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대문을 열면
허은미 지음, 한지선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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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 파란 대문이 보인다. 그 파란 대문을 와락 열고 들어서서 "다녀왔습니다" 인사 후 다락방으로 쪼르르 올라간다.  좁은 다락방에서 동생과 함께 그림도 그리고, 장난감 놀이도 하고, 혼자서 책도 읽고, 작은 창문으로 동네 구경도 한다. 집집마다 널어놓은 빨래들, 뒤노는 아이들, 아랫집 친구가 마당에서 목욕하는 모습까지 다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파란 대문에 노란 종이가 붙는다. 큰길을 내고, 상가를 짓고, 아파트를 지어야 하니 집을 비우라는 통보였다. 그렇게 동네 친구들과도 작별하고, 뛰어 놀던 골목길과도 인사를 하고, 이사를 간다. 이제 파란 대문 우리 집은 어디로 갔을까? 




하얀색의 텅 빈 화면에 대충 연필로 쓱쓱 그려 넣은 듯한 심플한 계단, 그리고 신나서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 이미지가 산뜻하다. 하나, 둘, 셋, 넷,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 뭐가 나타날까?


마당이 있는 집에는 봄이 되면 나팔꽃을 심는다. 버려진 화분마다 꽃씨를 심고, 햇볕 잘 받으라고 파란 대문 앞에 내다 놓으면, 곳 파랗고 여린 싹이 얼굴을 내민다. 꽃들이 하나, 둘, 셋, 앞을 다투며 피어나면, 나팔꽃 덕분에 골목이 다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맛있는 음식을 하면 옆집에 한 접시 가져다 주고, 속속들이 가족의 사정도 다 알고, 아이들과 친구이면 부모들끼리도 알고 지내게 되는 풍경은 지금은 보기 힘든 모습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도시는 점점 더 삭막해진다. 




다락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잡동사니들, 마당 뒤쪽엔 장독대들이 놓여 있고, 빨래줄에는 빨래들이 널려 있으며, 한 켠에는 과일도 주렁주렁 열려 있다. 종을 울려 주는 커다란 벽시계, 다이얼을 돌리는 유선 전화기, 발을 굴려서 드르륵 박는 커다란 수동 재봉틀, 꽃무늬 커튼... 지금은 다 잊어 버렸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풍경들이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작가가 살던 서울의 한 동네의 풍경과 자전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의 많은 공감을 자아낼 것 같다. 


이 작품 속 아이처럼 대부분 태어나 자란 곳에서 어린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이제는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그때 그 시절을, 다시 한번 현재로 소환시켜준다. 




이 그림책은 7,80년대 서울의 동네 풍경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재개발로 인해 정든 집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아이의 시선으로 '집'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그려내는 작품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파트에서 살았던 터라 극중 아이처럼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것 같은 경험은 해보지 못했지만, 그 시절 살던 집과 현재 살고 있는 동네의 분위기는 꽤나 다르다. 이 책 속에 나오는 것처럼 동네 아이들과 해가 질 때까지 놀고, 뛰어 다니다 각자 엄마들이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해졌지만 그 시절 함께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내가 살던 집은 그대로 있을까? 그때 그 친구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정감 있는 드로잉과 하얀 페이지 곳곳을 물들이는 색감들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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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연극 킴 스톤 시리즈 4
앤절라 마슨즈 지음, 강동혁 옮김 / 품스토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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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이 관심을 가진 건 밥의 손이 사라졌다는 수수께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무도 평범한 사람을 위해 싸워 주지 않는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미제 사건은 주기적으로 재검토되었지만 밥이 잔의 맨 윗부분에 크림처럼 떠오를 가능성은 낮았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무도 수사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사건들이 언제나 우선순위에 오를 터였다. 밥은 '신원미상 남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검시관의 소유물로 남아 있을 것이다.          p.134


너무 애정하는 킴 스톤 시리즈 그 네 번째 작품이 나왔다. 올해 표지 디자인이 바뀌고, 제목도 원제에 맞게 달라져 1,2,3권이 재출간되었는데, 벌써 신작을 만날 수 있다니 부지런한 출판사의 열일에 박수를 보낸다. 사실 좋아하는 시리즈를 계속 번역본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늘 궁금했던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지 않아 원서를 구매하곤 했던 터라, 이렇게 신작이 나올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다. 부디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더 많은 이들이 킴 스톤의 매력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면 좋을 것 같다. 


