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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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와도 같지 않아요!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일 뿐이라면, 왜 우리는 그걸 숨겨야 하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와 그런 여자들 사이의 차이점을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차이가 있어요?」 내가 다시 물었다.
키티는 여전히 시무룩하고 우울해했다. 키티가 말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당신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지 못해요......」
「전 이게, 우리가 하는 게 그르지 않다는 걸 알아요. 세상이 이런 행동이 옳지 않다고 말할 뿐이에요.」       p.176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여성들 사이의 성적 긴장과 그들만의 로맨스를 매혹적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한 세라 워터스의 작품들은 거의 다 만나 봤는데, 데뷔작은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벨벳 애무하기>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2009년에 출간되었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개역판이 출간되었다. 세라 워터스의 데뷔작인 <티핑 더 벨벳>은 동성애적 주제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티핑 더 벨벳Tipping the Velvet'이라는 제목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로 여성 성기를 입술이나 혀로 자극하는 행위를 뜻한다. 작가 스스로도 '다소 음란한 제목', '엄청나게 야하고 부적절해 보이는 제목'이라 칭했을 정도로 자극적인 제목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그 뜻을 알고 있을 때야 그렇게 느끼게 되겠지만 말이다.

 

 

세라 워터스가 이 작품을 발표했던 1998년 당시에도 솔직하고 대담한 성 묘사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십 년이 넘은 지금 읽기에도 당혹스러울 만큼 직설적이고 대담한 묘사들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한 연예장, 상류 사회 귀부인들의 퇴폐적인 파티, 남창의 세계, 그리고 레지비언들의 이야기까지..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을 만큼 놀라웠고, 낯뜨거운 행위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통속극에만 정통한 작가답게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성애 로맨스와 배신, 질투 등의 요소들이 모두 지나칠 정도로 통속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거나, 천박하거나, 뻔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여성들의 삶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배경과 함께 그려내기에 그럴 것이다. 게다가 너무도 아름다운 문장과 치밀한 묘사로 우아하고 정교하게 직조된 플롯이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어쨌건 살다 보면 불만스러운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미래로 방향을 바꾸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캔터베리 궁전에서 키티가 나에게 장미를 던지고 그 장미로 인해 키티에 대한 동경이 사랑으로 바뀌던 그날 밤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이번은 또 다른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갔던 것이리라. 아마도 내가 새 삶을 진짜로 시작하게 된 순간은 거리에서 날 기다리는 마차의 어두운 심장부로 들어가던 순간이었으리라. 어찌 되었든, 나는 이제 내가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정은 마침내 병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쾌락을 골랐다.      p.323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한적한 바닷가 마을 윗스터블에 사는 열여덟 소녀 낸시는 굴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굴 소녀로 컸다. 식당의 위층이 방이었고, 자라면서 분필 조각보다 굴 칼을 먼저 쥐고 사용법을 배웠다. 그들 가족은 아침 7시에 일을 시작했고 열두 시간 뒤에 일을 마쳤다. 어머니가 요리를 하는 동안 언니 앨리스와 아버지가 손님 시중을 들었고, 낸시는 굴을 손질하고 헹구고 쌓아 놓았다. 18년 동안 낸시의 인생에는 굴뿐이었지만, 그것외에 유일하게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연예장이었다. 연예장의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토요일 밤이면 앨리스아 함께 기차로 15분을 가서 켄터베리에 있는 연예장에서 공연을 보고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장 여가수 키티의 공연을 본 뒤로 낸시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다. 끝내주는 공연이었고, 낸시는 혼자 연예장을 다니며 키티에게 푹 빠져 버린다.

