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3
이희영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이 말하는 명확한 원인과 결과는 과학에서나 통용된다. 인간의 삶에서는 이것이다, 할 수 있는 정확한 공식과 법칙이 성립될 수 없다. 악한이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그냥 재수가 없거나 운이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우리네 삶이다... 나는 왜 내 얼굴을 볼 수 없을까? 원인이 뭘까?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장에 뾰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찾 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남들은 멀쩡히 잘만 가는데 나 혼자 넘어졌다고 화낼 필요가 없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냥 지지리 재수 없었다, 생각하며 툭툭 털어낼 수밖에.            p.25~26


만약 내 얼굴을 나만 볼 수 없다면 어떨까. 다른 모든 것은 다 보이는데 자신의 얼굴만 안 보이는,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상태. 거울에 비친 모습도 자신을 그린 그림도 사진도 모두, 얼굴과 관계된 것은 다 볼 수 없다면 말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인시울은 여섯 살 때 어느 날,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울 속에서 보이는 건 안개처럼 흐릿했다가, 색색의 블록으로 보이다가, 먹물을 엎어버린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병원을 다녀봤지만 안구나 시력에는 문제가 없었고, 어떤 병원에서도 명확한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시울은 부모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했고, 이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평범하게, 정상인 것처럼.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교실에서 작은 사고가 생긴다. 하필 그날 사물함을 새로 교체했고, 묵재가 친구들에게 던진 농구공에 맞은 시울이 쓰러지면서 사물함 모서리에 이마를 찍힌 것이다. 상처는 무려 스무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시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에 상처가 난다. 그렇게 보기 싫은 흉터가 이마에 생기고 난 뒤, 거울을 보다가 시울은 새된 비명을 지른다. 그 흉터가 시울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시울은 난생처음으로 진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천천히 손을 들어 흉터를 만져보고, 그 작은 흉터에게 인사를 하는 시울의 마음은 어땠을까.  





라미가 자신의 진짜 매력을 모르듯, 사람들이 할머니의 소녀 같은 호기심을 못 보듯, 우리는 어쩌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백지보다 귀퉁이의 작은 얼룩에만 집중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세상은 볼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어 기적처럼 내 얼굴과 마주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정도의 얼굴을 만들어가고 싶다. 표독하지 않은 표정과 웃는 주름이 많은 편안한 얼굴이 되길 바란다. 그 얼굴과 마주하는 건 오직 내 노력 여하에 달렸다. 그래서 다행이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위해 정작 보이지 않는 것들을 놓치게 될까봐.               p.172~173


시울에게 상처를 만들어준 묵재는 중2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꽤 유명했었는데, 이유는 엄마가 알코올중독자로 술에 취해 맨발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였기 때문이다. 이후 묵재는 아빠와 단 둘이 지내고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집을 가출해 한 번 더 학교를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그 뒤로는 교실 뒤 사물함처럼 조용히 학교에 다니고 있는 데 시울 역시 제대로 말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분명 있는데 전혀 없는 것처럼 그런 존재였던 묵재는 시울에게 상처를 만들어 주고는, 갑자기 존재감이 생겨 버린다. 얼굴에 생긴 흉터가 미안한 묵재는 죄책감을 느끼고 시울에게 사과하지만, 사실 시울이는 흉터를 빨리 지우거나 어떻게든 없애야 하는 그런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묵재에게 전에는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던 내 얼굴의 아주 작은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말해줘도 이해 못하겠지만 시울은 자신이 흉터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묵재와 시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게 되고, 엄마가 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빠와 남게 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들으며 시울은 생각한다. 아무도 상대를 완벽히 알 수 없다고. 설령 가족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게 상처 자국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볼 수 있게 된 시울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진짜 제대로 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구나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마주해야 하는 것 앞에서는 못 본 척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보여지는 것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4-19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궁금했는데,,, 잘 읽고 갑니다.
 
특종! 쌓기의 달인
노인경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인경 작가의 ‘밤이랑 달이랑’ 시리즈에서 만났던 밤이와 달이가 새로운 이야기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각양각색의 물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쌓기의 달인'이 되어서 나타났는데, 어떻게 된걸까? 


새 방송국의 비둘기 기자가 취재를 나온다. 매일 탑을 쌓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이 방송국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매일매일 탑을 쌓는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인가요?'




아이들은 매일 매일 물건의 탑을 쌓는다. 쿠션, 우산, 페트병, 프라이팬, 양동이... 급기야 커다란 몬스테라 화분과 변기, 대형 욕조에 냉장고까지 등장한다. 그야말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미션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왜 아이들은 계속해서 탑을 쌓는 걸까? 관심받고 싶어서일까?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에 대한 보상 심리일까?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즐기는 것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좋아하니까요.'




