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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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명의 사망자와 스물네 명의 부상자를 낸 콜럼바인 총격 사건 이후 이십 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세상을 경악하게 만드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져도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 비극의 한 복판에서 무려 16년 동안 멈춰버린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피해자의 가족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의 가족들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이 책은 평범하고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까를 묻고 또 물었던 가해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끔찍한 폭력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나도 범인의 가족은 어떤 이들일까 생각했었다. 부모가 가엾은 아이에게 어떻게 했길래 저런 사람으로 자라났을까 생각했다. 따뜻한 환경에서 사랑으로 키운 아이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족에게 책임이 있다는 설명을 언제나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부모가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고, 어쩌면 학대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엄마가 아주 신경질적인 사람이거나, 숨 막히게 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무기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999 4 20,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이 책은 사건의 주범이었던 두 학생 중 한명인 딜런의 엄마가 쓴 글이다. 그 끔찍한 날 뒤로 16년 동안, 여전히 자신이 알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보냈던 그녀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때 벌어졌던 학살을 속죄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책은 왜 필요한가? 가해자인 자신의 아들을 두둔하고 싶었던 한 부모의 목소리를 우리가 왜 들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평범한 고등학생이 어떻게 한 순간 세기의 괴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시 누구라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자신이 낳고 기른 아들에 대해서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애썼던 저자도 처음에는 아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려고 애쓰면서도, 여전히 아들이 자의로 누군가를 죽였을 리 없다는 현실부정을 놓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나마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타협하자면, 어쩔 수 없이, 혹은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그저 딜런은 마지막 순간에 에릭에게 끌려간 무고한 희생자라는 믿음을 놓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이 애초에 그 엄청난 학살을 미리 계획하고 사람들을 죽일 명백한 살해의도가 있었던 살인자라는 걸 받아들이기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건 이후 하나씩 드러나는 사실들은 부모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길의 끝에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가해자의 부모든, 피해자의 부모든, 세상 모든 부모에게 자식이란 존재는 내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한 존재,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만한 존재이니 말이다. 언젠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침묵의 거리에서>를 읽는데, 피해자를 둘러싼 가해자 4명의 부모가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이 위주로만 사건을 바라보는 모습이 기가 막혔던 기억이 난다. 그들에게 사건의 진상 따위야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내 아이가 사건과 연관되지 않기만을, 내 아이가 다치거나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라는 부모의 모습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것과도 같다. 그들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부모란 존재의 본질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딜런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막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목숨을 죽은 사람들 대신 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천 개의 열렬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는 내 아들 때문에 망가지거나 스러진 삶을 기리며 살려고 애쓴다. 내가 하는 일은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또 내가 아직도 딜런에게 느끼는 사랑에 매달리기 위해서 일한다. 아무리 끔찍한 일을 저질렀더라도, 딜런은 언제까지나 내 아이다.

실제로 그가 살아왔던 환경이, 그를 살인자로 만들고 방조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수많은 매체의 보도 속에서, 현실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허구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이다.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학대하고, 어떻게 낭떠러지로 내몰았는지 우리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서 보아 왔다. 그리고 당연히 아이가 제대로 된 인격 형성이 되기 전이라면, 아이가 하는 행동의 거의 대부분을 부모의 책임이라고 봐야 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말이다. 하지만 부모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자신의 아이를 품 안의 자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바라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아이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우뚝 서서 세상과 소통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혼자만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 시점에서 부모의 역할이란, 그저 아이가 원했을 때 고민을 나누거나, 도움을 주는 정도이니 이미 형성된 자아와 인격을 바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다르게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사람은 가정에서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십대의 경우에는 더군다나 그렇고 말이다. '양육'이란 한 사람이 접하는 모든 환경적 요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이 아는 방식 중에 최선의 방법으로 아이를 기른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아이는 부모가 알 수 없는 존재로 성장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딜런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그의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 혹은 어떻게 하지 않아서 딜런이 그런 엄청난 학살을 저지르게 된 것이 아니었을 거다. 딜런이 그런 상태에 이르기까지 부모님이 아들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숙하고 독립된 존재로 자라난 딜런이 자신의 내면을 부모님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감추었던 것이다.

