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톨의 밀알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왕은철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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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한 소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조응하며 어떤 희망을 남기는, 과거와 현재의 갈등을 오롯이 담은 그런 소설.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비추었던 것에 비해 현재는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 붙들려 있는 케냐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을 가늠하게 하는, 고전 소설 분위기를 품고 있는 작품... 이 소설을 읽고 난 만족감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응구기 와 티옹오의 다른 소설들이 궁금하지 않을 정도이다. 거장의 세계를 엿본 듯한 아니 맛본 듯한 그 만족감이 기묘하게도,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제거해버린다고 할까? 아프리카 문학, 제 3세계 문학으로 분류되겠지만 고전이라 불리는 어떤 작품과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작품이다.

1952년 시작된 무장봉기 마우마우 운동으로 1959년까지 비상사태가 선언된 케냐. 식민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 생활을 했던 인물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1963년을 배경으로 한다. 독립, 나라(부족)의 존망 앞에서 각자는 결정을 내린다. 그 결정은 곧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이었고 원하든 원치 않았든 오롯이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저항 운동의 상징인 키히카는 연인을, 무고는 양심을, 기코뇨는 동지들을, 카란자는 조국을, 뭄비는 배우자를  배반한다. 이러한 배반은 소명 때문에 혹은 사랑 때문에, 흥분에 따른 순간의 충동 때문이었고 그 결과는 역사의 흐름 속 개인의 생에도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과연 그들을 배반자라 손가락질 할 수 있을 것인가?

키히카는 말한다. ‘노예한테 삶이란 게 있을까.’ 기코뇨는 얘기한다. ‘나 자신의 자유를 살 수 있다면 케냐 전체라도 백인에게 팔아넘겼을 것입니다.’ 독립의 결실을 맛보는 자들은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 식민 통치는 주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배경을 달리한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들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프랑스의 동화 정책을 생각하는 톰슨은 어떠한가. 옥스포드 출신의 역사학자인 그는 자신을 아프리카의 ‘프로스페로’처럼 여긴다. 뒤떨어진 문명을 도덕적으로 갱생하여, 사회와 문화를 재교육함으로써 그들을 해방시켜주겠다는 오만한 생각. 당시 지배층 대부분을 지배하는 생각이었을 터이다.

자치 대장으로서, 식민 당국의 앞잡이었던 카란자는 자신을 백인 힘의 일부로 여겼다. 여인들을 욕보였으며, 형제들의 피로 몽둥이가 흠뻑 젖었다. 카란자는 왜 배반했던가?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지만, 배반의 과정과 결과를 자신이 즐겼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린드 박사는 비상사태 동안, 집에서 일하던 요리사와 남자들에게 윤간당하고 키우던 개도 잔인하게 죽는다. 이러한 장면은 존 쿳시의 『추락』을 떠올리게 한다. 남아공 독립 이후, 시골에 정착한 루시 역시 흑인 남성들에 윤간을 당하고 개도 죽는다. 루시는 이를 이 나라에 머무르는 대가처럼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린드 박사 역시 새로운 개를 키우며 케냐를 떠날 생각이 없다.

식민 통치를 했던 인종과, 식민 통치를 받았던 인종의 시각은 다르다. 『추락』과 『한 톨의 밀알』의 시각 차는 거기에서 기인한다. 서로를 두려워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한 톨의 밀알』에서 본국으로 송환될 톰슨은 아주 가차없는 인물이었으나, 독립을 앞둔 케냐인들의 열망에 두려움을 품는다. 어쩌다 위대한 제국이 이렇게 되었지? 못생긴 백인 노처녀, 린드 박사를 본 순간부터 증오했다는 코이나는 주인을 짓밟았지만 여전히 건재한 그녀를 보며 불안함을 느낀다. 마치 그들의 땅에 늘러붙은 제국을 상징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에 대한 폭력은 집단적으로 서술되지만 백인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개인적이며 상징적이다. 이마저도...

키히카는 스코틀랜드 교회 학교에서 여성의 할례가 야만적이라는 선생에게 주장한다. 그런 말은 성경에 없으며 잘못되지 않았다고. 모계사회였던 케냐가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은 ‘임신’으로 여성들을 땅에 묶어둔다. 숭배하던 여성을 타락했다 점찍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에서 배부른 여성은 새로운 탄생과 희망이라는 상징을 남긴다. 여성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신격화야말로 억압일 터이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독립국가들이 전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다시 돌아봐야할 자취들로, 기코뇨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장면들과 함께 새로운 여지들을 남긴다.

