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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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케빈과 내가 이 시대에 수월하게 끼어들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쇼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였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과 비슷한 척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우리는 실제로 역할 속에 녹아든 적이 없었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p.184~185

 

1979년에 출간된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수십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여전히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히는 압도적인 걸작이다. 무려 노예 제도가 나오고, 흑인 여성으로서의 불합리한 삶에 대해 그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국내에는 2016년에 소개되었었고, 작년 여름에 리커버 버전이 출간되었었다. 흑인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기존 버전의 서사성을 배제하고, 위대한 작가의 작품이 전해주는 강렬함을 컬러로 다시 빚어내는 것이 특별판의 모토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미래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형광 컬러를 표지부터 본문까지 부여한 너무 근사한 표지가 탄생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리커버 에디션은 출간되자마자 소진되어 여러 달 동안 절판 상태였는데, 최근에 한정수량으로 재제작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작년에 리커버 에디션이 출간되자마자 구매했었는데, 이제야 읽어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때로부터 사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요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만큼 엄청난 작품이었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날은 다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작가인 케빈과 작가 지망생인 다나 부부는 이사한 지 얼마 안되는 집에서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방 안이 흐릿해지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나는 그렇게 집도, 책도, 전부 다 사라지고, 난데없이 야외에서, 나무가 자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에 있던 넓은 강 한가운데에 어린아이 하나가 허우적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빠져 죽기 직전이었고,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으로 달려가 아이에게 헤엄쳐 가 아이를 구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물가에 있던 아이의 엄마는 구해준 자신을 주먹으로 공격하고, 화가 난 남자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평생 처음 보는 긴 총신이 내려다 보였다. 그렇게 자신이 총에 맞는다는 생각에 딱 얼어붙은 순간, 다나는 다시 케빈 곁으로 돌아온다. 온통 젖고 진흙투성인 채로. 다나가 체감한 시간은 몇 분 정도였지만, 케빈은 실제 그녀가 사라진 시간은 기껏해야 십 초에서 십오 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는 처음 만났던 소년 루퍼스가 커튼에 불을 붙여 위험에 처했던 순간이었다. 소년은 처음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고, 루퍼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나는 그곳이 무려 100년 전인 1815년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이 검둥이라 불리며 천시받고, 백인들이 노예들에게 채찍질을 해대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게다가 다나는 흑인 여성이었다. 그리고 루퍼스는 다나의 아주 먼 조상이었다.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 다나와 케빈은 자신이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루퍼스가 위험한 순간이었고, 다시 현재로 오게 되는 것은 다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체 언제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건지, 어떻게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닥쳐온 현실을 견뎌야 했다.

 

 

루퍼스는 내 어깨에 머리를 대고, 왼팔로 나를 안고, 오른손은 여전히 내 손을 붙잡은 채 누워 있었다. 나는 서서히 이대로 가만히 누워 있기가, 이 일마저 용서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깨달았다. 내가 했던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너무 쉬웠다. 반면 칼을 들어 올리기는, 그렇게 여러 번 구해준 몸에 칼을 박아넣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를 죽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p.506~507

 

다나는 그곳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맞아보기도 하고,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한 벌을 받기도 하고, 흑인으로서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며 당시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작품을 읽게 되면 누구나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허구의 이야기임을, 작가가 그려낸 상상의 산물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압도적인 이야기는 극중 다나가 겪는 수많은 경험들과 생각들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체험하게 만들고 있다.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인종과 젠더 문제를 다루었던 여타의 작품들이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일종의 거리두기가 있었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그 간극을 완전히 없애 버린 것이다.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무참하게,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하게 1800년대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압도적인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가까운 인생과,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귀한 줄 몰랐던 편안함과 안전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라는 이 작품의 처음을 열었던 문장의 의미는 5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결코 완전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작가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의 압도적인 서사에 방점을 찍으며 이 책을 결국 또 다시 읽게 만들어 준다. 이 작품은 두 번째 읽었을 때 훨씬 더 재미있었고, 아마도 세 번째, 네 번째 계속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살면서 이렇게 여러 번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홀린 듯 사로잡히게 만들어 줄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 당신도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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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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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리사가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고 사용하는 단어다. 리사는 늘 골든 오크스에 대해, 그러니까 임신을 외주화한 의뢰인에게 만족을 제공하려는 골든 오크스의 기념비적인 노력에 대해 악의에 찬 농담을 해댄다. “저희의 목표는 여러분께 기쁨을 드리는 겁니다!” 리사는 히죽히죽 바보 같은 미소를 띤 채, 마치 견습 수녀처럼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조아리는 시늉을 하며 조롱한다. 기쁘으-음을 드리는. 그녀는 그 단어를 꼭 아이스크림 같은 느낌으로 발음한다. “왜냐하면 아기를 갖는 것은 기쁘으-은 일이어야 하니까요!”   p.155