앤절라 마슨즈의 <킴 스톤 시리즈>는 기존에 <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 <상처, 비디오, 싸이코 게임>이라고 번역되어 먼저 나왔었다.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시리즈의 통일성을 주변서 시작되는 시리즈에서는 제목이 원문에 가까운 <소리없는 비명>과 <악마의 게임>으로 바뀌었고, 이북으로만 나왔었던 3권 <사라진 소녀들>도 함께 출간되면서 본격적인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사실 영국에서는 시리즈가 무려 20권까지 출간이 된 아마존 베스트셀러로 19개국에 번역 출간되었고, 시리즈 통산 누적판매 부수가 1300만 권이나 된다. 이 시리즈는 독보적인 캐릭터의 힘과 탄탄한 플롯과 전개로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하는데 스릴러 장르를 좋아한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 등 다수의 작품을 번역한 강동혁 역자는 오직 이 시리즈를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를 차렸을 정도인데, 이 작품을 읽고 나면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첫번째 작품인 <소리 없는 비명>에서는 옛 보육원 부지의 유물 발굴사업을 배경으로 10년이 넘는 세월을 넘나드는 연쇄살인을 다루었다. 두 번째 작품 <악마의 게임>에서는 성범죄자의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타인의 심리를 조정하는 소시오패스가 등장해 흡입력있는 스릴을 선사했었다. 타인의 심리를 조종하는 소시오 패스라는 캐릭터가 킴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점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했던 작품인데, 이 두 사람의 대결 덕분에 킴의 끔찍한 어린 시절과 어두운 과거에 대해서 조금씩 더 깊이 있게 알게 된 작품이기도 했다. 세 번째 작품 <사라진 소녀들>에서는 희대의 납치극이 벌어졌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부모들의 절망과 공포를 통해 모성애와 부성애의 다양한 모습과 인간 본성의 어두운 밑바닥을 그리고 있어 더 묵직하고, 깊이 있는 시리즈 특유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부모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위탁가정을 전전해야 했던 킴의 과거와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아마 대니얼은 킴이 다시는 자신을 그토록 많이 내줄 수 없는 이유를 모를 것이다. 킴이 가진 모든 것을 일에 바치는 까닭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킴에게는 이것이 안전하게 지내는 방법이었다. 그 무엇도 킴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킴은 눈물을 닦고 종잇조각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후회는 없었다.

세상에는 킴이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p.333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죽음의 연극>에서는 킴 스톤과 팀원들이 '웨스털리 시체 농장'으로 향한다. 이곳은 법의인류학 및 그와 연관된 분야에 특화된 연구 시설로 시체의 부패 단계와 곤충에 대한 움직임을 연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킴은 연구 목적으로 기증되지 않은 새로운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옷을 완전히 갖춰 입은 여성이 뭉개진 얼굴을 한 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으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 속이 흙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여성에게 구타 당한 얼굴 외에 다른 상처는 없었다. 킴과 팀원들은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고, 이어서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된다. 범인은 왜 굳이 이곳에 시체를 유기하는 것일까. 그들은 사건을 수사하며 이번 살인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심하게 어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피해자들은 무작위로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범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과거 회상과 현재의 수사 과정이 교차 진행되며 '죽음의 연극'을 향해 점차 다가간다.




냉소적이고 매사에 뾰족하며, 사회성이 떨어지고, 예절 혹은 사교성을 전혀 갖추지 못했지만, 업무적으로 매우 유능한 킴 스톤이라는 캐릭터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정신 병원에 있는 엄마, 어린 시절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는 죽은 동생, 그리고 수차례 위탁가정을 전전해야 했던 기억 등 어두운 과거가 현재의 그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시리즈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수시로 드러나며 킴 스톤이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배경이 된다. 이번 신작 <죽음의 연극>은 특히나 시리즈 중에서도 높은 작품성으로 이탈리아에서 반카렐라 상을 수상했고, 영국의 CWA 대거상 후보에도 올랐던 작품이다. 


