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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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거야.”

아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건 더 그래.”

아빠는 그러면서 자신이 다시 강아지를 키우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떤 예측 불가능한 일이 자신을 찾아왔고, 그렇게 이시봉을 만나게 되었다고.                p.123


이기호 작가가 11년 만에 본격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서사를 펼쳐보이는 국내 작가가 흔치 않기에, 더욱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시봉'으로 이기호 작가의 초기작부터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시봉은 올해 만 네 살이 된 수컷 비숑 프리제로 시봉이라고 부르면 알은척을 안 하고, 꼭 이시봉이라고 성까지 불러야지 뒤돌아보거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다. 아빠는 나주시 왕곡면까지 가서 이시봉을 데려왔고, 시봉, 시현 남매의 동생처럼 이시봉을 대했다. 아빠는 광주에 있는 한 타이어 공장에서 이십 년간 현장 노동자로 일하다 그만두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피자집을 차렸다. 그리고 매일같이 이시봉을 데리고 출근했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피자집 바로 앞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다 속도를 높여 달려오던 레미콘 차량에 그대로 치이고 말았다. 


알고보니 아빠 이시봉을 구하기 위해 도로에 뛰어들었던 거였다. 아빠에게 이시봉은 우리집의 막내였고,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뒤, 엄마는 이시봉의 존재에 대해 무심해졌다. 이시습은 아빠의 사고 이후 음주에 의지하며 강아지 이시봉에게만 마음을 붙이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 이시봉이 보통 비숑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들여온 희귀한 혈통의 후손이라고 자신들이 오랫동안 찾아 왔다며 삼천만원을 제시한다. 내 작고 소중한 개가 고귀한 신분이라니.. 시습은 이시봉이 자신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그게 억울하고 불안하고 원망스러워서 자꾸 화가 난다. 그들에게 가면 이시봉은 더 행복해질까? 이시봉은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을까. 이시봉은 내가 없어도, 아니 나 없는 곳에서 더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던 시습은 이시봉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한다. 아빠가 어떻게 이시봉과 만나게 된 것인지, 무슨 인연으로 그 먼 곳까지 가서 이시봉을 데려온 것인지, 직접 나주시 왕곡면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고도이는 마구간에 갇혀 있는 그 순간까지도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터무니없는 감상과 그에 따른 상심으로 받아들였으나,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의 혈통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오독하면서 동물들의 삶에 관여한다. 그것이 인간의 유일한 장점이자, 집사로서의 자격 요건이다. 집사란 직위는 대개 그런 사람들, 자기애가 충만하지만 그걸 잘 모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한 방식이다.                p.468~469


그렇게 이야기는 이시봉이라는 이름에 얽힌 아버지의 비밀로, 스페인 왕가의 가계도로, 개 농장과 공장 노동조합으로 종횡무진 퍼져 나간다. 이시봉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이시봉이 아닌, 그와 관계된 사람들의 비밀들을 하나둘씩 풀어내며 스페인과 프랑스, 한국을 잇는 파란만장한 대서사를 만들어 낸다. 이시봉이 '이시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연에는 어쩔 수 없이 동료를 배반하게 된 미안함이 있었고, 유럽 왕실에서 길러지던 개의 일종이 개 농장에 팔려가게 된 과정에는 꿈을 좇은 대가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인간의 비참한 눈물이 있었다. 비숑 프리제 ‘이시봉’이 어느 가족의 삶에 깃들기까지의 여정이 그야말로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자신을 원망하는 존재를 향해서 '어둠 속에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고 계속' 꼬리를 흔드는 이시봉의 모습처럼, 이 작품은 어떤 상황에서도 명랑하고 유쾌하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개의 마음을 알수는 없다. 반대로 개도 사람의 마음을 몰라주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만으로 어쩐지 위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되고, 계속 함께할 거라는 생각이 무언가를 견디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관계는 의미있는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실제로 작가가 팔 년째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 이름 또한 이시봉이라고 하는데, 초판 한정으로 받을 수 있는 포토카드로도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사인 옆에 이시봉의 발도장도 함께 인쇄되어 있어 더욱 사랑스러운 책이다. 내 곁의 작고 소중한 존재들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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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시인의 마음을 받아쓰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필사 에세이
오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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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내쉰 한숨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오전에 건넨 안부 문자에 답장이 없어 하릴없이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는 시간이다. 무작정 책을 펼쳐보지만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다. 책 속의 주인공에게 도무지 감정 이입을 할 수 없는 시간이다. 베개에 고개를 처박고 발버둥을 치는 시간이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만, 어떤 시간의 밀도는 지나치게 높다. 밤이다. 그것도 아주 깊은 밤. 너무 깊어서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날 수 없는 밤. 진흙처럼 매시 매분 매초 달라붙는 밤.             p.52~53


