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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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경찰청 7층 강력반에는 두 명의 스타플레이어가 있다. 우선 톰 볼레르, 그는 다들 휴가를 떠나는 기간에 조차 늘 자리를 지키고, 경찰청 내의 모든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으며 맡는 사건마다 거의 다 해결했다. 상관 입장에서도 듬직하고 탐낼 만한 부하 직원이었으며, 흠잡을 데 없는 전적을 가졌고,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게다가 반론의 여지가 없는 뛰어난 리더십까지 있었으니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아마 강력반 역사상 최연소 경정이 될 거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나머지 한 명은 해리 홀레, 그는 외톨이에 술고래이지만 톰 볼레르를 제외하고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에다, 툭하면 무단결근을 일삼는 그는 상사인 비아르네 묄레르가 병적일 정도로 자기 목을 걸지 않았더라면 진작 해고되었을 만한 문제아이기도 하다. 그가 그렇게 뛰어난 형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런 그의 능력을 알아봐주는 상사가 없었더라면 그는 그저 술집을 전전하며 망가져서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다.

 

  

 

"마침내 우리가 한 팀이 되어 기쁘기는 하지만 약간 슬프기도 해. 왠지 알아? 내가 슬픈 건 호적수를 잃었기 때문이야. 우린 비슷해. 무슨 뜻인지 알지?"

누구나 인정하는 완벽한 엘리트 형사와 모두들 혀를 내두르는 삐딱한 문제 형사가 한 팀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요 네스뵈는 그러기 위해서 시리즈 처음으로 작품의 배경을 여름으로 설정했다. 범죄에 한해서는 비수기인 시기라 강력반 직원의 절반이 휴가 중인 7월이다. 대부분의 근무자 명단이 휴가 중, 휴가 중, 병가 중... 이라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인원들로 팀을 꾸릴 수밖에 없는 골치 아픈 휴가철. 오슬로에는 연쇄 살인이 의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강력반에서 연쇄 살인을 수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해리 홀레 뿐이다. 묄레르는 해리에게 도와달라 요청하고 그렇게 해리는 볼레르와 한 팀이 되어 수사를 하게 된다

해리 홀레 vs 톰 볼레르

이번 작품에서는 주인공인 해리 홀레 만큼이나 톰 볼레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여느 작품에서 보아온 평범한 악당이 아니라 다소 복잡한 인물이다. 기존 시리즈인 레드 브레스트와 네메시스에서는 볼레르가 그저 우리의 주인공에 반대되는 악역처럼 보여졌다면, 데빌스 스타에서는 단순히 그를 악이라 치부하기에는 뭔가 아쉬울 정도로 그의 행동과 신념에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이 보여진다. 덕분에 캐릭터는 더욱 풍부해졌고, 갈등은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위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너와 내가 늘 경찰청에 일등으로 출근하는 거 알아, 해리? 이상하지? 제일 늦게 퇴근하는 것도 우리 둘인데 말이야."

해리와 볼레르는 주변 사람들의 평판도 극과 극이지만, 외모에서도 뚜렷하게 대비되는 인물이다. 볼레르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좌우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잘생긴 남자이다. 꼿꼿한 자세 덕분에 실제 키보다도 훨씬 커 보이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자신감과 지속적인 가라테와 근력운동으로 단련된 몸매 또한 그를 미남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 그에 비해 해리는 190정도의 장신에 짧게 깍은 금발 머리, 나이 들어 보이는 동시에 또 어려 보이기도 하는 파란 눈, 날카로운 콧날. 부드러운 굴곡을 이루면서 남성적인 눈이나 코와 또렷한 대조를 이루는 입술에 결코 전형적인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다. 특히나 충혈된 두 눈과 다크 서클, 핼쑥하게 푹 꺼진 뺨을 가지고 코는 빨갛고,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그는 얼핏 보면 노숙자나 마약 중독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은 서로를 싫어하지만, 각자 속으로는 서로의 어떤 부분만은 인정한다. 해리는 볼레르가 일을 할 때 얼마나 효율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지 깨닫고,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일을 완벽히 해내는 맹수를 볼 때의 존경심 같은 기분을 느낀다. 볼레르는 해리가 목표 지향적이고 똑똑하고 창의적이며, 정신력도 강하고 도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며 형사로서의 그는 존중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재미있는 건 이런 다른 두 사람의 공통점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두 사람 모두 경찰청에 항상 일등으로 출근하고, 제일 마지막에 퇴근한다는 것. 그들은 친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수사에만 헌신하며,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각자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가끔은 그것이 집착처럼 느껴질 정도로 목표지향적이다.