사교술이니 외교력 같은 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발명한 거라고 생각하는 킴이 시리즈를 거듭해 나가며 한 걸음씩 나아지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고, 어린 시절부터 정신병, 상실, 학대 등 잔인함의 온갖 형태를 경험하며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에 굴복 당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추진력으로 삼아 정의 구현을 위해 나서는 모습도 너무 멋지다. 무표정하게 툭툭 내뱉는 말투에서 묻어나는 깨알 같은 유머도, 요리를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매번 복잡한 메뉴에 도전하는 무모함(?)도 어쩐지 사랑스럽다. 겉보기에는 무례하고 퉁명스럽고 뻣뻣해 보일지 몰라도,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알면 알수록 더 매력적인 캐릭터 킴 스톤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독보적인 캐릭터의 힘과 탄탄한 플롯과 전개로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킴 스톤 시리즈! 아직까지 만나보지 않았다면, 이번 신작으로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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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카페 멋집 - 머물고 싶은 공간 훔치고 싶은 디테일
공상찻집 도라노코쿠 지음, 김슬기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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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라는 공간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한 이유만으로 가는 곳은 아닌 것 같다. 카페 투어가 하나의 취미에서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나 역시 워낙 커피와 디저트를 좋아하고 즐기기도 하지만, 친구와 만나 하루에 카페만 연속으로 두세 곳을 가본 적도 있고, 카페 투어를 위해서 하루에 커피를 서너 잔 마신 적도 있다. 물론 여행을 가도 현지의 맛과 멋을 살린 카페는 필수 코스이다.  워낙 카페가 많기 때문에 인테리어나 분위기, 디저트의 퀄리티와 커피의 맛, 고유한 감성과 멋까지 선택을 위해 필요한 요소도 많다. 이번에 만난 책은 카페 덕후들을 위해 탄생한 ‘도쿄 카페 버킷리스트'를 담고 있다. 




카페를 찾는 이유는 각자 다를 것이다.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혹은 약속 시간이 남아서 기다리기 위해, 혼자 휴식 시간을 가지기 위해, 또는 작은 기분 전환을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가서 방문하게 되는 현지의 카페는 어떨까.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아픈 다리를 쉬기 위해, 혹은 무선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해,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등등 이유는 다르더라도 꼭 한 두 번쯤은 카페를 이용하게 된다. 기왕이면 그 도시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에 가면 여행이 더욱 기억에 남지 않을까. 이 책은 도쿄의 곳곳에 있는 카페들을 통해 도쿄라는 도시를 특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말 종류가 많은 다양한 크림 소다 메뉴도 볼 수 있었고, 커피와 빵, 간단한 샐러드가 함께 나오는 아침 세트 메뉴를 만날 수 있는 카페들도 있다. 단단하고 진한, 직접 만든 푸딩도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네 가지 수제 잼을 곁들인 잼 세트 토스트도 궁금해졌다. 오무라이스나 카레, 스파게티 등의 식사 메뉴를 함께 할 수 있는 카페들도 많았는데, 여행을 가면 크림소다와 함께 꼭 먹곤 해서 반가웠다. 다음에 도쿄에 가게 되면 이 책에 수록된 카페들부터 찾아가 봐야 할 것 같다. 




카페 투어를 위해서라면 하루에 커피를 세 잔 이상 마실 수 있다. 친구와 만나 하루에 카페만 연속으로 두 곳 이상 가본 적이 있다. 새로운 카페를 찾아보는 데 30분 이상 써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찍기 좋은 카페도 있고, 시그니처 메뉴가 유명한 카페도 있고, 디저트가 정말 근사하게 플레이팅되어 나오는 카페도 있다. 이국적인 감성을 담고 있는 곳도 있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만으로 힐링을 안겨주는 곳도 있다. 카페를 간다는 것은 빡빡한 일상 속에서 누리는 나만의 작은 사치이자 소소한 행복이니 어디를 갈지 조금 더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이 책에는 마치 동화 속 세계에 들어온 듯한 편안한 비일상을 약속하는 동화 속 카페, 유럽 어느 나라를 여행하는 듯한 앤티크 카페, 달콤한 위로를 주는 아지트 같은 작은 카페, 유일무이한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찻집,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은 클래식 찻집, 책과 음악이 어우러진 레트로 카페 등 오랜 시간 현지인에게 사랑받은 찐 카페 멋집과 맛집 75곳이 수록되어 있다. 


19만 카페 전문 인플루언서인 '공상찻집 도라노코쿠'가 정성껏 엄선한 리스트라 여행자들에게, 그리고 카페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선물같은 책이 되어줄 것 같다. 카페에 관한 작은 에세이와 상세한 운영 정보, 커피와 곁들이면 환상적인 디저트 메뉴 추천, 그리고 저자가 정성껏 찍은 수백 컷의 ‘멋스럽고’, ‘맛스러운’ 사진들 덕분에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쿄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카페를 사랑하는 덕후라면 이 책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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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마음
임이랑 지음 / 허밍버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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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괴로운 것들이 너무 쉽게 좋은 것을 집어삼키고 평안을 지운다. 수없이 많은 밤을 쌓아 올린 평안도 순간의 불안 앞에선 불구덩이 안에 던져진 종잇조각처럼 순식간에 불타 사라진다. 정신이 망상과 싸우는 동안 몸이 백기를 흔들고 만다. '몸이 정신에게 지는 건 이렇게 초라한 마음이 되는 거구나'하며 슬퍼진다. 나약한 내가 강인하려는 나를 훼방 놓는다... 털어 버리고 싶다. 좋은 사람들의 눈빛만 남기고 쓸모없는 부스러기는 모두 사라져라.           p.42


