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
정원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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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는 드디어 새학년이 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학년이다. 새 담임선생님은 좋은 분인 것 같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여자와 남자를 짝꿍으로 앉힌 것이다. 왜냐하면 정훈이는 친한 친구인 윤석진과 앉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일기장에 쓰면 선생님이 읽어 볼 거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 짝을 다시 정하게 된다. 같이 앉고 싶은 사람 이름을 적어 내고 자리가 바뀌지만, 정훈이는 역시나 석진이와 짝꿍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친한 친구와 짝꿍이 되지 않아도 좋다는 걸 알게 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친구와 친해지면 되니 말이다. 




<올해의 미숙>, <뒤늦은 답장>으로 만났던 정원 작가의 신작이다. <올해의 미숙>에서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 한국의 익숙한 풍경을 바탕으로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성장하는 주인공 미숙의 십대 시절을 그렸다면, <뒤늦은 답장>에서는 200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관계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성장하는 주인공 남우의 마음을 찬찬히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열한 살 정훈이와 친구들의 일상을 통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어린이들의 세계를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그려냈다. 




표지에 있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어린이의 표정부터 인상적이다. 점점 더 자아가 생기고, 주변 관계에 대한 생각이 늘어나는 시기에 아이들은 불만도 많고,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아진다.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앉지 못해 화가 나고, 분식집에서 떡볶이 국물을 매번 많이 안 주셔서 아쉽고, 친구가 내 몫의 만두까지 먹어 버려서 짜증나고, 자신보다 키가 큰 친구에게 약이 오르기도 하고, 엄마가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아서 방학 동안 친구들과 연락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저학년 동생에게 고학년다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우산을 빌려주고는 비를 홀딱 맞기도 하고, 길에 홀로 있는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다 주기도 하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굴이 반쪽이 된 친구네 집에 찾아가 위로를 해주는 의젓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린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상 못지 않게 진지하다. 어린이들은 작은 일에 투덜대고, 사소한 일로 다투더라도, 잘못을 인정하면 제대로 사과할 줄 알고, 필요할 때 요구사항을 말할 수 있으며, 부당한 일에 화를 낼 줄 안다. 살면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갈등과 낯선 감정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해나가는 열한 살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때묻지 않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어느 정도 무모해 보이거나 지나치게 용기 있어 보이는 행동도 그 시절이기에 할 수 있는 기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점점 어른이 되면서 불편함에 익숙해지고, 차별을 모른 척하며, 부당함을 참아야 하는 것으로 만드는 세상 속에서 이들의 반짝거리는 순수함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원의 작품들은 매번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 담백하고 잔잔하게 펼쳐지는 서사를 통해 누구나 한때 겪었던 시절을 돌아보게 만드는 잔상을 남겨주곤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잊어 버리고 살았던 그 시절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고,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지난 날의 나에게 안부를 물어보고 싶어지게 하며,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더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어린이라서 안 되는 것 투성이인 세상이지만, 그 작고 여린 존재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좋은 어른들이 많아져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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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오버 - 국가, 기업에 이어 AI는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조용빈 옮김 / 와이즈베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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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에 인간이 아닌 것에 인간에게 하듯 책임을 묻는 것은 예민한 문제다. 기계가 사람을 해치면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기계 자체? 아니면 기계를 만든 인간? 이는 새로운 질문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집단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기계에 책임을 지우면 인간이 면책 받을 위험이 있다. 반대로 인간이 책임지면 기계의 책임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 집단의 결정을 인간으로 한정하는 것은 그 본질적인 특성을 왜곡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책임을 인간으로 한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집단이 비인간적으로 변할 수 있다.         p.90


인간의 삶을 개선하도록 사람의 형태로 고안, 제작된 초인적 기계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상상해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시대이다. AI 덕분에 우리는 몇 세대 전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삶을 즐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300년 전부터 인공적인 메커니즘과 함께 살아왔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것은 바로 ‘국가’와 ‘기업’이라고 하는 ‘실행하는 기계’다. 인류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더 안전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스스로 작동하는 ‘인공 대리인’을 만들었고, 성공했다. 하지만 우리의 해방을 위해 만든 이것들이 우리의 천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것이다. 게다가 현대의 국가와 기업은 인간보다 더 오래 산다. AI 또한 수명이 유한한 인간보다 오래 존속할 수 있다. 


