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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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오브 로마〉 3부, 《포르투나의 선택》은 젊은 폼페이우스를 깨우는 등불로부터 시작된다. 촌놈, 사팔뜨기 도살자 스트라보의 아들인 젊은 폼페이우스는 다소 경박하지만 순수한 열망을 지닌 인물이다. 스스로를 위대한 마그누스라고 부르는 그는 전작에서 아버지를 가슴 깊이 존경하지만 부족한 지략을 가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키케로에게 보여준 의리(안타깝게도 3부 1권에서 키케로는 이름으로만 등장한다)를 통해 다가올 활약을 예상할 수 있었다. ‘로마의 일인자’가 시작되는 기원전 110년 기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1세대로 한다면 3부는 2세대가 장년층을 이루며 3세대들을 본격적으로 등장시킨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깊은 병을 얻어 예전 같지 않다.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신 포도주는 그를 주정뱅이로, 참지 못해 긁은 피부는 얼룩덜룩하며 자제하지 못해 찌운 살이 병마로 인해 내리면서 급격하게 늙어버렸다. 가지런한 치아는 물론이고 탐스럽던 머리칼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콜린 매컬로가 그린 장년의 술라는 예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늙은이 그 자체다. 그럼에도 그가 지닌 특유의 야수성을 담은 눈빛은 여전하다. 집정관 카르보를 비롯하여 로마에 남은 이들은 그의 귀환을 두려워하며, 라티움의 삼니움 족을 비롯하여 여러 세력들이 그를 저지하기 위해 뭉친다. 젊은 폼페이우스는 아버지의 피호민들, 퇴역군인들을 모아 술라 세력에 가담한다.

술라의 사위 마메르쿠스, 새끼 똥돼지 메텔루스 피우스, 루쿨루스 등은 여전히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 젊은 폼페이우스는 치기어림을 감추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술라의 흥미를 끈다. 술라와 함께 게르만족 행세를 했던 세르토리우스. 그는 마리우스를 배신한 술라를 용서하지 않았으나 그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무능한 지휘관을 등진다. 로마에서는 마리우스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이들을 동원하여 마리우스 2세를 집정관으로 선출한다. 아우렐리아는 그를 말리며 술라를 꿰뚫어보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모든 것은 술라에게 있어 하나의 연극이니, 네가 집정관이 된다면 하나의 징조가 되고 그로 인해 술라가 만들어낼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어리석은 마리우스 2세는 자신의 능력을 적시하지 못하고 로마에 남은 의원들은 물론 자신도 죽게 만든다. 이는 술라에 반대하는 세력의 몰락을 가져왔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고귀하게 태어났으나 고귀함을 유지할 그 무엇도 소유하지 못했던 그는 58년만에 로마의 주인이 되었다. 값싼 가발, 초라한 발걸음. 홀로 걷는 술라를 조롱했던 로마는 곧 그가 가진 권력, 로마의 독재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술라가 통치하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아름다웠던 도시, 숙녀 로마를 이 꼴로 만든 이들을 용서치 않겠다. 술라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젊은 폼페이우스는 말한다. ‘존엄’. 코르넬리우스 일족으로서, 파트리키로서 술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말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예언을 저지하기 위해, 신관의 아펙스로 묶어버린 운명의 아이 카이사르. 수부라와 에스퀼리누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매혹적인 아이. 마리우스의 족쇄 부르군두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유피테르 대신관이지만 동시에 데쿠미우스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그 인물을 자유롭게 한 것은 놀랍게도 술라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어린 카이사르를 억압했기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를 자유롭게 한 것이다. 이제 그는 쇠붙이를 몸에 대면 안 되는 제약에서 벗어나, 쇠붙이가 몸에서 떨어지면 안 되는 전장으로 향한다. 술라는 아이에게서 마리우스를 느끼노라 하지만, 자신의 야수성을 발견한다.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선택한 진정한 펠릭스는 누가 될 것인가. 다가올 로마의 마지막 황금기를 더욱 기대한다.

-잔혹한 세르빌리아(리비아 드루사의 딸), 루키우스 무틸루스의 아내 바스티아, 애정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달마티카, 술라를 제대로 판단하는 아우렐리아의 출연은 반갑고도 즐거운 장면들이었다.

