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열정의 시대 - 일제강점기 장르 단편선
곽재식 외 지음 / 구픽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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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은 서로 큰 피해를 입은 척하면서도 서로 상대방이 큰 성과를 내고 있다고 믿도록 맞춰 주고 있었다. 그것은 장기를 두다가 자기가 지면 울고불고 화를 내는 어린애와 탈 없이 놀아 주기 위해서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일부러 실수한 척하면서 져 주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단, 정영재의 정보에 대해서는 양쪽이 모두 화를 내는 어린애면서 동시에 져 주는 할아버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오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관여시키며 계속될 수 있었을까?                 - 곽재식, '정직한 첩보원' 중에서, p.27



일제강점기 말기, 지하광복단과 총독부 사이를 오가며 이중스파이 역할을 했던 인물이 있다. 부모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정영재는 총독부의 지부장에게는 조선인들의 비밀 조직에 스며들겠다는 목적으로, 지하광복단의 단원들에게는 총독부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목적으로 접근한다. 그가 양쪽에서 이야기하는 수려한 언변을 듣다 보면 조선 광복을 위해 싸우는 사람인지, 총독부의 앞잡이인지 헷갈릴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그가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방식이 매우 정직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지하광복단에는 자신이 총독부 소속이라고 대놓고 말했고, 총독부에는 자신이 지하광복단 사람들과 교류하는 사이라고 대놓고 말한 뒤, 양쪽에서 미끼로 넘길 만한 정보들을 얻어 서로에게 넘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 정영재의 가짜 정직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양측에서 정영재의 실체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나오지만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가짜 정보와 가짜 싸움은 더 이어진다. 지하광복단 멤버 중에서 정영재를 수상하다고 여겼던 홍춘화는 의심을 밝힐 증거를 찾아내지만, 정영재는 발뺌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수법에 대해서 그녀에게 아주 세세히 알려준다. 이번에도 그는 '정직'이라는 수단으로 대응한 것이다. 그 결과 홍춘화는 정영재와 같은 편이 되어 행동을 하며 살기로 하고, 정영재의 수법은 훨씬 더 탄탄해진다. 만화같은 설정인데, 이상하게 설득력있는 이야기였다. 짧은 분량이지만 아주 임팩트 있는 작품 <정직한 첩보원>이다. 곽재식 작가에 의하면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실화를 토대로 쓰인 이야기라고 하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상상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누구십니까?"

한여름에도 덥지 않은지 친친 목을 두른 쪽빛 비단 목도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검은 셔츠와 바지에 군화, 손엔 계절에 맞지 않은 가죽 장갑까지. 딱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 돌아섰다. 노을빛을 가린 몸이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그러다 맥고 모자 밑으로 드러난 눈을 본 순간 월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람이 아니다!'

뒷걸음친 만큼 그것이 다가왔다. 월매는 붉은빛에 드러난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 배명은, '호열자 손님' 중에서, p.109


이선의 삶은 혼인 후 그지없이 외롭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도맡아 하는 장사도 잘 되어 있었고, 친정에 살던 때보다 형편도 훨씬 나아졌으나 마음만은 한겨울 구멍이 숭숭 뚫린 창호 문 같았다.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남편은 신혼 때부터 이선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첩도 세 명이나 잇달아 두었고, 장사에도 열심이지 않았고, 가정에도 소홀했던 그는 한겨울에 술을 먹고 결국 노상에서 얼어 죽고 만다. 시어머니는 이선에게 사내 잡아먹은 요망한 년이라고 머리채를 잡고 종로통에 그녀를 패대기 쳐버린다.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울지 않았던 이선은 외려 등허리가 시원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흡혈귀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 영원히 늙지 않게 된 대신 즐기지도 않았던 육식을 탐하게 된 이선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이야기는 색다른 공포를 보여주는 최희라 작가의 <푸른 달빛은 혈관을 휘돌아 나가고>이다. 


