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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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폭주하고, 범인은 갈수록 오리 무중이고, 완벽한 기억 속에 숨겨진 단 하나의 진실은 점점 더 무시무시해진다. 그렇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하게 잘 빠진 스릴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매력도 엄청나서 다음 시리즈를 기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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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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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코널리의 찰리 파커도 아내와 딸을 연쇄 살인범에게 잃고 경찰을 그만두고 방황하다, 복수를 다짐하고 범인을 찾아 나서게 된다. 더글러스 프레스턴과 링컨 차일드의 펜더개스트도 사랑하는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걸 알게 되고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복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데이비드 발다치의 에이머스 데커 역시 살인범에 의해 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된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각기 다른 캐릭터들이,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구원하게 되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데이비드 발다치의 작품이 가장 대중적이고, 호불호가 없는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감각 신경의 통로들이 교차했는지 숫자와 색깔이 연결됐고 시간도 그림처럼 눈에 보인다. 색깔들이 불쑥불쑥 생각 속으로 끼어든다. 나 같은 사람들을 '공감각자'라고 부른다. 나는 숫자와 색깔을 연결 지어 생각하고 시간을 '본다'. 사람이나 사물을 색깔로 인식한다.

......나도 한때는 평범했었다. 평범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에이머스 데커. 대학 4년 내내 미식축구 선수였던 195센티의 거구. 나이는 마흔두 살인데 외모는 쉰두 살처럼 보이는 남자. 한때 유능한 형사였지만, 현재는 20키로그람 이상이 늘어 뚱뚱해졌고, 지저분하고 산발한 머리에 덥수룩한 턱수염에 원시인 같은 몰골을 하고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 그의 거처는 모텔 방에서 노숙자 보호소를 거쳐 공원의 침낭과 공원 주차장의 박스로 대체되었고, 그나마 현재는 사설 탐정으로 잡다한 일을 해가며 여관 방에 머물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삶은 밑바닥으로 추락한 상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도, 하고 싶은 일도, 인생의 목표도 전혀 없었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5개월 전, 그가 경찰로 일하고 있던 당시 오랜 잠복근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갔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처참하게 살해된 어린 딸과 아내, 그리고 처남의 시체였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범인은 현재까지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못해 살고 있던 그의 삶이 달라지는 순간이 온다. 범인이 스스로 경찰서에 걸어 들어와 자백을 한 것이다. 데커가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을 죽였다고. 그런데 문제는 그 범인이라는 남자가 데커의 기억에 전혀 없는 인물이라는 거였다. 왜냐하면 그는 과잉기억증후군, 즉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잉기억증후군이란 뭘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어떤 기억을 찾으려고 할 때 머릿속의 영상 저장 장치를 켜면, 눈 앞에서 그 형상들이 보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다. 마치 녹화된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 보기라도 하듯이. 그런 능력은 아무것도 잊지 못하도록 만든다. 거기에 더해 데커는 그것에 숫자와 색깔이 연결됐고, 시간도 그림처럼 눈에 보이는 공감각 능력도 가지고 있다. 색깔들이 불쑬 불쑥 생각 속으로 끼어들고 사람이나 사물을 색깔로 인식한다. 한때는 그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대학 때 미식축구 경기 중에 사고를 당했고, 잠깐 동안 죽었다 살아난 댓가로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렇게 완벽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왜 하필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가 간과하고 있었던 과거의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데커는 그렇게 가족을 죽인 살해범의 뒤를 쫓기 시작하고, 마침 벌어진 고등학교의 총기 난사 사건에 연루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친다. 이야기는 폭주하고, 범인은 갈수록 오리 무중이고, 완벽한 기억 속에 숨겨진 단 하나의 진실은 점점 더 무시무시해진다. 그렇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하게 잘 빠진 스릴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매력도 엄청나서 다음 시리즈를 기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놈 진짜 당신이랑 두뇌 싸움을 하고 있는 거네요."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몸을 펴고 하품을 했다. "이제 어쩌죠?"

