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 - 마스다 미리 에세이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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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을 건널 땐 하얀 부분만 밟아야 해. 

어느새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규칙이 생겼다. 하얗지 않은 부분은 ‘지옥’이니까.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일 하얀 부분만 밟고 건넜다.

전혀 그런 걸 상관하지 않고 건너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가 지옥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p.30~31


인간의 전체 생애에 비하면, 어린 시절은 아주 잠깐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서 점차 어린 시절의 나와는 멀어진다. 사는 게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어린이였던 나를 잊어 버리고, 마치 처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일부 어른들은 노키즈존을 만들어 어린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공공장소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러는 당신들 또한 한때는 어린이였는데도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일이 종종 생긴다. 덕분에 아이들의 세상이라고 해서 언제나 속편한 일들만 펼쳐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들도 나름의 무게로 이 현실을 견뎌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이들만의 낙천성과 긍정 마인드, 그리고 상상력이 있어 그 시간들을 나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가끔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나를 한번쯤 만나러 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지금은 잊어 버리고 사는 재미있었던 일들, 이제와 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세상 전체를 짊어진 것처럼 고민했던 것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책벌레였던 나를 만나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스다 미리의 신작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작은 나'를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봄이 바로 저기까지 왔네." 걸어가는데 엄마가 말했다.

"어디까지?"

"바로 저기. 봄 냄새가 나."

나는 후웁 숨을 들이마셨다. 봄 냄새는 공기 냄새였다. 

바로 저기는 어딜까? 나는 빵집을 도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거기는 '바로 저기'니까.               p.178


마스다 미리가 4년의 공백을 깨고 낸 신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낸 예쁜 책이다. 몽글몽글 귀여운 마스다 미리의 일러스트들과 함께 읽으면 마치 한 권의 그림일기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드는 그런 책이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새 원피스를 입기 싫었던 이유, 네잎클로버가 갖고 싶어서 잎을 풀로 붙여 가짜 네잎클로버를 만들었던 일, 건널목을 건널 땐 하얀 부분만 밟아야 한다는 친구들 사이의 규칙, 수박 씨앗을 먹으면 배꼽에서 싹이 자란다는 걱정,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된 첫날의 풍경,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통해 다른 세계에 갈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 등 초등학교 시절의 소소한 모습들을 통해 추억 여행을 하며 읽었다. 




아이들이 툭툭 던지는 무구한 언어들을 통해서 어른인 우리는 인생에 대해 배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고 지혜로우며, 수만 번 넘어지면서도 단 한 번도 일어서기를 단념하지 않는 의지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지만, 실제로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생각이 많고, 예상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마스다 미리의 이 책은 우리 모두 작고 소중한 존재였던 그 시절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고, 어린이들이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작은'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별것 아닌 일에도 신나고, 사소한 것도 불안해 하고, 처음 마주하는 일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던 '작은 나'가 있어서 어른이 된 지금의 나가 있을 것이다. 피곤해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하고, 한숨으로 가득한 일상이라도 버텨내야 하고, 정신 없이 바쁘게 사는 와중에 타인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나의 자존감도 지켜야 하는 것이 어른의 현실이지만,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나를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의미가 없더라도, 뭔가 이득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냥 그 순간으로 충분한 행복들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에 대한 걱정들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씩 옅어진다. 그녀의 긍정 마인드가 내게도 전염되는 기분도 들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마스다 미리 버전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지금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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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말을 듣는 눈 - 법의학,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죽음의 시간 드레의 창
나주영 지음 / 드레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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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듣기는 쉽지 않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만 죽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말을 하지 않는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는 무엇일까? 나는 죽은 사람의 말은 내 눈을 통해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내가 시신을 보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본다'라는 뜻의 단어가 '부검'이 되었으리라.       p.24