어릴 때는 늘 일찍 잠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제 시간에 잠들어야 한다고 믿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보기도 했고, 몰래 불을 켜고 놀다가 후다닥 잠든 척 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도 어두운 밤이라는 시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낮과는 또 다른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 생겨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오직 깊고 캄캄한 밤이 줄 수 있는 마법 말이다.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처럼 마음속 어둠을 환히 비춰준다. 




'나를 위로해주는 말들은 대부분 속삭임'이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편지에 쓰인 문장, 한두 줄의 문자 메시지조차 속삭이듯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이다. 읽는 게 아니라 깃드는 글, 듣는 게 아니라 흘러드는 말이란 어떤 걸까 궁금해졌다. 잠들기 전이면 부모님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떼를 쓰던 아이는 자라서 밤마다 속삭임을 찾아 책을 펼치는 어른이 되었다. 책장과 책장이 스칠 때 들려오는 속삭임, 책 속 등장인물이 하는 심상치 않은 속삭임 등... 오직 한밤중에만 가능한 말과 이야기들. 


밤바람, 밤바다, 밤공기, 밤경치, 밤마실, 밤하늘, 밤물, 밤안개, 밤물결... 밤이 전유한 단어들을 살펴보니, 밤은 액체와 기체 사이에 있는 것 같다고, 시인은 말한다. 흐르면서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 같은  밤이라니... 시인의 문장들은 내가 알고 있던 밤을 아주 특별한 밤으로 변신시켜준다. 



"무슨 일 있어?" 묻고 나서 올려다본 친구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왜 우는지 차마 물을 수도 없었다. 온몸으로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다문 입을 드디어 열고 밤길에 울음을 뱉고 있었던 것이다. 꺼이꺼이 울 때조차 혼자였던 것이다. 비로소 혼자여서 우는 사람이 있고 혼자라서 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혼자의 사연은 함께일 때 몸집을 키운다. 그를 따라서 어느새 나도 흐느끼고 있었다. 검디검은 밤, 흑과 흑이 만나 흑흑이 되고 있었다.               p.102


유희경 시인의 필사 에세이 <천천히 와> 그리고 오은 시인의 필사 에세이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 함께 출간되어 '고요한 밤의 필사단'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올해 만났던 책 중에서 만듦새가 가장 예쁜 책이다. 사철제본에 표지를 아주 두툼하게 만들고 창문을 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미지와 내지 곳곳에 수록된 일러스트도 감각적이고, 종이를 묶은 실컬러까지 색상을 맞춰 얼마나 마음을 담아 만들었는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름다운 책이다.


필사용 글들만 모아놓은 필사집과는 달리 책을 읽다가 멈춰 문장을 따라 쓰고,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에 단순한 따라 쓰기가 아닌 정서적 필사의 경험을 만들어 준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밤이라는 시간은 없던 감성도 불러 일으키는 이상한 힘이 있다. 밤에 나누었던 대화, 밤에 들었던 노래, 밤에 썼던 글들은 모두 다른 시간대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정취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오은 시인이 밤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감각하며 써 내려간 감성적인 에세이와 시인의 문장을 따라 써볼 수 있는 필사 공간을 함께 수록했다. 이 책은 꼭 밤에 읽기를 권해주고 싶은데, '깊은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주는 신비스러움이 더해져 글을 읽고, 쓰는 내내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괜찮다고 토닥여 줄 것이다. 


