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스와프 프루스가 쓴 「인형」 상권을 반 정도 읽었는데 주인공 보쿨스키가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재력으로 상류 계급의 여성을 차지하려는 인물인가 하여 그 인물됨이 약간 저어되었는데(나이도 너무 많고) 볼수록 괜찮은 사람인 것이다. 물론 그의 과거(예를 들어 젊은 나이에 나이 차이가 나는 부유한 과부와 결혼하여 재산을 상속받은 것)가 깨끗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상인임에도 정도와 도덕을 알고 행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부하겠다 마음먹은 그를 모두가 비웃을 때 결국 대학에 들어가 과학을 탐구했고, 러시아에 대항한 봉기에 참여했기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했고 이후 불가리아 전쟁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으로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숭고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참 낭만적이라 할까.... 너무 늦은 나이에 찾아온 사랑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주변의 진심어린 충고보다 자신의 양심과 생각에 비추어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지마, 아 하지 말라고!!! 란 말이 절로 나오는데 정말 읽을수록 새드엔딩일 것 같은 예감에 미칠 것 같다. 보쿨스키의 몰락으로 끝날 것만 같은 예감. 책장이 넘어갈수록 하권도 같이 안 산게 너무 후회되고 이번 주말에 다 읽는 것이 옳은 일인가(??) 고민도 된다.

보쿨스키가 사랑하는 이자벨라는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리지 타입이 아닐까 했는데 빙리 양이나 레이디 캐서린, 「제인 에어」 의 레이디 잉그램에 가깝다. 아주 대귀족의 마인드.... 오만함에 걸맞은 놀라운 외모와 분위기.... 근데 빈털터리죠. 보쿨스키가 「워더링 하이츠」의 히스클리프, 아니 「설득」의 웬트워스 대령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 비록 이 두 캐릭터들은 과거에 여주인공의 사랑과 애정을 받았다는 차이가 있지만.... 똑같이 사랑을 얻으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재산을 모아 돌아오면 뭐하나. 약간의 복수심 혹은 야망을 zest로 뿌려 줘야 로맨스가 이어지는 재미가 있는데 아 진짜 이 소설은 넘나 사실주의다. 보쿨스키는 나이도 많고 말이야.... 마흔이 한참 넘었고 말이야.... 게다가 남주 버프의 아름다운 외모 그런 거 없음.... 그냥 아저씨.... 이자벨라의 스코프 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경멸만 얻은.... 많은 기회들을 그릇되게 흘려보내고.... 다른 면에서는 딱 떨어지게 정확하고 야무진 사람이 사랑 앞에 하루에도 몇 번씩 현타를 맞고 자기반성하고 그런다. 다가가지도 못해서 혼자 천국과 지옥 널을 뛰는 그런 찌질함이 한편으론 공감이 되고 그런 와중에 베풀 것은 또 베풀고- 그런 인성 때문에 보쿨스키를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단, 이자벨라와 이루어지라는 게 아니라 그 실체에 환멸을 느끼고 깨끗이 잊고 새출발하라고.... 「위대한 개츠비」같이 되지 말라고.... 상권을 마저 읽고 하권을 보면 이자벨라를 다시 판단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다....