딜런을 키우는 일은 끝이 났다. 이 아이를 만들어내는 데 들였던 모든 사랑과 노력이 끝이 났다.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수많은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종종 있다.  특히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란 사실 무시무시하다.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니, 거의 무조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부부와 닮은 아이들은 점점 자라면서 낯선 타인처럼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존재로 변해가고, 어느 순간 아이는 친근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진짜일까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한 내 아들이 누군가를 죽인 살인자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일 것이다. 그렇게 지옥과도 같았던 시간들을 겪어야 했던 가해자의 엄마이자 이 책의 저자인 수 클리볼드는 16년이 지난 지금도 날마다 딜런과 에릭이 죽인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한다. 그 동안 자신이 아들에게 잘못했던 무수한 것들과 아들이 남긴 끔찍한 파괴 둘 다에 대해서, 단 하루도 격한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고 말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한다는 굴레와도 같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수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는 육아의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 돌리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뒤집어, 아이가 괴물이 되고,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을 보아야 했던 한 부모는 이렇게 말을 한다.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고. 육아의 책임은 가정뿐만 아니라 학교, 사회에도 있는 거라고. 그러니 다 같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한번쯤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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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스토리콜렉터 46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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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의 집 시리즈 3부작 중의 두 번째 작품이 더위를 물리치러 돌아왔다. 폭염은 말할 것도 없고, 열대야로 인해 밤에 편하게 자기도 힘든 요즘, 제대로 더위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작품이다. 미쓰다 월드에선 더위란 단어는 존재할래야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오싹하고, 소름 끼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덥기는커녕, 추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더위에 지쳐버린 당신에게 에어컨보다는 미쓰다 신조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는 걸 추천한다.

그건 그렇고, 뭐 이런 집이 다 있담....... 새삼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아직 자신이 그 집의 침대 위에서 이렇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체험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머물러 있으니까.

유령의 집을 무대로 한 호러 영화를 보면서 '어째서 저 끔찍한 장소에서 얼른 도망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이따금씩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게다가 그 무대가 자기 집이 되니 그렇게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작은 임대주택에서 부모님과 셋이 살고 있었던 코타로는, 작년 가을 자동차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여의게 되어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된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 있던 빚과 밀려 있던 임대주택의 집세 때문에 지방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할머니와 코타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도착한 마을의 거리와 집을 바라보며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학여행을 제외하면 한 번도 전에 살던 치바 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기시감이 드는 길거리 한구석에 있는 정체 모를 숲에서 어쩐지 기분 나쁜 목소리의 환청도 들리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새까매지면서, 깨어 있는 채로 악몽의 한복판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무시무시하게 소름 끼치는 느낌에 사로 잡히게 된다.

그렇게 꺼림칙한 기분은 밤이 되면 더욱 극대화되는데, 등 뒤의 복도에서 뭔가의 기척이 느껴지고, 척척척척 발소리가 다가오고, 문 너머에서 무언가의 숨소리가 들린다. 코타로는 할머니가 다다미방에 들어가고 나면, 자신만 이 집에 홀로 남겨진 듯한 불안감에 감싸이고, 무서워졌다. 자기 방으로 가는 것뿐인데도 마치 호러 영화에 나오는 낯선 지역의 흉가에 발을 들이는 방문자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미신을 믿지도 않거니와, 괜스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코타로는 스스로 조사를 하기로 한다. 동네에서 새로 알게 된 친구 레나와 함께 도서관에 가고, 동네의 어른들을 통해 과거에 이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10년 전 자신이 이사를 온 바로 그 집에 살던 일가족이 처참하게 참살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10년 전 그 살인 사건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마저 깨닫게 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무시무시해진다.

어서 방 안으로 도망쳐야 해.....

그곳만이 안전지대 같다는 것을, 코타로는 요 며칠간의 체험과 오늘 노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로 확신하고 있었다.

척척척척.........

기척이 멈췄다. 그리고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공기의 압박이 느껴진다.

찾았다..............!

귓가에 소름끼치는 속삭임이 들렸다. 그 숨결까지 귓불에 느껴질 정도로.