식물을 가꾸고, 노래를 짓고, 글을 쓰는 사람, 디어클라우드 임이랑의 신작이다. <아무튼 식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불안이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리라> 모두 너무 잘 읽었고, 팟캐스트 식물수다의 오랜 팬이기도 해서 임이랑 작가의 신작은 언제나 설레이는 마음으로 챙겨보게 된다. 머리가 복잡한 날엔 자꾸만 식물의 세계로 도망치게 된다. 유해한 것들로 넘쳐 나는 세상 속에서, 식물만큼 무해한 존재가 또 있을까. 푸릇푸릇한 식물이 주는 그 에너지가 또 매일을 살아갈 힘을 준다. 임이랑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바로 '식물'때문이다. <아무튼, 식물>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는 지금도 가끔 펼쳐 보는 책이고, 팟캐스트 식물 수다를 통해서 정말 많이 배웠다. 그야말로 힐링이 되는 목소리와 글이라 위로가 필요할 때, 휴식이 필요할 때 항상 찾게 된다. 


이번 신간은 식물 이야기 대신, 개인적이고 내밀한 단상들을 담은 비밀 일기장 같은 느낌이다. 200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임이랑 작가가 지나 보낸 시간과 감정을 엮어 만들었다. 그녀는 2004년부터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개인 홈페이지 <감정공작소>에 솔직하게 기록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글들에는 뮤지션, 베이시스트, 작가, DJ, 식집사… 그녀의 다양한 직업 세계와 취향, 삶의 흔적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식물을 가꾸고, 노래를 짓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고민과 불안, 일상과 감정들이 담겨 있어 짧은 글들이지만, 그 무게와 깊이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임이랑 작가가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 식물들을 향해 쓴 글과 말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왔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 그 이면에 있는 많은 생각들과 배경을 알게 되어 더 공감되고, 더 친근해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요란하지 않게, 잔잔하게, 자극에서 가장 먼 방식으로 나를 입히고 먹이고 도닥인다. '그럭저럭 사는 시기가 너무 길어지지만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대로 괜찮겠지' 생각하며. 큰 소리로 엉엉 울고 싶은 내가 툭 튀어나와 그럭저럭 살아가는 나를 때려 눕히고 일상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곤란해지기 전가지는 그럭저럭 살아 내기로 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결국은 슬픔과 애통함을 건너 씩씩하게 살아갈 날이 다시 돌아올 테니까. 비슷하게 생긴 인생의 모퉁이를 이미 나는 몇 번이고 돌아 이 자리에 있다.             p.242~243


이 책에는 단정한 일상의 루틴, 생활을 리듬화하는 버릇, 물속에서 느끼는 고요한 감각, 18년 차에 접어드는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살아가는 이유, 생각을 멈추는 연습, 일과 쉼의 밸런스, 어른으로 산다는 것의 고단함, 뮤지션과 작가로서 갖는 고민과 불안감 등 200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임이랑 작가가 지나 보낸 시간과 감정들이 촘촘하게 엮여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놓치고 있던 것들을 세심하게 붙잡아 반짝반짝 빛나게 보여주는 글들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가드너로 사느라 분주하고, 해가 지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일을 하는 임이랑 작가의 일상이 궁금했다면, 이 책이 더 재미있게 느껴질 것 같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순간의 결정들이 모여 행동의 패턴을 만들어 가고, 그 새로운 패턴이 나를 조금씩 달라지게 만든다. 그러니 변화한 모습이란 각자의 책임이라는 거다. 내가 먹는 음식과 자세, 듣는 음악과 걷는 시간, 읽는 책과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니 말이다. 좋은 결정을 내릴 줄 아는 사람들이 더 멀리까지 가게 된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그런데 그 '좋은' 결정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 걸까. 시라는 형식을 제외하고는 짧은 글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임이랑 작가의 글들은 툭툭 던져놓은 단어에도, 단상 같은 글에도 생각할 거리가 담겨 있어 좋았다. 짧아서 술술 페이지가 넘어 가지만, 밑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이고, 생각날 때마다 다시 펼쳐보고 싶은 그런 글들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때는 '지금이 아닌 순간을 갈망하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던 시기'가 있다. 하지만 결국은 지금에 만족하고 여기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그렇게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야 나만의 방식으로, 오롯하게 나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뒤척이는 어느 날 밤,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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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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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아지른 듯한 산을 배경으로 목가적인 언덕이 있는 잔잔하고 평온한 곳이었다. 호수는 그림엽서에 나오는 물빛처럼 푸르렀지만, 수면 아래의 물은 유럽 구석구석의 모든 불행이 이런저런 행로를 거쳐 마침내 거기로 모여든 것처럼 약간 불길해 보였다. 회복해야 할 고달픔이 있고 죽어야 할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학교도 있었다. 양지바른 호숫가에서는 젊은이들이 물을 튀기며 놀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 보니바르의 지하 감옥이 있고, 칼뱅의 거리가 있었다. 밤이 되면 바이런과 셸리의 유령이 여전히 어슴푸레한 물가를 떠돌아다녔다.

