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보니, 진화 - 변한 것, 변하고 있는 것, 변하지 않는 것 33한 프로젝트
이권우 외 지음, 강양구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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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 : 인간은 생명의 세계에서도 필멸성을 거부하는 유일한 존재죠.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은 우리는 유전자의 탈것일 뿐이에요. 유전자가 영원한 것이죠. 그런데 오직 인간만이 이 유한한 탈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영원성과 불멸성을 추구하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것에 영향을 받아서 끊임없이 필멸성을 거부하는 삶을 살아왔죠.             p.75


33한 프로젝트는 도서 평론가 이권우, 천문학자이자 과학책방 갈다 대표 이명현, 펭귄 각종과학관장 이정모, 올해 환갑을 맞은 세 사람의 삶을 반추하는 의미에서 기획되었다. 어크로스, 사이언스북스, 생각의힘 세 출판사가 <살아 보니, 지능>, <살아 보니, 진화>, <살아 보니, 시간>이라는 책을 각각 출간했다. 이 책들은 뇌과학자 정재승, 진화학자 장대익, 물리학자 김상욱이 교양 과학계의 세 어른을 만나 나눈 진솔한 대화를 담고 있다. 먼저 만나본 것은 어크로스에서 나온 <살아 보니, 지능>으로 정재승 교수와 함께 뇌과학과 지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책이었다. 노년과 나이 듦에 대하여, 인공지능 시대의 미래에 대하여 흥미로운 질문과 현명한 대답이 오가는 대화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 읽었다. 노화란 것이 단순히 뇌가 쇠퇴하는 과정이 아니라 지식을 활용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점과, ‘나이 듦’에 따른 신체적 정신적 변화에 따른 삶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굉장히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읽어본 것은 <살아 보니, 진화>로 진화학자 장대익과 함께 진화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 장대익 교수의 첫 번째 질문은 "35년 정도 일하면 어떤 느낌이에요?" 였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사회적인 역할은 거덜 났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예순이 되니 되게 편해지고, 겁도 없어진다고, 여유가 생겼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평생 80퍼센트만 하면서 가능한 한 책임을 맡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60대가 되는 즈음에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무거운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대답도 있었다. 특히나 건강하게 예순을 맞았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대답이 인상적이었는데, 건강할뿐더러 그동안 꾸준히 책을 읽어 왔기에 새로운 정보가 나올 때 쉽게 소화해 낼 수 있는 연습을 해온 셈이라 뭐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예순이라는 나이의 긍정적인 부분이라는 거였다. 세 분 모두 각자 다른 영역에 있지만 공통적으로 과학과 책의 사랑꾼이라는 부분 때문인지 서로 공감되고, 이해되는 부분이 많아 대화 자체가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이정모 : 진화는 뭘까요? 진화의 전제 조건은 멸종이에요. 지구에서 자연 선택으로 또 다른 진화가 가능하려면 우리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이 사라져야 해요. 옛날 생명체가 멸종하면서 우리가 등장할 때까지의 진화는 긍정적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멸종 위기에 처하는 일은 피해야 하잖아요. 저는 공룡을 좋아하지만, 그들과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그들이 멸종했기 때문에 우리가 등장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일은 우리가 지구에서 사라지는 일을 피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전쟁을 피하는 게 핵심이에요.             p.167~168


'진화'라는 키워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도부터 더 흥미로워지는데, 우선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종의 진화를 위해서 개체의 죽음은 필수이니 말이다. '개체에게 있어 가장 불행한 이벤트가 그 종 전체가 장기 지속하기 위한 진화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러니'하지만 말이다. 자살과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안락사와 세대론에 대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다 인류 최초의 욕망인 영생과 불멸에 대해 이야기로 흘러간다. '진화'에 대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2부에서는 '진화'라는 키워드가 내게 온 순간, 진화가 내게 의미 있게 각인된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죽음에 집착했던 사춘기 때 진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고, 과학사와 과학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대학원 초창기 때 실존적인 고민에 휩싸이기도 했다고 말이다. 