키히카라는 저항 정신을, 조국 케냐를 배반한 이는 누구인가? 지난 과거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벌을 받아야 할 배반자를 찾는 것. 이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은 양심 선언, 어떤 숭고한 희생과 용기로 막을 내린다. 장거리 경주를 응원하던 열망, 사람들로 가득 찬 들판은 텅 비었으며 양심 선언을 한 인물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케냐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던 조모 케냐타. 그는 물러간 식민 통치를 이어받아 케냐인들을 억압한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응구기 와 티옹오는 ‘하람베’, 화해와 상생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길지는 않지만 놀라울 정도로 꽉 차 있는 작품이다. 직접적인 묘사는 피하면서도 충분히 그 고통과 절망이 묘사되고 있으며 캐릭터들이 제시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면들은 클래식하다. 다소 낯선 이름들에 익숙해지면 이제껏 읽어 온 작품들을, 우리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역자 해설을 참고하면, 이 작품은 조지프 콘래드의 『서양인의 눈으로』를 상호텍스트로 활용한 작품이라 한다. D. H. 로런스의 영향을 받았고, 응구기가 영어로 쓴 마지막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름을 제임스 응구기에서 기쿠유 식인 응구기 와 티옹오로 바꾼 후로는 기쿠유 부족언어로만 글을 쓰고 있다고. 이 다음에는 포스트 식민시대를 대표한다는 작품, 『피의 꽃잎들』을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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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11-08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박경리문학상...인가 받았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거의 완벽한 소설˝이라고 하시니, 확 당깁니다.^^ (글은 나중에 제대로 읽을게요. 요새 통 뭔 글이든 안 읽힙니다.)

에이바 2016-11-08 17:32   좋아요 1 | URL
흠결없는 작품이에요. 서양 고전 읽는 기분이었고 왠지 모르게 노벨상은 못 받을 것 같더라고요... 다음에 생각나면 한 번 보셔요.

AgalmA 2016-11-08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쿳시가 그 땅의 문제들을 먼저 캐치해 여러 작품을 써서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일까요. 존 쿳시의 여성 화자와 시점도 워낙 탁월했죠.
응구기 와 티옹오 소설 읽고 존 쿳시와 비교해 보고픈 충동이 생기네요~

에이바 2016-11-08 18:50   좋아요 1 | URL
쿳시랑은 좀 다르게 느껴지고요... 음 아무래도 이 작품이 1960년대에 쓰인 것도 있고, 작품들은 이 소설을 원형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느낌이래요. 쿳시 번역한 왕은철 교수님 역이고요. 아갈마님께서 응구기와 쿳시 비교해주시면 넘 좋죠 ㅎㅎ 아무튼 읽는다면 피의 꽃잎들 한 작품만 더 읽지 않을까... 한 권의 소설로 족하기는 오랜만이에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요.

AgalmA 2016-11-08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60년이면 존 쿳시보다 더 앞서 목소리를 낸 건데....흠. 존 쿳시가 작법에도 만능이라 라이벌로는 어려운 상대죠. 두 작가 나이대(티옹오가 2살 더 많네요)도 비슷하고, 같이 살아온 시대와 여건 생각하면 여러가지로 비교 지점이 있군요.
왕은철 교수님 번역이라면 더 신뢰가네요.
암튼 티옹오 작가도 한 권으로 읽고 말 작가는 아니군요.

존 쿳시 얘기 먼저 꺼내신 에이바님이 비교분석 먼저 하세요~ㅎ

에이바 2016-11-08 22:02   좋아요 1 | URL
1967년에 출간된 건데... 그쵸 남아공이랑 케냐, 서로의 인종이 달라서...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대한 권위를 무시할 수 없단 생각도 들고 또 응구기는 케냐의 역사를 겪어낸, 핍박받은 지성인이기 때문에 달리 느껴져요. 쿳시는 이천년대 초반에 몇 작품 읽었는데 가물가물하네요. 정확히 기억나는 건 추락 정도... 쿳시가 폴 오스터랑 주고 받은 서간집 번역된 거 좋더라고요. 다음에 쿳시도 다시 찬찬히 읽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ㅎㅎ 늘 그렇듯 저는 읽기 계획을 또 세워 보겠습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요 ㅎㅎ
 
[eBook] [고화질] 오르페우스의 창(신장판) 03 오르페우스의 창(신장판) 3
이케다 리요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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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는 율리우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뉘앙스를 비친다. 한편 음악원에서는 카니발에서 니벨룽의 노래를 공연하기로 한다. 율리우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그를 크림힐트로 꾸미고 아름다운 모습에 비르클리히는 옛 연인을 떠올린다. 이때 과거가 밝혀진다. 비르클리히와 율리우스의 모친은 사랑에 빠졌으나, 그때 이미 그녀는 아렌스마이어의 첩으로 살며 임신한 중이라 이름마저 속였던 것이다... 그 이름이 바로 크림힐트.