-아우렐리아가 연기하는 연극은 무언가를 이룩하면 술라가 느끼고 하는 허전함을 채워주는데, 초반에 등장했던 메트로비오스가 상징하는 술라의 욕망, 그들이 벌였던 향락을 연상하게 하는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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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8-1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부의 1권이군요~~~
제가.... 1권 2부를 읽을때만 해도 꽃같던 술라가 주정뱅이에... 급격히 늙어버렸다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부지런한 에이바님 덕분에 저는 포르투나 1권의 내용을 읽고 갑니다.
더운 여름인데ㅠㅠ 건강 조심하시구요^^

에이바 2016-08-12 10:20   좋아요 0 | URL
저도 완전 충격이었어요 ㅠㅠ 살아있는 조각, 로마 최고 공인된 미남 술라가 아니었던가요... 역시 자외선은 노화의 적입니당 ㅋㅋㅋㅋ 단발머리님도 여름 나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올 여름은 너무 하네요...
 


이 책의 3장, ‘무대에 올린 셰익스피어’에서는 『오셀로』와 『뜻대로 하세요』를 통해 인종, 젠더와 성별 문제를 탐구한다. 영화 『폭풍우』에서는 종래 비평적 관심사였던 식민주의가 아닌, 감독들이 창조자로서 비전을 실현하는 방식을 들여다본다. 2부에서는 코미디, 사극, 비극, 로맨스라는 장르적 분류를 통해 극을 분석하는 비평들을 소개한다. 매커보이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그 시대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문서, 시대적 산물로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많은 이야기에서, 여성에게 강조되는 미덕은 침묵과 인내의 복종이다. 초서의 그리젤다는 미덕을 시험당하며 남편이 주는 모욕과 고통을 온순하게 받아들인다. 로마 전설과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루크레티아는 강간을 당하였으나 가족의 명예를 위해 남편과 아버지 앞에 자결한다. 이런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의 권력은 물리적 힘에 기인한다. 군사적, 법적 권력은 온전히 남성의 손에 있었다. 여성에게는 이에 맞설 수단이 없었으나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었다. 즉 여성의 말하기는 요구와 소망을 드러낼 유일한 방식이다. 

그렇기에 가부장제 아래서 여성의 말하기는 통제될 필요가 있었고, 통제되지 않은 여성들의 말은 잔소리와 불평으로 여겨진다. 남성들은 여성의 본성을 무절제하다고 여겼고, 성적으로 난잡한 것과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았다. 이는 여성의 성이 그들에게 강력한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정절을 확신할 수 없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자녀를 의심하게 되고 이는 적장자 상속 체계를 저해할 수 있다. 따라서 남성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핵심적 부위인 여성의 입과 질은 반드시 억제되어야 했다. (『겨울 이야기』의 레온테스는 아내가 임신한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란 의심한다.)

이념Ideology이 아무리 강력하고 지배적일지라도 그것은 규칙이 아니며, 모든 계층이나 사람들에 걸쳐 적용되는 엄격한 사고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이념은 사회의 통상적 행동을 보여주는 ‘규범’의 신화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만약 가부장제가 강력했다면- 잔소리꾼, 극 중에서 권력과 권위를 가진 강력한 여성 파울리나가 등장하는 『겨울 이야기』가 대중 앞에서 공연될 수 있었을까?

『폭풍우』에서 식민지를 건설할 땅과 여성의 신체가 연계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태도, 여성의 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리처드 윌슨의 주장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후기 극에서 남성은 여성에 의해 주관되어 왔던 수태, 임신, 출산을 통제하고자 한다. 이러한 지배는 신비스럽지만 필수적인 ‘타자’인 여성에 대한 욕망과 두려움에 바탕한다. 이 지배는 당시 사회에 작동하던 계급, 문화, 인종에 의한 지배의 견본- 불안정한 지배였다.

복수를 정당화하는 셰익스피어의 일부 대사들은 태생, 인종, 성별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일반적인 육체적 특성을 지녔으며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한 행위도 정당화한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샤일록은 자신이 기독교인과 다를 것이 없으며, 그들과 똑같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한다. 『리어 왕』에서 에드먼드는 서출인 자신의 인성과 적장자인 에드가의 인성에 별반 차이가 없으며, 자신 역시 아버지의 상속 재산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오셀로』의 에밀리아는 샤일록과 에드먼드처럼 인간의 공통된 신체 특징을 내세워, 여성도 결혼에서 평등한 욕구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혼은 동등한 두 사람의 계약이며 계약의 위반에는 제재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에밀리아는 남편의 부정은 ‘오락’으로 여겨지나 아내의 부정은 죽어 마땅하다 여겨지는 근본적인 불공평을 지적한다. 이는 작품의 핵심이고 오셀로의 사고방식이다. 키어난 라이언은 에밀리아의 이 대사가 놀라운 추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가정에서 남자가 여자를 소유하고 지배한다는 사고방식에 따르면, 데스데모나가 실제로 카시오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오셀로의 아내 살해가 정당하다는 것이다.