진화라는 생물학적 개념부터 초고령화 사회, 종교와 신앙, 기후 위기와 인공 지능의 대두 등 이들의 대담은 그야말로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면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화 형식 그대로 수록한데다 페이지수가 많은 것도 아니라서 가볍고,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지만, 담고 있는 내용만큼은 굉장히 시의성 있고, 통찰력 있고, 깊이가 있어서 여러 번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다. 현재 살고 있는 인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약 80억 명이고, 지구의 인류는 모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새로운 종으로 다시 갈라지거나, 아예 다른 종으로 진화할 수도 있을까.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진화'라는 개념이 어렵게만 느껴졌다면, 이 책 속 대담을 통해서 조금 더 친근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간결하고 명쾌하게 이해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호기심이 생기는 부분도 나올 수 있고, 무엇보다 진화가 지루하거나 딱딱한 개념이 아니라 쉽고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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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처음 홍콩 여행 Kid's Travel Guide
Dear Kids 지음, 생갱 그림 / 말랑(mal.lang)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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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이번이 세 번째 가는 건데, 꽤나 오랜만에 가는 거라 달라진 점들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홍콩 여행을 앞두고, 관련 책들을 찾아 보다가 아주 색다른 가이드북을 발견했다. 바로 어린이 여행 가이드북인 <나의 처음 홍콩 여행>이다. 매번 해외는 가족 여행으로 가는 거라 항상 아이 위주로 여행 일정들을 짜곤 했었던 터라, 이번 책은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특히나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는 어른들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아이의 시선에 맞춰 설명하고 있어 아이들이 직접 볼 수 있는 가이드북이라 신선했다. 




10년 전, 홍콩에 처음 갔을 때 도착하자 마자 길을 잃어 헤매던 높은 빌딩들의 숲에서 그 유명한 홍콩의 야경을 마주했었다. 우여 곡절 끝에 피크 트램을 타러 가는 길에 탄 버스는 어둑한 언덕길을 올라갔고, 안내 방송을 들어도 모르겠고, 바깥은 무섭도록 캄캄하고, 이대로 길을 잃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첫날 그렇게 액땜을 한 덕분인지, 이후의 일정은 계획대로 잘 보냈지만, 시간이 꽤 흘렀어도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도시라고들 말하는 홍콩의 도시 풍경이 그날로부터 어떻게 달라졌을 지도 너무나 기대가 된다. 


홍콩 하면 또 식도락의 천국으로 유명한데 이 책에 수록된 '맛있는 홍콩' 코너의 음식들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딤섬과 완탕면, 밀크티와 파인애플 번 등 먹어야 할 음식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에그타르트와 우유 푸딩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고, 편의점 간식도 이것저것 챙겨서 먹어봐야겠다. 




<나의 처음 홍콩 여행>은 두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콩의 필수 정보가 담긴 <Kid’s Guide Book>과 놀이의 개념을 접목시킨 <워크북>이다. 가이드북에는 기본적으로 홍콩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와 빅토리아피크, 셩완&센트럴, 디즈니랜드, 홍콩과학관, 오션파크 등 꼭 가봐야 할 곳들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일반적인 가이드북이 빽빽한 정보들로 인해 거의 사전 급의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은 각각의 페이지에 꼭 필요한 내용들만 레이아웃을 크게 잡아서 배치했기 때문에 한눈에 쏙쏙 들어온다. 아이가 봐도 어렵지 않을 정보들이고, 어른들이 보기에도 물론 좋다. 각각의 장마다 홍콩의 어린이가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홍콩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워크북에는 스티커, 컬러링, 종이접기, 만들기, 게임, 퍼즐 등 여행하는 내내 들고 다니면서 아이가 직접 할 수 있는 놀이들이 가득 담겨 있다. 홍콩은 비행 시간이 3시간 40분 정도로 결코 짧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기내에서 지루해하는 아이를 위해 딱 좋은 아이템이 되어줄 것 같다. 