추가) 같은 날 오후 10:35

나는 정말 진지하게 하권을 읽지 말까 고민하였다.... 더 이상 읽는 것은 보쿨스키에 대한 모욕이야!!! 소설은 재밌는데 도저히 책장을 넘길 수 없어서 몇 페이지 읽고 딴 짓 하기를 계속하다가 드디어 19장을 넘겼다. 하권 목차도 들여다보고 어떡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이제 안심이다. 통쾌하기까지 하다. 「인형」은 보쿨스키의 로맨스를 진행하면서 당시 유럽을 휘감은 혁명, 전운, 산업화에 따른 계급과 의식의 변화, 사회 문제를 모두 담은 소설이다. 보쿨스키가 어떤 동기와 방식으로 귀족 사회에 진입하고 거부당하는지.... 그리고 바르샤바가 어떤 식으로 그를 조롱하는지.... 로맨스의 진행 역시 단순한 남녀 간의 감정이나 신분 차가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가는 배경지식에 녹아들어 있다. 감정이입을 하더라도 보통 이 정도는 아닌데 오늘은 정말 힘들었다. 이제 남은 이야기는 제츠키의 회고, 보쿨스키의 과거 이야기라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겠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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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클래식 이야기
손열음 (Yeoleum Son)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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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음. 이름은 들어 봤지만 얼굴은 모르던 젊은 피아니스트의 매력을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이 아니라 그이가 쓴 글 덕분이었다. 책을 펴자마자 쏟아지는 추천의 글 때문에 책장을 도로 덮을까도 했다. 본편을 시작하기도 전에 광고로 힘을 다 빼는 느낌. 왜 여러 사람의 추천사를 이렇게 한꺼번에 싣나 의문이 들었다. 혹 내용의 빈약함을 이런 식으로 무마한 것일까? 그런 의심은 책장을 넘기면서 사라진다. 진솔하고 매력적인 글을 읽으며 인간 손열음을 좀 더 알고 싶어졌다.

클래식 관련 책을 보면 음악가의 삶에 대한 가십 혹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분석으로 빠지거나 한다. 간혹 어떤 글에서는 ‘연주자’로서 겪는 고민도 엿볼 수 있지만- 손열음처럼 전공지식으로 무장하고서도 이렇게도 쉽고 편안한 글은 아직 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쓰지, 하고 감탄하다 깨달았다. 손열음은 사람이다. 연주를 들려주는 기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좋은 해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숨길 수 없는 사람 말이다.

그거야 다른 연주자도 마찬가지겠지만 그이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글에서 우러나오는 교양 때문이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 본 사람의 글. 클래식 음악은 서양 문화의 총체이니만큼 악기 연습 외에도 익혀야 할 ‘문화’가 상당하다. 글로벌 시대라지만 동양에서 자란 이가 서양 문화를 흡수해 그 토양에서 자란 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해외 리뷰에서 아시아 연주자들을 손가락만 잘 돌리는, 테크닉에 치중하고 깊이는 없다는 지적을 하던데 어떻게 보면 일리 있는 말인 것 같기도 열등감이냐 싶기도 하고 그렇다.

1장은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정말 좋다. 피아니스트들은 수학적 머리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치려면 체력적으로 받쳐주어야 하고 하는 이야기들이 속속 떠오른다. 손가락의 두께나 연주자의 체중이 음색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 페달 사용을 통해 연주자의 취향과 실력을 알 수 있다는 것. 알던 이야기들도 손열음의 글에서 확인하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는 즐거움이 크다. 진지하게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무겁지 않게, 읽는 이를 납득하게 하는 설득력. 글을 참 잘 쓴다. 2장은 작곡가들, 3장은 이 시대 음악가들, 3장은 손열음의 취향 그리고 이어지는 글들은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손열음은 천재일까? 한예종 전 총장의 호들갑스러운 칭찬이나 모 기업 전 회장의 아낌없는 후원을 보면, 그리고 그이의 우수한 콩쿠르 성적을 보면 그런 것 같다. 한예종의 지원 아래 ‘한국에서’ 공부하고 ‘세계에서’ 통했다는 음악계의 자부심은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외국에서 공부한 교수에게 수학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대체로) 유학을 가는데- 콩쿠르에 통한다는 시스템적 자부심은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오늘도 깊이 있는 해석, 혼을 담은 연주를 위해 영혼을 제련할 그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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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6-10-07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읽고 싶네요~~!! ^^

