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 문학과지성 시인선 52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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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지명을 책의 제목으로 삼았을 경우, 그 책이 읽는 내게 아주 가까이 다가왔을 경우, 이 책이 책 중에서도 시집일 경우, 나는 시뿐만 아니라 장소까지 품는다. 가 본 곳이든 못 가 본 곳이든 가 본 곳처럼 익숙하게 담는다. 아주 괜찮은 곳이라고.


남해 금산은 몇 차례 가 본 곳이다. 갈 때마다 이 시집을 떠올렸다. 이름이 같은 시집이 있었지, 내가 읽었지, 그럼에도 시와 금산은 영 다른 분위기인 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넓어야 금산 앞 바닷물까지 다 끌어당길 수 있으려나? 아니, 끌어당기는 대신 내어주는 쪽이어야 자신이 선 산과 멀리 있는 바닷물을 이을 수 있으려나? 갈 때마다 묻고 답을 구하였으나 산도 바다도 시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시는 읽기에 쉽지 않다. 쉽지 않은데 금방 덮어버리게 되지는 않는다. 무슨 말일까, 어떤 뜻일까, 알아듣는 몇 구절이 알아듣지 못하는 대부분의 시행들보다 반가워서 답답한 느낌은 안 든다. 나 혼자 잠길 수 있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 책의 초판은 1986년에 나왔고 나는 이듬해 5월에 이 책을 구입했다고 메모해 놓았다. 그 나이 때, 그 시절에 나는 시집 안에서 무엇을 읽어 내었을까? 상당한 허영은 짐작이 되는데 그 허영이 남긴 뿌듯함만 기억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읽는 시집이 되어서 무척 만족스럽다. 나는 여전히 내 안의 허영을 아끼고 있나 보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 P11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 P13

삶은 내게 너무 헐겁다 - P17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 P27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P36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 P40

모든 몸부림이 빛나는 정지를 이루기 위한 것임을 - P71

가르쳐 주소서, 우리가 저무는 풍경 한가운데서
오후의 햇빛처럼 머무는 법을 - P75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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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의 구멍가게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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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동네의 구멍가게가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우리 애들의 초등학교 옆에 있는데 애들이 다닐 때 가게를 보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벌써 15년이 넘었구나. 그분들의 아들 내외(이분들도 이미 손자를 두신 할아버지, 할머니시다.)가 이 가게를 새로 단장하면서 자그마한 간판을 걸었다.0 0슈퍼라고. 이 책을 봤더라면, 이 책 속의 그림 중 하나라도 일찌기 봤더라면 오가면서 사진 한 장 찍어 두어도 좋았을 것을. 사진 속 그림들과 참 비슷하면서 또 다른 구멍가게였는데.

 

평상, 나는 그 무수한 평상들이 그립다. 동전도 불량식품도 뽑기도 학용품도 그립지 않은데,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지상의 공간, 그곳이 그립다. 내 어린 시절은 그런 평상도 가질 수 없을 만큼 가난했던 것이리라. 우리집은 평상을 둘 곳이 아예 없었을 테니, 구멍가게들을 지날 때마다 저기 한번 앉아 봤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한데. 거기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어 본다거나 쭈쭈바를 먹어 본다거나 하는 상상, 딱 상상까지다.(나는 아이스크림이나 쭈쭈바를 어지간해서는 안 먹는다. 먹고 싶은 장소를 끝내 못 찾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무로 엮은 넓은 탁자 위에 남은 장판을 덮은 소박하면서도 튼튼한 자리, 어떤 애들은 그곳에 엎드려 숙제도 하는 것 같았는데......  

 

나무 그림들은 오히려 낯설다. 사소한 먹을거리에 가려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리라. 아무리 큰 나무였더라도, 아무리 울창했던 나무였더라도, 아무리 화려한 꽃나무였더라도 내 어린 시절의 시야에 나무까지 잡히지는 않았으리라. 그때는 아직 어렸을 테니까, 가게 안이 더 궁금했고, 내 수준에 먹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가늠해 보는 게 더 절실했을 테니까. 번번이 그냥 스쳐 지나갔겠지만.

