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강 세븐
A. J. 라이언 지음, 전행선 옮김 / 나무옆의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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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기억이라는 직물로 짜여 있으므로 그들은 꿈을 꾸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꿈을 꾸었다. 색깔이 변하는 모호하고 덧없는 꿈이었다. 파란색과 금색이 중첩된 안개, 그의 시야를 가로질러 움직이는 흰색의 유령 같은 형상. 그는 바닷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선체에 철썩이며 부딪히는 물소리가 아닌, 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였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더 생생하게 들리는 목소리,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p.50~51

 

한 남자가 낯선 공간에서 깨어난다. 그곳은 바다 한 가운데였다. 그를 깨운 것은 총소리 혹은 누군가의 비명 소리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발견한 것은 평범한 군복에 군화 차림의 죽은 남자 시체였다. 시체를 관찰하던 그는 팔에 쥐고 있던 권총의 기종과 성능을 바로 떠올린다.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면서, 권총의 이름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도, 집과 직업도, 가족도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자신의 얼굴에는 긴 흉터가 있었고, 팔에는 헉슬리라는 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배에는 그 혼자 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삭발한 머리에 군복 차림의 그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고, 모두 자신이 누군지 기억이 없었다. 왜 이 배 위에 있는 건지, 이 배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헉슬리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의 이름은 콘래드, 리스, 골딩, 플라스, 디킨슨, 핀천으로 각자 형사, 산악인, 물리학자, 의사, 군인, 역사가라는 점을 알아낸다. 그들은 함께 협력해서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로 협의하고, 주변을 살펴본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는 원격으로 조종되고 있어 직접 통제할 수 없으며, 많은 양의 총기들을 싣고 있었다.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전문가들로 구성된 한 팀이라면, 그들에게 뭔가 임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혹은 어떤 이상한 실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걷히지 않고 점점 짙어지는 분홍빛 안개의 정체도 수상했다. 그러던 가운데 그들은 위성 전화를 발견하고,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엇이든 사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구성원은 위험요소이기 때문에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때 마침 배에서 총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과연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대상은 누구이며, 목적은 무엇일까.

 

 

"모든 곳은 지옥이 되리라."
"뭐라고?"
골딩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의 작품 어딘가에서 나왔던 대사 중 하나야. '온 세상이 용해되고 모든 피조물이 정화될 때 천국이 아닌 모든 곳은 지옥이 되리라.'"
"이게 그거라고 생각해? 지옥이 현실이 된 거라고?"            p.158

 

자신에 관해 무언가를 기억하게 된 사람은 곧 생리학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며 광기에 사로잡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위성 전화 속 목소리가 지시한 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존재를 사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대체 어떤 질병이 이런 증상을 일으키는 것일까. 기억을 떠올리게 되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고, 공격적으로 변화게 되는 증상이라니.. 그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실험 대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다른 존재들을 만나게 되는데, 모두들 폭력적인 망상과 심각한 신체적 기형을 일으키는 병원균에 감연된 상태였다. 기억을 통해 감염되는 신종 박테리아가 집어삼킨 도시 속에서 그들 일곱 명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 작품은 출간되기 전부터 이미 메이저 영화사들의 치열한 경쟁 끝에 영상화 판권 계약이 체결될 만큼 압도적인 서사를 인정받았다. 세계의 종말을 그리고 있는 아포칼립스 스릴러이자 오싹한 호러물이기도 하다. 특히나 전염병을 기억과 연결한 부분은 팬데믹을 겪은 우리에게 보다 현실적인 미래를 느끼게 해준다. '다가올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시대를 그려'냈다고 하는 소개 문구처럼, 이 작품 속 멸망 직전의 세계가 근 미래의 지구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기억을 잃은 채 오로지 생존을 위해 낯선 이들이 함께 하는 이 여정은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보여주며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준다. 글로 표현된 소설이지만,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작품이라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훨씬 더 오싹하고 스펙터클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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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 - 마스다 미리 에세이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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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을 건널 땐 하얀 부분만 밟아야 해. 

어느새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규칙이 생겼다. 하얗지 않은 부분은 ‘지옥’이니까.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일 하얀 부분만 밟고 건넜다.