'그것'은 고타로의 바로 뒤에 있었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으로 체험하는 괴이한 현상들과 끔찍한 경험들을 통해 전달되는 공포라 그런지, 감정이입하기가 매우 쉬운 편이다. 스멀스멀 나타나는 '그것'이 뒤를 돌아보면 우리 집 어딘 가에서도 나타날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미쓰다 신조가 그려내는 공포란 헐리우드 영화의 그것처럼 아무 의미 없이 사람들을 깜짝 놀래 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구제할 수 없는 절망, 불합리할 정도의 우월감, 끝을 모를 악의, 압도적인 광기, 소름 돋는 증오,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살의'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동기가 있어 출발한 공포라 더욱 섬뜩하다. 오싹하고 기분 나쁜 기운 자체는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사실 그 악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극도로 현실적인 배경에서 시작한 거라 그만큼 끔찍하고, 놀라운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중반 이후에 밝혀지는 10년전 그 살인 사건의 진상이 매우 경악스러울 만큼 엄청나다.

시리즈의 세 번째 <재앙의 뜰>은 기존 '재앙이 내린 집'이란 기본 컨셉에, 기존 두 작품과는 다른 파격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더욱 궁금해진다. 괴이한 현상들과 끔찍한 사건들 너머로 또 어떤 엄청난 진실을 숨겨 놓고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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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유리의 검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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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피로 인해 신분이 결정되어 있는 세계이다. 붉은색 피로 태어나며 평범한 적혈과 은색 피로 태어나 초능력을 쓰며 적혈들의 위에 신처럼 군림하는 은혈로 이루어진 세계. '태어날 때부터 피로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의 피지배층 출신 소녀가 특별한 능력을 얻으면서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라고 요약되는 이 작품은 얼핏 <헝거게임>과 유사한 전개가 상상되지만, 흥미로운 건 작가가 구축한 세계가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헝거게임>의 성공 이후, 그와 유사한 판타지 작품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했던가. 이제는 좀 다른 색깔의 작품을 만날 때가 됐다. 그 시작이 바로 <레드퀸>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수백 명의 이름이 있어, 능력을 가진 적혈들 수백 명의 이름이. 더 강하고, 더 빠르고, 새벽처럼 불타오르는 피를 가진 적혈들이."

미래의 모서리에 서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 막힌다.

"메이븐이 그들을 죽이려고 할 거야,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먼저 닿을 수 있다면, 그들은....."

"이 세계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군대가 되겠지."

전편인 <적혈의 여왕>에서 할 수 있는 재능이라고는 소매치기 밖에 없었던 소녀 메어는 우연히 궁에서 일을 하다가, 왕비를 선출하기 위해 초능력을 겨루는 퀸스트라이얼 도중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능력을 무심코 분출하게 되었다. 적혈이 초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왕의 계획으로 둘째 왕자인 메이븐과 약혼을 하게 된 메어는, 언제 들통날 지 모르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왕궁에서의 위태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그러다 메이븐과 함께 반란 군단인 진홍의 군대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따뜻하고 배려있는 모습의 메이븐에게는 메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계략이 있었고, 결국 왕세자 칼과 그녀는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번에 출간된 <유리의 검>에서는 칼과 메어를 구축한 진홍의 군대 일원들과 메이븐 일행으로 부터 도피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편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고, 인물들을 설정하고 소개하느라 에필로그 식의 서두가 다소 길었다면, 이번에는 본격적인 두 세계의 대립과 전투 장면들이 압도적으로 휘몰아쳐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가 전개된다. 빠르게 진행되는 스토리 사이사이 메어의 고민과 고뇌 또한 계속 된다. 평범했던 열일곱 소녀가 온 나라가 주목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번개 소녀가 되기까지, 그리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핍박 받던 자신들의 세계를 다시 세울 수도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지게 되고, 믿었던 이의 배신으로 인한 충격과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사랑에 대한 혼돈까지... 메어의 성장기는 계속 된다. 잃어버린 몇몇 것들은 잊기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죽은 이들의 얼굴들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앞을 향해 달려나간다.

