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디츠 - 나치 포로수용소를 뒤흔든 집요한 탈출과 생존의 기록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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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940년 크리스마스는 기묘하게 평화로웠다. 외부 세계와 차단된 포로들은 전쟁 상황을 조금도 몰랐다. 고향에서 오는 편지도 없고, 최고 사령부의 지시도 없고, 미래에 대한 감도 없었다. 중세의 성벽 안에 갇힌 그들은 시간의 흐름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은 내일 끝날 수도 있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전투의 흥분, 포로가 된 충격, 다른 수용소에서 이곳으로 이송되며 느낀 불안감을 겪고 나서 만난 콜디츠는 동떨어진 장소, 거의 비현실적인 장소처럼 보였다. <도시 위에 높이 떠 있는 동화 속의 성.>                 p.40~41


1943년 9월의 어느 따뜻한 밤 자정 직전에 구스타프 로텐베르거 원사가 소총을 둘러멘 병사 두 명과 테라스에 나타났다. 포로들은 두 시간 전 이미 숙소에 들어갔고, 숙소 출입문도 잠겼다. 콜디츠는 조용했다. 로텐베르거는 첫 번째 경비병에게 다가가 서쪽에 탈출 시도가 있으니 즉시 경비실에 보고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두 번째 경비병과 세 번째 경비병에게 다가가 근무가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근무 시간은 아직 두 시간 더 남아 있었다. 오늘 근무는 일찍 끝내라는 로텐베르거가 유난히 성마르게 구는 것 같았다. 사실 로텐베르거는 가짜였다. 그의 정체는 스물다섯 살의 영국군 중위 마이클 싱클레어였다. 이미 콜디츠에서 두 번 탈출했다가 다시 붙잡혀 온 경험이 있는 그는 재능 있는 아마추어 배우이자 망상가였다. 


머릿속에 온통 탈출 생각뿐이었던 그의 계획은 단순했다. 경비병을 다른 곳으로 보낸 뒤, 먼저 스무 명이 침대보를 찢어 만든 끈을 이용해 건물 바깥쪽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그렇게 인근의 숲으로 들어가면, 남은 일행이 그들의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 당시 콜디츠에 갇힌 포로들 중에는 거의 3년이나 된 사람이 많았고,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탈출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감시받는 자와 감시하는 자 사이의 전쟁이 수용소에서 점점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콜디츠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탈주가 될 터였다. 과연 그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몹시 굶주린 포로들이 더 많이 도착하자, 에거스는 각자에게 빵 한 조각과 잼을 나눠 주면서 그들이 서로의 빈약한 음식을 훔치지 못하게 권총을 겨누었다. 공습 사이렌이 밤낮으로 울렸다. <모두가 밀치고, 소란스럽고, 사과하고, 냄새가 난다.> 플랫은 이렇게 투덜거렸다. 마침내 연료마저 떨어지자, 독일군은 소수의 포로들을 밖으로 보내 티어가르텐에서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오게 했다. 그렇게 나간 사람 중 한 명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마당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는데, 감옥 냄새가 우리를 강타했다.> 콜디츠는 얼어붙을 듯이 찹고, 악취 나고, 굶주리는 연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p.294