유희경 시인과 오은 시인은 각별한 우정을 나누어온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 ‘친구의 말’을 덧붙이며 한 권의 책이 다른 한 권에게 마음을 건네는 구조로 만들어져 더욱 특별하다. 유희경 시인의 <천천히 와>가 시처럼 읽히는 산문이라면, 오은 시인의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은 소설처럼 읽히는 산문이다. 각각의 글들이 짧은 소설처럼 서사를 가지고 있고, 여운이 남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무수한 밤의 시간들을 함께 견디게 해줄 친구가 필요한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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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나, 두 개의 세계에서
전혜진 지음 / 구픽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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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뭔가를 빼앗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우리들에게 친절해도, 그 친절에는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이. 물론 슈슬리사는 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새로운 기술을 가져다주었도,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와 어떤 정부도 해내지 못한 훌륭한 복지를 제공했다. 어떤 이유로든 특권층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던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에 만족하며, 이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p.58~59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상상력은 대부분 SF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만나온 외계인이라는 존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외계인이 지구를 박살내거나, 인간을 모두 노예로 삼거나, 인간을 식량자원으로 활용한다거나, 전쟁이 일어나거나, 혹은 외계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몰살당하는 그런 엔딩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상상력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둥글둥글 알사탕 같은 외계인 함대가 하늘을 가득 뒤덮으며 나타난다. 하늘에 둥그런 우주선들이 잔뜩 떠 있는, 마치 택배 포장할 때 쓰던 뽁뽁이 비닐처럼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한 달, 외계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사그러들고, 주가들이 곤두박질친 것 빼고는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외계인들이 지구에 온 이유는 뭘까. 외계 문명 슈슬리사는 지구인들에게 선언한다. 수많은 약자들이, 차별받고 굶주리고 폭력에 시달리고, 때로는 살 권리조차 보호받지 못한 채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지구의 문명을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청와대 자리에 외계인의 총독부, 일명 진화가속연구소가 들어선다. 앞으로 지구는 어떻게 될까. 




그 아이는 그래서, 정말 무엇이었을까. 바이블에 나오는 예언자, 선지자, 혹은 구세주였을까. 아니면 그저 외계인들의 과학이 빚어 낸 우연이었을까. 어느 쪽이라 해도 그 아이에게는 그동안 누구도 그런 말을 해 주었던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괜찮다고, 너의 선택이라고. 그 누구도 처음부터 자신을 알지는 못한다고,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아도 깨달았다. 바로 그 아이를 만난 덕분에. 우리가 이곳에서 길 건너를 바라보던 지난 40년이, 아주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었으리라고, 부질없는 고집도, 시간낭비도 아니었다고.            p.245


외계인들은 지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온 존재들처럼 군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했고, 지구인들의 사상과 신체의 자유를 존중했으며, 모든 지구인은 평등하니 차별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니 말이다. 그렇게 지구는 진화 가속 기술 아래 새로운 질서로 재편된다. 전쟁은 사라지고 기아와 환경파괴도 제어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회. 외계인들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낳은 어떤 정복자나 독재자보다도 관대했다. 아낌없이 선물을 풀어 주는 산타클로스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 출산이 아니라 진화 자궁에서 진보한 생명체를 태어나도록 했다. 마치 식물들 종자 개량하는 것과 같이. 덕분에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총명한 아이들이 태어났고, 사람들은 곧 그 시스템에도 익숙해진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아주 희박한 확률의 자연 출산을 통해 태어난 이사나는 이질적인 존재로 주목을 받는다. 이 작품은 이사나를 둘러싼 사회 속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외계 문명이 지구에 도착한, 진화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280일>, <달의 뒷면을 걷다>, <규방에 미친 여자들>, <김밥천국 가는 날> 등의 다양한 장르를 선보여온 전혜진 작가의 신작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13년 전 네이버 <오늘의 문학>을 통해 발표한 후 단행본 『홍등의 골목』에 수록했던 ‘이시나’ 시리즈를 개작과 신작을 더해 처음으로 완결된 형태로 선보이는 것이다. 단편소설처럼 각기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펼쳐지는 연작이다. 슈슬리사의 인공 자궁에서 사람이 태어나기 시작한 지 고작 15년 만에 사람들은 자연 출산으로 태어난 아이를 뭔가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존재인 듯 취급한다. 진화와 발전,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세계는 과연 진보된 사회가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시나라는 존재로 인해 생긴 윤리적 딜레마와 시스템의 모순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어 준다. 여섯 편의 이야기는 외계인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그들이 오고 나서 40년이 흐르는 시간 동안을 그려내고 있다. 외계 문명이 등장하는 ‘미래'이지만,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현실에 말을 딛고 있는 이야기라 어쩌면 근미래의 우리가 마주하게 될 세계가 아닐까 싶기도 했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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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조니 선 지음, 홍한결 옮김 / 비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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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라인도 내게 어떤 행복감을 준다. 일종의 평온함이다. 데드라인이 다가온다는 것은 어찌 보면 평온한 상황이다. 삶의 변수를 모두 단순화하는 느낌이랄까. 데드라인과 관련 없는 일은 모두 존재가 희미해지고 만다. 데드라인이 없으면 내 앞에 놓은 시간이 너무 막연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자유로움에 오히려 숨이 막힌다. 마치 '쓸 수 있는 시간'이라는 커다란 빈 캔버스를 바라보면서 최적의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하는 듯한 기분이다.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나?                 p.56


