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허밍버드 클래식 M 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윤도중 옮김 / 허밍버드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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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큰 감명을 받는지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종종 이야기를 하다가 중요하지 않은 세세한 부분은 내가 지어내기도 하는데, 같은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때 그것을 잊어버리고 빼먹으면 아이들이 즉각 먼젓번에는 달랐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제는 이야기에 멜로디를 붙여 틀리지 않고 실타래에서 실을 뽑아내듯 줄줄 암송하려고 연습한다. 이 일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작가가 원래 이야기를 고쳐서 개정판을 낼 경우 개정판이 설령 문학적으로 제아무리 개선되었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원작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다.    p.89

 

감수성 풍부한 청년 베르테르는 도시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발하임이라는 마을에 갔다가 한 여인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그녀의 이름은 로테로, 이미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트르는 이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히고 만다. '그토록 총명하면서도 그토록 소박하고, 그토록 심지가 굳으면서도 그렇게도 너그럽고, 참된 삶을 살고 활동하면서도 영혼의 평온을 유지한다'고 그녀에 대해 표현하며 천사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야기 전체가 서간체 형식으로 베르테르가 절친한 벗에게 편지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있어, 실제로 로테가 어떤 여인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상대가 단 한 번 바라봐 주는 눈길을 간절히 원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이렇게 이미 다른 짝이 있는 상대를 홀로 사랑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 간절함이란 더할 나위 없이 목마를 것이다. 그러한 열망은 로테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고 자신하며 점점 그녀를 향한 감정을 키우도록 만든다.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인간을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로테 역시 자신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인다고 생각하는 베르테르에게 절망과 고통, 불행의 감정들이 휘몰아치듯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그토록 찬란한 사랑의 감정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강행하게 된다.

 

 

 

베르테르가 그 불행한 사람을 구하려는 헛된 시도는 꺼져 가는 불꽃이 마지막으로 반짝 타오른 것과 같았다. 그는 더욱더 깊이 고통과 무기력 상태로 빠져들기만 했다. 게다가 이제 범행을 부인하고 나서는 그 사람의 반대 증인으로 어쩌면 자기를 소환할지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기이한 감정, 사고방식, 끝없는 열정에 온몸을 맡기고 그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서글프고 단조로운 교제를 일방적으로 끝없이 이어 가면서 그녀의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며 목표도 가망도 없이 기력을 소모하면서 점점 더 슬픈 종말에 다가갔다.     p.180~181

 

주요 뮤지컬과 오페라에 바탕이 된 서양 고전 문학들을 엄선한 <허밍버드 클래식 M>시리즈 중에서 먼저 만나본 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이 작품은 여러 판본으로 꽤 여러 번 읽어 보았고, 뮤지컬로 만들어진 작품도 오래 전에 보았던 기억이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스물 다섯 살의 청년 괴테가 7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폭풍처럼 써 내려간 작품이다. 이미 약혼자가 있던 여인을 사랑한 자신의 경험과 남편이 있는 부인을 사랑하다가 자살한 친구의 이야기를 토대로 쓰였다. 1774년 출간 당시 젊은 세대에게 큰 공감을 얻어,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가 입었던 옷이 인기를 끌고, 베르테르를 모방해 자살 신드롬까지 생겨났다.

 

사실 너무 유명한 작품이고,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장르로 아직도 변주되고 있는 작품이라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조차도 내용과 배경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괴테의 시적인 문장들은 원작을 통해 직접 만나는 것과 내용만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고전치고는 가벼운 분량에다, 딱딱하고 어려운 내용도 없고 진입장벽도 없다. 게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해서 기어코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되는 한 젊은이의 상심은 가볍게 연애하고, 쉽게 이별하는 요즘의 사랑법과는 다르게 너무도 우아하고, 순수하게 느껴진다. 뮤지컬 베르테르를 좋아한다면, 이번 기회에 고전 원작의 매력에 빠져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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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허밍버드 클래식 M 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한에스더 옮김 / 허밍버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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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야 상관없겠죠. 남자의 이름은 하이드였습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 사람이었나?"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이상하고 쳐다보기만 해도 불쾌하고 역겨웠습니다. 그렇게 혐오스러운 인상은 처음인데 이유를 정확히 알 수도 없고, 어딘지 모르게 기형이라는 느낌도 강하게 들었습니다. 아주 특이하게 생겼지만 어디가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질 못하겠어요. 그렇다고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하거든요."       p.17

 