그렇게 그들은 영웅과 악당, 선과 악이라고 명확하게 하나의 면만 가지고 있는 인물이 아니다. 번역자님이 '볼레르가 해리 내면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쌍둥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이들 두 사람은 한 쪽이 있어 나머지 한 쪽이 더 강해지려고 하거나,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볼레르는 이 작품에서 해리 덕분에 처음으로 통제력을 상실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해리는 볼레르 덕분에 끔찍하게 싫어하는 인간에게서도 존경할만한 부분을 느끼게 된다. 해리의 평소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 컨대 이건 대단한 발전인 셈이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제안

해리는 음주 문제에 무단결근, 권력 남용, 상부 명령 불복종, 조직에 대한 불성실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경력의 소유자이다. 겨울 내내 홀로 엘렌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면서 그는 점점 더 사건에 집착했고, 한 달 전에 갑자기 나타나 볼레르에 대한 허무맹랑한 비난을 늘어놓고는 사라져 폭음을 시작했다. 묄레르는 그의 무단 결근을 감추기 위해 그를 휴가 처리했지만, 휴가 기간도 끝났는데 해리는 여전히 나타날 기미를 안 보이고 있었다. 겨우 그와 전화 통화 후에 사건 현장에 투입시키지만 그는 취한 상태로 현장에 도착했고, 출근도 금요일마다 했으며, 상사의 지시를 어기고, 이후로 현장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술이나 퍼 마시는 중이다. 묄레르는 더 이상 해리를 감싸주다가는 자신이 더 이상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겠다는 판단에 결국 해리의 해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3주 뒤에 총경님이 휴가에서 돌아와 서명만 하면 끝인 것이다. 게다가 그가 5개월동안 엘렌 사건에 매달려 고군분투하면서 결국 미치기 직전의 정신상태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라켈과의 관계도 삐걱거리는 중이었다. 해리가 막판에 약속을 깬 것이 세 번째가 되자 라켈은 복수에 대한 욕망 때문에 다른 건 다 될 대로 되라는 거냐고 그를 비난한다. 하지만 해리에게 엘렌은 단순한 동료가 아니었으니 그는 그녀의 비난에 맞설 만한 명분이 없다.

  

 

 

"일자리를 하나 제안 받았어. 과연 거절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그러던 와중에 함께 팀을 이루게 된 볼레르가 그에게 제안을 한다. 아마도 그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며, 일단 그 일을 하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한번 발을 담그면 다시는 그 잉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치명적인 제안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볼레르와 해리가 나누는 대화가 꽤 여러 번 등장하는데, 볼레르의 생각은 꽤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는 기존에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총을 뽑았고, 두 상대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가 자기 방어를 위해 총을 발사한 것으로 다들 알고 있지만, 해리는 알고 있다. 그가 '일부러' 총을 꺼내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볼레르는 해리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그들에게 합당한 응징을 했을 뿐이라고. 그들과 자신이 한패라는 게 밝혀질까 두려워서 죽인 게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게 아냐. 해야 하는 건 없어, 해리. 이건 무엇을 원하느냐의 문제야... 난 그저 더 많은 정의를 원할 뿐이야.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

범인에게 정황 증거만 있거나, 범인이 정신병자 행세를 하거나, 그들이 빠져나갈 구석은 너무도 많고, 결국 그렇게 그들은 몇 년 후에는 석방되어 인간쓰레기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간다고. 아무도 더는 책임지고 불쾌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사회가 감히 실행하지 못하는 위생 작업을 하는 거라고 말이다. 법률 제도만으로는 안 되는 살인범들을 청소해서, 범죄자들로부터 오슬로를 지켜야 한다는 그의 말은 매우 그럴듯하다. 사실 법의 맹점은 누구나 알면서도 차마 손대지 못하는 금기의 영역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저 정의를 위해서였을 뿐이라는 그의 제안은 상당히 유혹적이다. 왜냐하면 해리에게는 현재 다른 대안이 전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마흔이 다 돼가는데 알코올 중독에 직업도, 가족도, 돈도 없는 처지가 되기 일보 직전이니 말이다. 볼레르와 함께 일할 바에야 그냥 자신을 자르라고 말했던 그였기에, "그 자식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 대신 다른 사람을 투입하세요."가 그의 성격이었기에, 해리가 그 제안에 어떻게 대처하는 지를 지켜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해리 홀레의 알몸과 마주하다

이 작품이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꽤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해리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점일 것이다. 데빌스 스타가 시작할 때의 해리는 점점 더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이다. 그는 꿈꾸기 싫어서 잠들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여자의 입이 뒤틀리고 벌어지며 무언의 비명을 지르는 것을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지켜봐야 하는 악몽은 그를 계속 괴롭히던 꿈이기도 하다. 암묵적인 비난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릴 때는 동생 쇠스였는데, 이제는 엘렌이고, 어느 날에는 엄마가, 혹은 라켈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악몽에 시달려 땀이 범벅이 된 채로 잠에서 깨는 해리의 모습은 이번 작품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보여진다. 그 악몽 속에서 우리는 해리가 왜 엘리베이터를 타기 싫어하는 지 알게 되고,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곤 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그가 지닌 책임감의 무게와 죄책감의 부피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인생이란 취기와 그 사이사이의 맨 정신으로 이뤄져 있었다. 취했을 때와 맨 정신일 때,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진짜 삶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답이 뭐든지 간에 어차피 그로 인해 삶이 더 나아지거나 더 나빠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의 기본적인 삶의 법칙(지독한 갈증)에 의하면 좋은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은 조만간 사라진다.