17세기부터 현대의 국가와 기업은 서서히, 그러다 이후에는 훨씬 더 빠르게 지구를 점령해 왔다. 국가와 기업의 긍정적인 측면은 빈곤을 정복하고, 질병을 퇴치하며, 몇 세대 전까지는 불가능했을 법한 부를 축적하게 했다는 점이고, 이들의 잘못으로 야기된 공포는 세계 대전부터 식민지 착취, 환경 파괴 등이 되겠다. 만약 이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다면, 아마도 국가와 기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와 기업 모두 인간들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국가와 기업을 기계나 네트워크, 알고리즘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은 근대 국가와 기업의 역사부터 짚어 나간다. 근대 국가의 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되었으며, 근대적 기업은 18~19세기에 등장했고, AI의 발전은 2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국가와 기업을 만들었고, 국가와 기업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를 구축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국가와 기업, 그리고 AI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는 결국 인간 같은 기계가 지배하는 세계에 살게 될 것이 분명한데, 그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도 말이다. 





수천 년 동안 저 멀리서 지구를 관찰하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내려는 외계인이 있다고 해보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1만 2000년부터 수천 년간 그들은 거의 변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지구는 안정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작은 금속 조각들이 우주로 날아가서 주변 궤도를 어지럽히고 있으며, 녹색도 얼음도 줄어들고 있다. 지구 표면의 많은 부분이 밤낮으로 밝게 빛나고 있으며,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그들은 아마 지구가 곧 폭발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을지도 모른다.             p.204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 전반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첨단 기술과 인공지능이라는, 인간이 잘 살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이 언젠가는 인간의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자각과 더불어 멀지 않은 미래에는 정말로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순간도 오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과 사이버스페이스가 한데 섞이고 인류가 기계와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은 이제 공상 과학 속 상상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바야흐로 AI의 시대이다. 급기야 챗GPT는 혼자서 책을 쓸 경지에까지 올랐으니 말이다. 그렇게 국가와 기업이 지배하는 세계에 로봇, 즉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AI가 진입하고 있다. 국가와 기업과 AI가 결합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 만약 국가 권력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컴퓨터 권력과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 조지 오웰의 <1984> 속 사회가 실제로 펼쳐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국가와 기업의 작동을 AI 알고리즘에 비유한 흥미롭고도 놀라운 이 책의 저자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영국 정치학계를 이끌어가는 학자로 평가 받고 있는 데이비드 런시먼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국가와 기업이 우리 삶을 어떻게 지배해 왔는지를 인류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고, AI가 앞으로 우리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미래 담론을 제시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작동하는 국가와 기업을 만들었고, 국가와 기업이 구축한 세계에 지금 AI가 진입하고 있으니, 인류를 위한 미래를 위해 이들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이다. AI와 미래를 예측하고 살펴보는 책들은 많았지만, 국가와 기업, 그리고 AI의 유사성을 탐구하는 책은 처음이라 대단히 색다른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주 시의적절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 앞으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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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전해 준 것
오가와 이토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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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에 씨는 밤이 되어 주위에 사람이 없어지면

종종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새들끼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비밀인 듯했다.

인간은 자신들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야에 씨는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가르쳐 주었다.

나는 매일 얼른 밤이 오길 기다렸다.             p.23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작은 왕관앵무 새 '리본'이다. 어느 날 회색앵무 할머니 '야에 씨'를 만나 새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 전에는 자신이 말을 걸어도 상대방은 어리둥절해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처음으로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야에 씨에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들은 날개를 잃었기에 하늘을 날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새라는 동물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리본은 야에 씨와의 소통을 통해 말이 통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아예 씨는 착한 인간이 있으면 나쁜 인간도 있다고,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그리고 세상의 여러 가지에 대해 알려 준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도 야에 씨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리본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대신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듣기만 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그 노래를 평생 잊으면 안 된다고 야에 씨는 말한다. 그리고 다정한 날개의 주인이 되라고, 그게 바로 새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말한다. 그게 야에 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후 다른 곳으로 이사한 리본은 모험을 계속하면서 다양한 인간을 만났고, 미유키라는 소녀의 새로운 가족이 된다. 