독일의 물데강에서 45미터 높이로 솟은 산꼭ㄷ기에 위치한 콜디츠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포로수용소로 사용되었다. 독일은 1043년경 지어진 이후 1천 년 동안 강대한 왕조들이 권력과 명성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 동안 증축과 개조,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던 고딕 양식의 성을 개조해 콜디츠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성의 목적은 처음부터 한결 같았다. 신민들에게 짓눌릴 듯한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 통치자의 힘을 보여 주는 것, 적에게 겁을 주고 포로를 감금하는 것. 그곳은 구제불능의 포로들을 모아 놓은 수용소였고, 수많은 탈출 시도가 있었다. 포로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탈출을 감행하고, 간수들은 강력한 통제와 긴장 속에서 이를 감시했다. 콜디츠성은 무시무시한 감옥이었으나 부조리할 때가 많았고, 고통의 장소였으나 고급스러운 희극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책은 철조망에 둘러싸여 세상과 단절된 채 엄중한 감시를 받는 이 새장에 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콜디츠는 높이 27m의 담장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외부로 이어지는 2개의 통로를 제외하면 주변이 가파른 낭떠러지 혹은 해자로 되어 있었다. 곳곳에 기관총 감시초소가 설치돼 삼엄한 경비 태세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책에는 생생한 사진들도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콜디츠성은 겉에서 보기에는 단단하고 틈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숨겨진 방, 버려진 다락방, 중세식 잠금장치로 단단히 잠긴 문, 오래전에 기억에서 사라진 틈새 등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래서 탈출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콜디츠에는 전쟁 전의 사회가 축소판으로 구현되어 있었는데, 다만 실제 사회보다 더 기괴할 뿐이었다. 저자는 기밀 해제된 공문서, 생존자 인터뷰 기록, 포로 및 독일군의 저서 등을 토대로 콜디츠에서의 일상과 인물들을 재구성했다. 이 책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의 포로수용소 역사를 정밀하게 복원한 놀라운 논픽션이다. <나치에 맞선 저항>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공간으로 회자되어 온 콜디츠의 진실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웬만한 영화보다 더 극적인 탈출과 생존의 기록이 궁금하다면, 극한에 처한 인간의 면면을 통해 그 어떤 전쟁 서사보다 드라마틱하고 강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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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 제3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대상 수상작 텍스트T 16
유진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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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도 된다고. 그 세계로.'

고유한은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적의에 가득 차 그 애를 노려보았다. 나는 내 삶을 지켜야 했다. 고유한은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검은색이던 눈동자가 햇빛에 희석되어 갈색으로 변하자 조금은 다정하게 보였다. 고유한이 말했다.

"그렇지만 네가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어. 그걸 모르고는 그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p.123


중학생 유주는 걱정많고, 숫기없는 성격에 자신감도 없어 친구를 사귀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당연히 일 년 중 가장 싫어하는 기간은 새 학기. 이미 무리가 형성된 아이들 틈에서 겉돌며 눈치만 보느라 매일이 힘겹다. 이 년 전 대입에 실패한 뒤로 스스로 방에 갇힌 언니를 살피느라 집에 가도 부모들은 유주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유주는 매일 밤 생각한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딴 인생은 싫다고, 새로운 인생을 갖고 싶다고. 잠들면 내일이 올 거라는 생각으로, 소리 없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삶이라니 얼마나 지옥같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 밤마다 텅 빈 방에 혼자 앉아서 '내일 또 학교에 가야 돼'를 고민하던 유주에게 변화가 생긴다. 어느 날 머리가 아파서 진통제라고 생각하고 초록색 캡슐형 알약을 먹게 되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주는 약을 먹은 뒤 현실과 비슷하지만,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 완벽한 세계에서 깨어난다. 집에는 다정한 부모님의 따뜻한 관심을 받고, 학교에서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모습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중심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꿈인 걸 알지만 절대 깨고 싶지 않은 세계였다. 그렇게 유주는 트윈이라는 초록색 알약을 통해 꿈과 현실을 오가기 시작하는데, 꿈속이 풍요로워질수록 현실은 점점 더 암담해졌다. 하지만 버틸 수 있었다. 알약을 먹고 잠들면 그곳에 자신만의 세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꿈 속 세계가 영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과연 완벽한 행복일까? 




"너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잖아."

"알아.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던 거잖아."

나는 기계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언니가 말했다.

"그게 잘못됐어? 사람들이 각자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한 게 잘못됐냐고."

"그건 현실이 아니니까."