이제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부분, 내가 가장 심하게 저항했던 부분이 닥친다. 하지만 칼은 확고했다. 우리는 찢어져야만 해. 더 많은 영역을 커버하고, 더 많은 죄수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우리 자신이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모여 있는 신혈들을 뚫고 흐름을 거슬러 가서 카메론의 옆에 선다. 그녀는 내 어깨 너머로 열쇠를 던지고, 킬런이 솜씨 좋게 그것을 받는다. 그는 우리가 가는 모습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본다. 지금이 그가 나를 볼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메어가 궁을 나와서 다시 처음으로 메이븐을 만나게 된 순간, "내가 그대를 찾을 거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며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마치 로맨스 같으면서도, 소름 끼치는 공포를 안겨주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분명 남자 주인공은 칼인 것 같은데,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묘하게 메이븐이라는 캐릭터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물론 작가는 어린 시절 친구인 킬런과의 관계도, 그리고 여전히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칼과의 관계도 놓치지 않고 이야기의 균형을 적절하게 배치해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더 이상 소년과 소녀가 아닌 그들, 나이만 보자면 어린 아이들에 불과해야겠지만, 이제 그런 아이들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군대를 모으고, 초능력을 사용해서 누군가를 죽이고, 지키며 그 와중에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아야 하고, 사랑도 놓치지 말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장면도 전편과 마찬가지로 메어가 메이븐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 막이 내린다. 다른 점은, 이번에는 그것이 메어의 선택이었다는 거다.

"나머지 사람들을 보내 줘, 그러면 내가 너의 죄수가 될게. 내가 항복할게. 내가 돌아갈게."

그리고 그 엄청난 선택의 대가는 엄청나다. 마지막 장면에 드러나는 그것은, 우리가 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을 계속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 준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소녀, 메어가 다음에는 또 어떤 상황을 겪게 될지, 어떤 방식으로 성장하게 될지, 그리고 그들이 결국 승리하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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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라이프
S. J. 왓슨 지음, 이나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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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때 온라인을 통한 만남이 엄청나게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막 피씨 통신이 활성화 되었던 그 시절, 그러니까 영화 '접속'에서와 같은 그런 만남을 꿈꾸던 이들이 너도 나도 온라인을 통해서 새로운 누군가를 찾아 헤매었다. 연애에 서툰 이들도, 연애에 닳고 닳았던 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왜냐하면 온라인 최대의 장점인 '익명성' 때문에 그들은 상대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지 않아도 되니, 그 순간 자신이 되고 싶었던 누군가로 자신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달콤한 꿈을 꿀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익명성'이라는 것은 반대로 어마 무시한 무기가 되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온라인 데이트의 무시무시한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작가가 S. J. 왓슨이기에,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그가 다시 온 것 같다. 불빛에서 멀찍이 서 있다. 내 창문을 지켜보면서.

거기에 있지만, 동시에 없다. 그림자를 똑바로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불빛이 어른거려서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내 두뇌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고, 무작위 속에서 의미를 파악하려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다른 데로 시선을 피하려는데, 그 모습이 또렷해지는 것 같다. 자신을 현실이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S. J. 왓슨의 데뷔작 <내가 잠들기 전에>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기억상실이라는 다소 평범한 소재를 다루고 있었지만, 페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칠 수가 없었던 굉장한 서스펜스가 있었고, 극중 화자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도록 그려진 심리 묘사 또한 굉장했으니 말이다. 이번 작품은 그가 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으로 한 여자가 동생을 살인 사건으로 잃은 뒤 진실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온라인 데이트에 발을 담그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때 예술 사진작가로 유명했던 줄리아는 현재 외과 의사인 남편과 무난한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차에 여동생 케이트가 미혼모로 낳은 아들을 입양해서 기르며, 소일거리로 가족 사진을 촬영하며 평범해 보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파리의 골목에서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하고 살인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동생의 친한 친구였던 애나를 통해 케이트의 남자 친구가 한 명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도 정식 남자친구도 아니었고, 온라인을 통해서 남자들과 만나 가벼운 만남을 즐기며 데이트하고 섹스를 즐겼다는 것이다. 케이트를 살해한 범인은 단서 조차 없었기에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줄리아는 케이트가 온라인으로 만났던 남자들 중에 범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케이트가 이용했던 데이트 사이트에 접속하고, 과거에 그녀를 알았을 것 같은 남자들을 찾아 나서다, 한 남자와 가까워지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급 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이후의 스토리는 동생의 죽음을 향한 죄책감이 살인범을 찾아내겠다는 편집증으로 번져 사건을 개인적으로 조사하는 언니의 여정을 그린 미스터리 물이지 않을까 기대했던 나의 생각을 여지없이 깨트린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어쩌면 다소 과격하다고 표현해도 될 것만 같은 온라인 데이트의 극단적인 폐해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너무도 현실적이라 더욱 섬뜩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무시무시하다.