"눈 좀 붙입시다. 그리고 생각 좀 해보죠. 뭐라도 떠오를지 모르니까."

"정말 그럴까요?"

"아니, 아마 아닐 거예요."

그에게 기억이란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이미 거기 있거나, 아니면 없는 것이다.

 

주인공 데커에게 있는 과잉기억증후군과 공감각 능력은 기존에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다. 과잉기억증후군, 즉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게 된다는 건데, 한번 본 것이 마치 사진 찍듯 머릿속에 저장된다면 대체 기분이 어떨까. 장용민의 <궁극의 아이>에 등장하는 앨리스는 일곱 살 이후 벌어진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리고 실제로 전 세계에 수십 명이 이 증후군을 앓고 있기도 하다. 서프라이즈라는 티비 프로그램에 실제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이들이 등장한 적도 있고 말이다. 몇 십년 전의 의미 없는 사건도 사진처럼 생생히 저장되어 산다는 것이 마냥 장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의 좋았던 순간 외에 슬프거나 기분 나빴던 순간들도 망각의 행운을 부여받지 못하는 거니 말이다. 공감각 능력은 최근 티보어 로데의 <모나리자 바이러스>에 등장하는 신경미학자 헬렌이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단어 하나하나마다 색이 나타나고, 색을 보면 소리가 들리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특별한 능력으로 인물에게 남다른 개성을 부여한 데이비드 발다치의 솜씨가 워낙 뛰어나서 데커에게 푹 빠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출간되는 족족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고, 80개국 45개 언어로 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1 1천만 부가 팔린 작가. 출간 수익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범죄 소설 작가'인 데이비드 발다치의 작품 목록을 정리해봤더니, 각기 다른 시리즈만 무려 여섯 가지이고, 스탠드 얼론으로 출간된 책도 꽤 된다. 아래는 그 중에 국내에 출판된 책 기준으로만 정리했다.

데이비드 발다치의 작품은 국내에 드문 드문 출간되다, 한동안 만나볼 수 없었는데, 이렇게 가장 최신 작품을 만나볼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 게다가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는 작년 출간된 이 작품에 이어 올해 그 두 번째 작품까지 출간된 상태이니, 북로드를 통해서 조만간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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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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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남편이 교통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 간다. 내리막길 커브가 연속으로 있는 도로를 상당한 속도로 들이박은 것 같다는 사고 경위를 전해 듣는 여자는 남편이 대체 어디서 돌아오는 길이었을지 의아하다. 머리를 다쳐서 의식을 되찾을 가능성은 낮다고 하니, 아마도 남편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 의심이 되는 것은 그 방향이었다면 남편의 옛날 애인이 사는 곳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옛날 애인은 바로 여자의 엄마였다.

"가집을 내라고 한 것도 그 사람이에요. 한번 제대로 자기가 쓴 글과 동반자살을 해보라며."

"동반자살이라니, 그것도 넘치게 문학적이네."

...........세쓰코는 남편이 사용한 동반자살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 이대로 계속 같은 노선으로 단가를 쓰면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세쓰코 자신이 아프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돌아보니 세쓰코보다 기이치로 쪽이 더 열심히 단가를 선별하고 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보다 한번 무덤에 묻는 편이 서로를 위한 거야. 당신은 앞으로도 살아갈 테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한 여자, 게다가 그녀는 남편이 의식 불명으로 병원에 실려 있는 동안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 라고 하면 무슨 막장 드라마냐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는 동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이야기 탓도 있겠지만, 생각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담담한 일상과 그녀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사연들이 전혀 선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롯만 보면 막장이지만, 이야기는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기 그지 없으니 말이다.