사람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거리, 키가 작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열 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가 힘껏 달려 길을 건너오다 그 남자와 부딪히고 만다. 그런데, 남자가 넘어진 아이를 태연하게 짓밟다가 그냥 가버리는 게 아닌가. 아이는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 장면을 목격한 남자가 달려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 현장으로 데려왔지만, 그는 태연하고도 냉혹한 모습으로 그를 쳐다본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아이의 가족에게 줄 위로금을 요구했고, 그는 수표를 꺼낸다. 그런데 수표에 서명되어 있는 이름은 신문에도 자주 나올 정도로 유명한, 훌륭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나 현명하고 선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아온 지킬 박사. 그에겐 남들이 모르는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쾌락에 쉽게 빠진다는 거였다. 그는 스스로 세운 높은 이상에 갇혀 병적인 수치심으로 욕구를 숨겨 왔지만,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인 선과 악을 가르는 실험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하이드를 발견한다. 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지킬 박사와 괴물 같은 외모로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하이드가 동일 인물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드는 지킬 박사가 가지고 있었던 제2의 자아임에는 분명하다. 결국 하이드의 힘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마침내 지킬의 영혼을 잠식하게 되는데...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이중성을 발견한 것도 도덕적인 나였지. 하지만 두 가지 본성 중 어느 한쪽만이 진정한 나라고 인정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그 둘 모두가 진정한 나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네. 의학적 발견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기대에 차 있었지. 내 안에 존재하는 두 자아를 분리하게 될 기적이 가능하리라 믿으면서 기뻐도 했고. 두 개의 나를 두 개의 전혀 다른 자아에 가둘 수만 있다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나 자신을 설득했네. 사악한 나는 정직한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잊고 자유로이 살 테고, 정직한 나는 기꺼이 선행을 베풀며 정상을 향해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나.    p.102~103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지만, 이 작품 역시 원작보다는 다른 매체를 통해 먼저 만나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영화와 뮤지컬, 연극, 오페라 등을 통해 수없이 변주되어 온 작품이니 말이다. 누구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외에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두 인격은 다소 극단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대비를 보여주기에 이만큼 매력적인 선택도 없었을 것이다. 타락을 향한 욕망으로 터질 듯한 내면을 철저히 억누른 채 겉으로는 점잖은 척 교양과 아량을 두른 지킬의 이중적 면모를 분열된 두 인격 간의 갈등으로 그려낸 이 탁월한 작품은 분량이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많은 여운을 남겨 준다.

 

선과 악의 경계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불분명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공권력이 항상 선한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고, 폭력, 범죄 집단에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란 것이 있고, 아무리 선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악한 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악한 부분을 죽을 때까지 내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짓는 다는 것이 어쩌면 애초에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모두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사소한 욕망이나, 나약한 이기심에 굴복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고,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이 인간이라 하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어 조금은 물들게 되는 순간도 올 수밖에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선과 악이 너무도 자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물론 그것이 한 사람의 내면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이 오랜 시간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싹한 고딕 추리소설이자 뛰어난 심리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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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평온을 아껴주세요 - 마인드풀tv 정민 마음챙김 안내서
정민 지음 / 비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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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힘든 현대사회예요. 그저 쉬는 것조차 우리에게는 마음의 부담입니다. 자유를 원하다가도 막상 자유가 주어지면 불안해하지요. 출퇴근길은 숨이 막히고, 인간관계는 머리가 아프고, 돈은 내 마음의 평온을 쥐고 흔듭니다. 이 모든 것을 멈추고 원래 내 안에 자리한 고요함을 찾음으로써 삶의 균형을 잡는 것이 명상입니다. 명상을 습관화하고 나면 마법 같은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p.21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따로 시간을 내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여유를 가지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 명상 비슷한 거라도 경험해 본 것은 오래 전 요가를 하러 다닐 때가 전부다. 조용한 음악과 강사의 나직한 가이드에 따라 몇 분 동안 가지는 그 시간이 요가를 하는 시간보다 항상 더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요가를 그만두고 나서는 굳이 집에서 명상을 해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 같다.

 

유튜브 채널 '마인드풀tv'로 11만 구독자의 아침을 여는 명상 멘토 정민의 첫 책은 그런 의미에서 궁금했다. 명상을 일상 속에서 습관처럼 해볼 수 있다면, 굳이 거창한 테크닉이나 어딘가 다른 장소에 가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저자는 명상이라는 것이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것이 아니고, 수염이 덥수룩한 도인들이 하는 것이 아닌, 매일 하는 세수와 양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마음을 또 하나의 근육으로 본다면 마음이 하는 운동'이라 여겨도 좋다는 부분이 와 닿았다. 이 책에는 명상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방법까지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평소 명상에 대해 궁금했다면, 해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면 이 책이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줄 것 같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보다 고요합니다. 자극적이지 않고 단순하죠. 그래서 우리의 에고는 항상 더 자극적인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을 살 수 있지만, 과거나 미래에 젖기로 선택하고 지금을 망각합니다. 현재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명상이 깊어지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수월해지면 완전히 비워지는 나를 경험할 수 있어요.      p.204~205

 