 

결국 낸시는 가족을 두고 고향을 떠나 키티와 함께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키티의 제안으로 그녀의 의상 담당으로 공연을 함께 다니기로 한 것이다. 키티를 향한 낸시의 마음은 우상에 대한 동경을 넘어 연인에 대한 사랑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키티는 사회적인 시선을 신경 썼고, 스타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낸시가 아닌 남자를 선택하고, 상처 받은 낸시는 키티의 곁을 떠난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도시에서, 갈 곳 없이 거리에서 떠돌게 생긴 것이다. 이 작품은 키티의 곁을 떠난 낸시가 거리의 남창을 거쳐 상류 사회 귀부인의 성적 노리개가 되었다가 진짜 사랑을 만나게 되며 사회의 새로운 모습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 여성이 열여덟에서 스물다섯 살까지의 삶 동안 얼마나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게 되는지 그 과정이 육백 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에 모두 담겨 있다.  굉장히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묘사가 거침없이 펼쳐지는 작품이라 단단히 마음먹고 읽어야 한다. 진부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정적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놀라운 데뷔작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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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 : 지구로 돌아온 소녀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10
은네디 오코라포르 지음, 이지연 옮김, 구현성 / 알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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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주선에서 내가 한 일이 뭔지 알기는 해? 다들 죽었다고. 조종사하고 나 빼고는 다! 나는 그들이 그 일 하는 걸 직접 봤어! 나는….”
“그랬는데 그 후엔 인류의 적을 친구 삼았지.” 내 등 뒤에서 베나 오빠가 말했다.
나는 홱 몸을 돌려 말했다. “아니, 쿠시족의 적이지. 잘 알면서. 오빠는 글 읽기 떼고부터 쭉 그이들 욕만 하지 않았어?” 나는 도로 베라 언니 쪽을 보았다. 언니는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이 끝을 혀로 차곤 역겹다는 듯 날 위아래로 꼬나보고 있었다.    p.108

 

별의 중재자 빈티의 여정을 그리는 은네디 오코라포르의 스페이스 오페라 <빈티>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 나왔다. 전작인 <빈티 : 오치제를 바른 소녀>에서 소수민족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류 인종인 쿠시족에게 핍박받아온 빈티는 대학에 합격해 우주선에 올랐다. 행성 지구를 떠나는 건 고사하고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암흑의 우주 공간에서 인간들과 전쟁 중인 외계 종족 메두스와 조우하게 된다. 우주선에 탔던 사람들은 조종사만 빼고 모조리, 빈티의 눈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빈티가 살아 남은 것은 그녀가 쿠시인이 아니라는 증거, 몸에 바르는 오치제 때문이었다. 오치제란 나미비아에 사는 힘바 부족 사람들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바르는 진흙으로, 붉은 점토와 꽃에서 짠 기름을 섞은 것이다. 이들은 평생 동안 물로 샤워나 목욕을 하지 않는 대신, 오치제로 몸을 씻는다고 하니, 이는 힘바족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살아남은 빈티는 메두스족과 대화를 시도한다. 우주선이 움자 대학이 있는 행성에 착륙하기 전에 우주전쟁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의 이야기였고, 두 번째 작품인 <빈티 : 지구로 돌아온 소녀>에서는 움자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빈티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구를 떠나 대학행성에 정착한 지 1년이었지만, 우주선 안에서 승객들이 외계인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본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빈티는 부족의 전통인 순례행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부정하다고 생각했고,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고 정화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녀는 메두스족 친구오크우와 함께 지구로 귀환해 가족들과 재회한다. 하지만 평화협정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구인들에게 메두스족이란 아래로 드리워진 기다란 촉수를 가진 괴물일 뿐이었다. 게다가 메두스의 DNA에 감염된 채 우주에서 돌아온 빈 역시 부정한 존재라고 여겨진다. 인종차별과 문화적 대립은 여전했고, 형제들에게도 빈티는 가업을 잇지 않고 열두 개도 넘는 행성을 지나야 있는 대학에 가느라 집을 나갔던 빈티는 이기적인 존재였다.