"우리 나무는 내내 같은 곳에서 살아.

언제나 보고 있어.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해 두는 게 우리 역할이란다."

"굉장한데요.

난 금세 잊어 버리는데."

"하지만 그 대신 너희한테는 날개가 있지.

생명체는 모두 주어진 역할이 있어.

그걸 완수하는 게 인생인 거다."                p.83


<라이온의 간식>, <츠바키 문구점> 등 국내에도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 오가와 이토의 신작이다. 아름다운 손편지로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가슴 뭉클한 기적을 보여줬던 <츠바키 문구점>,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소한 음식들이 풍요로운 힐링을 전해줬던 <양식당 오가와>, 경건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동화 같은 소박한 이야기 <마리카의 장갑>, 과하지 않게 적절한 감정선을 유지하면서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기분이 들게 했던 <라이온의 간식> 등 오가와 이토의 소설들은 매번 섬세하고 따뜻했다. 


이번 작품은 일본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구리포포(GURIPOPO)’와 컬래버레이션한 미니 소설로 어른들을 위한 한 편의 동화같은 느낌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은 판형과 짧은 분량이지만, 여러 번 다시 읽고 싶은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다. 




작은 왕관앵무 새 리본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자랐지만, 할머니 새 야에 씨와 인간 소녀 미유키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성장해 나간다. 그들과의 이별 이후에도 리본의 여정은 계속 되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나무 할아버지를 만나며 어른이 되어 간다. 살아 있는 존재에겐 누구나 각자의 역할이 있고, 새의 사명은 누군가의 희망이 되는 거라고 배워 가며, 알 속에서 들었던 작은 목소리와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낸다. 


이 작품은 오래 전에 국내에서도 출간되었던 <바나나 빛 행복>을 원작으로 탄생한 이야기이다. 오가와 이토가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새를 키웠던 추억을 바탕으로 쓰였던 그 작품 속에서 마치 본능처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의 곁으로 날아가던 아기 새 리본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이번 작품이 더욱 반갑게 느껴질 것 같다. '새에게는 날개가, 나무에게는 나이테가 있듯 생명체에게는 모두 주어진 역할이 있으며 그것을 완수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오가와 이토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맑고 건강하고, 따뜻한 느낌이 가득하다. 새해를 맞아 소중한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도 딱 좋을 것 같다. 전세계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일본 힐링 소설의 원조, 오가와 이토의 사랑스러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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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마귀 살인사건
다니엘 콜 지음, 서은경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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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에요. 연쇄 살인범의 딸이 강력계 형사가 되었잖아요... 사실 그건 쓰레기 같은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에요. 난 당신이 오늘 밤 왜 혼자 날 쫓아왔는지 처음엔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건 무모했어요. 하지만 이젠 알겠어요.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면 당신은 남들보다 10배는 더 열심히 해야 했겠죠. 사람들은 당신이 마침내 무너져서, 그동안 자기들이 몰래 뒷담화한 말들이 사실이었다는 걸 증명해 주길 기다리고... 또 바라고 있을 걸요. 당신 아버지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든, 뇌가 어떻게 잘못되었든 언젠가 그 정체가 드러나길 바라고 있겠죠."            p.108~109


연회색 카펫 위에 금빛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누워 있다. 하지만 그녀는 실크 스카프로 목이 졸려 죽어 있는 상태였다. 이는 유명 인플루언서의 SNS에 업로드 된 사진 중의 한 장이다. 더 끔찍한 두 번째 이미지는 250만 명이나 공유해가며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늘 같은 수법으로 살해되는 세 번째 희생자였다. 실크 스카프로 목이 졸리고, 얼굴엔 할퀸 자국이 다섯 개 있었으며, 목이 잘렸는데 몸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이 사건의 범인을 향해 언론은 '갈까마귀'라는 별명을 붙였다. 지난 밤 친구들끼리 모여 파티를 했고, 파티가 끝난 후 친구 세 명은 자리를 뜨지 않고 문밖에 앉아 밤새워 놀았다고 한다. 창문은 하나뿐이고, 방 안은 이중으로 잠겨 있었으며, 침대 위에 곯아떨어져 있는 남자친구 바로 옆에 잘라낸 여성의 머리를 놓아둔 채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 범인은 대체 누구일까. 