아침을 여는 명상, 저녁에 하는 마음 목욕 명상, 통증을 완화하는 셀프 힐링 명상 등 다양한 목적에 따른 명상들이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뿐만 아니라 예비 엄마를 위한 명상, 나를 안아주는 자기사랑 명상, 과거의 상처를 돌보고,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하고, 불안을 해소하는 명상과 팬데믹 시대를 위한 명상 가이드까지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명상을 실천하는 방법과 그 효과들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어, 누구라도 이 책 한 권이면 명상의 세계에 입문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든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명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하는 마법'을 보여준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평온하게 하루를 열고 일상을 유지하게 만드는 습관이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줄 것 같다.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가 명상 멘토로 활동하며 접한 다양한 질문들을 수록하고 있다. 마음공부를 하는데도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아요, 부정적인 생각의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나요? 질투와 열등감 때문에 괴롭습니다, 명상을 하면서 오히려 더 괴로워졌어요.. 등등 명상을 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봤을 만한 고민부터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들까지 망라하고 있어 도움이 될만한 부분들이 많았다. 명상으로 비워내고 편안해지는 방법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오늘도 흔들림 없이, 더 마인드풀하게, 우리 명상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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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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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사전에는 문자로 된 출처가 없는 단어들을 포함할 여력이 없단다. 어떤 단어든 글로 쓰인 적이 있어야 해. 그리고 그 출처라는 것이 대체로 남자들이 쓴 책들일 거라는 너의 가정은 옳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야. 당연히 비주류에 속하는 말들이긴 해도, 많은 인용문들이 여성에 의해 쓰였단다. 어떤 단어들의 출처가 기술 매뉴얼이나 전단지를 뛰어넘는 그럴싸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너는 놀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약병에 붙은 라벨에서 찾아낸 단어를 최소한 하나는 알고 있고 말이야.     p.159~160

 

엄마 없이 아빠와 단 둘이 사는 어린 에즈미는 아빠와 단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좋아 했다. 에즈미는 우편물을 뜯어보는 아빠의 무릎에 앉아 단어들의 소리를 듣고, 단어를 분류하는 방법을 배우곤 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집자인 아빠와 함께 사전이 만들어지는 편집실에서 매일을 보내던 에즈미는 어느 날 단어 쪽지를 하나 줍게 된다. 영어로 된 모든 단어가 엽서 크기의 종이쪽지에 하나씩 적혀 있었고,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쪽지들은 수백 개의 분류함 칸에 보관되었다. 삽과 갈퀴 대신에 단어들을 보관하는 창고인 스크립토리엄은 마법의 장소였다. 어느 자리에나 책 더미가 쌓여 있었고, 모든 칸에 쪽지들이 꽉 들어차 있는 분류함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졌다. 어린 에즈미에게 그곳은 '존재한 적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에즈미는 우연히 주운 단어 쪽지 하나를 시작으로 조금씩 사람들이 '잃어버린' 단어들을 모으게 된다. 그렇게 ‘거절당한/거절당할 법한’ 여성들의 단어들을 하나 둘 모아 자신만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낡은 트렁크 안에 꾸린다. 사전의 엄숙한 권위에서 밀려난 말들, 사전을 만드는 남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단어들이 그 속에 쌓여가고, 에즈미는 그 단어들이 주로 여성들의 언어라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된다. 단어들은 어떤 세계를 설명해주고, 누군가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준다. 하지만 모든 단어들이 사전에 수록될 수는 없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성장하는 에즈미는 공식적인 세계 이면에 있는 다양한 언어들과 여성들의 세계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단어에는 끝이라는 게 없다. 그 의미에도, 그것들이 사용되는 방식에도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단어들의 역사는 너무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현대의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원본의 메아리, 혹은 왜곡된 버전을 듣고 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종종 그 반대로 생각하곤 했다. 기이하게 생긴 옛 단어들은 그것들이 결국 취하게 될 형태의 서투른 초안이었을 거라고 말이다. 우리 시대, 우리의 혀 위에서 빚어지는 단어들이야말로 진실하고 완결된 것이라고.     p.295

 

꽤 오랫동안 문장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책을 읽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만나면 적어 두는 노트였다. 원하는 책을 모두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에 책을 빌려 보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책을 반납하거나 돌려 주어야 했고, 그러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니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내 안에 담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섬세한 어휘들과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문장들을 수집했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근사한 작품을 만났다.