 

아기를 낳은 지 4주가 된 제인은 딸 아말리아를 볼 때마다 엄청난 애정에 압도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난한 싱글맘이었던 그녀는 다른 필리핀 이민 여성들과 함께 퀸스의 합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몇 주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시부모와 함께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그에게 애인이 있고 그의 가족들 모두가 여러 달 동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는 아기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녀의 사촌인 아테가 자신의 침대 위 2층 자리에 대한 석달치 임대료를 선불로 내주었다. 합숙소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필리핀 사람들이었고, 상당수는 고향에 자식을 남겨두고 온 어머니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일한 아기인 아말리아와 함께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고, 제인에겐 앞날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아 보모로 일하는 아테가 아기를 돌보다가 쓰러졌고, 제인이 대신 보모 일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완벽한 상류층의 삶을 경험하고 두 배로 측정된 급료를 받고 처음으로 자신도 목돈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작은 실수로 해고 되고 몇 달 동안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그때 아테는 제인에게 여성을 대리모로 고용하는 골든 오크스라는 곳을 소개해준다. 호스트로 선택되면, 쉬면서 몸속의 아기를 건강하게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골 한복판의 호화 저택에서 지내게 된다. 제인은 9개월 동안 자신의 몸을 빌려주는 대가로 매월 돈을 받고, 무사히 건강한 아기를 출산할 경우 궁핍한 삶을 완전히 바꿔줄 거액의 보너스를 보장받는 계약을 맺게 된다. 그 동안 아말리아는 아테가 데리고 있으면서 보살펴 주기로 하고, 그녀는 대리모들을 위한 최고급 리조트에 입주하게 된다.

 

 

하지만 넌 이미 톱이지, 안 그래?
레이건은 배 속의 태아에 대해 생각한다. 유기농 식품으로 살찌고, 주문 생산 종합비타민으로 더 튼튼해지고, 유터로사운즈에 녹음돼 있는 다중 언어 재생 목록을 고려하건대 아마도 현시점에 3개 국어는 할 아기. 게다가 남자다. 더욱이 부유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이 아이가 언젠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267~268

 

베일에 싸인 골든 오크스의 의뢰인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뉴욕주 북부의 한적한 전원에 자리 잡은 ‘골든 오크스 농장’에는 전담 의사, 간호사, 영양사, 마사지사, 트레이너, 그리고 대리모인 ‘호스트’들을 돌본다는 미명하에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코디네이터 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식사, 명상, 운동, 진찰, 임신부 태교 수업 등 호스트들의 하루 일과는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의뢰인의 요청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호스트들은 외부로 나갈 수도 없고, 대부분의 경우 방문객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제인을 비롯한 네 명의 여성 화자들에 의해 진행된다. 골든 오크스를 총괄하는 중국계 혼혈인 메이, 제인의 나이 많은 사촌이자 20년 넘게 신생아 보모 일을 해온 아테, 그리고 제인의 룸메이트인 백인 여성 레이건이다. 레이건은 명문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물질적으로도 아무 부족함이 없지만, 아이를 출산할 수 없는 여성을 도와주고 싶다는 이상주의적 욕구와 강압적인 아버지의 도움 없이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현실적인 계산으로 대리모 일을 하게 되었다.