데스데모나는 부정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고 정말로 외도하는 아내들이 있느냐 묻는다. 이에 에밀리아는 외도하는 남편을 둔 아내들의 복수를 정당화하며 여성의 평등과 관리를 주장한다. 이러한 인물의 등장은 셰익스피어가 ‘당시에는 급진적이던 생각’에 동조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복수는 사회의 부당한 서열에 정의와 평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극에 대한 배경 설명과 세대별로 달라지는 비평은 좀 더 깊이 작품을 읽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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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깊이 읽기
션 매커보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작은사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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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문화를 조금이라도 공부할라치면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바로 400년 전의 사람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왜 셰익스피어인가? 이 물음에 션 매커보이는 이렇게 답한다.


셰익스피어는 영국문학, 나아가 영어권 문화의 중심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영국의 문학과 사회를 이해하려 한다면 그의 희곡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해는 그의 희곡들과 그 속의 언어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며, 영어권 문화에 해당하는 전반적인 사상, 가치, 이야기 등을 아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이런 사상과 이야기를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탁월한 그릇이다. (17)


셰익스피어는 근대 세계의 권력 및 권위 구조가 형성되던 시기에 글을 썼다. 그의 작품이 당시 사회의 가치를 담고 있음에도 여전히 현대적 관심사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은 ‘그 희곡이 동화와 전통적 이야기의 여러 요소들을 채택하여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오래되고 매력적인 이야기의 효과를 심화하기 때문이다.(캐서린 벨시)’ 그 가치를 안다 해도 희곡 읽기는 쉽지 않다. 매커보이의 『셰익스피어 깊이 읽기』 1부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배경을 설명한다. 2부에서는 희곡의 각 장르(비극, 코미디, 사극, 로맨스)에 따라 비평을 소개하고 그 장르의 희곡을 읽는 방식을 알려준다.


작품 읽기에 앞서 기억해야 할 것은 ‘셰익스피어는 극장에 오는 관객을 위해 글을 썼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기에 현대인보다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더 발달되어 있었고, 길고 복잡한 문장도 별 무리 없이 파악할 수 있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읽히는 글’은 다양한 기호와 상징을 포함하며 점점 간결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셰익스피어의 문장은 어렵게 느껴진다. 언어를 통한 특정한 효과를 위해 어려운 언어가 구사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보자.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에서 휘하 장군들을 향한 아가멤논의 연설에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어휘가 등장한다. 그가 말하는 내용의 어리석음을 감추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희곡은 운문으로 쓰였고 또 운문을 중시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산문(폭넓게 말해 시로 쓰지 않은 모든 문장)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산문은 운문보다 지위가 낮다. ‘상급자’인 진지한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운문으로 말하며, 여성과 노동자 계급은 주로 산문을 사용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작부분에서 하인들 사이의 모욕과 싸움은 산문으로 진행된다. 귀족이 등장하면서 2행씩 운문으로 진행된다. 산문이 이류언어라는 것은 아니다. 산문은 대중적인 감응과 관객들과의 접촉을 이끌어내는 극적 효과를 위해 사용되었다.