그리고 또 이번 작품에서 해리는 여러 번 알몸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것이 영상화 되어진 창작물도 아닌데 알몸이 무슨 상관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요 네스뵈가 굳이 여름을 배경으로 이 작품을 쓴 이유 중에 어쩌면 해리의 알몸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가 누구에게나 가장 개인적인 모습이니 말이다. 발가벗은 상태는 가장 정직한 모습이기도 하다. 뭔가를 감출 수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애쓸 수도, 자신의 모습을 꾸밀 수도 없는 상태이니 그야말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정..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해리는 카밀라 로엔의 침대 기둥 위의 펜타그램을 발견하고 집에 와서는 옷을 벗고 알몸으로 침대에 들어가거나, 나흘 째 금주를 하던 중 냉장고 앞에 서서 짐 빔을 바라볼 때, 혹은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 옷을 찢듯이 벗어 던지고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려고 할 때 독자들 앞에 알몸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캐릭터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해리의 알몸을 상상하며 므흣해할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그것도 나쁘지 않다;;) ,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주 알몸으로 보여진 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 그가 지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바닥'까지 내려와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친구인 외위스테인처럼 택시 운전을 하는 모습은? 그 동안에 해왔던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해리 홀레의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만큼 해리는 절벽 끝까지 내몰려 있는 상태이다.

'누가' '어떻게'보다 더 중요한 ''의 영역

요 네스뵈의 작품에서 항상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동기'이다. 주도 면밀하게 계획한 살인사건에서 범인은 법의학적 증거들도 모두 없애고, 피살자의 사망 시간에 확실한 알리바이도 세우고, 살인 무기도 모두 버리지만 사실상 절대 없앨 수 없는 것 하나가 바로 동기이다.

  

 

"관객에게 한 인물을 소개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인물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가장 은밀한 소망과 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거요. 한마디로 그의 동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거지."

첫 번째 살인 사건, 카밀라 로엔의 눈꺼풀 안에는 별 모양의 작고 불그스름한 다이아몬드가 발견된다. 그리고 그녀의 침대 기둥 위에는 악마의 별이라 불리는 펜타그램이 그려져 있다. 두 번째 실종 사건, 리스베트 발리의 손가락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다. 세 번째 다시 살인 사건, 바바라 스벤센의 한쪽 귀에 하트 모양 안에 오각형 별 모양의 붉은 다이아몬드가 있는 귀걸이가 있다. 그리고 그녀가 근무하던 법률사무소 건너편 텔레비전 가게의 먼지 쌓인 모니터 위에서 역시 펜타그램이 발견된다. 미모의 여자들이 죽어나가지만, 피해자들 간의 연관성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범인은 현장에 다이아몬드를 남겨 이 사건의 키가 '펜타그램'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사건에 동기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동기가 있어야만 범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은 바로 동기에서 사건의 수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캐릭터를 창출할 때도 시작은 그 인물의 동기가 무엇인지 에서부터 이다.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런 말을 했고, 그 모든 것에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이 작품에서도 매순간 인물들은 동기를 찾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왜 사람을 죽였는지, 왜 펜타그램 표식을 했는지 말이다. 작품이 시작할 무렵 해리가 근거 없이 볼레르에 대한 자신의 의심을 총경에게 이야기 했을 때, 총경은 볼레르가 엘렌을 죽인 동기가 무엇일지 생각해봤냐고 묻는다. 볼레르는 엘렌 사건의 진상에 대해 추궁하는 해리에게 자신 같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동기가 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피살자를 이어줄 만한 단서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범인에게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동기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볼레르가 함께 일을 하려면 마음을 열어야 하지 않겠냐며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라고 했을 때, 해리는 네가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다고 묻는다.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 것,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과 그 이유. 그러니까 어떤 행동에 대한 동기. 작품의 후반부에 해리가 또 사고를 치고 볼레르가 자신이 직접 수습하겠다고 말할 때, 총경은 미친 놈에게도 동기가 있다며 해리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리가 범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계기 또한 ''를 알아냈을 때 라고 말한다.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은 바로 ''의 영역이다.