             - '이국의 여행자' 중에서, p.54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성공으로 소설가로서 절정인 시기를 화려하게 누리지만,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과 알코올 의존증 아내의 신경쇠약 등으로 고통받는 말년을 보낸다. 이 책은 그렇게 피츠제럴드가 작가 활동 후기에 발표했던 단편소설 8편과 에세이 5편을 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고르고 옮긴 이 작품들은 피츠제럴드가 말 그대로 자기 몸을 축내며 살았던 암울한 시대에 내놓은 것들이다. 


<이국의 여행자>에는 미국을 떠나 1920년대 유럽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유복한 젊은 부부가 등장한다. 이들의 모델은 물론 스콧과 젤다인데, 이들이 이국의 땅에서 겪는 일들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어딘지 불온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인생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뭔가가 손상되었고(p.24)'라는 문장에서도 보여지듯이 정말 행복했던 시간 뒤에 찾아오는 것들을 보여준다.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에서 그리는 부부 사이의 위기는 실제로 피츠제럴드 부부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할리우드에서 일할 때 경험한 몇 가지 사건을 소재로 <크레이지 선데이>가 쓰였다. <어느 작가의 오후>는 피츠제럴드가 거액의 빚을 지고, 젤다가 신경쇠약에 걸려 입원 중이던 시기에 쓰였다. 글은 생각처럼 써지지 않고 몸도 좋지 않았던 당시의 어두운 일상을 피츠제럴드는 '사소설' 형태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빚에 떠밀려 정신없이 사는 자신의 생활과 긴박한 상황을 픽션이라는 형태로 희화화해 <피네건의 빛>과 <잃어버린 10년>을 쓰기도 했다. 





갑자기 나는 홀로 외로이 있어야 한다는 강한 본능을 느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평생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나는 평균적인 사교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나 자신을, 나의 생각을, 나의 운명을 내가 접촉하게 된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관련짓고 싶어 하는 경향은 평균 이상이었다. 나는 항상 남을 구원하거나 남에게서 구원을 받았다. 하루의 아침나절 동안에만도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공작이 느꼈을 법한 여러 다양한 감정들을 겪곤 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적대감을 품은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 힘든 친구와 후원자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 '망가지다'중에서, p.307~308


소설도 자전적인 부분을 바탕으로 쓰였지만, 에세이는 더욱 솔직해 진다.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에세이에 대해 '그는 머리가 아니라 펜 끝으로 깊이 생각하는 듯하다. 문장의 설득력은 아마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리라'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피츠제럴드는 <나의 잃어버린 도시'에서 뉴욕이라는 하나의 도시를 중심으로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망가진 3부작'에서도 깨달음의 순간들을 담았다. '망가진 3부작'은 <망가지다>, <붙여놓다>, <취급주의> 세 작품으로 <에스콰이어>에 매달 연속으로 게재되었던 에세이이다. 하루키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해 예전부터 수없이 읽고 또 읽었던 에세이라고 한다. 특히나 해설에서 헤밍웨이에게 '여성스럽다'라고 비난받은 이 에세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여기에 숨은 단단함을 부디 맛보라고 했을 정도이니, 그 애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오랜 팬을 자처하는 하루키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피츠제럴드의 후기 단편들을 직접 발굴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속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기만을 능가하는 힘, 어떻게든 희망을 움켜쥐려는 의지와 작가로서의 강인한 본능을 읽어 냈고, 그로 인해 작가에게 더 깊은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있다) 각각의 작품에는 하루키가 직접 작품의 배경과 해설을 썼다. 피츠제럴드는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일을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해 부풀려 쓰는 타입의 작가라, 이 책에 수록된 소설과 에세이들은 모두 자전적인 부분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츠제럴드는 장편소설 <라스트 타이쿤>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겨우 마흔네 살의 나이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칠십 대 중반을 맞이한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말년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과 지금을 동시에 떠올린다. 하루키의 애정이 가득 담긴, 피츠제럴드의 아름다운 작품 선집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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