 

책, 예쁘고 예쁘다. 오래 두고 보고 싶다. 그때는 가진 게 없어 조금 쓸쓸하고 서글펐으나 지금은 그 기억까지 아끼는 사람들께 권한다. 긴 시간 잘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y에서 옮김2017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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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온천 여행
다카기 나오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살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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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만화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사서 보도록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런 편집 의도에서 나온 듯하다. 여자 혼자 기차를 타고 가서 그곳의 온천을 이용하고 또 맛난 음식도 먹는다는 계획. 온천이 많은 섬나라이자 지역 곳곳에 이르기까지 기차 운행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일본이라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번에 번역이 되어 나온 책이지만 내용으로 보아 일본에서는 10년 전에 나온 듯하다. 작가가 결혼하기 전이었던 때이기도 하고. 


여러 번 느낀 것이지만 이 작가의 열정은 놀라울 정도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다니고 잘 자고. 여행에 더없이 적합한 체질이다. 만화로 그리려다 보니 생략시킨 내용이 많이 있었겠지만 그림으로 드러나 있는 것만 봐서는 지극히 발랄하고 유쾌하다. 고생했다고 해도 고생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즐겁게만 보인다. 실제 여행이 이렇게나 즐거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작가는 그런 내용은 전혀 전해 주지 않는다. 이만큼의 흥겨움을 얻을 수 있다면 정말 떠나 보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따져 봐야 할 것은 따져 봐야겠지. 혼자 1박 2일의 기차 온천 여행에 드는 비용. 해당하는 여행이 끝난 마지막 페이지에 돈을 쓴 내역을 소개하고 있는데 한번 여행에 일본돈으로 4~5만 엔 정도 들었다고 한다. 주로 교통비와 숙박비로 지불했다고 되어 있다. 기차를 타기 위해 비행기를 타기도 하고, 온천을 이용하기 위해 온천 여관에서 숙박하였다는데 가벼운 비용이 아니다. 이 만화를 그리기 위한 취재 비용으로 삼았다면 또 그러려니 하겠지만, 휴식으로든 여가 활동으로든 결코 만만하지 않은 금액이다. 이것도 10년 전 물가 사정이니 지금은 더할 테고. 코로나 19로 지금은 이마저도 시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만화를 만화로만 보면 좋으련만, 왜 나는 자꾸만 쓸데없이 비용 생각을 하며 삐죽거리는 것인지. 혼자 즐기기에는 너무 비싼 값이니 그저 이 책만으로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달래려는 의도가 궁색하고 쓸쓸하게 여겨져서 그런가. 어쨌든 만화는 재미있다. 작가따라 다닌 길이 신기하기도 했고 굳이 가지 않아도 될 만큼 만족스럽다. 점점 게을러지고 위축되는 나, 이런 만화책이라도 자꾸자꾸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대리만족, 이 정도면 충분하다. (y에서 옮김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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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손탁 호텔에서
듀나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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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곳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문제는 정황상 일어날 수밖에 없고, 어떤 문제는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맞기도 하고, 어떤 문제는 누군가의 악의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이런 문제를 누가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가에 따라 그 사회와 구성원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데.      


소설은, 특히 SF소설과 추리소설은 이런 사회적인 문제를 아주 온건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상상이지만, 간절한 바람을 담은, 너무도 해결하고 싶은, 그러나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소설이라는 글로 호소하는.


나는 이 작가의 글을 좀 무서워한다. 상상이, 표현이, 감추고 있는 감정이 내 취향을 약간 벗어나 있다. 잔인하거나 살벌하거나 끔찍하거나 대체로 그런 쪽이라. 그럼에도 나는 또 읽는다. 이 정도는 읽을 수 있겠다는 경계선 바로 안에 있다고 여긴다. 결말이 내 취향에 아주 가까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글의 표현에서 무서움을 좀 느꼈어도 주제는 썩 마음에 든다. 한결같다. 벌 받을 사람은 벌 받기. 그게 살인이라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방법에 의해서라고 해도.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입장으로 스멀스멀 움직이게 만드는 글힘을 보여 주면서. 소설이니까, 소설 안에서는 이렇게라도 평화와 안정을 찾아보라고, 이렇게 해서라도 현실을 살아나가는 의욕을 끄집어 내 보라는 듯.


