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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증명 ㅣ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처음엔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증명'이라니. 증명이라는 단어의 뜻이 어떤 사항이나 판단 따위에 대하여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증거를 들어서 밝히는 거라고 하면,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한다는 얘기가 될까. 무슨 증거를 대야 우리가 인감임이 증명되느냔 말이다. 무엇이 인간을 인갑답게 하는지, 최소한의 인간성이란 어느 정도인지, 이 작품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때 현장을 지나가던 교양 있어 보이는 노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부인은 괜히 참견했다가 험한 꼴을 본다면서 남편의 소매를 잡아끌어 도망쳤습니다. 목을 졸린 것보다 그 광경에서 미국의 진정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상관없는 사람이 죽든 살든 전혀 관심이 없다. 자신의 삶만 편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위협할 우려가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기피한다. 정의를 위한 싸움은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고 나서 한다. 상식적인 사회 구성원이 범죄를 보고도 못 본 척하게 된 것도 인종의 용광로 속에서 거대해진 기계 문명으로 인해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기가 두렵게,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나름의 이유와 목적이 있는 살인도 있겠지만, 무차별적으로 아무 이유없이 사람을 해치는 사건도 일어난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 라는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세상이 무서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을 지키며 살때, 좀 더 살기좋은, 따듯한,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을 축으로 진행된다. 24살의 한 흑인 청년이 고층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다 죽고, 그 수사과정에서 밀짚모자가 단서로 발견된다. 그리고 사건 해결을 위해 형사 무네스에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과 몸이 아픈 남편을 위해 밤일을 시작한 미모의 아내를 의심하던 남편은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실종된 걸 깨닫는다. 그리고 사라진 아내의 흔적을 쫒는 과정이다.
아내의 불륜남과 함께 아내를 찾는 남편은 아내가 실종된 곳에서 낡은 곰 인형을 발견한다. 그 인형은 사회적 지위에만 연연하는 부모에게 지쳐 점점 더 어두운 범죄의 그늘로 빠져드는 미치코의 것이다. 그는 우발적인 사고를 저지른 미치코는 여자친구와 함께 미국으로 도망을 간 상태이다. 그리고 한국 경찰의 협조 요청으로 살해된 조니에 대해 조사하는 뉴욕의 경찰 켄이 있다. 그는 슬럼가 출신으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를, 과거 일본에서 군 복무 중에 한 남자에게 분풀이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일본인 옆에서 군인들을 노려보던 어린 아이가, 이번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무네스에이다.
이야기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야스키 교코라는 한 여성에게로 집중된다. 매스컴의 명성을 얻고 있는 가정문제 평론가이자, 미치코의 가식적인 부모.. 그리고 살해된 흑인 청년과도 관계가 있는, 문제의 인물이다.
"야스키 교코에게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는지 한번 모험을 해보죠."
"인간의 마음을 시험한다고?"
나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일 그 여자에게 인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자백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자백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현재로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합니다. 야스기 쿄코의 인간성에 호소해 자백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인상적인 인물은 무네스에 형사이다. 사회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동물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풀어내기 위해서 형사가 되었고, 한 인간이 법률이라는 대의명분 아래에서 인간을 쫒을 수 있는 직업은 경찰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겐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가 적이었고, 형사는 국가 권력이을 짊어지고 모든 인간에게 보복하고자 형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매한 도덕가, 성숙하고 덕망 있는 성인의 가면을 쓰고 우정이나 자기희생을 역살하는 자라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기 보신의 주판을 튕기고 있다는데에 물론 동의한다. 인간이란 동물을 파체혀보면 누구다 깊은 바닥에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을 미워하고, 믿지 않고, 불신하면서 살기란 어쩌면 더 힘들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발뻗고 자지 못한다는 말처럼,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혹사시켜야 그런 수준에 이를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런 동기를 만들어준 어린 시절의 끔찍한 광경이란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해서, 마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런 그가 작품의 후반에 이런 얘기를 한다. 야스키 교코의 인간성에 호소해서 자백을 받아 보자고.
그녀 곁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무네스에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도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야스기 쿄코는 아직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놓은 것이다. 무네스에는 교코가 자백한 뒤, 자신의 마음에 숨어 있던 모순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 없이 교코와 대치했을 때, 그는 그녀가 인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믿고 모험을 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역시 인간을 믿고 있던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무섭고, 슬프다. 어떻게 저럴 수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인간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마음에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어차피 그녀에게도 자신의 어머니가 사준 '밀짚모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테니 말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 추억의 대부분은 어머니와 연계되어 있다. 자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라도, 어머니라는 존재는 나의 어린 시절을 형성하고, 그 것이 어른이 된 나의 가치관을 만들어주고, 외롭거나 힘이 들때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감싸주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