셰익스피어는 대체로 무운시blank verse로 글을 썼다. 무운시란 각운 없이 5개의 강세 음절을 가진 시행으로 구성된 시를 가리킨다. 고전적 명칭은 약강오보격, 달리 말해 영시의 표준 시행이라 할 수 있다. 전형적인 리듬은 ‘디-담-디-담-디-담-디-담-디-담’으로 ‘담’에 강세가 들어간다. 이것을 기본으로 강세의 패턴을 변조함으로써 대사의 효과를 꾀하게 된다. 이런 패턴을 알고 있으면 아무래도 대사의 효과를 파악할 수 있다. 이외에도 문장과 시행을 적절히 상호작용 시키거나, 각운을 통해 장면의 끝이나 극 전체의 극을 알리기도 하고 분위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수사학이 문학적 글쓰기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수사적 효과는 형태와 비유로 구분할 수 있다. 형태의 수사법은 특정 패턴을 만들기 위해 단어를 배열하거나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효과를 꾀한다. 비유는 단어의 의미를 바꾸어 효과를 만들어 내며, 은유와 직유, 아이러니, 과장 등의 친숙한 용어로 구분된다. 근대 초 관객들은 소수의 시각적 기호만 알고 있었다. 그들에 익숙한 기호란 주로 도덕적 묘사 등을 드러내는 엠블럼이었다. 셰익스피어는 도덕적, 정치적 교훈을 제시하기 위해 엠블럼을 이용한 알레고리를 사용했다.


중세적 위계질서, 하느님이 질서의 정점에 있고 아래로 천사, 남자, 여자, 동물, 새, 물고기 등 위계가 정해져 있는 이런 사상은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셰익스피어의 비유나 비교가 다소 황당할 수 있다. 과거의 사고방식은 런던의 상인계급의 출현과 사상의 변화라는 새로운 세계관과 뒤섞이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극에 등장하는 정치적 주장들은 언어의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되며, 이 이미지가 반복되는 패턴을 통해 드라마의 핵심 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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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16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에이바 2016-07-16 08:3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겨울호랑이님. 이 책은 1부가 특히 좋더라고요.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1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오지만 행복한 하루 되세요^^ 에이바님

에이바 2016-07-16 08:41   좋아요 1 | URL
네, 겨울호랑이님도 편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

단발머리 2016-07-1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때는 그렇게 머리에 안 들어오더니...
에이바님 페이퍼 읽으니 이해가 술술되네요~~~ ^^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2^^

에이바 2016-07-18 08:5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한 번 정리하고 읽으니 좀 낫더라고요... 나중에 젠더 편도 올려볼게요!!

루쉰P 2016-07-16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뚜아 에이바님 영어를 잘 하시나봐요...ㅠ.ㅠ 전 영어 고자라...잉잉 왜이리 영어가 안 느는지 원.
영어 단어 외우는 게 너무 힘들어요...외우다 보면 왜 이걸 외어야 하나 그러고 무슨 암호 기호 같아요 ㅋㅋㅋ
부럽다..에이바님....

에이바 2016-07-18 08:52   좋아요 0 | URL
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가벼운 덕질을 위한 정도요? 역시 덕질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ㅠㅠ 파워오브러브! ㅋㅋㅋ
 
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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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는 호가스 ‘셰익스피어 리톨드’ 시리즈. 기다렸던 책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시리즈 첫 권은 『겨울 이야기』를 개작한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이다. 셰익스피어의 후기 희비극으로 분류되는 이 작품은 사랑과 상실, 그리고 용서에 관한 이야기다. 셰익스피어 작품 읽기를 준비하는 동안 『겨울 이야기』에도 관심이 생겼는데, 그 이유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질투가 『오셀로』와 유사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점과 강력한 여성 캐릭터 파울리나가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 작품의 주인공인 페르디타와 작가 윈터슨의 개인사가 비슷하다니 『시간의 틈』에 더 관심이 갔다.


개작- 희곡을 소설로 옮기면서 얻는 효과는 시간과 배경의 제약이 사라지고, 동시에 논리적 설명이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레온테스가 폴릭세네스와 헤르미오네를 의심하는 이유가 실은 리오가 양성애자였기 때문이라거나, 안티고누스의 ‘곰에 쫓겨 퇴장한다’가 토니가 ‘베어 브릿지 아래서 사망’으로 대체되는 것들……. 소설이 시작되기 전, 희곡의 줄거리 요약을 삽입하고 있으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이해에는 큰 무리가 없다. 각 장의 제목은 희곡의 대사에서 가져왔으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성격도 희곡의 이미지와 대응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런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직한 리오는 시칠리아라는 헤지펀드를 운용하면서 자산을 쌓는다. 일에서의 성공과 달리 사생활은 평탄치 않다. 리오는 아내 미미와 죽마고우 지노의 관계, 그리고 복중태아까지도 의심한다. 리오는 아내의 침실에 설치한 웹캠을 보며 미미, 지오, 폴린 세 사람의 일상에 음탕한 프레임을 씌워 분노한다. 결국 질투에 눈이 먼 그가 미미와 지노를 죽이려 들고, 아내와 친구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일념 하에 벌어진 딸 퍼디타의 납치는 딸의 실종과 아들 마일로의 사망, 미미와의 이혼으로 끝난다. 16년 후, 뉴 보헤미아에서 솁과 클로의 보호아래 자란 퍼디타는 젤과 사랑에 빠진다. 젤의 아버지인 지노가 솁의 가게 플리스에 찾아오면서 출생의 비밀도 밝혀진다.