다들 알다시피 데빌스 스타는 오슬로 3부작의 완결편이다. 세 작품 모두 배경이 오슬로에만 집중되어 있고, 레드브레스트에 서 시작된 엘렌 옐텐 사건이 네메시스를 거쳐, 이번 작품에 이르러 비로소 끝이 나기 때문이다. 무려 2년 동안 해리를 괴롭히던 프린스의 존재가 세상에 밝혀지는 순간과 펜타그램의 비밀과 연쇄 살인의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의 희열이 비슷한 무게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작품에서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순서에 상관없이 이 작품부터 시작해도 된다. 과거에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것이 인물들을 괴롭히고 있는지 몰라도 작품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 이 작품의 매력에 일단 빠지게 되면 출간된 시리즈들을 죄다 찾아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단점은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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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경의 아이 놀이 백과 : 0~2세 편 - 아동발달심리학자가 전하는 융복합 놀이 103 장유경의 아이 놀이 백과
장유경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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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전쟁이기도 하지만,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이기도 하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모습은 인체의 신비를 새삼 깨닫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까워 더 많이 기억하고 마음 속에 담아두려고 애쓰게 하기도 한다. 한쪽으로 뒤집기를 처음 하던 순간을 지켜보며 탄성을 내질렀던 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배밀이를 하고, 앉혀 주면 머리와 몸을 똑바로 하려 하면서 혼자 앉을 준비를 하고 있다. '엄마 해봐.'라며 엄마를 가르치던 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엄마 목소리도 잘 알아듣고,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맘마, 빠빠 소리도 곧잘 하는 등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소리를 제대로 내기 시작하고 있다. 조리원에서 나와 집에 온 첫날, 이렇게 빽빽 울기만 하는 아기를 앞으로 어떻게 돌봐야 할지 막막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200일이 된 것이다. 어른 들은 그냥 놔둬도 아이들 스스로 잘 큰다고 하지만, 엄마 마음이 어디 그런가. 아무 것도 안 해도 지나가는 시간이라면, 가급적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아침에 눈떠서 젖을 물리고, 이유식까지 만들어 먹이고 나면 항상 드는 생각이 바로 이것 이다.

 

 

. 오늘은 또 뭘 하고 놀아줄까?

이제는 하루를 아이와 함께 보내는 것 중에 '놀이'에 가장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책을 읽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아기 체육관에서 피아노를 치고, 장난감을 만지고, 점퍼루에서 폴짝폴짝 뛰어도 보고, 자동차도 탔다가, 범보 의자에 앉아 이리 저리 움직이기도 했다가.. 이렇게 많은 종류의 놀이를 해도 한 두 시간이면 끝난다. 유모차를 끌고 나가 공원 산책도 하고, 아이를 안고 집안 곳곳을 구경시켜주면서 물건을 설명해주고, 아이 몸 구석구석을 마사지해주고, 목욕놀이도 하고.. 하지만 그래도 에너지 넘치고,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욕구를 다 충족시켜주지는 못한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 얘기를 들어봐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들 오늘은 뭐하고 놀아줘야 하는지 걱정부터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

누워만 있던 아기들에게 이제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며 때로는 앉아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외부 세계에 관심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딸랑이를 흔들어 소리를 내고 숟가락을 두들기며 즐거워한다. 이제 정확하게 손을 뻗어 물건을 잡을 수 있게 되어 혼자서 사과 조각을 집어먹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아기는 자신의 움직임이 가져오는 결과들에 즐거워한다.

 

이 책에서는 5개월에서 8개월 시기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모든 감각이 발달하는 시기'라고 정의해놓았다. 기존에 주로 반사운동에 의해 움직였다면,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몸을 조정할 수 있게 되는 시기인 것이다. 혼자서 뒤집고, 앉고, 붙잡고 서고, 기어 다니는 등 스스로 움직이게 된 아이의 모든 감각은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이런 시기에 그에 맞는 놀이를 통해서 소 근육을 발달시켜주고, 함께하는 사회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 것이다.

 

책만 보여주면 움켜 쥘려고 하는 통에 한동안 책을 가까이 두지 않고 있다. 책장을 넘기려고 하면 달려들어 잡고, 구기고, 찢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종이 찢기 놀이가 아기들에게 시청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하니, 책 대신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종이를 가지고 놀이를 할 수 있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투레질을 시작한지 꽤 되어서 이 놀이는 자주 해오고 있다. 아이의 배에다 입술을 대고 소리를 내면 깔깔깔 웃으면서 그렇게 재미있어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쿵쿵 뛰는 것을 좋아하는지 겨드랑이를 잡고 세워놓기만 하면 장소불문하고 폴짝폴짝 뛰어대는 중이다. 너무 뛰는 것을 좋아하는 활발한 아이라 점퍼루를 사줬는데, 역시나 깡충깡충 뛰어대면서 재미있어 한다. 걷기를 위한 좋은 준비 운동이 된다고 하니, 더 자주 놀아줘야겠다.

스트레스 때문에, 혹은 어떻게 놀아야 할지 방법을 몰라서 아이와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못했던 부모들이라면 이 책에 있는 놀이들이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 단계별로 필요한 엄마 표 놀이 방법과 더불어 고민상담소라고 해서 각 시기별 질문들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것 역시 초보 부모들에게는 유용한 팁이 된다. 갓난아기부터 24개월까지 아이들의 놀이는 두뇌 자극 경험이라고 한다. 놀이를 통해 스마트폰, TV, 태블릿 PC 등 아기가 스크린을 보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도 있고, 부모와 친밀함 형성에도 좋을 것 같다. 특히나 퇴근 후에 잠깐, 주말에 잠깐 아이를 보게 되는 아빠들이 이 책에 실린 놀이를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도록 활용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가끔 보면 아이를 가졌을 때, 처음 태어났을 때의 그 마음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 하루하루 아이 뒤치다 거리 하는 것도, 일상을 쫓기듯 살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게다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았던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말썽부리고, 미운 짓말 골라서 하고, 부모 말도 잘 안 듣고 그럴 테니 소리지르고, 한숨내시고 하느라 매일같이 행복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록 수많은 최초의 순간, 아이가 나를 보며 빙긋이 웃어주던 순간, 내 품에서 천사처럼 잠에 빠졌을 때의 소중한 순간들을 잊어 버리지 말자.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달래느라 잠 못 이루던 밤들이 쌓이고, 부모가 된다는 일의 그 모든 고통과 기쁨 속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그 모든 시간, 그 모든 날들을 잊어 버리지 말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 많이 놀아주고, 더 많이 사랑해주고, 더 아낌없이 시간을 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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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해도 될까요?
노하라 히로코 글.그림, 장은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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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이혼해야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혼해서 행복해질 수 없었던 것처럼