 

 

“네가 우릴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 봤어.” 그 애가 말했다. “내가 마주쳐본 힘바족이란 힘바족은 다 그랬듯이 너도 꼭 그렇지. 우릴 야만인 보듯 해. 넌 우리를 ‘사막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신비로운, 문명화되지 않은 검은 피부의 모래 부족이라고.”
내가 가진 선입견을 정말 부정하고 싶었지만 음위니 말이 맞았다.
“너도 우리처럼 피부색이 한결 짙은 데다 우리처럼 관을 쓰고 있으면서 말이야. 우리 피를 받았으면서.”   p.186

 

빈티의 언니와 오빠는 그녀를 비난한다. 열여덟 살이나 먹어놓고, 어떤 남자가 너하고 결혼을 하겠냐고, 그렇게 되어서 어떤 애들을 낳겠냐고, 장차 숙련 조율사가 될 애였는데 지금 네 꼴이 어떤지 보라고, 아예 집에 오지 말질 그랬냐고 말이다. 빈티는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혼자 학살의 현장에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복잡한 감정, 여전한 차별과 편견에 대한 분노를 참느라 애쓴다. 빈티는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녀였기에, 그 순간에도 간단한 수식이라도 붙들어 보려고, 마음 속으로 숫자를 거머잡아 보려고 애쓴다. 빈티 시리즈가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주인공이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묘사해내는 장면들에도 있다. SF물에서 등장하는 수학이란 이렇게 환상적이고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싶게 느껴지는 몇몇 대목들이 정말 인상적이다.

 

그렇게 빈티는 그리웠던 가족들을 뒤로하고 계시를 따라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난다. 빈티가 자신에 대해 점점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그려내는 세계는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 과연 그녀는 우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탁월한 중재자가 되어 갈등을 해결하고 지구의 주류 세력인 쿠시인과 외계 종족과의 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까. 이야기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Binti: The Night Masquerade>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이 시리즈의 독특한 점은 서두를 오프닝 그래픽으로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험적이고 변칙을 추구하는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인정받아온 작가 구현성은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열여섯 페이지의 프레임 위에 펜 선의 점층과 반복으로 책의 중심 사건 대부분을 담아내어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모노톤의 그림들은 <빈티> 시리즈의 놀라운 세계로 발을 내딛게 만들면서 작품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부추겨 준다.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작가인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마블의 「블랙팬서」의 스핀오프 코믹스 스토리 작가로서 활동할 뿐 아니라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 드라마의 각본을 맡는 등 현재 할리우드에서 주목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종말 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성별과 인종 불평등, 할례 의식과 제노사이드란 묵직한 주제를 녹여 냈던 <누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라는 작품으로 처음 만났었는데, <빈티>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휴고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에서 오치제를 바르고,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니는 흑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도, 아프리카 문화를 바탕으로 한 판타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신선했고,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시리즈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마지막 여정은 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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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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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케빈과 내가 이 시대에 수월하게 끼어들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쇼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였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과 비슷한 척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우리는 실제로 역할 속에 녹아든 적이 없었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p.184~185

 