"현실인지 꿈인지가 뭐가 중요해? 네가 말하는 현실이 뭔데?"            p.206


아이돌 연습생처럼 잘생긴 전학생이 짝꿍이 되어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반장이 되어 교실의 중심이 되고, 시험을 치면 전과목 올백에 미술 실력도 뛰어난, 그야말로 완벽한 자신의 모습에 유주는 점점 익숙해져 간다. 하루하루 눈을 뜨는 것이 지옥이었기에, 자정이 되기 전 알약을 하나씩 먹고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런데 보통은 잠을 자고 나면 현실로 돌아왔는데, 잠을 잤는데도 다른 세계에서 다음 날을 맞이하게 된다. 약을 먹지 않고도 이 삶을 지속할 수 있다니,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니 유주는 들뜬 마음이다. 하지만 꿈속은 현실과 거울같이 닮았다. 십 대가 며칠씩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는 뉴스가 계속 보도되고 있었고, 현실의 유주 역시 병원 침대에 누워서 깨지 않고 있을 터였다. 아이들은 암거래 사이트를 통해 약을 거래하고 있었고, 그렇게 현실과 꿈의 세계를 오가며 살고 있었다. 점점 더 약에 의존하게 된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 작품은 청소년 심사위원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제3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너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뜻하지 않게 외톨이가 되거나 고립된 생활을 견뎌야 했던 경험이 있다면 극중 유주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지금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고민을 정말 현실적으로 담아 내면서 놀라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청소년들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마음 아프지만 훅 빠져들어 읽게 되고, 마치 내 이야기 같아 공감되고, 너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소설을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청소년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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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삼국지 기행 : 위나라, 촉나라 편 - 기행장군 양양이의 다시 보는 삼국지 이야기
기행장군 양양이(박창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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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보통 유명인의 생가나 역사 유적지는 관광지로 화려하게 조성하는 경우가 많지만, 누상촌은 달랐다. 입구는 소박하고 조용해서 초라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곳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비가 자랐던 땅은 인위적 개발 없이 자연스럽게 변하며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덕분에 유비의 삶이 단순히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이라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p.198


삼국지 역사 현장을 찾아다니는 유튜브 채널 '기행장군 양양이'는 2019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약 80여 곳의 유적지를 누비며 기록해왔다. 저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게임과 소설을 통해 삼국지에 푹 빠져 있었던 '삼국지 덕후'이다. 언젠가 꼭 삼국지에 등장하는 전장과 영웅들이 머물렀던 도시들을 직접 가보겠다는 다짐은 자연스럽게 한문과 중국어 공부로 이어졌고, 결국 <삼국지>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는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은 유튜브 영상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영상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이야기와 부족했던 설명을 보완했고, 새롭게 알게 된 최신 정보들도 수록한 것이다. 그러니 영상을 재미있게 보아왔던 구독자들에게도, 삼국지를 좋아했던 독자들에게도 훌륭한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위나라와 촉나라의 이야기를 1, 2부로 나누어 구성하고 있다. 1부 위나라 이야기에서는 조조의 고향부터 시작해 그의 정치적 야망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실현되었는지를 만날 수 있다. 2부 촉나라 이야기에서는 유비의 고향에서 시작해 그가 다스렸던 지역과 적벽대전이 벌어진 실제 무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기대를 품고 찾은 장소가 예상과 조금 다르기도 하고, 치열했던 전투 현장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장소도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했던 장소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으며, 그저 발을 디디는 순간 왜 수많은 세력이 그곳을 차지하고자 했는지 그 절실함이 체감되는 곳도 있었다. 현재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 한때는 <삼국지>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하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새삼 부러워지기도 했고, 후대의 문학과 전설 속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한 장소를 목격하기도 한다. 이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그야말로 영화처럼 흥미진진한 역사 기행이 펼쳐졌다. 




이 장면은 소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허구다. 하지만 소화고성의 서문인 임청문 아래에서 만난 한 노점 주인은 "바로 앞에 보이는 이 임청문 아래가 마초와 장비가 싸운 그 자리요!"라며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고, 소설의 장면이 실제 역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현재를 지탱해 주리라는 생각에, 굳이 진실을 바로잡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허구든 아니든 아직도 이곳에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p.309


삼국지는 정말 다양한 버전으로 출간되어 있는데, 나도 아주 오래 전에 열 권짜리 시리즈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등장 인물만도 무려 1,000명이 넘게 나오는데다 중국의 지명들 또한 헷갈리고, 그 분량도 만만치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은 제대로 내용도 생각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삼국지의 그 현장들을 실제 모습으로 만나게 되니, 하나둘씩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삼국지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도 말이다. 100년의 역사가 펼쳐진 바로 그 현장을 직접 밟고,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이기에 뭉클한 부분도 있었다. 사진 자료들도 아주 많이 수록되어 있어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이 책은 단순히 유적지를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의 흐름을 공간적으로 재구성해 위나라와 촉나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장의 서두에 배경지식과 함께 보면 좋은 기행 영상이 QR코드로 수록되어 있고, 기행 루트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지도가 첨부되어 있어 삼국지를 잘 모르는 이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장비가 오랫동안 다스렸던 도시 낭중에서 장비소고기와를 맛보고 수제 맥주 장비정양을 곁들이고, 모진도의 가파르고 험한 절벽에서 헌제의 드라마틱한 탈출 과정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조조가 시를 읊던 장소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현장을 비롯해서 백마전투의 평야, 적벽대전의 장강 하구 등 삼국지의 결정적 장면들이 실제 어떤 공간에서 이루어졌는지 만날 수 있어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방구석에서 편하게 <삼국지>의 무대를 만나보고 싶다면, 쉽고 재미있게 <삼국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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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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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봐도, 수학 문제를 풀어도, 몰래 연습장에 축구 필드를 그리며 딴짓을 해도 소용없었다. 어떤 순간은 끊임없이 파고든다. 모든 상상과 감성, 논리와 태도를 허물고 보호 구역을 침입해 속을 난장판으로 뒤집는다.