에이바 2016-10-07 15:45   좋아요 0 | URL
이 책은 1장이 참 좋아요. 손열음이 글을 참 잘 쓰더라고요.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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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르지 쾨베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는 14세 소년으로 아직 어려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조차 없다. 아빠가 노동수용소로 떠날 때쯤 유대인들의 처우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빵 배급표를 받고, 허락 없이 도시 경계를 넘지 못하고 저녁이 되면 통금, 창문도 가려야 한다. 사람들의 눈초리에 증오와 경멸이 스민다. 수용소에서 일하기에 어린 아이들도 노동에 동원되고 죄르지도 정유회사에서 일한다. 어느 날, 출근하는데 경찰관이 버스를 세우더니 유대인들을 내리게 한다. 몇 대의 버스를 세워 같은 일이 반복되고 해가 떨어질 때쯤 행진을 시킨다. 도착한 곳 연병장에서 독일군을 봤다. 독일로 노동이주를 할 사람을 찾습니다. 어차피 가게 될 거지만 미리 가면 좋은 대우를 받아요. 젊고, 진취적인 독신들 신청하세요. 사람들은 기차에 실려 이동한다. 그들을 감시하던 헝가리 경찰이 금붙이를 요구한다. 독일놈들 주느니 동포에게 주는 게 낫잖소! 더러운 유대인들! 물이 부족하다. 옆 칸의 노파가 죽었다.

도착한 곳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사이렌 소리와 함께 죄수복을 입은 이들이 왔다. 여러 언어가 동시에 들린다. 뜨문뜨문 독일어로 묻는다. 지쳐도 안 돼. 병들어도 안 돼. 쌍둥이 안 돼. 난쟁이 안 돼. 어린이 안 돼. 너 몇 살? 죄르지가 답한다. 열네 살. 아니 열여섯 살. 네? 열여섯 살. 몇 번 다짐한 그가 사라지고 우르르 밀려 의사 앞에 선다. 의사가 묻는다. 몇 살이지? 열여섯이요. 짧게 보고 사람들을 분류하는 의사의 잔인한 미소. 도살장 같다. 죄르지는 자신이 건강한 그룹이라는데 약간 우월감을 느낀다. 건강한 사람을 골라내는 거라면 나도 할 만 하겠어. 어차피 일을 할 거라면 말이야. ‘식수 아님’이란 푯말이 적힌 곳에서 물을 마신다. 화학약품 맛이 많이 났지만 목이 너무 말랐다. 독일군은 제지하지 않았다. 목욕 전 안내사항입니다. 엑스레이를 찍어야 하니 귀중품을 맡기세요.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금붙이를 내놓는다. 죄르지는 그들을 돕는 죄수들에 위화감을 느낀다.

모든 체모를 밀렸다. 목욕 후 허름한 죄수복과 신발, 모자를 받았다. 건너편 여자들도 민머리가 되었다. 혼란스러우나 수프를 먹을 수 있다고 들어 기뻤다. 말린 쐐기풀수프라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어 쏟아 버렸다. 연기냄새가 이상하다. 가죽공장인 줄 알았는데 실은 화장터란다. 수용소에서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 때문이라 한다. 잠자리는 가구도 전등도 없는 창고 시멘트 바닥이다. 화장실은 하루에 두 번 간다. 아침은 춥고 낮은 찐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배고픔이었다. 사흘째 저녁, 부헨발트로 이동했다. 동물원도 있고 시설이 크고 건물이 멋지다. 군인들이 빠르고 정확하다. 문득 헝가리경찰이 떠오른다. 저들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인간일까?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진게 맞을까. 64921, 번호를 받았다. 음식과 잠자리는 아우슈비츠보다 조금 낫다. 목욕탕과 화장터가 있다. 시골수용소인 차이츠로 이송되었다. 목욕탕, 화장터 둘 다 없다. 처음으로 구타당했다. 헝가리 사람 번디 치트롬을 만났다.

