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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ㅣ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천천히 쓰고 있다. 사실과 선택의 집합에서 한 인생을 잘 나타내는 실타래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씩 아버지만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글의 초안이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생각이 혼자 뛰어다닌다. 반대로 기억의 장면들이 슬며시 미끄러져 들어오게 두면, 아버지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보인다. 그의 웃음, 그의 걸음걸이, 그가 내 손을 잡고 장터에 데려가고, 나는 놀이기구를 두려워한다. 다른 이들과 나눴던 상황의 모든 조건들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나는 매번 개인적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온다. p.40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국내에 꽤 많이 소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권 만나보지 못했다. 어쩌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다는 이유로, 언제든 읽으면 된다는 안이함으로 사두고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 사이에 쌓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에 여러 출판사들이 바빠졌는데, 이유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다양한 출판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을 가장 열심히 국내에 소개해왔던 것이 아마도 1984Books일 것이다. 세련된 표지 디자인 때문에 나 역시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품들을 비롯해서 1984Books의 책들을 꽤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다시 찾아 읽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이 작품을 고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니 에르노가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며 쓴 작품이다. 그 동안 철저하게 객관적인 회상을 통해서 자전적 글쓰기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듯한 작품을 선보여왔던 아니 에르노였기에, 이 작품 역시 최대한 단조로운 글이 되도록,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으고 있다. 흥미진진하거나, 감동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이, 물기를 쫙 빼고 덤덤하게 흘러가는 글이다.
어느 오래된 가게의 종이 덜컹대며 울리는 소리, 너무 익은 멜론 향기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Y시의 여름 방학만을 되찾았을 뿐이다. 하늘 색깔도, 가까운 우아즈강에 비친 포플러 나무도 내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대합실에서 앉아 지루해하거나, 아이들을 부르거나, 기차역 플랫폼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방식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다. 나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익명의 존재들이자 자신도 모르게 힘 혹은 굴욕의 징표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서 아버지가 살던 환경의 잊고 있던 현실을 되찾았다. p.92~93
누구에게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혹은 규정해버린 어느 순간, 어떤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차마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어떤 것이든,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순간이든 간에 말이다. 그 중에서도 부모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영원히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존재의 상실에서 오는 비탄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이 하나의 시절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이자 단절의 표식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20세기로 넘어가기 몇 달 전, 바다에서 25km 떨어진 코 고장의 어느 마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농장의 인부로 일하고, 전쟁으로 인해 군대에 갔다가, 제조 공장에서의 노동을 거치고,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게를 운영하면서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기까지의 삶이 그려진다. 과장이나 왜곡 없이, 꼭 필요한 단어로만 표현하는 미화되지 않은 기억의 세계가 그렇게 펼쳐진다. 사는 데 책이나 음악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아버지의 삶, 다만 물질적 필요에 의해 앞으로 달려가듯 살아온 한 남자의 자리가 여기 있다.
여자로, 아내로, 사람으로 살아온 엄마의 서러움과 회한, 그리고 남자로, 남편으로, 사람으로 살아온 아빠의 슬픔과 후회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어른의 모습이었던 부모이기 때문에, 그들의 빛나던 시절을, 그들의 꿈과 열정을, 살아온 세월만큼의 실패와 고난을 알 수 없다. 이제 어른이 된 우리가 부모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대부분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때이다. 긴 세월 동안 아버지라 불렀던 한 남자의 삶을, 아버지라는 이름 아래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떠나 보낸 뒤에야 우리는 상상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굉장히 개인적이면서도 이상하게 보편적인 감정을 불러 온다. '가치에 대한 판단을 철저하게 없앤, 현실에 가장 가까운, 정서를 벗겨낸 글쓰기'가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쓰인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어떤 현대 문학과도 닮지 않은, 문학적 요소를 뺀 문학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힘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