연극 무대에 놓여있던 배우의 잘린 머리, 시상식장에서 발견된 가수의 머리, 그리고 유명인들이 나오는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기를 얻은 여성까지 세번 모두 다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몸통은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게 연쇄 살인은 계속 이어지고, 신출귀몰한 범인은 점점 더 불가능해 보이는 장면을 연출하기 시작하는데... 사건을 맡은 스칼릿 형사는 불가능해 보이는 살인을 계속하는 범인을 막을 수 있을까. 좌충우돌하면서 주로 혼자 사고를 치고 다니는 형사 스칼릿은 결국 진전 없던 수사를 반전시킬 단서를 찾아낸다. 바로 첫 번째 피해자의 사라진 몸통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함께 발견된 목걸이가 다음 타깃을 가리키고 있었고, 목걸이의 주인은 중동 석유 재벌의 딸이었다. 삼엄한 경호팀과 함께 특급 호텔의 꼭대기 층을 모두 쓰고 있어 범인이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긴 했지만, 스칼릿은 주변 곳곳의 보안을 확인한다. 그리고 곧이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초현실적인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꿈같은 장면이 펼쳐지며, 또 다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 거죠?" 스칼릿이 물었다. 런던탑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사람, 그 모든 죽음이 당신을 따라다닐 텐데?"

"죽음은," 헨리가 대답했다. "... 따라다니지 않아요. 죽음은 거기서, 그 순간에 끝나요. 그걸로 끝이에요... 늘 같아요. 항상 똑같은 순서대로 감정을 느끼죠. 두려움, 희망, 절대 오지 않을 무언가가 올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눈 깜짝할 순간의 깨달음,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요."             p.304


<봉제인형 살인사건> 시리즈로 네 편의 작품을 선보였던 다니엘 콜이 새로운 시리즈로 돌아왔다. 이번 작품에서는 충동적이고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돌아버린 딜레이니'라고 불리는 여형사 스칼릿 딜레이니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극중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스칼릿의 아버지가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설정이 있어 흥미로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행운의 칼잡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연쇄살인범으로 7개월 동안 여덟 명의 여인을 살해했다. 전부 붉은 머리였는데, 마지막 한 명은 예외였다. 자신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어린 스칼릿이 뒤뜰에서 놀 때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살해되었다. 이유는 어머니가 남편의 범죄 행각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스칼릿의 어린 시절이 어땠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정보는 상사인 프랭크와의 인연을 보여주는 부분에서 잠깐 언급되는 정도라 아마도 이 부분은 시리즈를 이어 나가면서 더 자세히 풀어나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스칼릿 만큼이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또 다른 인물은 바로 불법적인 일도 서슴지 않는 사립 탐정 헨리이다. 조각같은 얼굴과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고, 넉살좋고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나쁜 남자같은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라 앞으로 스칼릿과의 파트너십이 더욱 궁금해진다. 일반적으로 탐정하면 쉽게 떠올리는 인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라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시종일관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는 점도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해준다. 진지한 스칼릿에게 '당신하고 같이 연쇄 참수 살인범을 쫓는 경찰 놀이는 즐거워요. 진심이에요. 하지만 난 그냥 단순한 호의로 이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라고 말하면서 불법 거래에 대한 조건을 얘기하는 모습과 그럼에도 위험한 순간에는 그녀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이 상반된 매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작가가 벌써 이 시리즈의 후속편을 집필 중이라고 하니 다음 이야기도 곧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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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지음, 최정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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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죽음을 토대로 번성한다. 그러나 봄 햇살 속에 가만히, 아주 가만히 있어 보아라. 그러면 잿빛머리 박새 한 마리가 당신의 머리칼을 거둬 모으러 다가올 것이고, 그것으로 새끼를 위한 부드럽고 따뜻한 둥지를 만들 것이다. 담쟁이덩굴이 집 한쪽 면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아라. 그러면 어느 날 핀치 한 쌍이 담쟁이 잎사귀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자리한 작은 둥지에서 새끼들을 달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건 정확히 그들이 원한 바로 그것일 것이다.             p.38~39