살아남으려면 자포자기 하지마라. 잘 씻어라. 아껴서 나눠먹어라. 번디의 가르침이다. 여기에 하나 더, 고집이 필요하다. 기억, 희망, 즐거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자존심, 존엄,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소년은 이디시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유대인 무리로부터 배척된다. 처음으로 자신이 유대인 같다고 느낀다. 처음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이 경험들이 나를 근본적으로 흔들지는 못했다.” 배급이 줄었다. 기력이 쇠한다. 외모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정도 유한하고 생존법칙이 모든 걸 결정”함을 깨닫는다. “근본적으로 흔들”리는데 고작 석 달이었다. 육신이 급격히 늙고 망가지니 정신도 무기력하고 예민해졌다. 무릎 통증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다. 병들고 더러운 몸에 경멸적 시선이 떨어진다. 소년은 원래 자신이 이렇지 않았음을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누가 믿을까. 무마취 수술. 부헨발트로 옮겨진다는 말에, 쐐기풀수프를 먹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기쁨을 느낀다.

크고 깨끗한 나치친위대 건물에서 치료를 받는다. 번호가 짧고(수형기간이 김) 붉은 삼각형(정치범)을 단 사람들이 많다. 육년째 수감중이라는 의사가 나이와 이곳에 온 이유―어떤 죄를 지었니―를 묻는다. 인종이 달라서요. 엄마 아빠는 내가 여기 있는 걸 몰라요.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수감자들의 레지스탕스, 미군의 진입으로 부헨발트는 해방되었다. 집으로 오는 길 어느 기차역. 사람들이 떠나고 한 남자가 다가와 묻는다. 가스실을 본 적 있습니까. 봤으면 여기 없겠지요. 그는 잠시 생각한다. 가스실이 있었다는 걸 확인한 게 아니라 들어 알고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남자는 만족해 돌아갔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해 전차를 탔다. 돈이 없다. 표가 없으면 내리라는 말에 한 남자가 부끄럽지 않으냐 일갈한다. 신문기자라던 남자는 같이 연재기사를 쓰자고 한다. 새엄마는 가게 직원이던 쉬퇴 씨와 재혼했다. 동네 노인들을 만났다. "전적으로 그것이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것과 함께 갔다"는 소년의 말에 화를 낸다. 우린 가해자가 아니야, 피해자라고. 우리도 힘들었어.

인간을 인간답게 머무르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절멸수용소를 다른 극한 상황과 비교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이 재현불가능한 비극 앞에 로빈슨 크루소 류 재난소설은 픽션일 뿐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속적인 폭력과 학대가 자행되는 곳에서 이전의 세계―안락하고 온유하던 원래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죄르지는 분노를 느낀다. 낯설고 고된 노동도 할 만 했다. 그래서 난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씩 몸이 상하고 삐걱거리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어도 나는 나답게 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혼을 담은 그릇이 깨지는데 혼이 어찌 견딜까. 수용소를 뒤덮은 무기력과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날 길이 없던 소년은 그냥 아프지 않게 죽고 싶었을 뿐이었다. 돌아온 부다페스트는 변함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생활을 지속하고 있고 늙어버린 노인의 눈을 한, 절뚝이는 걸음마다 뼈가 달그락거리는 소년만이 텅 빈 눈 아래 분노를 느낀다. 분노를 태울 연료도 없이.

소년은 생각한다. 침묵하고 동조한 것도 잘못이다. 아니, 사회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폭력과 학대가 잘못이다. 수용소로 가기 이전에 이미 무언가가 유대인을 다른 부류로 만들어놓았고 서서히 자라난 증오가 범죄를 묵인했다.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조차 없던 소년은 이디시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용소 내에서 따돌림 받고 그제서야 자신이 유대인 같다고 느낀다. 유대인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쓰이는 용어라면 말이다. 귀향길에 들렀던 기차역에 있던 사람. 그는 가스실의 존재를 묻는다.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유대인들을 데려갔지만 설마 그런 방식으로 학살했겠어, 나치들이 문제지 나는 그 죽음에 책임이 없어. 누가 봐도 수용소에서 나온 행색의 소년에게 전차 삯을 치르라하자 부조리하다며 일갈한 신문기자는 진실을 알리고 역사에 이바지하자며 소년을 꾄다.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특종을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으로 포장하면서. 자신이 지옥이라고 명명한 곳에서 겨우 살아남은 소년의 악몽을 들쑤시면서.