러브 호텔을 배경으로 젊은 나이에 연배가 있는 남자의 세 번째 아내가 되면서도 결코 그를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단언하는 여주인공이라니 정말 이상하기 그지 없다.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청혼을 받아 들었을 때, 극중 세쓰코 처럼 반응할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 남자는 오랜 세월 엄마의 애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사랑이니 뭐니 운운하지 않는 만큼 담담한 결혼 생활이 평범하게 이어지다, 어느 날 이유를 알 수 없는 남편의 교통 사고 이후 그녀의 삶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애초에 돈으로 유혹 받아 돈으로 맺어진 부부의 관계, 게다가 그녀는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그런 남편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녀는 마음이 아프다는 감정 조차 누릴 수가 없다.

마음이 아프다는 건 대체 어떤 것일까.

살면서 좀처럼 '감정'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여자. 세쓰코는 단가를 쓰면서 자신의 내면을 글로만 투영해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성애와 허무를 기둥으로 하는 그녀의 작품이 매우 도발적이고 적나라한데 비해, 그녀의 평소 말투와 행동은 정반대였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이, 가정 폭력에 시달려온 어린 소녀라는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 엄마에게 학대를 받았던 과거가 있었으니 말이다.

미치코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품위 있게 웃었다. 마유미도 역시 엄마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세쓰코는 미치코의 천진난만함보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소녀가 보이는 엄마와 똑같은 미소에 무서움을 느꼈다.

세쓰코는 자신도 어린 시절 리쓰코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딸은 엄마를 닮으며 자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같은 생물을 낳은 여자가 얼마쯤은 후회하게 하기 위해.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은 <굽이치는 달> <호텔 로열>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만난다. 어린 시절 실제로 러브호텔을 하던 부모의 딸이었던 사쿠라기 시노는 열다섯 소녀였던 시절부터 학교에서 돌아와 호텔에서 청소를 했었다. 더러운 시트를 갈고, 욕실 청소를 하고, 손님들이 사용한 콘돔을 버리고 새것을 구비해놓는 등 부모의 일을 도우며 그녀는 러브호텔을 드나드는 다양한 인간을 마주해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절실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우울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극단적으로 불행한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이어지지만, 이상하게도 마냥 어둡지만은 안다는 것 또한 그녀의 작품 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부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삶에서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포착해내는 것 같다고 할까.

사쿠라기 시노를 '신 관능파 성애문학의 대표 작가라고 하는데, 확실히 이 작품은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치정이 얽혀있고, 막장스럽고, 러브 호텔이 배경이라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치열한 애증과 욕망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주 밑바닥까지 내려간 원초적인 욕망을 마주하고 나면 오히려 그것이 순수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가식과 허례허식에 둘러 쌓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제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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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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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밑바닥까지 내려간 원초적인 욕망을 마주하고 나면 오히려 그것이 순수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을 읽고 나면 그래서 언제나 순수와 관능의 그 어느 경계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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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블 인 헤븐
가와이 간지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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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기사에서 일본이 갈수록 늙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높은 노인인구 비율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노인인구 급증으로 인해 관련 인프라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의 사정은 역시나 노인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점차 가속화 되고 있는 고령화 시대, 건강 100세를 추구하는 노년시대이지만, 세계 어디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어 보인다. 가와이 간지는 <데블 인 헤븐>에서 이런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짚어내며 매우 현실적인 미스터리를 그려내고 있다.

"스와 씨는 정말로 국가가 시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고 믿습니까?"