아이들의 행복한 여행을 위한 여행 가이드 시리즈로 타이완, 하와이에 이어 세 번째 홍콩 편이 나왔는데, 다음 번에는 또 어떤 여행 가이드북이 나올 지도 매우 기대가 된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여행 정보서는 전무하기 때문에 이 시리즈는 아이와 함께 여행을 계획 중인 가족들에게 아주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아이와 여행을 다닐 때 마다 여행하는 나라에 대해서, 방문하는 장소에 대해서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곤 했는데, 이 책이 있다면 아이가 더 여행을 즐겁게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내가 가는 곳이 지도 상에서 어디쯤 위치에 있는지, 홍콩은 한국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내 짐은 내가 챙기고, 여행에서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계획 세워보고, 홍콩의 문화는 어떤지, 홍콩에서 사용하는 광동어로 기본적인 인사말은 어떻게 하는지... 이 모든 것들을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면, 분명 이번 여행은 완전히 달라질 것 같다. 바로 이 책 덕분에 말이다. 아이와 해외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Kid's Travel Guide' 시리즈를 꼭 챙겨 보길 추천해주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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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
정원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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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는 드디어 새학년이 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학년이다. 새 담임선생님은 좋은 분인 것 같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여자와 남자를 짝꿍으로 앉힌 것이다. 왜냐하면 정훈이는 친한 친구인 윤석진과 앉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일기장에 쓰면 선생님이 읽어 볼 거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 짝을 다시 정하게 된다. 같이 앉고 싶은 사람 이름을 적어 내고 자리가 바뀌지만, 정훈이는 역시나 석진이와 짝꿍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친한 친구와 짝꿍이 되지 않아도 좋다는 걸 알게 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친구와 친해지면 되니 말이다. 




<올해의 미숙>, <뒤늦은 답장>으로 만났던 정원 작가의 신작이다. <올해의 미숙>에서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 한국의 익숙한 풍경을 바탕으로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성장하는 주인공 미숙의 십대 시절을 그렸다면, <뒤늦은 답장>에서는 200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관계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성장하는 주인공 남우의 마음을 찬찬히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열한 살 정훈이와 친구들의 일상을 통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어린이들의 세계를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그려냈다. 




표지에 있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어린이의 표정부터 인상적이다. 점점 더 자아가 생기고, 주변 관계에 대한 생각이 늘어나는 시기에 아이들은 불만도 많고,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아진다.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앉지 못해 화가 나고, 분식집에서 떡볶이 국물을 매번 많이 안 주셔서 아쉽고, 친구가 내 몫의 만두까지 먹어 버려서 짜증나고, 자신보다 키가 큰 친구에게 약이 오르기도 하고, 엄마가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아서 방학 동안 친구들과 연락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저학년 동생에게 고학년다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우산을 빌려주고는 비를 홀딱 맞기도 하고, 길에 홀로 있는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다 주기도 하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굴이 반쪽이 된 친구네 집에 찾아가 위로를 해주는 의젓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린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상 못지 않게 진지하다. 어린이들은 작은 일에 투덜대고, 사소한 일로 다투더라도, 잘못을 인정하면 제대로 사과할 줄 알고, 필요할 때 요구사항을 말할 수 있으며, 부당한 일에 화를 낼 줄 안다. 살면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갈등과 낯선 감정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해나가는 열한 살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때묻지 않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어느 정도 무모해 보이거나 지나치게 용기 있어 보이는 행동도 그 시절이기에 할 수 있는 기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점점 어른이 되면서 불편함에 익숙해지고, 차별을 모른 척하며, 부당함을 참아야 하는 것으로 만드는 세상 속에서 이들의 반짝거리는 순수함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원의 작품들은 매번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 담백하고 잔잔하게 펼쳐지는 서사를 통해 누구나 한때 겪었던 시절을 돌아보게 만드는 잔상을 남겨주곤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잊어 버리고 살았던 그 시절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고,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지난 날의 나에게 안부를 물어보고 싶어지게 하며,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더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어린이라서 안 되는 것 투성이인 세상이지만, 그 작고 여린 존재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좋은 어른들이 많아져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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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오버 - 국가, 기업에 이어 AI는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조용빈 옮김 / 와이즈베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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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에 인간이 아닌 것에 인간에게 하듯 책임을 묻는 것은 예민한 문제다. 기계가 사람을 해치면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기계 자체? 아니면 기계를 만든 인간? 이는 새로운 질문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집단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기계에 책임을 지우면 인간이 면책 받을 위험이 있다. 반대로 인간이 책임지면 기계의 책임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 집단의 결정을 인간으로 한정하는 것은 그 본질적인 특성을 왜곡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책임을 인간으로 한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집단이 비인간적으로 변할 수 있다.         p.90


