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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봐도, 수학 문제를 풀어도, 몰래 연습장에 축구 필드를 그리며 딴짓을 해도 소용없었다. 어떤 순간은 끊임없이 파고든다. 모든 상상과 감성, 논리와 태도를 허물고 보호 구역을 침입해 속을 난장판으로 뒤집는다.
잊으려고 해도, 외면하려 해도 순식간에 생생하게 복원되는 기억.
너무 강제적이어서 불편한 기억.
그런 건 장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경험이라고 부른다. p.97
그야말로 올해 여름을 휩쓸었던 이야기를 가을의 문턱에서 만나보았다. 작가가 직접 겪었던 사건들을 토대로 쓰인 소설이라 그런지 감정 표현이 굉장히 디테일하고, 섬세한 작품이다. 누구든지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는 천국이라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작품 속 제니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제니는 열 살에 갑작스럽게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한 뒤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영어를 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잘한다고 모든 고민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제니는 경계에서 서성이는 존재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다. 얼마 뒤 같은 한국인 이민자 '한나'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뒤, 제니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한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그 와중에도 윽박지르듯이 자기 이름을 표명하고 다녔다. '잇츠 낫 해나. 잇츠 한나'를 로봇처럼 반복하는 한나는 금방 고집스러운 아이, 유별난 아이로 알려졌다. 한나는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제니는 한나를 안쓰러워하면서도 한심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한나 엄마는 제니의 엄마와는 달리 자주 학교에 나타났다. 한나를 데리러 오는 일 말고도 지도 선생님과 수차례 면담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예민한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곤 했고, 달래면 또 금방 그쳤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한나는 매일 조금씩 귀찮은 아이가 되어갔고, 규칙을 지키지 않고, 숙제를 제출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제니는 그런 한나를 지켜보며 자신이 몹시 미워했던 백인 아이들과 점점 비슷해져간다. 아이들에게 미움받는 한나와 가까워지는 것은 곧 무리에서 다시 한번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제니는 한나가 당하는 것을 방관했고,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으면서 자꾸만 신경쓰는 자신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있잖아, 제니."
어느새 물소리가 멈추고 한나가 나를 불렀다. 그 애는 먼저 불러놓고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을 틀었다. 유리에 귀를 박고 있던 나는 말보다는 진동으로, 그 안에서 요동치는 울림으로 한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처럼 되고 싶어.
그 순간 내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타일 바닥으로 똑 떨어졌다.
동그랗게 고인 물방울이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하고 구르는 것을 보다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p.159~160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한나는 우연히 제니가 한국어로 통화하는 것을 보고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네가 한국어를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다고. 그 동안은 하나도 못 알아 들어서 공지 사항이든, 숙제든 알 수 없었다고. 영어 유치원까지 다녔다는 한나가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제니는 한나가 통역을 요구하거나, 숙제를 도와달라고 할 때 마지못한 기분으로 도와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억울함과 분노, 자격지심과 콤플렉스, 질투와 동경, 천국과 지옥....의 감정을 오가며 제니와 한나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나름의 우정을 쌓아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 번째 여름, 두 사람은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백인 여자아이들이 초대한 호숫가 모임에 가게 된다. 그날은 제니의 생일이었고, 그 호수에서 단 한 사람만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작품은 우리가 '우정'이라고 부르는 감정에 대해,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이민자들의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이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새라가 한나의 머리끈을 잡아당기고 뜯어내듯 풀어내리는 장면이나, 테일러가 한나를 모욕하는 장면, 여자아이들이 빠르고 어려운 영어로 말하며 한나를 놀리는 장면도 작가가 겪은 것이라고. 그렇게 작가는 한나에서 제니로 자랐다고 말한다. 구조게 적응했고, 로렌처럼 부역했고, 어느 순간부터 자기방어, 합리화, 변명 등의 악순환에 갇혀 스스로에게,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더 많인 이들에게 와 닿았던 부분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머릿속으로만 쓰는 이야기라 직접 몸으로 체화한 이야기는 분명 다른 지점이 있을 테니 말이다. '여름은 고작 계절'이지만, 마음에 커다란 멍이 새파랗게 드는 시간일 수도, 터무니없는 기쁨과 괴물 같은 고통이 동시에 찾아오는 시간일 수도 있다. 누구나 친구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미숙하고, 순수했던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