파랑새 가족이 창문 바로 밖의 둥지 상자에 정착하기를 수년째 기다리는 중이었다. 마침내 알 하나가 흔들리기 시작하며 부화의 신호를 보여준 이틀 뒤, 알 다섯 개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자연에서 유혈극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그 유혈극을 몸소 겪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시인이자 수필가인 마거릿 렌클은 말한다. 집굴뚝새는 자기 영역에 들어온 작은 새들을 죽이고, 어치는 다른 새들의 새끼를 잡아먹지만 자연은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포식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한 본능을 따르고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 렌클은 그렇게 아름답고도 무심한 자연과 야생 생물들을 바라보면서 삶에 관한 지혜를 배운다. 


집 열뜰에 굴뚝새들이 영역을 만들고,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온 박새들이 알을 낳고 새끼 박새들이 부화한다. 부모 박새들은 새끼들을 먹이려고 계속 일하지만, 깃털이 다 난 새끼 박새는 머리에 상처가 난 채 죽어 있다. 야생의 새들에게 물과 먹이와 거주 공간을 제공하며 돌보던 렌클은 귀여운 새끼 박새를 죽인 갈색 집굴뚝새도 미워할 수가 없다. 집굴뚝새들이 부르는 노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이고, 그들 역시 거센 바람과 퍼붓는 비와 포식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 말이다. 햇빛이 가득한 수련 연못을 보며 물 위에 둥글게 뜬 수련 잎들을 보다가 연못이 죽어 가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빽빽하게 자라는 수련이 빛과 산소를 차단해 연못을 질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물고기나 개구리, 뱀이나 거북이가 살아갈 공간은 없어지고 오직 연못 끝에서 저 긑까지 온통 수련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아름답게 피고 향기로운 수련꽃들을 바라보며 렌클은 자연의 아이러니를, 산다는 것의 절박함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 인간은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생물이다. 우리는 모든 증거에 맞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통함과 외로움과 절망은 비극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 비극적인 것들은 세상의 바른 길들이 제공하는 지면, 다시 말해 우리 존재가 굳건히 디딜 단단한 지면을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침착함과 안전함의 불운한 변이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동화 속에서 우리 자신에게 말하고 있고, 어둠은 선물 비슷한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늘 느끼는 것에는 그 자체의 진실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진실은 아니다. 어둠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 약간의 선량함을 숨기고 있다. 예기치 않던 빛이 반짝이기를, 그리하여 가장 깊은 은닉처에서 그것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면서.              p.261~262


외할머니가 들려주신, 내 어머니가 태어날 때의 이야기부터 사랑하던 개 이야기, 내가 걸음마를 배우던 아기였던 시절의 기억,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식, 어머니의 어린 시절 안식처였던 다락방, 내가 여섯 살 때 알던 것들과 여섯 살 때 알지 못하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 등등 한 사람의 생에는 아주 수많은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들이 친근하면서도, 다정하게 펼쳐지고 있다. '네 어머니도 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머니들이 일하지 못하게 하는 규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린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된 나는 알게 된다. 어머니의 인생에 대해서 비로소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좋은 추억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누구나 나이를 먹게 마련이고, 그만큼 많은 이들을 떠나 보내야 했으니 말이다. 늙어 간다는 것은 각자에게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과 가족에게도 짐을 지우게 마련이다. 그렇게 렌클은 자신과 남편을 키워 주었던 어른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지쳐가는 마음을 다독여야 했고, 그 시간들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정원에 찾아오는 온갖 생물들이었다. 


그렇게 렌클의 인생 이야기와 자연 이야기가 짧은 분량으로 서로 교차되면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이 책은 소박하지만 기적적인 순간을, 특별하진 않더라도 작은 깨달음을 선물처럼 안겨준다. 자연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책들을 꽤 읽어 왔지만, 이 책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미국 남부 지방 대가족 출신인 렌클의 수많은 친척, 가족들의 이야기와 함께 진행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분량 자체는 짧은 글들의 연속이지만, 글 하나하나가 빛나는 통찰로 가득해 꼼꼼히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가 자연으로부터 배운 상실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탄생도, 죽음도 모두 공평하게 존중 받을 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 우리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 매일 평범한 하늘과 바다와 숲속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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