1979년에 출간된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수십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여전히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히는 압도적인 걸작이다. 무려 노예 제도가 나오고, 흑인 여성으로서의 불합리한 삶에 대해 그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국내에는 2016년에 소개되었었고, 작년 여름에 리커버 버전이 출간되었었다. 흑인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기존 버전의 서사성을 배제하고, 위대한 작가의 작품이 전해주는 강렬함을 컬러로 다시 빚어내는 것이 특별판의 모토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미래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형광 컬러를 표지부터 본문까지 부여한 너무 근사한 표지가 탄생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리커버 에디션은 출간되자마자 소진되어 여러 달 동안 절판 상태였는데, 최근에 한정수량으로 재제작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작년에 리커버 에디션이 출간되자마자 구매했었는데, 이제야 읽어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때로부터 사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요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만큼 엄청난 작품이었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날은 다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작가인 케빈과 작가 지망생인 다나 부부는 이사한 지 얼마 안되는 집에서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방 안이 흐릿해지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나는 그렇게 집도, 책도, 전부 다 사라지고, 난데없이 야외에서, 나무가 자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에 있던 넓은 강 한가운데에 어린아이 하나가 허우적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빠져 죽기 직전이었고,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으로 달려가 아이에게 헤엄쳐 가 아이를 구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물가에 있던 아이의 엄마는 구해준 자신을 주먹으로 공격하고, 화가 난 남자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평생 처음 보는 긴 총신이 내려다 보였다. 그렇게 자신이 총에 맞는다는 생각에 딱 얼어붙은 순간, 다나는 다시 케빈 곁으로 돌아온다. 온통 젖고 진흙투성인 채로. 다나가 체감한 시간은 몇 분 정도였지만, 케빈은 실제 그녀가 사라진 시간은 기껏해야 십 초에서 십오 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는 처음 만났던 소년 루퍼스가 커튼에 불을 붙여 위험에 처했던 순간이었다. 소년은 처음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고, 루퍼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나는 그곳이 무려 100년 전인 1815년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이 검둥이라 불리며 천시받고, 백인들이 노예들에게 채찍질을 해대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게다가 다나는 흑인 여성이었다. 그리고 루퍼스는 다나의 아주 먼 조상이었다.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 다나와 케빈은 자신이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루퍼스가 위험한 순간이었고, 다시 현재로 오게 되는 것은 다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체 언제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건지, 어떻게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닥쳐온 현실을 견뎌야 했다.

 

 

루퍼스는 내 어깨에 머리를 대고, 왼팔로 나를 안고, 오른손은 여전히 내 손을 붙잡은 채 누워 있었다. 나는 서서히 이대로 가만히 누워 있기가, 이 일마저 용서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깨달았다. 내가 했던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너무 쉬웠다. 반면 칼을 들어 올리기는, 그렇게 여러 번 구해준 몸에 칼을 박아넣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를 죽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p.506~507

 

다나는 그곳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맞아보기도 하고,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한 벌을 받기도 하고, 흑인으로서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며 당시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작품을 읽게 되면 누구나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허구의 이야기임을, 작가가 그려낸 상상의 산물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압도적인 이야기는 극중 다나가 겪는 수많은 경험들과 생각들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체험하게 만들고 있다.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인종과 젠더 문제를 다루었던 여타의 작품들이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일종의 거리두기가 있었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그 간극을 완전히 없애 버린 것이다.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무참하게,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하게 1800년대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압도적인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가까운 인생과,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귀한 줄 몰랐던 편안함과 안전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라는 이 작품의 처음을 열었던 문장의 의미는 5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결코 완전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작가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의 압도적인 서사에 방점을 찍으며 이 책을 결국 또 다시 읽게 만들어 준다. 이 작품은 두 번째 읽었을 때 훨씬 더 재미있었고, 아마도 세 번째, 네 번째 계속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살면서 이렇게 여러 번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홀린 듯 사로잡히게 만들어 줄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 당신도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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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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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리사가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고 사용하는 단어다. 리사는 늘 골든 오크스에 대해, 그러니까 임신을 외주화한 의뢰인에게 만족을 제공하려는 골든 오크스의 기념비적인 노력에 대해 악의에 찬 농담을 해댄다. “저희의 목표는 여러분께 기쁨을 드리는 겁니다!” 리사는 히죽히죽 바보 같은 미소를 띤 채, 마치 견습 수녀처럼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조아리는 시늉을 하며 조롱한다. 기쁘으-음을 드리는. 그녀는 그 단어를 꼭 아이스크림 같은 느낌으로 발음한다. “왜냐하면 아기를 갖는 것은 기쁘으-은 일이어야 하니까요!”   p.155

 