현실의 어떤 면이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면 이렇게라도 가상 세계를 지키고 싶은 것일까. 듀나의 글이라도 계속 읽었으면 하는 시절이다. (y에서 옮김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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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가고 여름 민음의 시 313
채인숙 지음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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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을 때 내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 이 시집, 대단하다, 나에게는. 거의 대부분의 시에서 얻는다. 좋은 느낌으로, 서글픈 느낌으로, 아득한 느낌으로, 슬픈 느낌으로…… 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어떤 느낌들로. 


장마가 길어지고 장마 안에 파묻혀 있다 보니 이 시집 제목마저 절절해진다. 여름이 가고도 여름, 비가 내리고도 비, 장마가 간 뒤에도 장마일까. 날씨가, 기후가, 계절이, 사람 마음을, 사람 기분을 이렇게나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니, 맑은 날이, 화창한 날이, 상쾌한 날이 무지무지 기다려진다. 


통영의 사량도에서 태어나 삼천포(지금은 사천시)에서 자라고,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있다는 시인. 내가 알 만한 바다와 전혀 모르는 바다가, 내가 알 만한 여름과 전혀 모르는 여름과 함께 일렁인다. 신나는 여름 바다로 떠오르는 게 아니고 대체로 서럽다. 구경하는 바다가 아닌, 살아 남아야 하는 바다로 여겨져서 그런가, 나는 좀 심하게 이런 내 감정을 구박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떤 사랑인지 구체적으로 묻지 못하겠으나 짐작으로 충분하다. 사랑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면, 사랑이 아직도 그만한 힘을 갖고 있다면, 나는 사랑을 믿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무라지는 못하겠다. 뉘라서 사랑하는 마음을 멋대로 흔들 수 있을 텐가.


올 여름이 힘들다. 이 시집 덕분에 잠깐이라도 여름의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기를.(이 시집을 선물해 주신 woojukaki님께 고마운 인사를 전합니다.) (y에서 옮김20230717)



당신을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했는가를 생각하는,
밤은 쓸쓸하다 - P17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 - P19

왜 나는 이리 천천히 늙어 가는 것일까 - P21

나의 위로는 모든 당신이었으나
당신의 위로는 언제나 당신 눈물뿐이었다 - P23

당신이 없어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망고나무 그늘이 둥글게 자랍니다 - P25

독을 품은 마음이란 그런 것이지. 한때 내 팔 위에 앉아 쉬었던 새들을 향해 한 점 눈물을 뭉쳐 독화살 촉을 겨누고 말아. - P26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는 것은 그것의 중심을 지키는 일이지 - P28

살아 본 적 없는 생은
여태 모두의 것이므로 - P30

밀려오고
스러지는 것은
파도의 일이 아니라
바람의 일 - P32

어떤 사랑도 다시는 나를 불러 세우지 말아다오 - P35

곧 허물어질 것들에만
생을 걸었다고 - P37

눈이 멀도록 저녁놀을 보리 - P43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 - P44

기이한 슬픔이 목울대를 치고 저녁 그림자가 초조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 P46

격자무늬 창문마다 다른 풍경이 저물고
여행 가방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우네 - P49

내가 당신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거리는
여기까지라고 - P51

언제쯤이면
당신과 나의 아득한 시차는
한 잔 술에 뒤섞여 사라지고 말 것인지 - P53

모든 이야기에는 먼지가 덮이기 마련이라네 - P60

본 적 없는 생을 붙들고 함께 우는 것 - P63

말하지 못한 것은
말할 수 없었던 것 - P65

가난과 고향을 팔아서 시를 적는 일이 지겨웠지만
가난하지 않은 시인을 여태 본 적은 없었다 - P71

너의 우주를 떠도는 별들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말고 - P74

마지막 인사는 짧았고 후련했다 - P78

낮은 파도가 밤의 팔뚝에 얼굴을 부빌 때
끝내 말하지 못하는 마음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 P80

어디에도 내 방은 없지만
마음 얹힐 일은 아니지 - P82

나무는 맹목적으로 자라고
한때 내 사랑도 그러하였다 - P84

어떤 애타는 마음도 없이 여름을 지난다 - P86

길가 쪽으로 창문이 난 식당에서 우리는 다정하고 조금 수다스럽다 - P90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시는 희망이 있는 걸까요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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