원작에서 레온테스는 뜬금없이 질투를 일으키는데 소설에서는 설명이 붙으면서 이야기가 아주 재밌어진다. 소년 시절 리오와 지노는 부모에 방치되었고, 자연스레 가까워진다. 어느 날 키스를 하고 얼마 후엔 몸을 겹치고 ‘특별한 사이’가 되지만- 리오의 실수로 지노가 절벽에서 떨어진 후 회복하는 동안 두 사람은 멀어진다. 서로를 원하면서도 모호한 우정으로 포장된 채 세월이 흐른다. 많은 사람들을 거쳤지만 두 사람 다 사랑에 빠지진 않았다. 그리고 미미의 등장. 특별한 미미, 그녀와 헤어진 1년. 사랑을 깨달은 리오는 지노에게 미미를 되찾아달라 부탁하고, 프랑스를 찾은 지노는 미미와 사랑에 빠진다. 지노는 호모섹슈얼이고, 미미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아내가 될 사람이다. 두 사람은 거기까지였고 리오와 미미는 결혼한다.


그렇다면 지노와 미미의 관계를 의심하고, 질투한 리오도 나름 합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리오의 열여섯, 지노를 잃을 뻔했던 공포. 그 트라우마가 미미를 잃을 수 없다는 광기로 발현된 것이다. 하지만 질투의 대상은 여전히 모호하다. 리오는 지노에게 질투한 것일까, 미미에게 질투한 것일까? 그렇게 세 사람의 관계는 16년 동안 동결된다. 리오와 미미의 사랑을 증거했던 아들 마일로가 사망하면서, 그리고 또 다른 증거인 딸 퍼디타가 사라지면서. 그리고 리오가 지노를 두 번째로 죽이려고 하면서……. 세 번째는 견딜 수 없다며 도망친 지노는 게임 개발에 매달린다. 언젠가 리오에게 이야기했던 꿈의 게임, 미미가 들려준 제라르 드 네르발의 꿈속에 나온 천사 이야기를 말이다. 사랑과 시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할 천사의 깃털을 모으는 게임. 그렇게 ‘시간의 틈’을 메울 수 있는 게임.


두문불출하는 지오, 조각상이 된 미미, 괜찮은 듯 괜찮지 않은 리오. 게임 속에서 세 사람은 만나고 또 만나지 않는다. 소설의 전반부를 휘몰아친 상처가 치유되는 데에는 16년이 걸린다.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입양되어 사랑받은 퍼디타, 부모에게서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젤이 자라는 동안이다.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야기는 또 다른 구원의 계기를 얻는다. 원작과 다른 점은 지노가 폴릭세네스처럼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업둥이 퍼디타의 운명은 작가 지넷 윈터슨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윈터슨 역시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져 독실한 오순절 교회파 부부에 입양된다. (퍼디타를 기른 솁이 오순절 교회파 신자다.) 지넷의 열여섯에 찾아온 첫사랑은 리오와 지노, 퍼디타와 젤이 경험한다.


현대사회의 특징인 다양성도 빼 놓을 수 없다. (윈터슨의 삶처럼)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은 리오와 지노, 이후 등장할 로레인의 삶이 보여준다. 인종적 다양성은 원작과 달리 솁과 클로가 흑인이라는 점에서 또 그들 고유의 문화를 향유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왕과 신하, 백성으로 나뉘어졌던 신분제는 현대에 와 경제적 차이로 구분되지만, 솁과 리오의 대화에서 인간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종교 아래 자라난 지넷 윈터슨, 그녀가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경험한 자각은 첫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윈터슨은 『겨울 이야기』를 개작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준다.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작품 속에는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영어로는 fall, 불어로는 tomber. 가을이기도 하고 추락이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기도 하고. ‘시간’ 역시 중요한 키워드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다 생각하지만 과거가 바로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오고 있다.’, ‘일어난 일을 되돌리는 것’. 지노가 과거를 돌려보겠다며 게임에 매달리는 것은 어떠한가. 과거에 박제돼버린 미미와 과거를 회상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리오는 어떠한가. 지넷 윈터슨은 퍼디타의 입을 빌려 말한다. 역사는 반복되고 추락(fall, tomber)하지만 용서와 구원의 씨앗, 사랑은 우리 안에 있다. 그러니까 (폴린이 말한 것처럼) ‘시간에게 시간을 주어라.’