소년의 분노는 독일을 향해 있지 않으며, 수용소의 삶을 지옥으로만 묘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질서정연한 독일 군인에 대한 칭찬과 감탄이 자리하며 자신의 경험을 제3자인 마냥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소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타인의 아픔엔 공감하나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쉽게 피로해한다.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픔 역시 토로한다. 나도 힘들었어, 우리 모두가 그런 경험이 있지. 그리고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종국엔 그런 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외면하는 것이다. 증인들은 화장터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 목소리는 사라질테고, 그 일들은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렇게 나치의 행위를 묵인했다는 죄책감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진다. 집단적인 망각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기억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망각의 시대에 모두가 불편해하는 일들을 자꾸 끄집어내고 공론화시키는 것은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극을 미학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발화 순간 왜곡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라면, 어떤 방식이든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증인들은 수용소에서 사라졌으며, 시간과 삶의 흐름으로 인한 남은 증인들의 기억―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기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쇼아》를 비롯하여 홀로코스트를 전달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문학, 애니메이션, 영화, 다큐멘터리, 수많은 목소리들……. 비극을 미학화하여 소비하는 방식이 윤리적으로 옳지않게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증언을 남겨야 한다. 비단 나치 홀로코스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폭력과 피해에 대해서, 공적인 기록은 물론이고 사적으로도. 많은 증언들이 확보될수록,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방향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목소리를 지우려는 시도들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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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14: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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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1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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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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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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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4 0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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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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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메자와 리카가 횡령을 시작한 것은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사는데 현금이 모자랐고, 인출기에 다녀오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마침 고객에게서 부탁받은 돈이 있어 얼마를 꺼내 값을 치른 뒤, 금액을 채워 놓았다. 그렇게 빌려 쓰고 채우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금방이었고, 익숙함이 불편함으로 바뀌는 것 역시 얼마 걸리지 않았다. 리카는 은퇴한 고객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단정한 외모와 다정함 덕에 실적이 높았다. 그래서 횡령할 수 있는 금액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시작은 고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남편과 소원했던 리카는 고타의 관심에 행복했다. 띠동갑 차이가 나는 대학생, 젊음이 주는 싱그러움과 애정 어린 손길은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리카는 자신의 저축과 고객의 예금을 허물어 고타의 빚을 갚아준다.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 돈은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가꾸는데도 쓰였고 고타와 시간을 보낼 호텔의 스위트룸과 고타의 외국 여행 경비, 급전이 필요한 친구와 어려움을 호소하는 가족에게도 돌아갔다. 처음엔 갚을 생각이었지만 씀씀이가 커지자 횡령액수가 늘어났고 나중엔 돌려 막는데 급급해진다.


태국으로 도피한 리카는 강가에 서서 생각한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만약’들은 말 그대로 시행되지 않은 가능성들이기에 부질없다. 결국 새로운 나를 만들자, 들키면 도망쳐서 또 새로운 삶을 살면 돼, 이러한 도덕과 현실의식의 부재는 아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쇼핑, 아니 충동적인 소비가 주는 자극에 중독되었다. 상황의 비윤리성은 차치하고, 무형의 돈을 유형의 상품으로 바꾸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유의미한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손쉬운 대출제도로 인해 더 악화된다.