애나는 잠시 입을 다문다. 내가 운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만큼의 행복을 견딜 수 있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재고 있다. "있잖아요. 이상하긴 하지만 모든 게 케이트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 일도 그렇고. 그 일 때문에 삶은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연습하는 게 아니라."

"그렇죠." 진부하지만 사실이기에 클리셰가 되는 것이다. "맞아요."

줄리아는 애초에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서 만난 그와 얼굴을 마주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속이고, 생략한다. 그렇게 시작한 거짓말이 쌓여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그녀는 어느 순간 남들이 보듯 스스로를 바라보기에 이른다. 이건 내가 아니라고, 이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이 만남을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 그를 만나기로 한 뒤, 유리처럼 단단해서 도무지 바꿀 수 없던 자신의 미래마저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 잡힌다. 그렇게 점점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에게 깊이 빠져 들수록, 그녀의 삶은 위태로워진다.

이야기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는 그녀의 현재가 주요 플롯으로 자리를 잡고, 과거 예술 작가이던 그 시절 만났던 남자 마커스에 대한 비밀스러운 기억과 알콜 중독으로 인해 치료받은 적이 있는 그녀의 상태에 대한 모호함이 곁들어져 현재의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S. J. 왓슨 특유의 뒷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은 역시나 감탄스럽고, 단순한 플롯 임에도 굉장히 복잡하게 느껴지는 세밀한 심리 묘사 또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지만, 동시에 없는, 그런 숨겨진 비밀과 은밀한 욕망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순간 이야기는 폭발한다. 역시 심리 스릴러 분야의 독보적인 작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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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한강 작가의 작품은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고, <소년이 온다> 까지 읽었으나, 정작 맨 부커상 수상으로 화제가 된 <채식주의자>는 이제야 겨우 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채식주의자'라는 제목부터가 나에게 다소의 거부감을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그들이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온갖 이미지로 점철된 이 작품은 과연 놀라울 만했다.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 먹어?"

아이를 넷쯤 낳아 기른 중년의 여자처럼 방심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내가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삭아삭 소리를 내어 오랫동안 김칫대를 씹었다.

-'채식주의자' 중에서-

'채식주의자'에서 올해로 결혼 오 년 차에 접어드는 남자는, 아내인 영혜가 극도로 평범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를 선택했었다고 추억한다.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권태로울 것도 없었던 그들의 일상은, 어느 날 새벽 아내가 잠옷바람으로 부엌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후로 완전히 달라진다. 꼼짝 않고 서서 냉장고를 마주보고 있던 아내는 멍하니 서서 꿈을 꿨다는 소리만 반복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육식을 멀리하고 오로지 채식만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하루하루 말라갔으며, 잠도 거의 자지 않았기에 사태는 점점 심각해진다. 남자는 처가 사람들을 동원해서라도 아내를 말려보려고 하지만, 언니 인혜의 집들이 자리에서 장인이 강제로 그녀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고 하면서, 아내는 손목을 긋고 병원으로 실려간다.