아오키 가스미는 조용한, 그러나 날카로운 투로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전쟁은 왜 일어난 거죠? 아편, 각성제, 담배 같은 중독 물질을 팔 수 있게 허가해서 국민 건강과 이익을 맞바꾼 것은 누굽니까? 공해니 약해니 식품첨가물 피해니 하는 사태는 왜 일어나는 거죠? 시민이 타국에서 납치되면 국가가 구출하려고 진심으로 애쓰던가요? 유일한 원폭 피폭국이면서도 고집스레 원전을 추진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스와는 말문이 막혔다. 아오키 가스미는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오래된 음식점 건물들이 늘어선 번화가의 한 골목 쓰레기 더미 위에 노인의 사체가 발견된다. 누군가 싸운 흔적도 없고, 건물 사이 좁은 틈새는 일반적으로 투신 자살할 장소로 선택될 만한 곳도 아니다. 그저 심한 부식으로 망가진 비상계단을 내려가다 실수로 떨어져 죽은 것 일까. 경찰은 사건성이 없어 보인다고 자살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데,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노인이 기요스의 이스트헤븐에 틀어박혀 도박에 빠져 지내다 통장을 깨고 주식과 국채를 팔고, 급기야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액의 빚을 가지고 보험금을 노린 자살이라고 보기에는, 새로 보험을 가입한 사실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현장에 검은 천사 그림이 인쇄된 트럼프 카드가 한 장 있었다. 스와는 의문을 묻어버리자니 영 찝찝했지만, 마침 이스트헤븐을 관할하는 기요스 경찰서로 전근 명령이 떨어지고, 사건은 평범한 자살로 마무리가 된다

이스트헤븐은 도교 올림픽 개최와 동시에 도쿄 만 매립지 기요스에 들어선 일본 최초의 카지노이다. 국가에서는 도박이 노인의 노망이나 칩거를 방지하는 데 좋다는 이유로 고령자 복리후생 차원에서 예산을 배정해놓고, 카지노를 찾는 노인들에게 온갖 서비스를 제공하며 카지노 놀이를 장려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요스 서로 전근을 간 스와는 그곳에서 또 의문의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의문의 추락사를 한 동료 형사,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이스트헤븐의 사설 경비 회사,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보험조사원이라는 가스미가 그를 찾아와 노인의 추락사가 사고가 아니라 살인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알고 보니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노인이 한 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험조사원과 형사, 그리고 기자가 함께 이시트헤븐을 둘러싼 일련의 의문사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과연 이스트헤븐은 지상 최대의 낙원인가, 거대하고 추악한 욕망의 지옥인가. 돈이 모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욕망이 모여든다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곳에선 모든 범죄가 태어나고 모든 비극이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고스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버지가 생선 같은 눈빛으로 스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늙은이가 돈을 가지고 있어봐야 좋은 일은 하나도 없어. 하지만 카지노에서 돈을 쓰면 그 돈이 나라에 들어가고 세상에 나돌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지. 그러니까 여기서 도박을 하면 늙은이도 세상에 보탬이 되는 거야. 그러다가 빈손이 되었을 때 진짜 천국에 갈 수 있는 거다."

이야기의 배경은 2023, 먼 미래 같지만 사실 지금으로부터 겨우 7년 뒤의 이야기라 디스토피아적인 느낌이 나면서도 매우 현실적이다. '65세인 노인이 평균 수명인 83세까지 산다면 그 동안 일인당 5688만엔이 필요하고, 그 돈을 국가와 지자체가 부담해야 하는데, 역으로 고령자 한 사람이 죽으면 5688만 엔이 굳는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돈을 아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고령자 수를 줄이는 것'이라고 국가와 지자체가 생각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대목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면서도 또한 매우 리얼하게 현실적이라 오싹해지기까지 한다. 소비자금융, 보험 회사, 카지노, 도쿄 도, 국가, 이렇게 다섯이 결탁하여 죄 없는 노인들을 잇달아 살해하고 있는 이 작품의 설정은 우리의 가까운 미래에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는 일 같아서 서글퍼지고, 무서워지기도 했다.

가와이 간지의 데뷔작인 <데드맨>에서도 독특한 플롯과 기발한 구성, 그리고 인간의 실존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들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세 번째 작품인 <데블 인 헤븐> 역시 흥미로운 설정과 현실 풍자적인 예리함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는 죽음의 천사, 야곱의 층계, 악마의 유혹, 지옥과 천국 등 성경을 모티프로 한 기독교적인 은유와 암시가 유독 많은데, 그것을 통해서 사회 정의와 선과 악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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