이혼해서 행복해질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혼인율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것으로 조사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결혼을 포기한 젊은 층이 많아지면서 결혼을 안 하거나, 혹은 결혼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못하거나, 어찌되었던 70년대 이후로 역대 최저 수치라고 한다. 결혼을 기피해 노총각, 노처녀가 넘쳐나는 '결혼 안 하는 대한민국'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혼율은 여전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50대 이상의황혼 이혼이 눈에 띄게 증가했단다. 그 동안 참고 살았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자의식이 발달한 탓도 있겠고, 그만큼 이혼을 선택하는 일이 예전보다는 '쉬워'진다는 뜻도 될 것이다. 특히나 불만과 갈등이 있었지만, 자녀 양육과 교육, 금전, 부모님 문제 등으로 참고 살다가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된 뒤에 갈라서는 황혼 이혼은 무려 30년 이상 함께 살았던 가족도 한 순간 남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니, 애초에 결혼부터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시사하기도 한다.

싫어하는 걸 좋아하게 되는 경우란 없을까? 있겠지...

하지만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되면 두 번 다시 좋아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작품 속 34살 시호는 6살과 8살짜리 두 아들을 둔 엄마이다. 그녀는 결혼 9년차에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다.

이런 상태로 앞으로도 이 사람과 함께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만... 이혼해도 되지 않을까?

시호의 남편은 성실하게 일 다니고 바람도 안 피고 빚도 없고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이웃이 보기엔 좋은 남편으로 보이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그런 가정이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 속에 이혼 그 두 글자가 떠오르지 않는 날은 없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점차 쌓이게 되면 그로 인해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전혀 가족을 배려하지 않는다. 물론 매일같이 회사에서 시달리고,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부담도 있겠지만, 하지만 모든 남편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결혼한지 9년이나 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걸까.

시호의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부터 켜고, 쓰레기는 꼭 쓰레기통 밖에 버리고, 세면대를 쓰면 항상 주변에 물이 튀어 있고, 양말은 항상 뭉쳐서 던져놓는다. 쓰레기는 제대로 통에 넣으라고, 양말 좀 제대로 벗어놓으라고 시호가 수백 번도 더 말했는데 왜 아무리 말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포기도 해보지만 그녀는 결국 또 다시 말해본다. 하지만 잔소리하면 남편이 오히려 화를 더 낸다. "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냐고. 주부니까 집에 있으면 그 정도는 니가 알아서 하라고. " 그녀는 다른 집의 경우를 들을 때마다 별것 아닌가 싶어진다. 하지만 '작은 기대가 차례차례 부서져서 따끔따끔 찌르듯이 쌓여만' 갔던 것이다.

 

시호도 결혼 전에는 말하고 싶은 건 다 말해 버리고 마음껏 싸울 수 있었다고, 그렇게 다투고 또 화해사면서 결혼하게 되면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될 거라고 믿었단다. 하지만 결혼해서 9년 동안 살아본 결과,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될 거라는 건 커다란 착각이었다고.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어릴 때 엄마랑 아빠가 가끔 다투실 때, 아빠가 뭐라고 하시면 엄마가 그냥 참는 것을 보며 왜 저러실까. 그냥 한마디 하시지 싶었는데 그게 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였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다. 아빠는 그렇게 소리쳐놓고 금방 잊어버리셨기 때문에 그 순간만 지나가면 다툼은 없었던 일처럼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 순간에 엄마가 참지 못하고 같이 맞서 다투기라도 하셨다면, 아마 좀 더 큰 다툼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아이들도 눈치를 보게 됐을 테고 말이다. 그렇게 아내들은 아이를 위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시호처럼 남편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게 참고, 숨을 죽이곤 한다. 그럼 겉에서 보기엔 행복한 가족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자신의 행복을 저당 잡혀 수십 년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기분이 좋을 때는 '착한 남편' '좋은 가장'

케이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게 나는 숨을 죽인다.