인간의 삶을 개선하도록 사람의 형태로 고안, 제작된 초인적 기계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상상해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시대이다. AI 덕분에 우리는 몇 세대 전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삶을 즐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300년 전부터 인공적인 메커니즘과 함께 살아왔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것은 바로 ‘국가’와 ‘기업’이라고 하는 ‘실행하는 기계’다. 인류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더 안전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스스로 작동하는 ‘인공 대리인’을 만들었고, 성공했다. 하지만 우리의 해방을 위해 만든 이것들이 우리의 천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것이다. 게다가 현대의 국가와 기업은 인간보다 더 오래 산다. AI 또한 수명이 유한한 인간보다 오래 존속할 수 있다. 


17세기부터 현대의 국가와 기업은 서서히, 그러다 이후에는 훨씬 더 빠르게 지구를 점령해 왔다. 국가와 기업의 긍정적인 측면은 빈곤을 정복하고, 질병을 퇴치하며, 몇 세대 전까지는 불가능했을 법한 부를 축적하게 했다는 점이고, 이들의 잘못으로 야기된 공포는 세계 대전부터 식민지 착취, 환경 파괴 등이 되겠다. 만약 이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다면, 아마도 국가와 기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와 기업 모두 인간들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국가와 기업을 기계나 네트워크, 알고리즘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은 근대 국가와 기업의 역사부터 짚어 나간다. 근대 국가의 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되었으며, 근대적 기업은 18~19세기에 등장했고, AI의 발전은 2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국가와 기업을 만들었고, 국가와 기업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를 구축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국가와 기업, 그리고 AI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는 결국 인간 같은 기계가 지배하는 세계에 살게 될 것이 분명한데, 그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도 말이다. 





수천 년 동안 저 멀리서 지구를 관찰하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내려는 외계인이 있다고 해보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1만 2000년부터 수천 년간 그들은 거의 변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지구는 안정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작은 금속 조각들이 우주로 날아가서 주변 궤도를 어지럽히고 있으며, 녹색도 얼음도 줄어들고 있다. 지구 표면의 많은 부분이 밤낮으로 밝게 빛나고 있으며,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그들은 아마 지구가 곧 폭발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을지도 모른다.             p.204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 전반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첨단 기술과 인공지능이라는, 인간이 잘 살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이 언젠가는 인간의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자각과 더불어 멀지 않은 미래에는 정말로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순간도 오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과 사이버스페이스가 한데 섞이고 인류가 기계와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은 이제 공상 과학 속 상상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바야흐로 AI의 시대이다. 급기야 챗GPT는 혼자서 책을 쓸 경지에까지 올랐으니 말이다. 그렇게 국가와 기업이 지배하는 세계에 로봇, 즉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AI가 진입하고 있다. 국가와 기업과 AI가 결합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 만약 국가 권력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컴퓨터 권력과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 조지 오웰의 <1984> 속 사회가 실제로 펼쳐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국가와 기업의 작동을 AI 알고리즘에 비유한 흥미롭고도 놀라운 이 책의 저자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영국 정치학계를 이끌어가는 학자로 평가 받고 있는 데이비드 런시먼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국가와 기업이 우리 삶을 어떻게 지배해 왔는지를 인류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고, AI가 앞으로 우리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미래 담론을 제시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작동하는 국가와 기업을 만들었고, 국가와 기업이 구축한 세계에 지금 AI가 진입하고 있으니, 인류를 위한 미래를 위해 이들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이다. AI와 미래를 예측하고 살펴보는 책들은 많았지만, 국가와 기업, 그리고 AI의 유사성을 탐구하는 책은 처음이라 대단히 색다른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주 시의적절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 앞으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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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전해 준 것
오가와 이토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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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에 씨는 밤이 되어 주위에 사람이 없어지면

종종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새들끼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비밀인 듯했다.

