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뚱맞게 코로나 확진이 되고, 외출금지에 재택격리 치료중. 어차피 별다른 외출은 않았는데 궁금하다.
대체 어디서 누구로부터 옮은 것일까?
이틀째 꼼짝않고 있는데 그나마 가끔씩 문앞에 무언가 툭. 툭 내던져지는 소리가 들리면 잠시후 삐끔하고 문을 살짝 열어본다.
문앞에 어떨땐 조그마한 박스, 어떨땐 봉투.
이번엔 봉투다. 납작하게 접힌 뽁뽁이 봉투. 서평단신청도서가 드디어 도착했나보다.
별스럽게 발호한 소년심(少年心)이었을까. 윤동주라는 이름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그를 만나러 북간도로 달려 가고 싶었다.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28살로 돌아간 내가 28의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
[윤동주]
북간도에서 나서 일본에서 명을 거두고, 죽어서 다시 북간도로 돌아간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투사, 독립, 저항 따위의 사회참여와 거리가 먼 그를 우리는 '민족시인'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배웠다. 우리의 '민족적'이지 못했던 역대 국가지도자들과 정부에서 계면쩍음을 가리고자 그리 칭하였을게다. 그정도 이해의 너그러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 향수(鄕愁)따위의 서정(抒情)을 애국, 독립을 향한 투혼으로 각색하는 용기는 어지간한 뻔뻔스러움이 있지 않고서는 입밖에 내기 어려웠을 터인데 나는 그렇게 배웠다. 오해는 내가 철이들면서 시나브로 바로잡아졌으나 아직도 애국애족놀음을 하는 족속들이 적잖이 존재한다. 그들은 언제나 '철'이 들른지.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시인은 [또다른 고향]에서 스스로를 다중적인격으로 표현하였다. 갈등의 시기에는 더욱 분명해 지는것이 아닌가. 현실속의 자신과 그 자신이 동경하고 목표하고, 그리워하는 또 다른 자신. 흔히들 內面이라고 일컷는 제2의 자신. 제2의 우주.
부분적 중첩을 지닌 의식적 다중존재다. 누구라도 이정도 다중적 의식은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갈등이라는 판단의 모호함이 발생하고 후회라는것도, 만족이라는 것도 모두가 이상이라는 제2의 인격과의 괴리와 합치의 변화과정이다. 시인은 그를 자신의 백골로 표현하였다. 얼마나 신선하고 깜찍한 문학적 상상력인가? 두리뭉실한 감동을 구체적, 하나의 단어적 표현으로 유인해내는 작업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세련되고 이해가능한 표현으로 뱉어낸것을 시인의 작품이라고 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중구난방하며 이해가 어려운 표현으로 뱉어지면 이를 주정뱅이의 술주정이라 할 것이다. 그런맥락에서 보자면 시인의 작품과 고주망태 술주정과의 부분적 일관성은 존재한다고 봐야겠다.
시인이란 슬픈천명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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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본문 p.49 쉽게 씌어진 詩]
시인은 태생부터 시인이어야 한다. 뜨거운 가슴을 어쩌지 못하는 운명, 그래서 그들은 글로써 눈물을대신한다.
또 시인이란 별스런것이 없다. 인간은 울음으로 생명의 탄생을 증명하고 울음으로 그 생명이 존재함을 알린다.
어느 누구는 글로서 울고, 어떤 누구는 술로서 울고, 또 어떤 누구는 멀뚱한 모습으로 가슴으로 운다. 시인은 그저 서러움을 글로 뱉아내는 족속일 뿐이다.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즛내물아 동켠으로 훠-ㄴ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래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본문 p.159 별똥 떨어진데 중]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긴, 아주 긴 터널과 같은 암담한 时节이 있게 마련. 희망과 단절된듯한 캄캄하고 긴 암흑속에서 새벽같은 빛을 기다리노라면 희망이라는 단어보다는 절망과 고통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세상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간혹 글재주 하나믿고 운문을 쓰고, 산문을 쓰고 하는 작가들이 있다. 물론 탁월한 글재주는 높이 받들어 줄만하나 미려한 글들 속에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녹아들어 있지 않다면 한낱 아름답게 울려대는 깽깽이소리에 불과할것. 그들은 삶에 번뇌하지 않았으며 절망과 고통을 통하지 않은 희망인지라 마시고 돌아서면 더한 갈증이 이는 싸구려 단물과 같이 눈을 버렸구나, 귀를 버렸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시인에게는 아마도 희망보다 좌절이 더 익숙했었나 보다. 혹은 詩人이란 족속들은 그러한 胎生을 짊어지고 났을지도. 시인의 글에서는 산문과 운문의 구분이 필요가 없다. 호흡을 느리면 산문이 되고 호흡을 재촉하면 운문이 된다. 자신의 우주에 속해있는 모든 엘레멘트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 그리고 용서, 부분적 성찰을 통하지 않고서는 길고짧은것 모두가 내것이 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시인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그의 모나지 않고 겸손한 성격덕에 외롭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다. 재주있는자들은 항상 외롭고 고독한 법이다. 그만이 볼수있는 세계가 있고 그만이 간직한 우주가 있었던 그는, 지극히 외롭고 고독하였다.
살아서 고독했고 또 고통속에 죽어간 시인.
그는 죽어서 이제는, 심히 행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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