그러면 이 집은 밖에서 보기엔 행복한 가족이 된다

 

다들 시작할 때는 이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서로 죽고 못살아서, 한시도 떨어져 있는 것이 못 견디겠어서, 매일 같이 있고 싶어서 결혼을 할 테니 말이다. 물론 모두 첫눈에 반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적당한 나이에 조건 맞춰서, 나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도 나이가 삼십 대 후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그 동안과는 다르게 주위의 재촉에, 나이에 떠밀리듯이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결혼을 해야 하는 걸까. 결혼하지 않으면 어떨까. 지금 이 사람과 헤어지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었다. 머 결국은 사 년의 오랜 연애를 결혼과 연결시켰고, 정해진 수순처럼 아기가 태어나고, 엄마가 되었지만 말이다.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많은 것들이 생겨났고, 인생이 그저 짐작했던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는 막연히 가족이라는 개념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자연스럽게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십 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타인과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매 순간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끔은 무조건 희생해야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공유해야 하는,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유지되는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책 표지가 두 개로 되어 있다. 뒤집어서 씌우면 <이혼해도 될까요>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바뀐다. '남편이 절대 손댈 수 없는' 핑크빛 페이크 표지란다.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남편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경우, 숨겨 놓기에 딱 인 깜찍한 설정이다

 

결혼이 사랑의 문제가 아닌 책임의 영역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 또한 절대적인 포기와 희생을 통해서만 견고한 믿음으로 자라나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참아질 수 없는 부분이 어느 순간 생겨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내 선택이 처음부터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후회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내 주변의 친구들, 선배, 언니들의 경우를 보면서 숱하게 들어왔던 그런 에피소드들이, 실제 결혼을 하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결혼 생활이 생각보다 더 많이 어려운 거라는 걸 이제 막 깨닫게 된 이들에게 이 책은 그 사소한 일상들을 너무도 콕, 잘 찝어 내고 있어 공감을 넘어선 위로를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결혼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한 집에서 사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너무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결혼은 하지 않는 것 보다는 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지만, 사실 결혼하지 않아도 다른 종류의 행복을 찾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이혼율이 높아졌어도, 극중 시호처럼 이혼이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중대한 문제만큼이나, 이혼이라는 것은 그 배로 더 어렵고 중요한 문제이다. 혹시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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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4-2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네요, 피오나님.

피오나 2015-04-27 23:12   좋아요 0 | URL
결혼을 했거나, 아님 결혼 적령기이거나..모두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이 될거예요. 꼭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공감되고 그러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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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내년부터는 정년 60세가 의무화되면서 공공기관과 상시 근로자 300인 이상인 사업장의 경우 정년이 만 55세에서 만 60세로 바뀐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럼 전까지는 만 55세가 정년이었다는 건데, 알다시피 55세는 아직 너무도 정정하고, 멀쩡한 나이 대이다. 55세는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쉬기에는 아직 많이 아까운 나이라는 말이다. 대부분 정년 퇴직을 타의로 하게 되면서 퇴직금으로 새 사업을 시작해서 그 돈 마저 날려버리거나, 혹은 퇴직 후에 우울해하며 소일거리를 하며 갑자기 늙어버리거나 그럴 것이다. 아예 새로운 일을 찾아 다시 시작하는 경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 아빠도 정년 퇴직 후, 그러니까 잘 나가던 회사의 이사 자리에서 내려와 평범한 아저씨의 위치에 오게 되고 나서 몇 년, 계속 직장 생활을 하던 시기에 비해 금방 늙으셨다. 그런 아빠를 보면서 '정년'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 가에 대한 의문을 나는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었고, 55세가 되기 전에는 꼭 그 이후 노년의 삶에 대해 대비를 별도로 해두어야 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뭐 인생이 마음 먹은 대로 되겠냐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무라카미 류의 <55세부터 헬로라이프>는 그렇게 사회에서 밀려난 4050세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신문 에 연재했던 중편소설 다섯 편인데 모두 중, 장년인 주인공이 인생의 전환점을 지나 새 출발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년 퇴직 후에 찾아오는 어려움은 경제적인 격차에 따라 다양할 텐데, 이 작품집 속의 다섯 인물들의 스토리를 읽다 보니 나에겐 아직 한참 먼 미래의 이야기이면서도 어딘지 공감이 되어 쓸쓸해지기도 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기존의 무라카미 류의 작품을 꽤 읽었던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이 색다르게도 느껴질 수 있을 거라는 점이다. 인물들의 내면을 따스하고 부드럽게 바라보는 시선은 이들의 현실과는 다르게 꽤 희망적이라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겠죠?"