분노도 고통도 사랑도 구원도 모두 우리 내면에 있다. 셰익스피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도 로버트 그린의 『판도스토-시간의 승리』을 다시 썼고, 지넷 윈터슨도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다시 썼다. 윈터슨은 거기에 자신의 인생과 인생에서 얻은 깨달음도 함께 들려준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다시 쓰는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이야기의 힘, 그 영속성을 빛나게 하는- 이보다 더 적절한 ‘다시 쓰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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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7-1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제게는 버거울게 뻔한데 너무너무 읽고 싶게 만드는 에이바님의 이 페이퍼... 저는 그냥 웁니다 ㅠㅠ
저.... 개인 질문 하나들어갑니다.
에이바님~~~ 제가 로마의 일인자 2권까지만 읽고 3권에 중도하차 했잖아요~ 아시면서 ㅎㅎ 포르투나의 선택으로 바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니면 로마인이야기 3권부터 다시 시작해야할까요@@

에이바 2016-07-14 10:54   좋아요 0 | URL
이 책 뭔가 아침드라마 느낌으로 재밌어요 ㅋㅋㅋ 리오가 질투심 폭발하는 장면 정말 막장스럽고 대단합니다. 호가스 시리즈 소개글은 올리지 않았는데 2020년까지 쭉 예정돼 있어요. 라인업도 좋아요. 앤 타일러, 마거릿 애트우드, 요 네스뵈, 질리언 플린,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트레이시 슈발리에... 개인적으로 애트우드 작품 기대중이에요.

시리즈 쭉 보실거면 로마의 일인자 3권 읽으시길 추천해요. 마지막이 아마 술라가 파티하면서 끝났던 거 같은데... 시리즈 중 1부가 젤 재밌었어요. 2부 풀잎관 안 보고 3부 포르투나의 선택 보시게요? 근데 2부는 2부대로 리비아 드루사 얘기도 나오고 재밌는데요... ㅠㅠ 결론은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순서를 지켜 읽지 않아도 되지만 순서를 지켜 읽으면 더 재밌다! 입니다. 가문별 세력도 파악하기 좋고 여러가지로요.

단발머리 2016-07-16 17:58   좋아요 0 | URL
호가스 시리즈, 정말 대단하네요!!
모르는 작가들이 많지만^^ 에이바님 설명 들으니 기대가 됩니다~~ 셰익스피어 리톨드면 일단 셰익스피어 작품을 알아야겠군요. 흐흠~~
마스터스 오브 로마는.. 아하.. 그냥 직진으로 가는게 낫겠군요. 제가 뭐 안 읽으려고 그런건 아니구요. ㅎㅎㅎ 얼른 포르투나를 읽고 싶은 욕심에... 히힛!
친절 안내 감사해요~

다락방 2016-07-1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엇 이건 뭡니까! 아니 가뜩이나 사고 싶은 책이 많아서 속상한데 ㅠㅠ 어떤 책을 골라서 결제해야 할지 고민중인데 ㅠㅠ 이런 리뷰라니요 ㅠㅠㅠㅠㅠㅠ 아 너무나 흥미로울 것 같아요 ㅠㅠㅠㅠㅠ

에이바 2016-07-14 11:28   좋아요 0 | URL
리오 질투하는 부분 상당히 로맨스 장르소설같고 표현도 아주 거칠고 예... 번역도 찰지고.. 좋았읍니다... 쭉 시리즈로 나올 거라서요. 해당하는 셰익스피어 작품 읽으면서 같이 보면 더 재밌을 듯 해요! 저는 윈터슨 작품도 찾아 읽으려고요.ㅎㅎ

비연 2016-07-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주문했는데.... 또 지름신을 강림케 하는 리뷰를...ㅜㅜㅜㅜ