한편, 리카의 동창 유코는 고통스러울 만큼 절약하는 모습이다. 결국 견디지 못한 딸 지카게는 도둑질을 하게 되고, 아이를 야단치는데 남편이 얘기한다. 이제는 조금 써도 되지 않을까, 너무 절약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키는 대출을 받아 딸이 갖고 싶은 물건을 마음껏 사주는데, 아이의 태도에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유코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절약했지만, 아이의 태도에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엄격한 절약과 무절제한 소비 둘 다 좋은 답이 아니었다.


리카를 사회로 내보내고, 그녀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듯 하던 마사후미는 출장에서 돌아와 말한다. 이제는 아이를 가져 보는 게 어때, 그리고 가끔 사치하며 해외여행도 가고 그렇게 살아 보자. 진작 그렇게 말해주었더라면, 계획이 있었다면 왜 말하지 않았던 걸까. 고가의 선물, 생활비 등 모든 것을 고타에게 주었지만 정작 그녀가 원했던 관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사후미는 리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해주었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다. 이제 리카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책임을 질 것인가, 자유로워질 것인가.


리카의 횡령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이상한 정의감’은 이 행위에 묘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애인과 제대로 사랑하던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할 비용을 마련해 두던지…. 평범했던 이가 어마어마한 횡령사건을 벌인 것 자체가 비일상적이지만, 이왕 하려면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소비를 통해 욕망을 드러낸다. 눈 닿는 곳 모두가 돈이기에,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그런 욕망이 허상으로 둔갑하는 순간, 현실은 깨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를 현실에 붙들어둘까. 여러모로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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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0-0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결말이 좀 별로인가봐요? 저는 에이바님의 리뷰를 읽고보니 이 책이 너무 읽고싶어지는 데 말이죠!! 읽고 싶은데 에이바님의 별 셋 리뷰라니..음... 그래도 읽어보기 위해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에이바 2016-10-05 11:57   좋아요 0 | URL
결말은 괜찮아요. 요즘 저는 예전이라면 별 넷을 주었을 책들에 별 셋을 주고 있어요. 별 다섯을 아끼려고요ㅎㅎ 90년대 일본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괜찮은 소설이에요.
 
나사의 회전 세계문학의 숲 6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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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의 소설은 『워싱턴 스퀘어』를 읽은 적이 있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담담하면서도 비정하게 그려낸 수작이라 생각한다.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몇 년이 지나고서야 그중 하나인 『나사의 회전』을 읽게 되었다. 액자식 구성, 의식의 흐름 기법에 의해 서술된 이 작품의 바깥 화자 ‘나’는 더글러스라는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아마도 여행지인 듯한 곳에서 유령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더글러스는 어릴 적 누이의 가정교사였던 여성이 남긴 원고를 읽어준다.

시골 목사의 딸인 그녀는 런던에 올라와 가정교사 자리를 얻기 위한 면접을 통과한다. 이제껏 본 중 가장 멋진 신사인 고용주에 반해버린 것도 잠시, 설렘은 사그러든다. 고용주가 그은 선-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 것, 어떤 일도 보고하지 말라는 얘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 가정교사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보면 그가 내건 조건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갓 스무 살이 된 가정교사는 고용주의 조카인 플로라를 가르치게 되고 곧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얼마 후, 소녀의 오빠인 마일스가 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오는데 그 이유는 끝까지 모호하게 설명된다.

플로라와 마찬가지로 마일스 역시 아름다운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흠결 없는 심성의 소년으로 보인다. 가정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신 역시 성장한다고 생각하며 또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녀 자신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투영하듯 아이들을 아낀다. 가정부 그로스 부인이 이전의 가정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 며칠 후, 탑 꼭대기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를 목격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남자가 저택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가정교사가 남자의 인상착의를 알리자 그로스 부인은 퀸트라며 겁에 질린다.

