛 투성이였던가, 쓴 맛을 빼고는 글을 쓸 수 없는 시절인가, 현실도 쓴 맛인데 소설에서도 같아야 아니 더하고 마는가…… 


쓴 맛 소설이라고 해서 다 거북한 건 아닌데 이번 호에서는 산뜻한 글을 못 만났다. 글 때문인지 읽는 나 때문인지. 대체로는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는 내 탓으로 돌리는 편인데 이번 호는 헷갈린다. 읽는 마음이 이렇게 고단해서야.


실제 삶에서는 도통 보이지 않는 희망을 소설의 마무리에서 얼핏 만날 때가 있다. 오죽하면 소설을 이렇게 맺었겠나 하다가도 소설이니까 이렇게라도 맺어야지 싶어 끄덕여지는데 요즘은 이것마저 시비를 걸게 된다. 소설에서라도 희망을 가지면 안 될 듯한 날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탓이다. 가장 먼저는 이 시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내게 책임이 있는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빚을 반려로 삼아야 하다니. 내일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날을 견디고 있어야 하다니. 여성과 엄마에게서 기쁨보다 슬픔이 먼저 다가오는 사정이라니. 정녕 나아질까, 우리는 앞으로 좀더 괜찮게 살 수 있을까, 아니 지금이 가장 괜찮은 때인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삶이 죽음보다는 낫다는 것을 계속 믿을 수 있을까. 


다가오는 겨울이 걱정된다. (y에서 옮김20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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