 

작가인 조앤 라모스는 우연히 한 잡지에서 인도의 대리모 서비스 광고를 접하고 이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닐라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그녀는 그 동안 만나온 필리핀인 여성 가사 노동자들의 삶도 이 작품에 투영시켰다. 덕분에 계급, 인종, 이민에 대한 섬세하고도 현실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소설이 탄생했다. 임신이 수익성 좋은 비즈니스가 되고, 여성의 몸과 아이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장소가 '농장'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는 설정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더 소름끼치는 것은 이 소설 속 상황이 결코 상상의 산물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아시아 저개발국가 이민 여성들의 삶을 너무도 리얼하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대리모라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인 딜레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는 작품이었다. 대리모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도 있지만, 대리모 사업이 합법인데다 심지어 권장되기까지 하는 나라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당장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을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는 디스토피아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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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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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뉴욕 시내에서 지낸 적이 있다. 편마암과 콘크리트와 유리로 된 북적이는 섬, 고독이 일상적으로 지배하는 도시. 절대로 편안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나는 울프의 말이 틀린 게 아닌지, 고독의 체험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은 없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살아 있다는 게 무엇이냐는 더 큰 물음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고. 사적인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픽셀로 분할된 우리 세기에 사는 시민으로서도 내게서 소진된 것들이 있었다. 외롭다는 게 무슨 뜻일까? 타인과 직접 가까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는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p.15

 

이 책은 '제2의 리베카 솔닛'이라 불리는 올리비아 랭의 대표작으로 국내에는 2017년에 소개되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으로 새롭게 출간이 되었다. 연인을 따라 도착한 뉴욕에서 실연하며 혼자가 된 그녀가 ‘외롭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천착해가는 과정을 좇는다. 에드워드 호퍼에서부터 앤디 워홀까지, 저자는 뉴욕의 예술가들이 남긴 외로움의 다양한 조각을 유연하게 이어 붙이며 고독의 맨얼굴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예술가들의 궤적을 따라가는 이 내밀하고도 대담한 여정 끝에 만나게 될 특별한 사유가 정말 근사한 책이었다. 고독이 일상이 된 시대,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는 않은 모순된 감정을 느끼며 살아 가는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올리비아 랭은 고독하다는 것이 배고픔 같은 기분이라고 말한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잔칫상에 앉아 있는데 자신만 굶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거다. 창피하고 경계심이 들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소외되는 상태. 그러다 보니 현대 사회에서는 '고독사'라는 것으로 고독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고독사라니, 얼마나 서글픈 단어인가. 사람들로부터,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아무도 모르게 홀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고독인 것이다. 도시에서 고독이란 어느 정도는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아래층엔 누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로 살고 있다. 핵가족화와 고령화, 1인가구의 증가로 인해 고립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도 많은 주거 형태가 아닐 수 없다. 도시에서의 삶이란 아무도 날 간섭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가 존재하지만 거울의 양면처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찾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이 할 수 없는 일은 너무나 많다. 죽은 이를 도로 살릴 수도 없고, 친구들 사이의 다툼을 말려주지도 못한다. 에이지를 치료하지도 못하며, 기후 변화의 속도를 늦추지도 못한다. 그렇기는 해도 예술은 아주 비상한 기능을 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중재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친밀성을 창조하는 능력이 분명 있다. 예술은 상처를 치유하면서도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p.369

 

호텔, 영화관, 집 등 도시의 장소와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바로 고독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한 명이거나 두세 명이 있어도 서로 소통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타인들과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어도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서로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 올리비아 랭은 뉴욕이라는 유리의 도시, 염탐하는 눈의 도시에서 끊임없이 호퍼의 그림들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단서를 발견하고 그 도시를 살아간 예술가들의 작품과 삶 속으로 빠져든다. 외로워지기 전에는 언제나 무시했던 앤디 워홀의 작품들에게 매혹 당하고, 평생 골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죽음 직전에야 세상에 알려진 아웃사이더 헨리 다거, 소외의 원천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깝게 담아낸 사진작가 낸 골딘, 고독한 피사체들을 담아온 사진작가 피터 후자 등등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부랑자로서 고립을 경험한 예술가들의 삶 속에서 자신이 모습을 발견해낸다. 