책과 서점에 관한 SF, 팬데믹 시대의 로맨스, 귀신날 호러, 고전 SF오마주, 판소리 SF, 하드SF,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 등 다양한 장르소설 앤솔러지를 선보여온 있는 구픽의 앤솔러지 신작이다. 이번에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다섯 명의 소설가들이 쓴 각기 다른 장르의 단편소설 다섯 편을 만날 수 있다. 스릴러, 호러, 로맨스,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나 이 책의 수익금 일부가 한국해비타트의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환경개선사업에 선기부되었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통해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다양한 시각으로 만나보고, 과거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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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동정탑 - 2024년 제17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구단 리에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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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도 않은 것을 멋대로 설명하기 시작하는 맨스플레인 기질이 AI-built의 싫은 점이다. 똑똑하고 공손한 양식을 잘 꾸미는 건 실제로는 치명적인 문맹이라는 결점을 감추기 위함이다. 아무리 학습 능력이 뛰어나도 AI는 자신의 약점을 직시할 힘이 없다. 언어를 무상으로 훔치는 것에 익숙해져 그 무지를 의심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차별’이라는 단어를 구사하기까지 어디에 사는 누가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어왔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호기심을 가질 수 없다. '알고 싶다'라는 욕망을 품지 않는다.                p.24~25


‘심퍼시 타워 도쿄’, 일명 ‘도쿄도 동정탑’으로 불리는 건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소외와 차별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범죄자들에게도 안락한 생활을 제공하고자, 도심 한가운데에 최첨단 교도소를 짓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은 범죄자, 수감자, 비행청소년 등을 가리켜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뜻의 ‘호모 미세라빌리스’,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살아온 비범죄자들을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의 ‘호모 펠릭스’로 정의한다. 한편 타워 건설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연일 항의 시위를 하는 중이다. 


범죄자가 되는 이유를 개인의 인격과 의지박약 등에서 찾는 건 말과 현실이 크게 괴리되어 있다는 쪽도 이해가 되고, 범죄자는 범죄자일뿐, 동정은 피해자에게 해야 한다, 범죄자에게 세금을 쓰지 마라는 쪽도 공감이 된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을 만큼 불행한 성장 과정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모두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범죄자들을 동정해야한다는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이야기는 타워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와 그녀의 어린 연인, 범죄자 동정론을 주도하는 사회학자, 새 교도소를 취재하러 온 미국인 기자 각각의 시선을 통해 다각도로 진행된다. 분량에 비해 가독성이 높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과감한 상상력으로 그려진 근미래 도시의 풍경을 통해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름 얘기잖아. 이름은 물질이 아니니까 건물의 구조랑은 상관없지 않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이름은 물질이 아니지만, 이름은 언어이고 현실은 언제나 언어로부터 시작돼. 정말이야. 이 육상 세계를 움직이는 건 수학이나 물리를 잘하는 인간이 아니라 말을 잘하는 인간이라고. 그래서 나도 꽤 쓰라린 경험을 해왔고. 너는 안 그래? 이건 말이지, 보기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야..."                 p.83~84


이 작품은 2024년 제17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 구단 리에는 ‘작품 일부에 생성형 AI로 만든 문장을 사용’했다고 밝혔는데, 작중 인물들의 질문에 AI가 답변하는 부분이 해당된다. AI를 활용해 집필한 소설이 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이례적인데, 그만큼 독특한 작품이었다. 


찬성파와 반대파의 극심한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관계자들에게는 살해 협박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상 71층짜리 거대한 원기둥 형태의 건물이 신주쿠 도심 한복판에 완공된다. 그리고 타워를 설계한 마키나 사라는 돌연 잠적해버린다. '심퍼시 타워 도쿄'는 도쿄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는데, 연민해야 할 현대의 장 발장들을 피상적인 언어만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 동정하고 지원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보도된다. 호화로운 내부 시설에서 마약중독자, 연쇄 살인범, 강간범 등이 행복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게다가 탑 안에는 정해진 유니폼이나 죄수복이 없으며, 각자 지급되는 지원금을 사용해 취향에 맞는 옷을 자유롭게 사 입을 수 있다고 하니... 교도소라기보다 호텔같은 느낌이다. 탑 밖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세금으로 지불되는 비용을 범죄자들의 행복을 위해 사용해도 되는 걸까 의문도 든다.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리는 세상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독자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면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사유하게 해주는 이 작품을 만나보자.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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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맥거핀 일상 만화 1 소맥거핀 일상 만화 1
윤종문 지음, 샌드박스네트워크 감수, 소맥거핀 원작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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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인기 애니메이션 채널, 소맥거핀이 책으로 나왔다. 소맥거핀 채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리즈 중 하나인 '일상 만화 시리즈'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도록 만화로 재탄생시켰다. 남매 전쟁, 할머니의 손주 사랑 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어른들이 읽기에도 물론 재미있다. 어딘가 이상하지만 공감되는, 어이없지만 빵빵 터지는 웃음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가족 중 최약체이자 서열 꼴지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주인공 소맥이, 부동의 서열 1위 엄마, 귀여운 외모와 달리 상남자 그 자체인 아빠, 소맥이 괴롭히기가 제일 재밌는 누나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리고 사람 외의 등장인물은 심심하면 소맥이에게 장난을 치는 귀시니, 소맥이가 질색하는 동거 벌레 바선생, 귀시니가 아끼는 반려 식물 다육이와 누나가 길에서 데려온 고양이까지 소맥거핀 집안의 구성원이다. 