현대인들은 누구나 번아웃 상태이고, 늘 시간이 부족하다.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잠깐 내려놓고, 느긋이 쉬면서 충전할 방법을 찾아 보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간에 '생산적'으로 보내지 않은 시간에 대해 우리는 약간의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잘하는 게 너무 많을 수록,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조니 선처럼 말이다. 


에세이스트, 일러스트레이터, 시나리오 작가, 프로듀서, 극작가, 설치예술가, 연구원으로 경계 없이 활약하고 있는 저자는 어느 날 갑자기 쉼 없이 달려온 일상을 멈추고, 돌연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이 책은 강박에 사로잡힌 작가가 번아웃 이후 ‘진짜 휴식’을 취하며 남긴 글과 그림을 모은 에세이이다. 라인 드로잉 그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낙서와 일기, 단상들이 가볍고 유쾌하게 펼쳐져 있는데 예술가의 기발한 머릿속을 엿볼 수 있어 아주 흥미로웠다. 계란 스크램블 만들기로 시작해서 차예단 말들기, 날계란밥 만들기, 계란찜 만들기, 완숙 계란 만들기, 천년계란 만들기... 등등 레시피가 이어지는 장도 있는데, 요리를 하는 사이사이 가족들간의 일상 에피소드가 더해져 있어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를 너무 말끔히 분리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여전히 과거의 나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내가 아니라 과거의 어린 내가 한 일이 되고,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이 모두 내가 아니라 미래의 나이 든 내가 할 일이 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늘 뭔가 하려고 할 뿐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신세다. 현재의 나는 그 모든 나 중에서 가장 쓸모가 없다. 삶을 항상 그런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걱정스럽다.              p.148


다육식물, 선인장, 에어플랜트, 크로톤, 마란타, 피토니아 등 식물 키우기에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은데, 식물을 잘 키우는 것도, 많이 키우는 것도 아닌 평범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식물 이야기라 더 재미있었다. 다육식물을 번식시키려면 밑동에서 건강한 잎 하나를 떼어내는 방법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저자가 떼어낸 잎은 항상 말라버리고 만다는 이야기부터 죽어가는 선인장을 부모님께서 데려가셨는데, 이후 삐딱하고 기우뚱한 기둥 모양을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놀라웠다는 에피소드도 귀여웠다. 이상한 모양으로 자란 선인장 기름도 수록되어 있는데, 아주 귀엽다. 식물이란 늘 가만히 있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식물을 하나둘씩 집에 들여놓고 돌보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짙은 녹색 잎에 선명한 분홍색 잎맥이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나 있는 마란타라는 식물은 밤이 되면 잎이 위를 향해 꼿꼿이 선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세상을 향해 활짝 펴져 있다. 나 역시 마란타를 데리고 있어서 저자의 묘사한대로 마란타의 행동을 알고 있는데, 저자는 이를 통해 식물의 삶에도 질서와 규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책의 제목처럼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갈 필요가 있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럴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상쾌하게 수영 한번 하면서 걱정거리와 고민, 해야 할 일들을 한쪽에 내려놓는 거다. 제일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휴식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마음, 일을 미루는 동안 더 복잡해지는 생각, 쉬는 중에도 일 언저리를 맴도는 강박적 태도 등 진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가족들과의 추억과 일상 풍경 등 소소하고 다정한 이야기들도 담겨 있어 공감하며 읽었다. 자, 쉬고 싶지만 오늘도 쉬지 못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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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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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초록을 알지 못한다.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초록은 무섭고, 섬뜩하고, 압도적이다. "초록에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자문한다. 그러나 초록은 무의미에 가깝다. 그것은 우리의 오성을 마비시키고 어지럽힌다. 또한 눈과 마음을 아프게 하고, 영혼을 옥죄고 당혹스럽게 한다. 색, 색! 다른 어떤 색도 초록 같지 않다. 다른 어떤 색도 그렇게 눈부시지 않다. 초록, 초록! 어디로 눈을 돌리건 초록빛이다. 착상과 생각, 마음의 충동도 초록과 은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초록의 성질로 바뀐다.             p.53