 

'예술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기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상처를 치유하고,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독은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것이다. 올리비아 랭은 말한다. 우리의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지옥에서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상실감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외로움과 고독이 구축한 다정한 세계로 향해간다.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은, 고독이라는 도시의 거주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었다. 올리비아 랭의 근사한 사유가 그려내는 도시의 풍경들과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서 고독하더라도 조금은 따뜻하게 일상을 보내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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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이어달리기 - 마스다 미리 그림에세이
마스다 미리 지음, 오연정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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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세계에는 표면적으로 교제하는 경우가 있다. 날씨라든가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쓱 헤어지는 가뿐함이여! 하지만 그런 교제 중에도, 어떤 순간에 따끔따끔 마음이 아픈 경우가 있다... 날아오는 나쁜 공 모두를 탁탁 되받아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무리다. 나는 평소에도 논리정연하게 말하지 못한다. 당황했을 때는 한층 더 어렵다. 나는, 나를, 나의 말로 도울 수가 없다.     p.48~49

 

마스다 미리의 2020년 출간작을 함께 모니터링하는 모임, '마스다 미리 패밀리'가 되었다. 내가 고른 책은 작년 출간작 중에 <행복은 이어달리기>이다. 작년에도 꽤 많은 책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내가 읽은 마스다 미리의 책이 세 권이라 그걸 제외하고 골랐다. 그녀의 만화도 좋아하고, 에세이도 좋아하는데, 이 책은 그림에세이이다. 커다란 행복보다 일상의 소소하게 작은 행복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마스다 미리라서 '행복은 이어달리기'라는 제목부터 너무 와 닿았다.

 

 

1킬로그램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물에 뜬 채로 하늘을 보고 싶어 수영을 배우고, 전철 안에서 자느라 정류장을 놓친 남자아이를 깨워 반대편 열차에 태워주고, 길을 걷다 발견한 물웅덩이 속에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가 있을 거라 상상하고, 친구들과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 밤 벚꽃놀이를 가서 솜사탕 한 봉지를 순식간에 먹기도 한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면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싶을 만큼 작은 일상 속 순간들, 우리에게도 매일 같이 벌어지는 평범한 나날들. 그런데 마스다 미리는 그 속에서 기어코 반짝거림을 발견해낸다.

 

 

이웃 마을까지 걸어서 카레를 먹으러 가고, 또 걸어서 돌아온다. 밤의 주택가에서 기분이 잔잔해진다. 남의 집 텔레비전과 목욕물 소리. 희미한 가로등, 환한 가로등. 가만히 놓인 자전거들. 온갖 일이 일어나도 하루는 어김없이 저물어간다. '좋은 사람'이 다정한 사람이라면 내게도 당연히 다정한 면이 있다. 있다! 많이 있다! 단언할 수 있다. 그 다정함을 스스로 헤적거려버리는 날도 있다.      p.162~163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실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내 뒤에서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 사람도, 넘어지고, 다쳤을 때 달려와 토닥여 줄 사람도 없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어리광을 부릴 수도 없고, 무턱대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어른인데, 그렇다면 어른의 행복이란 뭐가 있을까. 피곤해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하고, 한숨으로 가득한 일상이라도 버텨내야 하고, 정신 없이 바쁘게 사는 와중에 타인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나의 자존감도 지켜야 하는 현실은 나를 지치게 하고, 미래는 불안하기만 하다.

 

그냥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기분 좋은 일은 없을까. 의미가 없더라도, 뭔가 이득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냥 그 순간으로 충분한 행복 말이다. 날씨가 좋아서 행복하고, 걱정할 일이 아무 것도 없어서 좋은 날이고, 카페에서 먹은 디저트가 맛있어서 행복하고, 갓 내린 커피가 너무 근사해서 설레는 그런 것들 말이다. 마스다 미리는 말한다. 작은 행복이 여러 개 모여서, 그 소소함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어른의 행복이라고 말이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소녀 같은 마음과 행동들이 참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에 대한 걱정들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씩 옅어진다고나 할까. 그녀의 긍정 마인드가 내게도 전염되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스다 미리의 작품을 읽는 것일 테고 말이다. 여자들의 마음을 콕콕 찝어 내어 그려주어 매 페이지마다 맞아. 맞아.를 연발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해서 정말 공감하며 읽게 되는 것 같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는 안다. 아주 오래 마음에 남아있게 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아주 보통의 어떤 날이라는 것을. 그저 스쳐 지나갔던 일상의 수많은 날들 중에 어느 한 순간이 오래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남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한해, 한해 나이를 먹을 수록 조금씩 더 좋아지는 것이 바로 마스다 미리의 작품이다. 오늘의 인생을 넘기면, 그 다음의 오늘의 인생이 있고, 내일의 내가 있다고, 그렇게 인생은 계속 이어지는 거라고 마스다 미리는 말했다. '보통의 매일이 지금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오늘 하루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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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약한 사람들을 위한 통계학 수업 - 데이터에서 세상을 읽어내는 법
데이비드 스피겔할터 지음, 권혜승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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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먼의 범죄에 대한 통계적 접근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긴 희생자 목록에서 한 걸음 물러서기를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개인적이고 고유한 세부 사항들은 건조한 숫자와 그래프로 바뀐다. 처음에는 이것이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통계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면, 일상의 경험은 데이터로 전환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사건들을 범주별로 묶고 꼬리표를 달고 측정값을 기록한 뒤 그 분석 결과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p.11