퀸트라는 하인은 방종하기 그지없어, 여러 스캔들을 일으키고 객사하였는데 그이의 행적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난다. 한편 가정교사는 플로라와 호수 근처에 갔다가 전 가정교사, 제슬로 보이는 여성을 본다. 이때 그녀는 제슬이 유령임을 알고 플로라의 반응을 통해 소녀와 유령이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음을 의심하게 된다. 그로스 부인에게 들은 사실은 무척이나 놀랍다. 비천한 신분의 퀸트가 상류층 여성이던 제슬의 배를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제슬이 이 집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그녀가 주목한 부분은 퀸트가 이 집 도련님 마일스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로스 부인은 그것을 영향력이라 표현한다. 여기서 퀸트와 마일스, 제슬과 플로라가 성적인 관계였음이 암시된다. 가정교사는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되었던 빅토리아 시대 어느 시골 목사의 딸이다. 스무 살이 되었고 고용주에게 반해 있으며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풍경과 꼭 맞는 천사 같은 아이들. 그러나 부도덕한 유령의 출현으로 아이들의 도덕성과 순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보수적으로 자라왔을 가정교사가 자기 분신처럼 사랑하고 숭배하던 아이들을 그대로 둘 수 있었을까?

이 집에서 유령을 목격한 사람은 가정교사 밖에 없고, 아름답고 소중한 아이들을 유령의 영향력에서 떼어놓을 이도 그녀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서 진실을 듣는 일은 쉽지 않다. 순진한 미소는 그녀와 힘겨루기를 하는 꿍꿍이로 느껴진다…. 이 소설에서 유령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가정교사의 서술을 어디까지 믿느냐에 달려 있다. 소설의 모든 것은 모호하다. 가정교사는 가정부보다 계급이 높기 때문에 대화의 대부분을 이끌어간다. 교사는 아이들보다 위엄 있을지 모르나 신분은 아래이다. 아이들은 그녀를 존중하고 따르지만, 유령을 본 후 아이들에 대한 가정교사의 의심이 깊어지면서 이 역시 미궁에 빠진다. 아이들은 진실만 말하고 있는가? 그로스 부인은 가정교사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유령은 가정교사라는 신분의 한계, 보답 받지 못할 사랑, 억눌린 성적 욕망의 좌절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낮은 신분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기존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것일수도, 혹은 저택 내 권력을 제어하려는 욕망일 수도 있다. 서술자의 자기기만이 환상과 현실을 혼동한다고 본다면, 『속죄』에 등장하는 브리오니와 『봄에 나는 없었다』에 등장하는 조앤과 비교할 만하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더글러스부터가 거짓일지도 모른다. 먼저 원고 자체가 거짓일 수 있고, 원고를 쓴 이가 가정교사가 아닐 수 있다. 또 더글러스는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니던 대학생일 때 열살 연상인- 누이의 가정교사를 만났다고 했는데 만약 마일스가 그라면 이 또한 거짓일 것이다.

사실 원고의 진위 여부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정교사가 유령을 본 건지, 만든 건지에 따른 해석을 주고받는 편이 더 다채로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진짜 유령이 존재했다면- 이 소설의 고딕 분위기가 한껏 살아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모호함으로 무장한 심리 소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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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10-0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문단 읽고 그만 읽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어요.
무서워서요~~~ㅎㅎㅎㅎ (웃지마세요, 진심입니다.(
앞부분은 <제인 에어>랑 비슷하네요. 젊은 가정교사, 매력적인 집주인, 귀여운 아이들. ㅎㅎㅎ

에이바 2016-10-05 11:11   좋아요 0 | URL
저번에 『리틀 스트레인저』때도 단발머리님 무섭다고 그러셨잖아요ㅎㅎ 근데 그 책은 좀 무서웠는데 『나사의 회전』은 그렇지 않아요. 제인도 그렇고 고딕 소설풍 이야기라 서로 연상되는 구석이 있어요. 하지만 제인은 모든 작품 중에서도 넘나 1순위! 좀 전에 알게 되었는데 오늘이 『제인 에어』 초판 출간일이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