법의학자는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직업이다. 법의학이라고 하면 흔히 죽은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아무런 증거 없는 살인에서도, 완벽하게 사고사로 보이는 시신에서도, 전혀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사건에서도 법의학자들은 숨겨진 죽음의 진실을 찾아내곤 하니 말이다. 그런데, 본래 법의학은 재판의학이었고, 부검 등 죽음에 제한되는 학문은 아니라고 한다. 법의학은 법률상 문제가 되는 의학적, 과학적 사항을 연구해 이를 해결함으로써 법을 운영하는데 도움을 주고 인권 옹호에 이바지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죽어 있는 사람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법의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는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이자 법의학연구소 소장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고,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고민하는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시각으로 본 법의학과 법의학의 시각에서 보는 인간에 관해 말한다. 법의학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법의학을 통해 규명되는 사인과 사망의 종류와 사망증명, 개인식별을 비롯해 법의학의 눈으로 보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죽음 이후의 변화, 검시제도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 본다. 





처음 시신이 내게 왔을 때는 일반적인 주거지 안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으로 내인사로 추정되었다. 부검을 시작하기 전 담당 형사와의 면담에서 형사도 내게 그렇게 설명했다. 그가 주거하는 곳은 14층이었고, 현관문은 잠겨 있어서 119가 강제 개방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거지 안에서는 물색 흔적이 없었고 현금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부검이 마무리된 후 망인의 사인은 머리 부위 손상으로 판명되었다... 사망 전 망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수사가 필요해졌다. 홀로 거주하던 고립된 사람의 죽음도 수사가 필요한 죽음일 수 있다.            p.148~149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사실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니 말이다. 죽음은 늘 그렇게 삶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사망하는 사람은 2021년 기준 31만7,680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중 몇 건이나 부검이 이루어질까? 2017년 기준으로 당시 시행된 부검을 다룬 통계 논문에서는 사망자 28만5,534명 중에서 법의학자들이 행한 부검은 8,888건으로 전체 사망자의 3.1%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활동 중인 법의병리학자가 우리나라에 40명~50명 정도라고 하니, 부검 수치가 결코 낮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있는 40여 개의 의과대학 중에서 법의학을 전공한 교수가 근무하는 법의학교실이 존재하는 학교도 10여 곳에 불과하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법의학과 검시제도의 현실과 마주한 듯한 느낌이다. 


법의학의 시선으로 보는 인간은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우리에게 말을 하는 인간이다.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생명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죽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이 유일하고 말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학문이 법의학이라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므로, 그 어떤 학문보다 실재적으로 죽음을 다루는 학문인 법의학에 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인 용어도 많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거나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의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통해 시작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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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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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였다. 거대한 문어가 다리로 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지구 ? 생물체는 ? 항복하라.

문어가 말했다. 아니 "문어가 말했다"라는 이 문장은 상식적으로 굉장히 이상하지만 하여간 그 당시 나는 문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문어가 말하는 걸 듣다니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같이 했다. 애초에 대학교 건물 안에 복도를 꽉 채우는 크기의 거대 문어가 등장해서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리며 나에게 말을 거는 사건이 내 평생에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문어' 중에서, p.27


해양 생물을 주제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정보라 작가의 SF연작소설집이다.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라는 제목으로 쓰인 여섯 편의 이야기에서 '나'와 '남편(위원장님)은 자꾸만 말하는 해양 생물과 마주하고, 그때마다 정체 모를 검은 양복 군단에게 연행된다. 진지하지만 코믹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지만 그 배경들은 대부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가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소속이고 실제로 국회 앞에서 고등교육법 개정 농성을 한 적이 있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 위원장님과 연애를 하고 결혼해 포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살면서 바다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이 책의 제목을 '포항 소설'이라고 하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새벽에 대학교 본관 건물 복도에 문어, 혹은 문어처럼 생긴 어떤 생물이 등장한다. 때는 고등교육법 개정안, 일명 강사법이라고 하는 것이 제정되어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났고, 잘려서 열받은 선생님들이 대거 노조에 가입해 농성 중인 시기였다. 농성 천막을 홀로 지키던 위원장님은 자다가 배가 고파서 깼고, 잠결에 자신한테 오는 문어를 잡아 라면에 넣는다. 그리고 그 이유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취조실에 있는 참이다. 그걸 대체 왜 먹었습니까, 대학교 건물 복도에 문어가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로 시작되는 대화는 벌써 한 시간째 똑같은 말의 되풀이 상태였다. 실제로 이 소설 <문어>의 초반 5~6쪽 정도는 2021년 모 대학교 농성장에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농성도 하고 데모도 하면서 러시아 문학과 문화 수업도 열심히하던 작가는 러시아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바다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러시아어로 '나'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대게가 등장하는 작품 <대게>가 만들어 진다. 