아기를 낳은 지 4주가 된 제인은 딸 아말리아를 볼 때마다 엄청난 애정에 압도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난한 싱글맘이었던 그녀는 다른 필리핀 이민 여성들과 함께 퀸스의 합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몇 주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시부모와 함께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그에게 애인이 있고 그의 가족들 모두가 여러 달 동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는 아기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녀의 사촌인 아테가 자신의 침대 위 2층 자리에 대한 석달치 임대료를 선불로 내주었다. 합숙소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필리핀 사람들이었고, 상당수는 고향에 자식을 남겨두고 온 어머니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일한 아기인 아말리아와 함께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고, 제인에겐 앞날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아 보모로 일하는 아테가 아기를 돌보다가 쓰러졌고, 제인이 대신 보모 일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완벽한 상류층의 삶을 경험하고 두 배로 측정된 급료를 받고 처음으로 자신도 목돈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작은 실수로 해고 되고 몇 달 동안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그때 아테는 제인에게 여성을 대리모로 고용하는 골든 오크스라는 곳을 소개해준다. 호스트로 선택되면, 쉬면서 몸속의 아기를 건강하게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골 한복판의 호화 저택에서 지내게 된다. 제인은 9개월 동안 자신의 몸을 빌려주는 대가로 매월 돈을 받고, 무사히 건강한 아기를 출산할 경우 궁핍한 삶을 완전히 바꿔줄 거액의 보너스를 보장받는 계약을 맺게 된다. 그 동안 아말리아는 아테가 데리고 있으면서 보살펴 주기로 하고, 그녀는 대리모들을 위한 최고급 리조트에 입주하게 된다.

 

 

하지만 넌 이미 톱이지, 안 그래?
레이건은 배 속의 태아에 대해 생각한다. 유기농 식품으로 살찌고, 주문 생산 종합비타민으로 더 튼튼해지고, 유터로사운즈에 녹음돼 있는 다중 언어 재생 목록을 고려하건대 아마도 현시점에 3개 국어는 할 아기. 게다가 남자다. 더욱이 부유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이 아이가 언젠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267~268

 

베일에 싸인 골든 오크스의 의뢰인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뉴욕주 북부의 한적한 전원에 자리 잡은 ‘골든 오크스 농장’에는 전담 의사, 간호사, 영양사, 마사지사, 트레이너, 그리고 대리모인 ‘호스트’들을 돌본다는 미명하에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코디네이터 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식사, 명상, 운동, 진찰, 임신부 태교 수업 등 호스트들의 하루 일과는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의뢰인의 요청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호스트들은 외부로 나갈 수도 없고, 대부분의 경우 방문객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제인을 비롯한 네 명의 여성 화자들에 의해 진행된다. 골든 오크스를 총괄하는 중국계 혼혈인 메이, 제인의 나이 많은 사촌이자 20년 넘게 신생아 보모 일을 해온 아테, 그리고 제인의 룸메이트인 백인 여성 레이건이다. 레이건은 명문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물질적으로도 아무 부족함이 없지만, 아이를 출산할 수 없는 여성을 도와주고 싶다는 이상주의적 욕구와 강압적인 아버지의 도움 없이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현실적인 계산으로 대리모 일을 하게 되었다.

 

작가인 조앤 라모스는 우연히 한 잡지에서 인도의 대리모 서비스 광고를 접하고 이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닐라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그녀는 그 동안 만나온 필리핀인 여성 가사 노동자들의 삶도 이 작품에 투영시켰다. 덕분에 계급, 인종, 이민에 대한 섬세하고도 현실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소설이 탄생했다. 임신이 수익성 좋은 비즈니스가 되고, 여성의 몸과 아이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장소가 '농장'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는 설정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더 소름끼치는 것은 이 소설 속 상황이 결코 상상의 산물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아시아 저개발국가 이민 여성들의 삶을 너무도 리얼하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대리모라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인 딜레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는 작품이었다. 대리모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도 있지만, 대리모 사업이 합법인데다 심지어 권장되기까지 하는 나라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당장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을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는 디스토피아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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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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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뉴욕 시내에서 지낸 적이 있다. 편마암과 콘크리트와 유리로 된 북적이는 섬, 고독이 일상적으로 지배하는 도시. 절대로 편안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나는 울프의 말이 틀린 게 아닌지, 고독의 체험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은 없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살아 있다는 게 무엇이냐는 더 큰 물음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고. 사적인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픽셀로 분할된 우리 세기에 사는 시민으로서도 내게서 소진된 것들이 있었다. 외롭다는 게 무슨 뜻일까? 타인과 직접 가까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는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p.15