 

오늘날 우리는 데이터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교통 상황, SNS 게시물, 온라인 구매 이력 등 일상에서 수집된 거대한 데이터가 이동 경로 최적화, 맞춤 광고, 구매 추천 서비스 같은 기술에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잡음 속 신호를 감지해내서,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선택의 순간에 좋은 결정을 내리길 원한다. 알고리즘은 과거 데이터를 사용해, 그런 문제들을 공략한다. 이렇게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마저 수량화되는 빅데이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통계적 분석과 사고 능력은 읽고 쓰는 능력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책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각종 현상과 사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통계과학을 설명해준다. 단순히 평균이나 표준편차를 계산하는 것이 아닌,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패턴과 관계를 연구하는 통계학을 실세계의 데이터와 예제를 활용해 보여주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통계학이 집값 예측부터 질병 추적, 살인 패턴 분석뿐만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호기심까지 해결할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나 이 책은 기술적 측면보다는 개념적 측면에 더 비중을 두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골치 아픈 수식은 거의 없고, 그나마 몇 개 등장하는 수식도 맨 뒤에 수록되어 있는 용어집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니 기술적이지 않은 통계학 입문서를 찾고 있는 학생과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통계에 관해 쉽게 이해하고 싶은 일반인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수포자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는 점 또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이다.

 

 

우리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다음에 받을 카드에 내기를 건다. 또는 스크래치 복권을 산다. 또는 아이의 가능한 성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밖에 추리소설을 두고 골머리를 쥐어짜고, 야생에 남은 호랑이의 수에 관해 논쟁하고, 이민자나 실업자 추정값을 듣는다. 이 모든 것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실이나 수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베이즈 방법은, 이런 사실이나 수에 대한 개인적 무지를 나타내기 위해 확률을 사용한다.      p.338

 

베이컨, 햄, 소시지가 담배 같은 발암물질이라는 WHO의 발표는, 암 발병률을 18퍼센트 증가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실제 사람 수로 환산해보면 100명 중 6명이 7명으로 증가할 뿐이다. 사고 다발 지역에 과속 단속 카메라를 설치한 후에 사고율이 내려가면, 대부분 카메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카메라의 설치 효과 중 약 3분의 2는 '평균으로의 회귀' 증상 때문인 걸로 밝혀졌다. 그 밖에도 통계는 사람들의 수명에 관한 데이터를 가지고 내가 80살까지 살 가능성을 예측해보기도 하고, 특정 시간과 장소에 비가 올지 안 올지에 대한 예측도 해보고, 자녀의 키가 부모 중 누구와 더 큰 연관성이 있는지를 예측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을 챙길지 말지 결정하고, 어떤 식당에 가고 어떤 영화를 볼지를 결정할 때도 사용자 평점을 참고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투표에, 경제 지수는 투자 등의 가계 운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니, 통계란 것이 우리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활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통상적인 사망자 수보다 몇 명이나 더 죽어야 연쇄살인을 알 수 있을까? 정확도가 90%인 암 검사 결과 양성인 사람이 실제 암에 걸렸을 확률은? 매일 일어나는 살인 사건의 수, 실업률, 사고가 났을 때 승객들의 구체적인 생존율 등등 데이터를 통해 결론을 이끌어 내는 상황들은 너무도 다양했다. 저자는 통계학의 고수처럼 생각하는 10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통계적 방법은 데이터가 과학적 질문에 답하게 해야 한다, 신호는 항상 잡음과 함께 나타난다. 그 두 가지를 구분하려는 노력이 통계학을 흥미롭게 만든다, 데이터의 질에 신경 써라. 모든 것은 데이터에 달려 있다. 등 우리 삶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통계학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팁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자 너머 세상의 흐름을 올바르게 읽어내는 통계적 사고의 힘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숫자들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데이터 문해력을 길러 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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