(그러니까 떠나요. 잔인한 권력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요. 가서 행복하게 살아요.)

그리고 나는 울었다. 비인간 생물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망쳐버려 살 수 없게 된 바다, 부서진 해저, 죽은 땅과 도망칠 곳 없이 좁아져버린 지구가 한없이 미안했다. 그러나 우는 것 외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예브게니가 다른 다리들로 나를 받치고 집게발에 기대어 울게 해주었다. 집게발은 비린내가 나고 거칠고 단단했다. 나는 그 거친 단단함에 기대어 울었다. 검은 덩어리도 예브게니도 내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 대게' 중에서, p.84


작가는 <문어>, <대게>, <상어>까지 쓰고 3부작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이야기를 몇 개 더 붙여서 책으로 내보자는 제안을 받고 <상어>가 탄생하고 이어 <개복치>와 외계 생물 거래의 음모를 밝히기 위한 <해파리>와 <고래>까지 만들어 진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일본은 원전 폐수를 바다에 버렸으며,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나빠지고 있지만, 어디선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섯 종의 해양 생물이 등장하는 이 연작 소설들은 세계의 위기 속에 있는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과 생물들이 죽으면 인간도 죽게 마련이다. 그러니 기후 위기에 대응해야 하고, 더 적극적으로 지구가 망가지지 않도록 맞서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시간강사인 작가가 처우 개선을 위해 싸웠던 이야기에서 시작해 러시아와 일본의 국제적인 문제를 거치고, 지구 환경 위기에 이르는 여러 이슈들을 보여준다.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것도 아니고, 도망칠 데가 항상 있어서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있기엔 열받으니까, 안 싸울 수는 없으니까 싸우는 거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을 누군가를 응원하며 읽게 되는 작품이었다. 해양 생태계 파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해고 처분과 장애인의 이동권을 무시하는 시설, 세상 전체가 의존하면서도 무시하고 착취하는 돌봄의 가치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 있어 아주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지구 생물체가 모두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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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살인사건
애슐리 칼라지언 블런트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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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피로함을 느끼고 손가락 끝으로 눈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니까,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게 분명하네."

"네가 이 유명한 살인 사건 피해자와 똑같이 생겼고, 널 닮은 다른 여자들이 살해당해서 똑같은 자세로 발견되는 게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두 번째 피해자는 아직 - "         p.115


일요일 이른 아침, 조깅을 하던 레이건은 알몸이 드러난 여자의 상반신을 발견한다. 마치 마네킹처럼 몸이 반으로 쪼개진 채 토막난 시신이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죽은 여성의 얼굴이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던 것이다. 레이건은 마치 자신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얼마 뒤 또 다른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녀도 레이건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이 사건은 오래 전 미국에서 발생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블랙 달리아 사건과 유사한 면이 많아 언론에서는 '시드니 달리아 사건'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사실 레이건은 어린 시절 지독한 스토킹을 겪은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SNS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온라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다. 현재는 화원을 운영 중이었지만, 장사가 계속 안 되어 작년부터 형편이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이런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레이건은 한국에서 만난 친구 민을 찾아가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을 자신이 없다. 자신의 과거가 민과 그녀의 가족까지 위협하게 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건의 친구 민은 시드니 모닝 헤럴드지의 범죄 보도 부서에서 일하며 20년 전에 발생한 충격적인 살인 사건에 관해 책을 쓰고 그것이 국제적인 출판 계약으로 이어져 유명해졌다. 지금도 경찰은 물론 언론 쪽에도 지인들이 있었기에, 레이건은 사건에 관해 뭔가 알 수 있을까 해서 친구를 찾아간 거였다. 