'몽고반점'에서 비디오 아티스트인 남자는 어느 날 일 년여의 고갈상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만한 궁극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것은 무심코 아내가 아들을 목욕시키며 몽고반점 얘기를 꺼내면서, 처제인 영혜는 스무 살까지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부터이다.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이 그 순간 그는 충격과도 같은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백일몽처럼 자신이 그리는 이미지를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지 궁리하다, 처제인 영혜에게 자신의 작품에서 모델이 되어 주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고 영혜와 비디오작품을 찍게 된다. 벌거벗은 영혜의 몸에 바디페인팅으로 꽃들을 그려놓고 비디오로 찍고, 후배에게 남자 모델을 제안해 남녀의 교합 장면을 찍으려다 실패한 뒤로,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리고 직접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의 모습을 촬영한 테이프를 보고 있는 아내를 발견하게 된다. 인혜는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자신의 동생을 범한 남편을 용서할 수 없고, 그들을 위해 정신병원에 연락한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몽고반점' 중에서-

'나무 불꽃'에서 인혜는 삼 년여 전 동생인 영혜가 갑작스럽게 채식을 시작한 뒤로 벌어진 일들을 떠올려본다. 현재 영혜는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고, 남편은 병원에서 정상으로 판명되어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수개월의 소송과 지루한 구명운동 끝에 풀려나고는 잠적해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부모는 더 이상 둘째 딸을 보려 하지 않았고, 짐승만도 못한 사위를 연상시키는 큰딸과도 연락을 끊었으며, 막내 동생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영혜를 버릴 수 없었기에, 입원비를 대고,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으며, 병원에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동생 곁에서 삶을 겨우 버텨나간다. 영혜는 갈수록 육식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을 섭취하는 걸 거부하려 들고, 자신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 되고 싶다며 점점 죽어간다.

표제작인 '채식주의자',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 이렇게 세 작품은 2002년 겨울부터 2005년 여름 사이에 씌어진 연작 중편소설이다. 주인공은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영혜이지만, 각각 이야기의 화자는 모두 영혜가 아니다. 1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의 남편이, 2 '몽고반점'에서는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가, 3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가 화자가 되어 그들 시점으로 영혜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어가는 개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점점 육식을 멀리하고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영혜'를 그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작중 화자는 서로 다르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이, '몽고반점'에서는 처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을 탐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사진작가인 영혜의 형부가, '나무 불꽃'에서는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을 목격했으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혜가 각각 화자로 등장한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나무 불꽃' 중에서-

영혜라는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세 인물, 남편과 형부, 그리고 언니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이야기는 다르면서도, 같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누구나 동일한 장면을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같은 상황도 다른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 역시 그렇다. 어린 딸의 다리를 물었던 개를 죽이는 아버지의 목적은 그저 자신의 딸을 위함이었지만, 그 끔찍한 기억은 어른이 된 영혜에게 육식 거부로 이어지게 된다. 가족 모임에서 극단적으로 육식을 거부함을 손목을 긋는 것으로 증명한 영혜의 모습이 남편에게는 더 이상 이 여자와 살 수 없다는 그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고, 형부에게는 누군가 자신의 앞에서 목숨을 던져버리려고 한 것이 구역질 나고 삶에 넌더리 나도록 만들었고, 어린 시절부터 동생을 지켜봐 온 언니에게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막을 수는 없었을까. 두고두고 자책으로 남게 된다.

2007 10월에 출간되었던 이 작품은 2016년 맨 부커상 수상으로 화제가 되어, 벌써 초판 37쇄를 발행했다.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강 작가의 작품이 그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다지 대중적인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고 말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그다지 쉽게,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전혀 아니다. 하지만 문장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를 완성시킨다는 점에 있어서, 굉장히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10년 전 한강 작가는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는데, '채식주의자'는 그것의 변주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한다. 물론, 인간의 삶에 있어서 폭력적인 부분을 동물적인 것으로, 그 반대의 평화로운 부분을 식물적인 것으로 은유한 작품이 한강 작가가 처음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려내는 그것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어찌되었든 완성도가 매우 뛰어난 작품임에는 틀림 없다. 어디선가 이번 맨 부커상 수상관련 글을 읽다가, 이 작품을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가 작업한 방식이 '직역'보다는 '의역'에 충실했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이미지로 구축되고, 완성되는 이야기라 데보라 스미스가 의역한 번역 작품 또한 어떻게 그려졌을지 매우 궁금해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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