잊으려고 해도, 외면하려 해도 순식간에 생생하게 복원되는 기억.

너무 강제적이어서 불편한 기억.

그런 건 장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경험이라고 부른다.                p.97


그야말로 올해 여름을 휩쓸었던 이야기를 가을의 문턱에서 만나보았다. 작가가 직접 겪었던 사건들을 토대로 쓰인 소설이라 그런지 감정 표현이 굉장히 디테일하고, 섬세한 작품이다. 누구든지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는 천국이라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작품 속 제니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제니는 열 살에 갑작스럽게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한 뒤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영어를 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잘한다고 모든 고민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제니는 경계에서 서성이는 존재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다. 얼마 뒤 같은 한국인 이민자 '한나'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뒤, 제니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한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그 와중에도 윽박지르듯이 자기 이름을 표명하고 다녔다. '잇츠 낫 해나. 잇츠 한나'를 로봇처럼 반복하는 한나는 금방 고집스러운 아이, 유별난 아이로 알려졌다. 한나는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제니는 한나를 안쓰러워하면서도 한심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한나 엄마는 제니의 엄마와는 달리 자주 학교에 나타났다. 한나를 데리러 오는 일 말고도 지도 선생님과 수차례 면담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예민한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곤 했고, 달래면 또 금방 그쳤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한나는 매일 조금씩 귀찮은 아이가 되어갔고, 규칙을 지키지 않고, 숙제를 제출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제니는 그런 한나를 지켜보며 자신이 몹시 미워했던 백인 아이들과 점점 비슷해져간다. 아이들에게 미움받는 한나와 가까워지는 것은 곧 무리에서 다시 한번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제니는 한나가 당하는 것을 방관했고,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으면서 자꾸만 신경쓰는 자신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있잖아, 제니."

어느새 물소리가 멈추고 한나가 나를 불렀다. 그 애는 먼저 불러놓고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을 틀었다. 유리에 귀를 박고 있던 나는 말보다는 진동으로, 그 안에서 요동치는 울림으로 한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처럼 되고 싶어.

그 순간 내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타일 바닥으로 똑 떨어졌다. 

동그랗게 고인 물방울이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하고 구르는 것을 보다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p.159~160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한나는 우연히 제니가 한국어로 통화하는 것을 보고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네가 한국어를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다고. 그 동안은 하나도 못 알아 들어서 공지 사항이든, 숙제든 알 수 없었다고. 영어 유치원까지 다녔다는 한나가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제니는 한나가 통역을 요구하거나, 숙제를 도와달라고 할 때 마지못한 기분으로 도와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억울함과 분노, 자격지심과 콤플렉스, 질투와 동경, 천국과 지옥....의 감정을 오가며 제니와 한나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나름의 우정을 쌓아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 번째 여름, 두 사람은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백인 여자아이들이 초대한 호숫가 모임에 가게 된다. 그날은 제니의 생일이었고, 그 호수에서 단 한 사람만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작품은 우리가 '우정'이라고 부르는 감정에 대해,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이민자들의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이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새라가 한나의 머리끈을 잡아당기고 뜯어내듯 풀어내리는 장면이나, 테일러가 한나를 모욕하는 장면, 여자아이들이 빠르고 어려운 영어로 말하며 한나를 놀리는 장면도 작가가 겪은 것이라고. 그렇게 작가는 한나에서 제니로 자랐다고 말한다. 구조게 적응했고, 로렌처럼 부역했고, 어느 순간부터 자기방어, 합리화, 변명 등의 악순환에 갇혀 스스로에게,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더 많인 이들에게 와 닿았던 부분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머릿속으로만 쓰는 이야기라 직접 몸으로 체화한 이야기는 분명 다른 지점이 있을 테니 말이다. '여름은 고작 계절'이지만, 마음에 커다란 멍이 새파랗게 드는 시간일 수도, 터무니없는 기쁨과 괴물 같은 고통이 동시에 찾아오는 시간일 수도 있다. 누구나 친구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미숙하고, 순수했던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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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과학
이선 크로스 지음, 왕수민 옮김, 김경일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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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감정은 삶을 헤쳐나가도록 인도하는 길잡이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낸 시간을 담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며, 음악이자 마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부정적 감정에서 도망쳐 기분 좋은 감정만 뒤쫓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거기서 배우되, 필요할 때는 한 감정 상태에서 다른 감정 상태로 자연스럽게 옮겨 가는 감정 전환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가치 있는 기술들이 다 그렇듯, 감정 전환 능력을 갖추려면 어느 정도 연습이 필요하다.           p.74~75