전혀 그런 걸 상관하지 않고 건너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가 지옥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p.30~31


인간의 전체 생애에 비하면, 어린 시절은 아주 잠깐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서 점차 어린 시절의 나와는 멀어진다. 사는 게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어린이였던 나를 잊어 버리고, 마치 처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일부 어른들은 노키즈존을 만들어 어린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공공장소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러는 당신들 또한 한때는 어린이였는데도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일이 종종 생긴다. 덕분에 아이들의 세상이라고 해서 언제나 속편한 일들만 펼쳐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들도 나름의 무게로 이 현실을 견뎌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이들만의 낙천성과 긍정 마인드, 그리고 상상력이 있어 그 시간들을 나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가끔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나를 한번쯤 만나러 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지금은 잊어 버리고 사는 재미있었던 일들, 이제와 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세상 전체를 짊어진 것처럼 고민했던 것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책벌레였던 나를 만나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스다 미리의 신작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작은 나'를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봄이 바로 저기까지 왔네." 걸어가는데 엄마가 말했다.

"어디까지?"

"바로 저기. 봄 냄새가 나."

나는 후웁 숨을 들이마셨다. 봄 냄새는 공기 냄새였다. 

바로 저기는 어딜까? 나는 빵집을 도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거기는 '바로 저기'니까.               p.178


마스다 미리가 4년의 공백을 깨고 낸 신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낸 예쁜 책이다. 몽글몽글 귀여운 마스다 미리의 일러스트들과 함께 읽으면 마치 한 권의 그림일기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드는 그런 책이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새 원피스를 입기 싫었던 이유, 네잎클로버가 갖고 싶어서 잎을 풀로 붙여 가짜 네잎클로버를 만들었던 일, 건널목을 건널 땐 하얀 부분만 밟아야 한다는 친구들 사이의 규칙, 수박 씨앗을 먹으면 배꼽에서 싹이 자란다는 걱정,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된 첫날의 풍경,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통해 다른 세계에 갈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 등 초등학교 시절의 소소한 모습들을 통해 추억 여행을 하며 읽었다. 




아이들이 툭툭 던지는 무구한 언어들을 통해서 어른인 우리는 인생에 대해 배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고 지혜로우며, 수만 번 넘어지면서도 단 한 번도 일어서기를 단념하지 않는 의지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지만, 실제로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생각이 많고, 예상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마스다 미리의 이 책은 우리 모두 작고 소중한 존재였던 그 시절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고, 어린이들이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작은'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별것 아닌 일에도 신나고, 사소한 것도 불안해 하고, 처음 마주하는 일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던 '작은 나'가 있어서 어른이 된 지금의 나가 있을 것이다. 피곤해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하고, 한숨으로 가득한 일상이라도 버텨내야 하고, 정신 없이 바쁘게 사는 와중에 타인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나의 자존감도 지켜야 하는 것이 어른의 현실이지만,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나를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의미가 없더라도, 뭔가 이득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냥 그 순간으로 충분한 행복들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에 대한 걱정들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씩 옅어진다. 그녀의 긍정 마인드가 내게도 전염되는 기분도 들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마스다 미리 버전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지금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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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말을 듣는 눈 - 법의학,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죽음의 시간 드레의 창
나주영 지음 / 드레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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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듣기는 쉽지 않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만 죽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말을 하지 않는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는 무엇일까? 나는 죽은 사람의 말은 내 눈을 통해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내가 시신을 보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본다'라는 뜻의 단어가 '부검'이 되었으리라.       p.24


법의학자는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직업이다. 법의학이라고 하면 흔히 죽은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아무런 증거 없는 살인에서도, 완벽하게 사고사로 보이는 시신에서도, 전혀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사건에서도 법의학자들은 숨겨진 죽음의 진실을 찾아내곤 하니 말이다. 그런데, 본래 법의학은 재판의학이었고, 부검 등 죽음에 제한되는 학문은 아니라고 한다. 법의학은 법률상 문제가 되는 의학적, 과학적 사항을 연구해 이를 해결함으로써 법을 운영하는데 도움을 주고 인권 옹호에 이바지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죽어 있는 사람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법의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는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이자 법의학연구소 소장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고,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고민하는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시각으로 본 법의학과 법의학의 시각에서 보는 인간에 관해 말한다. 법의학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법의학을 통해 규명되는 사인과 사망의 종류와 사망증명, 개인식별을 비롯해 법의학의 눈으로 보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죽음 이후의 변화, 검시제도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 본다. 