에이바 2016-07-14 11:28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셰익스피어 희곡 읽는 중이라 더 재밌었어요. 왜 겨울 이야기로 스타트를 끊었나 했더니 윈터슨의 삶이 겨울 이야기... 이름도 윈터슨...ㅠㅠ 나중에 희곡도 볼건데 소설에 비해 심심할까봐 좀 걱정이에요 ㅠㅠ
 
안과 겉 알베르 카뮈 전집 6
알베르 까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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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 키요에 따르면, 『안과 겉』 재판에 붙일 서문은 적어도 1954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적은 부수의 초판을 절판시킨 뒤 20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글을 다시 읽고 펴내는 과정에서,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는 초심을 되새긴다. 더 일찍 재판하지 않은 이유는 카뮈에게도 ‘내글구려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러한 자기 성찰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세계가 계속해서 팽창하고 발전한 것이리라. 아무튼 이 서문이 정말 좋다. 서문을 거쳐 함께 실린 글을 순서대로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면, 그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


빛과 어둠, ‘안과 겉’을 품은 글의 구성은 이야기에서 사유로 발전한다. 에세이들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낯선 체험으로부터, 자신이 살아있음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낯설다는 것은 세계와 대면하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는 여행에서, 혹은 고독에서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된다. 일상적인 ‘이미지 하나하나가 제각기 하나의 상징’이 되고, 모든 산물에 민감해져 ‘명철한’ 도취감, 모순된 도취감을 느낀다. 이러한 체험은 스스로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스스로에게 가까이 접근시켜준다.


당연히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그러한 체험은 절망이기도 하고 행복이기도 하다. 눈짓을 까닥하기만 해도 세계의 균형이 깨어져 무너져버릴 것 같은 불안전함, 그러한 단순함의 세계 속에서 스스로가 보잘 것 없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함이야말로 깊은 감동을 준다. 죽음에 대한 의문 앞에 대답을 얻는다. 그렇다. 삶을 그쳐야 할 이유가 없다. 카뮈는 절망에서 삶에 대한 사랑을 찾는다. 그는 태양 아래에서 두려움을 떨쳐낸다. 어두운 절망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위대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죽음을 내포하고 있지만 죽음이 두렵다고 삶에 대한 사랑을 잃어서는 안 된다. 카뮈는 모순에서 나오는 괴로움과 절망도 삶의 일부분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가면을 벗어던지는 해방이 가져다 줄 감동, 진실의 순간을 마주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려면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다시 서문으로 돌아와, 카뮈는 말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더한 절망도 겪었지만 삶에 대한 사랑과 의욕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고. 그 서투른 글에 배인 열정은 아름답고 그만큼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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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7-0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베송`의 [포기의 순간]이란 책을 읽으면요, 필립 베송이 자신의 책에 독자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불의의 사건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라는 글귀를 적어주었다는 구절이 나와요.

에이바님의 이 리뷰를 읽다보니, `에세이들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낯선 체험으로부터, 자신이 살아있음을 인식한다`란 문장에서, 문득 필립 베송의 저 구절이 떠오르네요.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요.

에이바 2016-07-07 10: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께서 말씀하신 그 문장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에 대한 인식, 삶이라는 무대 장치가 붕괴되는 순간인데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저는 스토너에서도 저런 향기를 느꼈습니다. 일상에 대한 권태와 낯섬,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떤 체험? 그런 것을요. 여기서는 오히려 어떤 의미를 찾았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필립 베송의 문장에 더 가까우려나요? 스토너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그 문단을 인용해볼게요.

***
한번은 저녁강의를 마친 뒤 늦게 연구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겨울이었는데, 낮에 눈이 내려서 바깥 풍경이 하얗고 부드럽게 보였다. 연구실 안은 지나치게 더웠다. 그는 사방이 막힌 연구실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도록 책상 옆의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하며 하얗게 변한 캠퍼스를 눈으로 방황했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책상 위의 불을 끄고는 덥고 어두운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다. 열린 창문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겨울밤의 침묵이 들려왔다. 섬세하고 복잡하며 조직이 성긴 눈(雪)이라는 존재에 흡수된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 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 무(無)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쩡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책상 위의 불을 켰다. 그리고 책 한 권과 논문 몇 개를 챙겨서 연구실을 나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제시 홀 뒤편의 널찍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그는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마른 눈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억눌린 듯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스토너 252,2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