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재채기하다 갈비뼈가 부러졌을 때 깨달은 것들
악셀 하케 지음, 배명자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잊을 수 없는 냄새가 또 있다. 나는 어린 시절 매주 새로운 책을 찾아 시립도서관에 갔는데, 거기에는 선명하게 구분되는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 먼지 냄새, 독서에 빠진 사람들의 냄새가 있다. 아, 언젠가 내 차가운 몸이 무덤에 들어갈 때, 내 기억의 거대한 건물도 가져갈 수 있도록 갓 깎은 잔디와 갓 볶은 커피, 시가 한 대, 그리고 책들도 같이 넣어주기를! 하지만... 해골에는 코가 없다.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다른 감각과 구별되는 후각만의 특징, 즉 코에서 뇌로 가는 직통 경로에 대해 얘기해보자. p.187
<삶은 당신의 표정을 닮아간다>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악셀 하케의 신간이다. 전작에서 철학, 심리학, 예술, 대중문화를 넘나들며 '유쾌함'에 대해 탐구했던 그는 이번 책에서 더 이상 젊지 않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시간, 세월, 그리고 이 시대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순 여덟 살인 그는 노화로 인해 웃지 못할 사건들을 겪었고, 그 덕분에 평생의 동행자인 '몸'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피부, 뼈, 검지, 치아, 폐, 무릎, 뇌 등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중년 남자의 시선으로 나이든 몸과 노년이라는 시간에 대해,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흉터, 주름, 생채기 등의 개인적인 경험은 보통 몸에 새겨진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키가 줄어들고, 주름이 선명해지며, 크고 작은 부상과 질병의 흔적들을 갖게 된다. 그 모든 것들은 매일 거울 앞에서 마주하게 되기도 하고, 특별하지 않다고 잊어 버리기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간다. 악셀 하케는 지극히 내밀하고도 개인적인 기억들을 몸이라는 '작은 우주'를 통해 읽어 낸다. 재채기로 인해 갈비뼈가 골절된다거나, 주머니칼로 멋을 내려다 손가락 부상으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었을 정도로 아찔한 사고를 겪기도 하고, 톨스토이 때문에 왼쪽 무릎 연골이 영구적으로 손상되기도 하며, 살면서 원하는 만큼 날씬해 본 적이 없었던 식습관을 돌아보고, 유독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생긴 아찔한 에피소드도 들려준다. 사진첩 속 아기 시절부터 68세에 이르기까지, 성장과 노화, 크고 작은 부상과 질병, 그리고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며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어 준다.

세상의 진부함과 아름다움, 역겨움과 온갖 현상은 오로지 몸으로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 없이 어떻게 하겠는가? 몸은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인생은 아름다우면서도 역겹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몸에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몸이 적절히 기능하도록 살 수 있으며, 몸의 기계적 특성을 볼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몸을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몸이 상호작용하고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세계의 일부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p.247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자칫 견디기 어렵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과 수치심, 두려움 조차 유머러스하게 엮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전작에서 인생의 어려운 시기에도 유쾌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악셀 하케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두려움을 넘어 긍정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내용 자체는 매우 유쾌하게 읽히지만, 그 속에 담긴 성찰은 결코 가볍지 않아서 더 가슴 찡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몸의 변화와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며 유머로 승화 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늙어가는 몸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기란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흉터 하나, 주름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모든 흔적들이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증명해주는 기록이 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개인적으로는 냄새와 후각을 다룬 장을 특히 흥미롭게 읽었다. 냄새는 일반적인 외부 자극과는 달리 비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뇌에 도달하기 때문에 시상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후각은 뇌의 아주 오래된 영역이자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변연계에 속하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장 오래된 감각이기도 하다. 냄새는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대목을 소개하기도 한다. 추억의 냄새와 특별한 의미가 있어 잊을 수 없는 냄새에 대한 부분도 인상깊게 읽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가져온 변화와 점점 더 흐려지는 개인의 기억력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나이 든 신체란 볼품없어 지게 마련이지만, '나'의 모든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안에 축적된 시간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을 통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여보고,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