거장들의 품격 있는 문장과 사유를 소개하는 열림원의 '열다' 시리즈, 그 네번째 책이다. 헤르만 헤세의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빈센트 반 고흐의 <싱싱한 밀 이삭처럼>, 버지니아 울프의 <모두의 행복>에 이어 이번에 나온 것은 로베르트 발저의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이다. 에세이, 시, 소설, 편지 등 다양한 장르의 글과 사유의 흔적들을 찾아 모으고 엮은 것이 이 시리즈인데, 이번 책은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 시, 단편 중 ‘숲’을 테마로 삼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새롭게 엮은 것이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라는 책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이자 실제 삶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이 바로 '쓰기'와 '걷기'였다. 그는 산책길에서 발견한 하찮고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의 산책은 곧 그의 글이 되었고, 그는 걷기를 통해서 어디서나 살았고, 어디에서도 살지 않았다. 그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 무더운 날에도 숲으로 뒤덮인 가파른 산을 오른다. 꼭대기에 올라 시야가 확 트이면서 하얗게 반짝거리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이 멋진 풍경은 아무리봐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늘한 초록빛 전나무 숲의 한가운데에 있는 벤치로 가서, 거기 놓여 있던 전나무 가지와 작은 손수건, 그리고 작은 인형 모자를 발견한다. 아이들의 존재는 얼마나 아름답고 선하고, 영원한지... 그는 부디 사람들이 세상의 선함과 아름다움, 행복, 위대함,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둘러 길을 내려온다.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단단히 고정되거나 굳건한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더 우아하고 아름답고 고상할 수 있음을 관찰할 좋은 기회다. 방금 나무와 어린나무 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이유는 누구나 곧장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다. 그것들이 단단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바람에 얼마나 굴복하느냐에 따라 흔들림이 생겨난다. 만일 그것들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나뭇잎은 살랑대지 않을 테고, 그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소리는 나뭇잎의 살랑거림에 좌우되고, 살랑거림은 흔들림에, 흔들림은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물체에 좌우된다.                p.123


계절적으로 숲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당연히 여름이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발저는 전능한 여름 숲의 초록을 잊지 못한다고 썼다. 여름 숲은 단 하나의 짙고 생기발랄한 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모든 것이 초록이고, 사방이 초록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스럽고 다정한 것이 평생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하며 친밀한 초록색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자연을 멀리서 관찰하지 않고, 직접 만지고, 느끼고, 경험한다. 그의 문장으로 만나는 숲을 통해 그토록 단단하고, 크고, 넓고, 힘이 세고, 씩씩하고, 화려한 숲을 독자로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바람과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 상쾌한 숲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발저의 진심어린 마음이 페이지 곳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상깊은 글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야간 산행'을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사실 숲은 밤이 되면 낮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달빛으로 비춰지는 환함이란 그다지 넓지 않아서, 숲이 내품은 어둠은 깊고 시커먼 동굴처럼 느껴질 정도이니 말이다. 발저 역시 마치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았다고, 모든 것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시커먼 숲을 지나며 나무뿌리와 돌에 발이 차이고, 머리는 나무에 자주 부딪혔지만, 야간 산행을 아름답다고, 만물에 무언가 신성한 것이 내려 앉아 있다고 느끼는 걸 보며 그의 숲을 대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숲에 관한 이야기만 이어지는데도, 그 내용이 얼마나 다채롭고 풍부한지 지루할 틈없이 읽었다. 발저가 이끄는 대로 숲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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