 

매 페이지마다 문장과 글과 말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이 작품은 실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 역사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다. 주인공 에즈미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실존 인물이며, 완간까지 70여 년이 걸린 초유의 프로젝트였던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만드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무엇보다 '어떤 단어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 그래서 모든 단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 너무도 뭉클하고 설레이는 그런 작품이었다. 단어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변화하고, 말해질 필요가 있는 것에 맞춰 확대대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그러니 단어들은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하다면, 역사 속에서 누락된 여성들의 언어를 만나 보고 싶다면, 잃어버린 이야기를 되찾고, 삭제된 세계를 복원하는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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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사이드 하우스
찰리 돈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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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전 하나로 형을 죽였다. 간단하고도 가볍게, 그리고 완벽히 그럴듯하게. 그 일은 선로에서 일어났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알게 되겠지만,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차는 여러모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 눈에 오직 색의 잔상만이 남는다는 점에서는 위풍당당하다. 곧 지진이라도 닥칠 듯이 땅을 뒤흔든다는 점에서는 강렬하다. 하늘에서 뇌우라도 쏟아지는 듯 선로를 훑고 지나가는 소리는 귀를 먹먹하게 한다. 달리는 기차는 이 모든 것을 전부 갖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달리는 기차는 치명적이다.       p.9

 

인디애나 북동쪽, 미시간 호수 근처에 있는 페퍼밀드에는 엘리트 기숙학교인 웨스트몬트 사립고등학교가 있었다.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학업으로 정평이 난 곳으로 사립고 순위에서 자주 상위를 차지했으며, 4년제 대학 진학률 백 퍼센트를 자랑했다. 위풍당당한 모습의 유서 깊은 건물을 보며, 부모들은 이런 곳이라면 외부 세계의 위험에서 안전할 거라는 믿음으로 아이들을 보냈을 것이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삶을 바로잡고 단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데 교내에 버려진 교사 사택에서 학생 두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 3일 후 경찰은 범인을 찾아냈지만, 그 화학교사는 사택 옆을 지나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한다. 겨우 살아남았지만 뇌손상을 입어 정신병원에 갇힌다.

 

그 후 일년, 그날 밤 생존한 학생 세 명이 다시 사택으로 돌아가 교사가 자살 시도한 자리에서 똑같이 기차에 뛰어드는 일이 벌어진다. 대체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살인사건에서 살아남았음에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화물열차에 뛰어들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가. 이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것은 놀랍게도 한 팟캐스트 방송이다. 사건의 의문점을 파헤치는 자극적인 팟캐스트 <수어사이드 하우스>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순식간에 화제가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전직 FBI 프로파일러이자 현재는 법정 심리학자인 레인 필립스와 미해결 사건 수사에 독보적인 능력을 가진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가 등장한다. 구교사 사택이 ‘자살의 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와 이미 범인까지 밝혀지고 끝난 살인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계속 현장으로 돌아가 자살하게 되는 이유만으로도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바빠지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일 년 전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방송사 유명 진행자와 신문사 기자, 법정 심리학자와 범죄 재구성 전문가라는 다소 낯선 설정때문에 더 흥미진진한 작품이기도 했다.

 

 

 

예쁘고, 어리고, 아무 잘못 없는, 자신 앞에 놓인 기나긴 생을 채 살지 못하고 간 소녀. 사진을 본 순간 로리는 마음이 끌리는 걸 느꼈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파헤칠 때마다 느끼는 거였다. 마치 브리짓이 삶과 죽음의 깊은 틈 사이로 갈고리를 던져 로리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만 같았다... 로리는 죽은 자의 영혼이 고이 잠들었다고 확신할 때까지 그들에 대한 아주 작은 것도 잊을 수 없었다. 이런 무방비 상태는 그녀를 늘 막막하게 했다. 그녀가 그토록 까다롭게 사건을 고른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희생자들과의 관계에서 그녀는 큰 부담과 동시에 막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p.247

 

개인적으로 범죄, 스릴러 소설은 플롯이 복잡할 수록 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잠시 내려놓은 순간에도, 머리를 놔주지 않는 책을 쓰려고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 작품 역시 탄탄한 플롯과 매력적인 캐릭터 덕분에 굉장히 몰입도가 뛰어난 이야기였다. 특히나 로리 무어라는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는데, 골동품 도자기 인형을 수집하고 복원 작업을 하는 것이 취미라는 점도 이색적이었고, 자폐증에 가까울 정도로 강박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지능을 활용해 범죄 수사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범죄 재구성 전문가'라는 직업도 독특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보고도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그녀의 능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부분이 잘 표현되어 있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 찰리 돈리는 2018년에 데뷔한 뒤로 3년간 총 5권의 책을 내놓는 엄청난 속도로 호평을 받아 왔다고 한다. 그는 “독자를 속이지 않는다”는 서스펜스의 원칙을 지키면서 휘몰아치는 사건을 속도감 있게 내놓는 작가로 평가 받고 있는데, 첫 페이지부터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해준다. 특히나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작가가 쓴 스릴러 소설들이 모두 독자적인 작품이지만, 이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후의 소설에 간간히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전작들과 캐릭터들을 자연스럽게 소개하고 있어, 가능하면 그의 전작들도 모두 챙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리 돈리의 다른 작품들도 어서 빨리 국내에 소개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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