탑이 높아질 수록 취재하러 나온 비둘기 기자의 궁금증도 더해지지만, 사실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다. 그저 좋아하기 때문에, 재미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쌓아 올리다 보니 어느새 하늘까지 향해 가기 시작한 탑! 아이들은 탑을 쌓아서 달까지 높이 가려는 걸까? 


그런데 그 순간, 하늘을 향해 가던 아이들은 다시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 놀이의 진짜 재미는 탑을 쌓은 뒤에는 무너뜨리고, 다시 쌓는데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탑이 무너질까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그랬던 마음을 어른이 되어서는 자주 잊어 버리게 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어쩐지 살면서 자꾸 결과에만 얽매이고 매달리게 되는 것 같다. 매일 쌓고 무너뜨리고, 다시 쌓을 수 있는 새로운 날들이 주는 기쁨을 잊어 버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 '부수고 다시 쌓았던' 경험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넘어져도 괜찮고, 무너져도 괜찮았던 그 시절의 긍정 마인드를 되찾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그림책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과 정전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상 등장했던 모든 마술을 능가하는' 마술은 이 단계에서는 '거대한 장치'라는 복선만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나를 포함한 관객은 이미 리도의 '연출'이라는 마법에 걸려 있다. 존재하지 않는 '금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그에 도전하는 마술사로서 리도가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 기대하고 있다... 사실 내가 가장 감동한 마술은 이 오프닝이었다. 리도는 복선을 깔고 관객에게 마법을 걸어 더없이 주도면밀하게 앞으로 일어날 기적을 준비한 것이다.          - '마술사' 중에서, p.17



한때 마술계의 스타였던 인기 마술사 '다케무라 리도'는 마술단을 운영하며 자금난에 시달렸고,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마저 실패하면서 빚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무대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순 없을까' 고민하다 타임머신을 만들었다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는 기적의 트릭을 선보인 뒤 자취를 감춰버린다. 한동안 그의 행방을 둘러싸고 텔레비전이 시끌시끌했지만, 시간이 흘러 곧 리도는 지나간 과거가 된다. 22년 뒤, 역시 마술사가 된 리도의 딸은 오랜 시간 아버지의 마지막 마술을 연구해왔으며 드디어 그의 타임머신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한 번 더 시간 여행을 하겠다고 공언하는데, 과연 그녀는 서른한 살 때의 아버지를 만나 그의 타임머신 초연을 막을 수 있을까. 


음악이 화폐로 통용되며 재산이자 학문으로 여겨지는 섬이 있다. 델카바오라는 작은 섬에 사는 루테아족은 필리핀 정부와 유네스코에서 C급 특정 문화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소수 민족이다. 그들은 각각 '음악'을 소유하는데, 그들이 소유하는 음악은 자기가 지은 것과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다른 음악이나 토지, 가축 등과 교환해 입수한 것이다. 그들은 음악을 '화폐'와 '재산'으로 나누어 관리하는데, '화폐'로서의 음악은 소유하는 곡을 그 자리에서 연주해 사용하고, '재산'으로서의 음악은 그것을 소유하는 이의 지위도 되고 '화폐'의 가치와도 연관된다. 너무 자주 연주하면 '재산'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가치가 높을 수록 좀처럼 연주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루테아족의 가장 유복한 남자가 소유한 부족 역사상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음악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연주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음악을 듣기 위해 델카바오 섬에 간 '나'는 과연 한 번도 연주된 적 없는 그 음악을 찾을 수 있을까.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지국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꿔 말해서 백삼십 년 전으로 CIA 정보원을 보내 공산주의가 탄생하는 걸 막는 겁니다.”

“그런 짓을 하면 세계는 어떻게 되는데?”