처음 시신이 내게 왔을 때는 일반적인 주거지 안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으로 내인사로 추정되었다. 부검을 시작하기 전 담당 형사와의 면담에서 형사도 내게 그렇게 설명했다. 그가 주거하는 곳은 14층이었고, 현관문은 잠겨 있어서 119가 강제 개방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거지 안에서는 물색 흔적이 없었고 현금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부검이 마무리된 후 망인의 사인은 머리 부위 손상으로 판명되었다... 사망 전 망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수사가 필요해졌다. 홀로 거주하던 고립된 사람의 죽음도 수사가 필요한 죽음일 수 있다.            p.148~149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사실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니 말이다. 죽음은 늘 그렇게 삶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사망하는 사람은 2021년 기준 31만7,680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중 몇 건이나 부검이 이루어질까? 2017년 기준으로 당시 시행된 부검을 다룬 통계 논문에서는 사망자 28만5,534명 중에서 법의학자들이 행한 부검은 8,888건으로 전체 사망자의 3.1%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활동 중인 법의병리학자가 우리나라에 40명~50명 정도라고 하니, 부검 수치가 결코 낮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있는 40여 개의 의과대학 중에서 법의학을 전공한 교수가 근무하는 법의학교실이 존재하는 학교도 10여 곳에 불과하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법의학과 검시제도의 현실과 마주한 듯한 느낌이다. 


법의학의 시선으로 보는 인간은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우리에게 말을 하는 인간이다.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생명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죽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이 유일하고 말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학문이 법의학이라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므로, 그 어떤 학문보다 실재적으로 죽음을 다루는 학문인 법의학에 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인 용어도 많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거나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의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통해 시작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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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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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였다. 거대한 문어가 다리로 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지구 ? 생물체는 ? 항복하라.

문어가 말했다. 아니 "문어가 말했다"라는 이 문장은 상식적으로 굉장히 이상하지만 하여간 그 당시 나는 문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문어가 말하는 걸 듣다니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같이 했다. 애초에 대학교 건물 안에 복도를 꽉 채우는 크기의 거대 문어가 등장해서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리며 나에게 말을 거는 사건이 내 평생에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문어' 중에서, p.27


해양 생물을 주제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정보라 작가의 SF연작소설집이다.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라는 제목으로 쓰인 여섯 편의 이야기에서 '나'와 '남편(위원장님)은 자꾸만 말하는 해양 생물과 마주하고, 그때마다 정체 모를 검은 양복 군단에게 연행된다. 진지하지만 코믹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지만 그 배경들은 대부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가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소속이고 실제로 국회 앞에서 고등교육법 개정 농성을 한 적이 있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 위원장님과 연애를 하고 결혼해 포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살면서 바다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이 책의 제목을 '포항 소설'이라고 하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새벽에 대학교 본관 건물 복도에 문어, 혹은 문어처럼 생긴 어떤 생물이 등장한다. 때는 고등교육법 개정안, 일명 강사법이라고 하는 것이 제정되어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났고, 잘려서 열받은 선생님들이 대거 노조에 가입해 농성 중인 시기였다. 농성 천막을 홀로 지키던 위원장님은 자다가 배가 고파서 깼고, 잠결에 자신한테 오는 문어를 잡아 라면에 넣는다. 그리고 그 이유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취조실에 있는 참이다. 그걸 대체 왜 먹었습니까, 대학교 건물 복도에 문어가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로 시작되는 대화는 벌써 한 시간째 똑같은 말의 되풀이 상태였다. 실제로 이 소설 <문어>의 초반 5~6쪽 정도는 2021년 모 대학교 농성장에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농성도 하고 데모도 하면서 러시아 문학과 문화 수업도 열심히하던 작가는 러시아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바다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러시아어로 '나'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대게가 등장하는 작품 <대게>가 만들어 진다. 





(그러니까 떠나요. 잔인한 권력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요. 가서 행복하게 살아요.)