매일 우리는 미미한 혹은 격렬한 감정에 기반하여 결정을 내리고,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 삶의 궤도에 영향을 미친다. 호기심, 적의, 사랑, 질투, 불안, 우울, 기쁨, 고독 등 감정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의 감정적 삶을 조사한 한 연구에서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시간이 평상시의 33퍼센트에 이른다고 대답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랑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고, 슬픔은 분노를 부채질하고, 기쁨은 비통함을 누그러뜨리고,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희망을 품기도 한다. 이렇게 복잡한 감정은 대인관계부터 재정문제, 건강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것을 뒤흔든다.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 일상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는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결국 감정에 지배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 책은 감각, 주의력, 관점, 공간, 관계, 문화라는 6가지 감정 전환 도구를 통해 부정적 감정을 인생의 부스터로 바꾸는 과학적인 마음 관리법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감정은 억눌러야 할 방해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신호이므로, 올바른 방식으로 감정을 전환할 수 있다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실제로 활용해볼 수 있는 감정 전환 도구들을 삶에 적용하는 방법과 이 도구들로 스스로 감정을 전환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최신 심리학과 뇌과학 연구를 바탕으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론들을 알려주고 있으며,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 인류가 발생한 이래 우리는 줄곧 감정을 붙들고 사투를 벌여왔기 때문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감정에 대한 문제는 시대를 초월해 어디에서나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인류 역사는 감정 조절법을 찾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의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외과 수술법도 사람들의 감정 조절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내면의 전환 도구들은 우리가 손에 집어 들 때까지 잠자코 가만히 있지 않으며, 온종일 외부 요인들에 의해 밀리고 당겨지고 조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평소에 마주치는 가장 강력한 외부 요인 중 하나이며, 감각, 주의력, 관점이라는 내면의 전환 도구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공간'이다.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 현실의 우리도 맥락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거주하고 오가는 공간들이 우리의 감정적 삶을 형성하는 것이다.             p.206~207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갈등이 불거져 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질 때도 결국은 감정이 관건일 때가 많다. 날뛰는 감정 때문에 하루를 망치거나, 감정의 영향을 받아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도,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한다. 감정은 우리 삶을 건강과 활기로 가득 채우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을 때는 에너지를 축내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부정적인 경험을 하고 나서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곤 한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직면하는 것과 회피하는 것, 어느 쪽이 도움이 될까. 저자는 좀처럼 떨치기 힘든 부정적 경험이라면 직면하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회피할 경우 문제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데로 전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긍정적 감정이든 부정적 감정이든 상관없이 모든 감정은 우리가 이 세상을 헤쳐나가도록 돕는 일종의 도구 역할을 한다. 모든 감정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삶을 헤쳐나가는 길잡이가 돼준다. 심지어 괴로운 감정이라도 말이다. 


이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곳이다. 우리가 아침에 어떤 메시지를 받고 잠에서 깰지,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생겨난 감정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그날 하루의 흐름부터 가족들의 감정 세계, 직장과 지역 사회 등 모든 것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감정 관리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나를 지치게 하고, 진이 빠지게 만들고, 유혹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되고자 하는 모습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감정은 마치 스트라디바리우스 악기와도 같다. 익숙하지 않으면 소음이지만, 제대로 다루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음악이 된다. 우리는 모두 감정이라는 정교한 악기를 갖고 태어났다. 이제는 이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방법을 배워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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