“모릅니다.” 화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제 존재도 사라질지 모르죠.             - '거짓과 정전' 중에서, p.280


이 작품은 미야베 미유키가 'SF계에서 초신성이 나타났다.'고 평가한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첫 번째 SF 단편집이다. '시간'과 '역사'를 테마로 여섯 편의 단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타임머신 마술의 비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경주마에 얽힌 인연, 그리고 CIA에 협력하는 소련 과학자의 특별한 기술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형식도, 소재도, 배경도 낯설고 참신한 작품이었다. 오가와 사토시는 불가능 범죄를 미스터리로 풀어내는 <너의 퀴즈>라는 작품으로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SF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 동안 다섯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마다 파격적이고도 정치한 상상력으로 호평을 받아왔는데, 이번 작품 역시 독특한 오가와 사토시만의 상상력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출간 인터뷰에서 'SF의 재미는 지금의 현실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 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가치관이 붕괴되는 듯한 감각을 맛보는 데 있다고' 말했다.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을 때, 보편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그 세계만의 특별한 가치가 모든 평범한 기준들을 넘어설 때 느낄 수 있는 재미야말로 오가와 사토시의 작품이 주는 재미인 것이다.  시간과 역사라는 소재로 쓰여진 이번 다섯 작품 역시 마술, 경마, 음악, 아라비안 나이트, 공산주의 등 어떤 공통점도 없는 다채로운 장르로 선보이고 있는데, 그 낯선 감각이 주는 매력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 한계 없는 상상력으로 버무려진 색다른 SF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가 잠든 사이에
스테이시 에이브럼스 지음, 권도희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이버리는 놀라지 않았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 사람은 자기가 죽을 거라고 했어요." 재러드가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날 도우려고 했는데 일이 복잡해졌다면서요."

복잡해졌다? 그 합병을 허용하기 위해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내는 일은 그저 복잡한 정도가 아니지 않는가. 에이버리는 신랄하게 생각했다. 그건 탄핵의 근거이며,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법원 판결의 상황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했던 것처럼.         p.165


'국민의 대변인'이라 불리는 대법관 하워드 윈은 업무 능력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재선을 준비 중인 현대통령과 대놓고 대립 중이면서 나라 전체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사건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최근 대통령이 막내딸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대학의 졸업식에서 한 연설로 인해 언론을 들썩이게 만들었는데, 언론에서는 윈 대법관이 앞으로 <미친 판사>라는 리얼리티 쇼를 보여주진 않을지 궁금하다며 대놓고 비꼬기도 한다. 윈은 늘 혼자였다. 첫 번째 아내는 죽었고, 두 번째 아내와는 이혼 소송 중이었으며 하나뿐인 아들은 아버지를 경멸했다. 그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걱정하는 척하는 아첨꾼들과 멸시당해도 산 인간들만 모여 있는 법원도 역시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워드 윈이 혼수상태에 빠진 채 간병인에게 발견되고, 그의 법적 후견인으로 자신의 서기로 일하는 에이버리 킨을 지명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아버지는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마약 중독자에, 가진 돈도, 연줄도 없는 에이버리 킨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세간에서는 킨이 대법관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단연코 아무런 일도 없었던 데다 그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편애한다고 느낄 법한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의식이 없는 대법관은 킨을 위해 숨겨진 단서들을 곳곳에 숨겨 두었는데,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풀면서 자신을 몰아내려는 세력에 맞서야 했다. 그녀는 윈 대법관이 나라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 중 하나인 미국 생명과학 회사와 인도 유전학 회사 간의 합병 제안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사실 이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국제적 음모가 함께 어우러진 복잡한 사안이었다. 과연 킨은 대법관이 남겨놓은 비밀들을 무사히 찾아내 그를 구해낼 수 있을까. 




에이버리는 리타와 윈 대법관, 양쪽 모두를 잃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구해야 해.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해결책이 떠올랐다. 에이버리는 또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단호하고, 안정적이었다.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위협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윈 대법관이 에이버리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가 책으로 배운 지식만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버리는 경험도 많았다. 그래서 쉽게 겁을 먹지 않았다. 여전히 목을 조르고 있는 위협을 옆으로 밀어내며, 에이버리가 중얼거렸다. "나한텐 문서가 있잖아요. 영향력도 있고."           p.440