"저는 인터넷만 안 쓰면 저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저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고요.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여자들 탓으로 돌리도록 사람들을 세뇌하는 여성 혐오 커뮤니티들이 그 안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하지만 이런 커뮤니티에서 내세우는 폭력성은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끼쳐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죠."          p.357


1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스토킹 사건은 레이건을 다시 위협하기 시작한다. 과연 그 남자가 다시 레이건을 찾아낸 것일까. 그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인 것일까. 민은 레이건을 걱정하며 경찰에 알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레이건은 경찰에는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사실 오래 전 그녀를 스토킹했던 남자가 바로 경찰이었기에, 경찰들이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한 이메일이 오기 시작하고, 집 근처에 속옷이 선물 포장되어 배달 되는 등 그는 점점 그녀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다. 범인은 왜 블랙 달리아 범죄 현장을 재현한 것일까. 시드니 살인범이 블랙 달리아 살인범과 동기가 같은 걸까. 그리고 왜 그는 레이건과 도플갱어처럼 닮은 여성들만 골라 살해하는 걸까. 정말 오래 전 그녀를 스토킹했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 것일까.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애슐리 칼라지언 블런트의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다크웹, 스토킹, 여성 혐오, 온라인 범죄 등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더욱 오싹한 이야기였다. 작가가 한국에 거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한국계 캐릭터와 에피소드도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고, 극중 주인공이 겪는 사건 또한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더욱 몰입감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호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심리 스릴러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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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인물 사전 - 일러스트로 보는
에노코로 공방 지음, 이지호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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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의 서명>은 <주홍색 연구>에 이은 셜록 홈즈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코난 도일이 처음으로 쓴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네 사람의 서명>에서는 홈즈에게 코카인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 권투와 변장의 달인이라는 사실, 독특한 여성관의 소유자라는 사실 등도 밝혀진다. 여기에 전작에서는 이름이 없었던 221B번지의 여주인 이름이 '허드슨 부인'으로 밝혀진다든가 의뢰인이 찾아 오면서 사건이 시작되는 패턴이 사용되는 등 이후 시리즈의 기본이 되는 요소가 다수 등장한다.             p.65


영원히 읽히고 재창조되는 독보적인 캐릭터, 100년도 넘은 시대에 탄생했지만 여전히 동시대에 숨쉬고 있는 캐릭터, 바로 셜록 홈스이다. 그동안 수많은 셜록 홈즈 이야기를 만나왔고, 그를 소재로 변주된 또 많은 이야기를 읽어 왔지만 여전히 재미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 없다. 셜록 홈즈가 없었다면 오늘날 법과학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홈즈는 최초의 과학 수사 요원이었고, 그가 썼던 방식을 현대에도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셜록홈즈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경찰들의 수사 방식은 주먹 구구식이라 현장을 보존하고, 증거를 찾는 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셜록 홈즈는 아주 작은 증거와 흔적도 놓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단서를 찾는 캐릭터였다. 그는 백여년이나 앞선 과학 수사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그러니 작가보다 캐릭터가 더 많이 언급되고, 더 유명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1887년 탄생한 이래 여전히 만화, 영화, 드라마등으로 변주되며 사랑받는 고전이다. 그 '셜록 홈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250여 명의 인물을 비주얼화해 전격 해부한 셜록 홈즈 인물 해부 도감이다. 아서 코난 도일이 쓴 60편의 ‘셜록 홈즈 시리즈’ 중 장편 <주홍색 연구>와 <네 사람의 서명>, 단편집 <셜록 홈즈의 모험>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일러스트와 작품의 주요 배경인 221B번지 하숙집 거실 조감도, 사건이 벌어지는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근교와 광역 지도, 영국 그레이트브리턴 섬 전체 지도가 작품 속 연관 정보와 함께 수록 되어 있다. 각 작품마다 등장인물 관계도와 개성을 잘 살린 인물 해설 일러스트, 토막 지식, 체크 포인트를 담았고, 작품의 이해를 돕는 주요 배경 설명과 사건의 흐름 연표, 깊이 있는 다양한 주제의 칼럼과 핵심 관전 포인트, 셜록 홈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기 명소, 셜록 홈즈의 세계를 장식하는 관련 아이템 이야기까지 꼼꼼하게 정리했다. 