누나는 소맥이에게 매번 잔심부름을 시키고, 소맥이가 끓인 라면을 뺏어 먹는 적군이지만, 소맥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는 멋지게 나타나 해결해준다. '누가 내 동생을 괴롭히는 거야?' 하며 적을 무찔러 주지만, '내 동생은 내가 때린다!'라며 결국은 소맥이를 혼내며 집에 데려가는 누나의 뒷모습은 어쩐지 웃프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진짜 알 수 없는 남매 사이의 이야기는 현실보다 더 리얼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것 같다.  




공포의 할머니 사랑 에피소드도 굉장히 공감되었는데, '우리 강아지들, 밥 더 먹어라!'로 시작되는 두 시간 동안의 식사 시간은 좀 많이 과장되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봤을 테니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라는 표현처럼 할머니들은 어린 손녀, 손자들 앞이라면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늘 안절 부절이다. 뭘 해도 예뻐죽겠다는 할머니들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우주 최강 할머니의 손자 사랑 편은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캐릭터는 바로 '귀시니'였는데, 심심해서 종일 소맥이를 따라 다니는 '귀시니의 하루'와 다육 식물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그린 '내가 지켜! 다육이' 두 편의 에피소드에서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꿈속에서도 다육이를 지키는 귀시니의 모습은 정말 너무 귀여웠다. 귀시니의 지극정성 보살핌으로 밤사이 다육이가 너무 커버려서 집안 서열 최약체인 소맥이를 밀어내고 위로 올라서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 앞으로 이어질 에피소드에서도 귀시니의 활약을 기대해봐야겠다. 




이 책에는 유튜브 영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코너들도 있다. ‘소맥이의 먹잘알 테스트’와 ‘숨은 그림 찾기’, 소맥이의 귀여운 일기, 그리고 소맥거핀 심층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어 소맥이 캐릭터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영상 편집과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 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유튜브 구독자 100만 명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소맥거핀이 소맥이 다음으로 좋아하는 캐릭터가 강력한 힘으로 뭐든지 무찌르는 엄마와 막내 같은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는 귀시니라고. 영상 하나를 편집하는데 기본적으로 12시간 이상이 소요된다고 하니,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편집해서 올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꿈이라면 소맥거핀의 인터뷰를 더 관심있게 읽게 될 것 같다. 


스트레스 가득한 날, 동글 말랑 귀여운 캐릭터들이 만들어 내는 좌충우돌 일상을 통해 기분 전환해보는 건 어떨까. 엉뚱한 상상력과 코믹함으로 스트레스를 저 멀리 날려 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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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지브리의 현장 - 애니메이션 만들기의 즐거움
스즈키 도시오 지음, 문혜란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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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연재가 시작되었는데 미야자키 씨는 정말 진지했다. '영화의 원작을 만들어보자'라는 의도로 시작한 것인데 그는 무척이나 고민했다.