요즘은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의 책을 몰입감있게 읽기가 힘들다. 워낙 읽을 책이 많아 병렬독서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 별로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스릴러 작품을 만났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도저히 중간에 다른 책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속도감있고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예일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조지아 하원의원과 소수당 대표를 역임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필명으로 여덟 권의 로맨스 소설을 썼는데 이번 작품이 자신의 실명으로 출간한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정치와 법조계를 거쳐온 자신의 이력을 잘 살린 작품이라 굉장히 현실적이고 시의성있는 이야기를 탄탄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의 장점을 얘기하자면, 탄탄한 플롯과 속도감 있는 전개, 시의성 있는 주제와 현실감 넘치는 배경 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돋보이는 것은 캐릭터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고 입체감있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버리 킨은 영리하고 침착하고, 사진같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며 신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조차 옳고 그름을 판단해 행동할 수 있는 대범함과 치밀하게 짜여진 단서들을 풀어나가는 신중함도 가지고 있다. 반가운 소식은 후속작이 2023년 여름에 출간되었고, 작가가 현재 세 번째 이야기를 집필 중이라는 거다. 그녀의 새로운 활약과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로서의 재미 또한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정의는 어디에나 있지만 보기 힘든 세상,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서도 오직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위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의 탄생을 놓치지 말자.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으로 휘몰아치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잘 만들어진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피엔스의 뇌 - 더 좋은 삶을 위한 심리 뇌과학
아나이스 루 지음, 뤼시 알브레히트 그림, 이세진 옮김 / 윌북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모 사피엔스는 믿을 수 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 동족이 느끼는 바를 함께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이죠(다른 포유류들도 어느 정도 공감 능력을 지니고 있긴 합니다_.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공감 수준이 모두 같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똑같은 동물 다큐멘터리를 봐도, 저는 어느새 펑펑 울고 있는데 제 친구는 콧물 한번 훌쩍이지 않죠. 이유가 뭘까요? 게다가 우리는 모든 존재에게 같은 방식으로 공감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공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지적인 능력입니다.              p.52

 

수천 년 전부터 연구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의 뇌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뇌를 실제로 연구하기 시작한 건 20세기 부터였는데, 뇌 영상 촬영 기법과 정보공학 및 그 밖의 기술 발전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인류는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뇌의 진화와 기능, 그리고 인간의 뇌 구조에 대한 여러 이론을 수립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모든 이야기는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했기에 존재할 수 있었는데, 신경과학이란 신경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과들의 총체를 말한다. 머리에 전극을 부착해 뇌의 전기적 활동을 기록하는 기술인 뇌전도(EEG)와 자기공명영상(MRI)의 발명으로 인해 인간의 뇌가 활동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뇌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언제쯤 뇌의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 수 있게 될까.

 

이 책은 프랑스의 임상심리학자이자 250만 명이 넘는 청취자에게 사랑받은 뇌과학 팟캐스트 〈뉴로사피엔스Neurosapiens〉를 제작하고 진행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이기도 한 저자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 뇌과학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펴낸 것이다. 뇌의 경이로움에 매료되어 신경과학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하는 저자는 '왜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무수한 청취자의 고민을 접하다 그들의 생활 속 고민과 밀착한 뇌과학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고작 1.4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는 뇌는 수많은 신경 세포로 구성된 경이로운 연회색 덩어리이다. 이 작지만 복잡한 뇌라는 존재 덕분에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환상을 품으며, 이상을 꿈꾸고, 만족할 만한 선택을 하거나 후회할 만한 행동을 하기도 하며,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러한 뇌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답은 우리가 기억한 단어들이 뇌에서 네트워크를 이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력은 경이롭습니다. 단어를 기억하기 위해 얼마나 집중력을 기울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집중한다고 생각이 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사실 단어에 대한 기억에는 '뇌 전체'가 관여합니다. 대부분의 인지 능력은 뇌의 어느 한 영역만 작동해서 발휘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언어 구사의 중추가 측두엽에 있는 건 맞지만, 그 중추는 뇌의 모든 부분과 연결되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어요.            p.270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한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왜 나는 나를 간지럼 태울 수 없을까, 왜 그 사람은 말의 속뜻을 모를까, 어떤 단어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현듯 기시감이 들 때 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름답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을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걸까, 창의성도 계발할 수 있을까 등등 뇌의 작동 방식을 알게 되면 일상 속 고민들에 대해 명쾌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될테니 말이다. 이 책 속 내용들은 뇌과학 팟캐스트에서 지난 5년 동안 다뤘던 이야기 중 가장 유용한 주제 23가지를 엄선한 것이다. 대중들을 풀어내는 방송이라 그런지, 기존의 뇌과학을 다루고 있는 어떤 책보다도 쉽고 현실적이고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나는 건 공감 능력이 고도의 지능이라는 점이었다. 타인이 느끼는 바를 함께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지적인 능력이라고 한다. 저자는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을 구분해 알려주고,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이코패스의 뇌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짚어준다. 외국어를 배울 때 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려주는 챕터도 재미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외국어를 빨리 배우는 것인지,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한 언어를 쓰다가 다른 언어를 쓰는 일은 뇌에 좋은 일인지, 불편한 일인지 궁금해 본적이 있다면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이 많을 것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기존에 잘못 알려진 뇌에 대한 정보와 오해를 바로잡고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어  우리의 뇌를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어준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