홈즈와 왓슨이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은 작중에서 이따금 등장하지만 어떤 요리를 먹는지 까지 적혀 있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아침 식사의 정석인 베이컨 앤 에그가 등장하는 것도 <기술자의 엄지손가락>뿐이다. 그 밖에는 스크램블 에그가 1회(블랙 피터), 햄 앤 에그가 2회(네 사람의 서명, 해군 조약문), 삶은 달걀이 2회(토르 교 사건, 은퇴한 물감 제조업자) 등장했다... 그 밖의 아침 식사 메뉴는 <해군 조약문>에 나오는 커리맛 닭요리뿐이다. 왓슨이 허드슨 부인의 요리만이라도 조금 더 상세히 기록해 줬으면 어땠을까 싶어 아쉬울 따름이다.                p.174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온갖 판본의 셜록 홈즈를 다 읽어왔는데, 서재에 보관하고 있는 건 딱 세 버전이다. 가장 긴 버전, 가장 짧은 버전, 휴대가 편리한 버전이다. 가장 긴 버전은 당연히 '주석 달린' 셜록 홈즈 시리즈이고, 가장 짧은 버전은 '미니북' 버전의 셜록 홈즈, 그리고 휴대에 중점을 둔 것은 이북 버전이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더해 바로 이 책 <셜록 홈즈 인물 사전>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등장인물을 전부 그려 보자'라고 생각한 것에서 시작된 이 책은 에노코로 공방이 <셜록 홈즈어 사전>을 작업하며 원작을 거듭 읽게 되면서 비로소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코난 도일의 뛰어난 캐릭터 창조력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이 책은 원작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 충실히 따르고, 간혹 영상화 작품 등을 참고하면서 독자적인 해석을 가미해 시각화를 시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줄거리나 주목할 포인트, 사건의 핵심 부분 등 셜록 홈즈의 '기본'을 알리는 데도 집중하고 있어, 셜록 홈즈 시리즈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소장해야만 하는 책이 되었다. 게다가 이 책은 셜록 홈즈 전체 시리즈의 첫 1/3에 해당하니, 이어질 다음 책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셜록 홈즈는 초등학교 시절 나를 처음으로 추리 소설에 입문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고,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나의 확고한 독서 취향을 만들어준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양한 버전과 판본의 셜록 홈즈 작품들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가끔 펼쳐서 읽어보곤 한다. 그래서인지 정말 깨알같이 디테일한 정보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소개된 '셜록 홈즈'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꿰뚫듯 날카로운 눈(주홍색 연구), 깡마른 얼굴(녹주석 보관), 검은 머리카락(춤추는 인형), 그을린 뺨(등이 굽은 남자). 살집이 없는 매부리코(빨간 머리 연맹), 근육질의 팔뚝(네 사람의 서명),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얇은 입술(빈집의 모험) 등 각각의 원작에서 묘사된 외모에 대한 묘사들을 모두 수집해 하나의 인물로 탄생시켰으니, 얼마나 탄탄한 정보를 기반으로 인물들을 구축시켰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소개된 작품들의 첫 페이지는 만화로 재구성된 장면들로 시작하는데, 만화 또한 아주 흥미진진하다. 사건의 흐름을 시간순으로 정리해둔 것도 좋았고, 홈즈의 명언과 패션 체크, 코난 도일이 쓴 원문에 대한 고찰 등 볼거리로 가득하다. 그야말로 원작을 다각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 원작 소설을 보다 더 깊이 있게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셜록 홈즈'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입문서로도 좋을 것 같고, '셜록 홈즈' 전문가들인 셜로키언들에게도 너무나 훌륭한 선물같은 책이 아닐 수 없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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