인간은 자신들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야에 씨는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가르쳐 주었다.

나는 매일 얼른 밤이 오길 기다렸다.             p.23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작은 왕관앵무 새 '리본'이다. 어느 날 회색앵무 할머니 '야에 씨'를 만나 새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 전에는 자신이 말을 걸어도 상대방은 어리둥절해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처음으로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야에 씨에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들은 날개를 잃었기에 하늘을 날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새라는 동물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리본은 야에 씨와의 소통을 통해 말이 통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아예 씨는 착한 인간이 있으면 나쁜 인간도 있다고,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그리고 세상의 여러 가지에 대해 알려 준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도 야에 씨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리본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대신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듣기만 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그 노래를 평생 잊으면 안 된다고 야에 씨는 말한다. 그리고 다정한 날개의 주인이 되라고, 그게 바로 새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말한다. 그게 야에 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후 다른 곳으로 이사한 리본은 모험을 계속하면서 다양한 인간을 만났고, 미유키라는 소녀의 새로운 가족이 된다. 




"우리 나무는 내내 같은 곳에서 살아.

언제나 보고 있어.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해 두는 게 우리 역할이란다."

"굉장한데요.

난 금세 잊어 버리는데."

"하지만 그 대신 너희한테는 날개가 있지.

생명체는 모두 주어진 역할이 있어.

그걸 완수하는 게 인생인 거다."                p.83


<라이온의 간식>, <츠바키 문구점> 등 국내에도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 오가와 이토의 신작이다. 아름다운 손편지로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가슴 뭉클한 기적을 보여줬던 <츠바키 문구점>,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소한 음식들이 풍요로운 힐링을 전해줬던 <양식당 오가와>, 경건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동화 같은 소박한 이야기 <마리카의 장갑>, 과하지 않게 적절한 감정선을 유지하면서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기분이 들게 했던 <라이온의 간식> 등 오가와 이토의 소설들은 매번 섬세하고 따뜻했다. 


이번 작품은 일본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구리포포(GURIPOPO)’와 컬래버레이션한 미니 소설로 어른들을 위한 한 편의 동화같은 느낌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은 판형과 짧은 분량이지만, 여러 번 다시 읽고 싶은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다. 




작은 왕관앵무 새 리본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자랐지만, 할머니 새 야에 씨와 인간 소녀 미유키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성장해 나간다. 그들과의 이별 이후에도 리본의 여정은 계속 되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나무 할아버지를 만나며 어른이 되어 간다. 살아 있는 존재에겐 누구나 각자의 역할이 있고, 새의 사명은 누군가의 희망이 되는 거라고 배워 가며, 알 속에서 들었던 작은 목소리와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낸다. 


이 작품은 오래 전에 국내에서도 출간되었던 <바나나 빛 행복>을 원작으로 탄생한 이야기이다. 오가와 이토가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새를 키웠던 추억을 바탕으로 쓰였던 그 작품 속에서 마치 본능처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의 곁으로 날아가던 아기 새 리본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이번 작품이 더욱 반갑게 느껴질 것 같다. '새에게는 날개가, 나무에게는 나이테가 있듯 생명체에게는 모두 주어진 역할이 있으며 그것을 완수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오가와 이토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맑고 건강하고, 따뜻한 느낌이 가득하다. 새해를 맞아 소중한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도 딱 좋을 것 같다. 전세계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일본 힐링 소설의 원조, 오가와 이토의 사랑스러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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