이런 말도 했다. "스즈키 씨, 영화 제작을 전제로 만화를 그리는 건 만화에 대한 실례예요. 그런 의도로 그리면 만화로서 실격이고 아무도 안 읽지 않을까요? 나는 만화로서 제대로 그릴 겁니다." 미야자키 씨는 항상 그렇지만 몇 가지 중에서 선택할 때 결국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결단을 내린다.             p.4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노> 등 내놓는 작품마다 히트 행진을 이어가며 '지브리 마니아'들을 열광시키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은 어떻게 만들어 질까. 이 책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가 들려주는 제작 현장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그는 중요한 것은 현재 움직이고 있는 이 순간,이라고 말한다. '과거'는 아무래도 좋고, 눈앞에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와도 30년 동안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옛날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언제나 '현재', 지금 해야 하는 것, 그리고 1년 정도 미래의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왔다고 말이다. 


애니메이션 정보지인 <아니메주>를 창간하던 무렵부터 시작해 다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만남,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일을 하기 시작하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설립까지 과정이 이어진다. 이미지보드, 콘티, 스케줄표 등 당시의 현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자료들도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지브리'라는 이름은 미야자키가 붙였는데, 사하라사막에 부는 열풍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선풍을 불러일으키자'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사하라사막에 부는 'GHIBLI'는 이탈리아어이기 때문에 '지브리'가 아닌 '기블리'로 불러야 맞다는 것. 물론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버려서 정정하기엔 너무 늦었지만 말이다. 





기능과 인간이랄까, 재능과 성실함의 균형을 잡는 것은 어렵지만 이 두 가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실하지만 아직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그 사람을 도우려고 한다. 도우면서 도와주는 사람 자신이 새로운 면을 드러내고 그러면서 성장해나간다. 이런 점이 조직의 장점이다. 단순한 개개인의 집단이라면 그 조직의 능력은 개개인의 능력을 합한 것이 되고,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뺄셈을 하는 꼴이 되고 만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잘 만들 수 있다면 그 집단의 능력은 개개인의 능력의 몇 배도 될 수 있다.                p.189


지브리의 이름으로 발표된 첫 작품은 1986년에 개봉된 <천공의 성 라퓨타>로 77만 5,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1988년에 <이웃집 토토로>, <반딧불이의 묘>, 1989년에는 <마녀 배달부 키키>로 이어진다. <마녀 배달부 키키>가 26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거두자, 스즈키 도시오는 애니메이션 잡지 일을 그만두고 지브리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만 제작하는 스튜디오는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한다. 극장용 작품은 흥행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리스크가 너무 커서 보통 계속적으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만들면서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의 최전선을 달려왔던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야기들이 전부 흥미진진했지만,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제작 방법에 대한 대목이었다. 미야자키의 풍부한 발상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떻게 창조되는지, 결말은 아직 모르는 상태로 작화에 들어가는 과정과 <토토로>를 둘러싼 에피소드들, 수수께끼를 풀지 않는 이유에 대한 비밀 등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라 인상적이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계속 보아왔다면 이 책이 아주 많은 궁금증들을 해소시켜줄 것 같다. 다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제작방식과 철학, 온갖 우여곡절이 담긴 귀중한 비하인드 스토리, 저자가 다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 하야오와 나눈 작품에 대한 일상적인 이야기들까지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이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친분을 쌓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일을 한다'라고 저자는 자신의 일에 대해 설명한다.  '무엇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유명해지고 싶다고 바란 적도 없었다고.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일을 해왔기 때문에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이다. 지브리의 역사를 돌아보고, 작품에 담긴 비화들을 만나보자. 왜 지브리의 작품들이 그런 재미와 감동을 주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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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이슨 벨을 죽였나 -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 3 여고생 핍 시리즈
홀리 잭슨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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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킬턴에서도 이따금 좋은 일이라는 게 생긴다고 핍은 스스로 되뇌었다. 핍은 라비를 쳐다보며 테이블 아래에서 라비의 손을 잡았다. 제이미의 반짝이는 눈빛과 나탈리의 강인한 미소. 펌킨 스파이스 따위로 투닥대는 코너와 카라. 핍이 원하는 건 바로 이런 거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이것, 이 평범한 일상 말이다. 손가락으로 곱을 수 있을 만큼 많지 않지만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 또 날 아끼는 사람들. 내가 사라지면 날 찾아 나설 사람들. 이 감정을 병에 꼭꼭 담아 잠깐이라도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p.71