"그게 실은, 스스로 인생의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결혼 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정년 퇴직한 남편이 재취업을 하려다 번번히 실패하자 온종일 텔레비전 앞에 대고 불평불만만 늘어놓기 시작하자, 함께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30년 가까이 함께한 사람과 이렇게 간단히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이혼이 순식간에 결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혼자 살게 된 적막감과 해방감을 느끼며 백화점 식품 매장에서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결혼 상담소에 등록을 하고 남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재혼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도 있지만, 평생 남편 외에 다른 남자를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다른 남자를 한번 사귀어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녀가 선을 보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취향과 성격의 남자들은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들기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는데, 어쩌면 그것이 늦은 나이에 재혼하려는 그녀의 냉정한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쉰네 살에 작은 출판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한 뒤로 노숙자를 볼 때마다 불안감이 엄습한다. 자신도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무리에 끼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날이 커져 차량 안전 요원으로 일을 한다. <캠핑카>의 토미히로 타로는 회사의 조기퇴직제도에 응하는 형태로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회사의 영업 방침이 바뀌면서 한직으로 밀려난데다, 조기퇴직우대제도에 따른 특별 가산금 때문이었다. 그는 퇴직 후 한 달이 되어 갈 때 즈음 그 동안 꿈꿔왔던 일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바로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돌아보는 것. 그러나 아내는 앞으로의 노후도 있는데 캠핑카에 들이는 지출은 안 했으면 하고, 휴가를 길게 내기도 어렵다고 말하고, 그는 뭔가 소중한 것이 산산조각 난 듯한 기분이 든다.

"좋은 재취업 자리라도 있으면 모를까, 체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저금도 나날이 줄어들기만 하지. , 장년층 자살이 많은 것도 당연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앞으로 좋은 일 같은 건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래도 내게는 이런 좋은 일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희망이잖아. 뭔가 희망이 필요한 거야."

정년 후에도 대부분은 재취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는데, 정년퇴직이라는 제도는 오로지 회사의 입장만 고려해 만들어낸 냉정한 제도라는 생각도 든다. <펫로스>의 다카마시 요시코의 남편은 전형적인 외향형 인간으로 밖에서는 쾌활하고 화제도 풍부하지만, 집에서는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볼 뿐 그다지 말이 없는 편이다. 그런 그가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는 인터넷 블로그를 시작해 거의 하루 종일 서재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 부부 간의 대화는 더욱 없어졌다. 정년퇴직 후 시간이 많아지면 그 동안 함께 못한 시간들을 더 많이 공유할 수도 있을 텐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쉽지 만은 않을 것도 같다. 그런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은 애견 보비, 그녀는 애견 모임을 통해 친구를 만나고 산책을 시키고 하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만들지만, 나이 든 보비가 병에 걸리게 되자 하루하루가 슬프고, 우울하기만 하다. <여행 도우미>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시모후사 겐치이는 예순 살이 되자 회사에서 해고된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웠지만, 취직을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운전사가 남아도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헌책방에서 추리소설을 즐겨 읽던 그는 비슷한 취향의 유부녀를 만나게 되고, 결국 그녀에게 고백을 하지만 그녀는 병든 남편을 떠날 수 없다며 거절한다.

죽겠다고 결심하고 죽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에 끌어당겨지듯이,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결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행선지가 정해진 트럭을 담담하게 몰고 가듯이, 어떤 장소로 피해 옮겨 가려 할 뿐이다. 하지만 내 인생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구나.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저런 물건들을 트럭으로 운반하는 내 일은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55세라는 나이는 많은 것 같으면서도 아직 늦지 않은, 그러니까 더 이상 젊지는 않지만 늙었다고 말하기엔 어딘지 아까운 그런 나이이다. 수십 년을 한 가지 일을 하며 살았던 이들이라면, 정년퇴직 후에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막막할 것이다.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어린 사람이나 나이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다. 특히나 절만이나 실의를 겪고 나서, 용기도 없어지고, 자신감도 줄어들었을 때는 더욱 힘이 들 것이다. 하지만 무라카미 류는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차피 한번뿐인 내 인생 아닌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루는 지나가고,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도 내일은 온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 동안 당신의 인생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난 일을 후회하고 막막해하기보다,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수많은 시간들에 감사해보자.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해보지 못하던 것들을 이제는 실컷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용기를 가지면 당신의 인생은 이전보다 훨씬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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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4-2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 문장에 씽긋~ 웃으며 ^^ 잘 읽었습니다. 필요한 책이네요.

피오나 2015-04-26 12:32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이 나이때가 되었을 무렵에..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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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매 순간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고, 빛나서 시간이 지나는 게 아까울 정도로 삶이 퍼펙트 하기만 한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되돌아보면 내 삶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뭘 해도 나쁜 결과만 봐야 했던, 이렇게 계속 좋지 않은 일만 생겨도 되는 걸까 싶었던,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을 주는 건지 억울하기도 했던 그런 시간들. 당시에는 세상이 전부 끝장나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했었는데, 어느새 지나고 보니 나는 그 순간들을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 마냥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굳이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는 잊어버리고 싶었던 시간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 기억을 팔아서 무언가 가치 있는 걸로 바꿔주는 곳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자신의 기억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없애버리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생의 모든 순간들을 전부다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니, 그래 몇 가지 기억쯤 없어도 될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그 기억들이 점점 사라지고 나면, 남아있는 ''를 온전한 ''로 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기억이 없다면, 타인과 구분되는 것이 허울뿐일 터인데, 그럼 빈 껍데기처럼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이 물고기들은 세상의 어떤 화폐로도 환전해주지 않습니다. 오직 그 사람의 기억과 맞바꿀 수 있을 뿐이죠.