그리고 나는 울었다. 비인간 생물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망쳐버려 살 수 없게 된 바다, 부서진 해저, 죽은 땅과 도망칠 곳 없이 좁아져버린 지구가 한없이 미안했다. 그러나 우는 것 외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예브게니가 다른 다리들로 나를 받치고 집게발에 기대어 울게 해주었다. 집게발은 비린내가 나고 거칠고 단단했다. 나는 그 거친 단단함에 기대어 울었다. 검은 덩어리도 예브게니도 내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 대게' 중에서, p.84


작가는 <문어>, <대게>, <상어>까지 쓰고 3부작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이야기를 몇 개 더 붙여서 책으로 내보자는 제안을 받고 <상어>가 탄생하고 이어 <개복치>와 외계 생물 거래의 음모를 밝히기 위한 <해파리>와 <고래>까지 만들어 진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일본은 원전 폐수를 바다에 버렸으며,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나빠지고 있지만, 어디선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섯 종의 해양 생물이 등장하는 이 연작 소설들은 세계의 위기 속에 있는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과 생물들이 죽으면 인간도 죽게 마련이다. 그러니 기후 위기에 대응해야 하고, 더 적극적으로 지구가 망가지지 않도록 맞서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시간강사인 작가가 처우 개선을 위해 싸웠던 이야기에서 시작해 러시아와 일본의 국제적인 문제를 거치고, 지구 환경 위기에 이르는 여러 이슈들을 보여준다.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것도 아니고, 도망칠 데가 항상 있어서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있기엔 열받으니까, 안 싸울 수는 없으니까 싸우는 거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을 누군가를 응원하며 읽게 되는 작품이었다. 해양 생태계 파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해고 처분과 장애인의 이동권을 무시하는 시설, 세상 전체가 의존하면서도 무시하고 착취하는 돌봄의 가치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 있어 아주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지구 생물체가 모두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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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살인사건
애슐리 칼라지언 블런트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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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피로함을 느끼고 손가락 끝으로 눈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니까,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게 분명하네."

"네가 이 유명한 살인 사건 피해자와 똑같이 생겼고, 널 닮은 다른 여자들이 살해당해서 똑같은 자세로 발견되는 게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두 번째 피해자는 아직 - "         p.115


일요일 이른 아침, 조깅을 하던 레이건은 알몸이 드러난 여자의 상반신을 발견한다. 마치 마네킹처럼 몸이 반으로 쪼개진 채 토막난 시신이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죽은 여성의 얼굴이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던 것이다. 레이건은 마치 자신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얼마 뒤 또 다른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녀도 레이건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이 사건은 오래 전 미국에서 발생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블랙 달리아 사건과 유사한 면이 많아 언론에서는 '시드니 달리아 사건'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사실 레이건은 어린 시절 지독한 스토킹을 겪은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SNS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온라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다. 현재는 화원을 운영 중이었지만, 장사가 계속 안 되어 작년부터 형편이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이런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레이건은 한국에서 만난 친구 민을 찾아가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을 자신이 없다. 자신의 과거가 민과 그녀의 가족까지 위협하게 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건의 친구 민은 시드니 모닝 헤럴드지의 범죄 보도 부서에서 일하며 20년 전에 발생한 충격적인 살인 사건에 관해 책을 쓰고 그것이 국제적인 출판 계약으로 이어져 유명해졌다. 지금도 경찰은 물론 언론 쪽에도 지인들이 있었기에, 레이건은 사건에 관해 뭔가 알 수 있을까 해서 친구를 찾아간 거였다. 





"저는 인터넷만 안 쓰면 저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저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고요.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여자들 탓으로 돌리도록 사람들을 세뇌하는 여성 혐오 커뮤니티들이 그 안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하지만 이런 커뮤니티에서 내세우는 폭력성은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끼쳐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죠."          p.357


1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스토킹 사건은 레이건을 다시 위협하기 시작한다. 과연 그 남자가 다시 레이건을 찾아낸 것일까. 그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인 것일까. 민은 레이건을 걱정하며 경찰에 알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레이건은 경찰에는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사실 오래 전 그녀를 스토킹했던 남자가 바로 경찰이었기에, 경찰들이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한 이메일이 오기 시작하고, 집 근처에 속옷이 선물 포장되어 배달 되는 등 그는 점점 그녀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다. 범인은 왜 블랙 달리아 범죄 현장을 재현한 것일까. 시드니 살인범이 블랙 달리아 살인범과 동기가 같은 걸까. 그리고 왜 그는 레이건과 도플갱어처럼 닮은 여성들만 골라 살해하는 걸까. 정말 오래 전 그녀를 스토킹했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 것일까.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애슐리 칼라지언 블런트의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다크웹, 스토킹, 여성 혐오, 온라인 범죄 등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더욱 오싹한 이야기였다. 작가가 한국에 거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한국계 캐릭터와 에피소드도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고, 극중 주인공이 겪는 사건 또한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더욱 몰입감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호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심리 스릴러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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