여고생 ‘핍’을 주인공으로 하는 미스터리 3부작 '여고생 핍 시리즈' 그 세 번째 이야기이다.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 <굿 걸, 배드 블러드>에 이어 <누가 제이슨 벨을 죽였나>로 3부작이 마무리되었다. 이 작품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를 아우르는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이라 평가받으며 영미권 최대 서평 사이트 굿리즈 초이스 어워드 영어덜트 소설 1위를 차지하기도 하며, BBC TV 드라마로도 만들어 졌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었던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에서 핍은 학업성취도평가를 위한 수행평가 과제로 5년 전에 벌어진 앤디 벨 실종사건에 대해 탐구활동을 했다. 사건 당시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샐의 남동생을 찾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앤디 벨 실종을 둘러싼 정황 조사부터 시작해,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계자들을 찾아 다니며 인터뷰를 하며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밝혀냈다. 두 번째 작품인 <굿 걸, 배드 블러드>에서 핍은 지난해 해결한 살인 사건에 대한 ‘트루 크라임 팟캐스트’를 만들었고, 유명 인사가 된다. 그럼에도 핍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큰 위험에 빠지기도 하며 고생했기에, 시즌 2는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실종되고 경찰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자, 결국 핍이 다시 나서게 되고 치명적인 비밀들과 마주하게 되었었다. 여고생 핍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세 번째 이야기는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더욱 기대하며 만나보게 되었다.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고, 금세 공포가 자리를 잡았다. 배 속에서 서서히 자리 잡은 공포는 벌레처럼, 혹은 죽은 자의 손가락만큼이나 빠르게 등골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핍은 증거 봉투 안의 헤드폰을 쳐다보았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지난주에 봤는데, 아닌가? 재키의 인터뷰 파일을 들을 때만 해도 썼는데 말이다. 아니, 아니다. 그때도 헤드폰이 없었다. 핍은 조쉬가 빌려갔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헤드폰을 쓴 게...... 그날이다.           p.560


전편에서 직접 목격한 충격적인 사건 이후 핍은 계속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 갑작스럽게 손에 흥건한 피가 보인다거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듣는 식으로 불안과 공황 증세까지 보이고 있는 중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학교 과제를 하며 진실을 찾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 있던 소녀는 이제 없다. 진실은 이미 수차례 핍을 저버렸고, 훨씬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지금의 핍은 작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누군가 핍을 노리고 있었다. 핍의 웹사이트를 통해 보내온 이메일과 트위터로 '네가 사라지면 누가 널 찾지?'라는 내용이 여러 번 발송되었고, 핍의 집 앞 바닥에 분필로 그린 머리 없는 사람 표시와 역시나 머리 없는 죽은 비둘기가 발견된다. 급기야 핍이 자주 뛰는 코스의 인도에 '데드 걸 워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핍을 겨냥한 메시지를 보내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건 대체 누구일까. 핍은 경찰을 찾아가지만, 경찰은 그저 유명세에 뒤따르는 악플러들 일거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핍은 이 사건이 바로 자신이 기다렸던 사건이라고, 스스로 해결하기로 한다.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이 명확한 사건을 해결한다면, 핍 자신도 온전히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시리즈의 1편을 처음 만났을 때, 살인 사건 수사를 여고생이 한다는 점, 무엇보다 그것을 수행평가 과제로 선정해 조사를 한다는 점이 대단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서사가 진행되는 중간 중간 핍의 활동 일지와 인터뷰 녹취록, 점점 늘어나는 용의자 파일들과 스토커 일지, 증거 사진 등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데이터로 모아지는 과정 또한 수사에 함께 참여한다는 기분이 들어 더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사건 당시의 이동 경로를 표시한 지도, 관계도로 정리한 용의자, 잠재적 적의 목록, 뉴스 보도 내용, 몽타주 등의 자료들 또한 사건을 추적하는 데 현실감과 긴장감을 부여해준다. 여고생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사건 조사이지만 전혀 유치하지 않고, 굉장히 진지하게 서사가 진행된다는 점도 이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이다. 이번 작품은 시리즈의 마지막이니 만큼 1편에서 시작된 여러 사건과 인물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오르며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여준다. 사건 해결을 위한 핍의 아이디어도 충격적이고, 거듭되는 반전 또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넷플릭스에 방영중인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면, 틱톡에서 인기많은 영어덜트 소설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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