스물 아홉의 나는 스승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독립해 프렌치 레스토랑의 셰프가 되어 버려다 오픈을 앞두고 모든 게 박살 나 버리자, N국 국경 근처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렇게나 숙소를 정하고 빈둥거리다 보니 시간이 꽤 흘러,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국경 너머의 P국으로 가기 위해 메카데로 왔다. 그는 그곳에서 열 살 연상의 전 연인 로나와 동갑내기 백인 주코를 만나 함께 요리를 해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을 그들과 파티를 즐기다 로나가 떠나는 날이 되자 부랴부랴 P국으로 함께 가기로 한다. 그들은 출입국 관리소에서 자리를 비운 관리를 반나절이나 기다리다 밖으로 나왔고, 그곳을 걸어 다니다 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소년들을 만난다. 소년들은 보름달이 뜰 때마다 장이 선다며, 그들을 국경시장으로 안내한다. 그곳에는 화려하고 이국적인 온갖 물건들이 가득 있었고, 배낭 객들이 골목마다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았고, 거기서 계산을 하려다 난관에 봉착한다. 이곳에서의 화폐는 강 상류에서 잡히는 물고기 비늘이라는 것이다.

기억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다니, 그들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의 기억을 판다. 보통은 첫 거래에서 출생부터 두세 살까지의 기억을 판다고 하는데, 어차피 생각나지도 않는 기억이니 없어도 별 상관 없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씩 자신의 기억을 팔아 바꾼 화폐로 시장의 갖가지 물건을 정신 없이 사들이다, 결국 기억을 모조리 팔아 버리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억을 모두 전소시켜버린 로나는 더이 상 로나가 아니었다. 우아한 독신 귀족 같던 여자는 이제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장이 열리기 때문에, 달이 기울어지자 가게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한다. 붐비던 시장은 열두 개의 골목에서 여섯 개의 골목으로, 거기서 다시 세 개의 골목으로 서서히 줄어들어 결국 단 하나의 골목만 남기고 사라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는 달의 음모였던 것일까. 표제작인 <국경시장>은 이렇게 환상동화 같은 미스터리하고도 섬뜩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심술궂은 삶에 이제는 지쳐버렸다. 더 이상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 음미하는 일이 즐겁지가 않다. 어릴 때는 똑똑하다고 따돌림을 받았고, 커서는 음침한 성격이라며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피서지로 떠난 여름에도 혼자 도서관에 앉아 모래 대신 잉크를 묻히던 청춘의 시간들. 그때 내 목표는 일찌감치 교수가 되어 지나치게 똑똑한 나머지 마음의 온도를 잃어 차가워진, 그런 인간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쿠문>의 나는 여섯 살 어린 동생의 재능을 질투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매를 죽도록 미워했다. 선천적으로 평형기관에 이상이 있어 자주 넘어지곤 하는 동생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외면한 순간, 그들 사이를 차 한대가 지나갔고, 그렇게 동생은 두 번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만다. 천재 동생의 언니에서 바보 동생의 언니가 되고, 끝을 알 수 없던 질투가 종결되자 목적과 생기를 잃은 나는 권태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타블로이드에서 믿거나 말거나 가십 기사를 읽게 된다. <쿠문>은 일명 천재 병이라고 해서 잠복기에는 갑자기 명랑하고 영리한 사람이 되어 주변의 인기를 차지하고, 첫 번째 발작이 시작되면 갖은 환영을 보며 온갖 창조적인 작업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다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3~5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이 병은 일종의 불치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당신에게 쿠문에 걸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짧고 고통스러운 천재의 삶과 이전의 삶 중에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나는 결국 죽음을 불사할 용기를 자신의 재능에 투자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너무도 있을 법한 스토리라 잔혹 동화 같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였다. <필멸> 역시 뛰어난 재능을 얻기 위해 무섭게 달려드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건강과 재산이 모두 파산한 앙투안은 세 의 동료들과 광란의 밤을 보내고 불멸의 곡을 작곡하기 위한 영감을 얻는다. 그런데 그 영감이 그에게만 내려진 게 아니라 함께 했던 세 명의 동료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찾아왔다면? 그렇다면 그 곡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 것일까. 재능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눈이 멀어버린 이는 그걸 얻기 위해 그 어떤 방법도 서슴지 않고 달려든다. 그것이 설사 살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쿠문> <필멸> 그리고 <국경시장> 모두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삶을 파멸로 이끄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작품의 배경이 현실 같으면서도 환상적인, 꿈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섬뜩하다는 데 있다. 어디선가 멜로디 인형의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로 가다가 갑자기 잔혹동화의 결말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이다. <동족>에서 글자를 읽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었던 킹코브라 여왕의 죽음이나 <관념 잼>에서 결혼과 회사생활에서 모두 실패해 지방으로 이사 온 낙경 씨가 점점 '사물화'되어가는 모습은 사실 좀 무시무시하다. 그래서 김성중 작가의 이야기는 모두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번뜩 정신이 들어보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세계 말이다. 그런데 그곳은 묘하게 자꾸만 빠져들고 싶은 세계이기도 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야기의 매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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