 

이 책은 '제2의 리베카 솔닛'이라 불리는 올리비아 랭의 대표작으로 국내에는 2017년에 소개되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으로 새롭게 출간이 되었다. 연인을 따라 도착한 뉴욕에서 실연하며 혼자가 된 그녀가 ‘외롭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천착해가는 과정을 좇는다. 에드워드 호퍼에서부터 앤디 워홀까지, 저자는 뉴욕의 예술가들이 남긴 외로움의 다양한 조각을 유연하게 이어 붙이며 고독의 맨얼굴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예술가들의 궤적을 따라가는 이 내밀하고도 대담한 여정 끝에 만나게 될 특별한 사유가 정말 근사한 책이었다. 고독이 일상이 된 시대,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는 않은 모순된 감정을 느끼며 살아 가는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올리비아 랭은 고독하다는 것이 배고픔 같은 기분이라고 말한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잔칫상에 앉아 있는데 자신만 굶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거다. 창피하고 경계심이 들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소외되는 상태. 그러다 보니 현대 사회에서는 '고독사'라는 것으로 고독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고독사라니, 얼마나 서글픈 단어인가. 사람들로부터,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아무도 모르게 홀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고독인 것이다. 도시에서 고독이란 어느 정도는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아래층엔 누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로 살고 있다. 핵가족화와 고령화, 1인가구의 증가로 인해 고립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도 많은 주거 형태가 아닐 수 없다. 도시에서의 삶이란 아무도 날 간섭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가 존재하지만 거울의 양면처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찾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이 할 수 없는 일은 너무나 많다. 죽은 이를 도로 살릴 수도 없고, 친구들 사이의 다툼을 말려주지도 못한다. 에이지를 치료하지도 못하며, 기후 변화의 속도를 늦추지도 못한다. 그렇기는 해도 예술은 아주 비상한 기능을 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중재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친밀성을 창조하는 능력이 분명 있다. 예술은 상처를 치유하면서도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p.369

 

호텔, 영화관, 집 등 도시의 장소와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바로 고독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한 명이거나 두세 명이 있어도 서로 소통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타인들과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어도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서로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 올리비아 랭은 뉴욕이라는 유리의 도시, 염탐하는 눈의 도시에서 끊임없이 호퍼의 그림들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단서를 발견하고 그 도시를 살아간 예술가들의 작품과 삶 속으로 빠져든다. 외로워지기 전에는 언제나 무시했던 앤디 워홀의 작품들에게 매혹 당하고, 평생 골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죽음 직전에야 세상에 알려진 아웃사이더 헨리 다거, 소외의 원천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깝게 담아낸 사진작가 낸 골딘, 고독한 피사체들을 담아온 사진작가 피터 후자 등등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부랑자로서 고립을 경험한 예술가들의 삶 속에서 자신이 모습을 발견해낸다. 

 

'예술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기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상처를 치유하고,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독은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것이다. 올리비아 랭은 말한다. 우리의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지옥에서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상실감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외로움과 고독이 구축한 다정한 세계로 향해간다.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은, 고독이라는 도시의 거주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었다. 올리비아 랭의 근사한 사유가 그려내는 도시의 풍경들과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서 고독하더라도 조금은 따뜻하게 일상을 보내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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