공연 중 어째서인지 가검이 진검으로 바뀌어 율리우스는 자상을 입는다. 이것은 비르클리히의 소행으로 의심된다. 그는 이전에 율리우스를 죽이려 했었고 이는 아렌스마이어 가에 대한 깊은 증오 때문인 듯 하다. 클라우스는 방에 갇힌 채 가면을 도둑맞고 동지들과의 접선이 위태롭게 된다. 비가 내려 카니발이 중단되고 율리우스는 클라우스의 가면을 쓴 자를 따른다. 이후 만난 동지 때문에 가면을 훔친 자(비르클리히)는 클라우스의 정체를 알게되는 듯 하다. 그리고 나타난 진짜 클라우스와 율리우스는 러시아 황제파 요인들에 쫓긴다. 이때 알라우네가 나타나 구해준다.



자상에 비를 맞은 채 달아나느라 지쳐 쓰러진 율리우스를 돌보다 그가 여성임을 알게 된 클라우스. 이후 깨어난 그녀에게 알라우네는 비밀을 지킬 것을 다짐한다. 클라우스는 자신에게 맹목적인 율리우스에게 끌리지만 마음을 다잡으려 하고, 이자크에게 여성인 것을 밝힌다. 한편 프리드리케는 이자크의 부모에 거둬져 동기처럼 자랐으나, 그를 연모한다. 이자크를 음악가로 만드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그래서 모리츠의 구애에 일부 응답하지만, 그는 아직 철 없는 부잣집 도련님에 불과하고 미래가 험난해 보인다.



비르클리히와의 레슨 중 율리우스는 그가 가면을 쓴 자,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임을 알아차린다. 그때 율리우스의 부친은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아렌스마이어 가에 경찰이 찾아 와 실종된 의사 얀이 스파이로 의심된다고 밝힌다. 부친이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되었음도 암시되며, 아네로테(율리우스의 둘째 누나)는 얀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마리아 바르바라는 율리우스 모자에게 이전보다 따뜻하게 대하지만 연모하는 비르클리히와 레나테가 함께 있는 모습에 분노한다. 그녀에게 레나테는 아름다움을 이용한 불륜 야망녀이기에...


율리우스의 아버지는 그에게 제국은행 금고 열쇠를 남기고 사망한다. 율리우스가 18세가 되는 날 열 수 있다. 그 때까지 아렌스마이어 가의 재산은 레나테와 마리아 바르바라, 변호사가 관리한다. 아네로테는 율리우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조심하는 게좋을 거야. 너에게 정당한 상속권이 없다는 게 밝혀지면 마리아 바르바라 언니에게 유리해질 테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비밀이 밝혀지면 율리우스와 레나테는 사기죄로 감옥가는 거 아닌가?


이자크가 믿을 만 하고, 클라우스가 율리우스를 위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비밀을 너무 빨리 밝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물론 이자크는 신의를 지키지만 사람은 어찌 될 지 모르는데! 다비트도 율리우스에게 저돌적이고, 이자크는 프리데리커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나... 율리우스 주변 남자들 하나같이 다 실망이다. 역시 여자 캐릭터들이 최고다. 율리우스, 마리아 바르바라, 알라우네, 게르트루드... 아네로테까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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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9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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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0 09: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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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0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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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0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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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9 2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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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0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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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리틀 선샤인 - 할인행사
조나단 데이턴 외 감독, 토니 콜레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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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카렐이 출연하기에 본 《리틀 미스 선샤인》. 올해로 개봉한지 10년이 되었다. 아마도 2006년 여름 쯤 극장가에 포스터가 걸리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에는 소식이 없다가 입소문을 거쳐 겨울쯤 개봉했을 것이다. 제목은 캘리포니아 주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 수상자를 가리킨다. 이해할 순 없지만 제목의 어순을 바꿔야 눈에 확 들어온다며 우리나라에서는 ‘미스 리틀 선샤인’으로 개봉했으며 소소한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발표된 이 블랙 코미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이를 라이벌에 빼앗기고, 커리어마저도 그에 패배하여 자살을 기도한 프랭크. 동생셰릴이 병원으로 찾아 왔다. 그녀의 집으로 와 보니 이 가족, 아주 가관이다. 프랭크와 방을 함께 쓸 조카 드웨인은 니체에 빠져있고,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날까지 묵언수행중이다. (500일이 훌쩍 넘었다.) 다른 조카, 통통한 올리브는 미인 대회에 우승하는 것이 꿈이다. 처남 리처드는 자기계발 강사로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춰 생각한다. 사돈 어른은 마약을 하다 양로원에서 쫓겨났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 삶에 지친 이들은 눈만 마주치면 시비다.

올리브가 보결로 ‘리틀 미스 선샤인’ 대회에 나갈 수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자살기도 때문에 프랭크를 혼자 둬선 안 되므로 가족들 모두 상태가 좋지 않은 미니버스에 오른다. 리처드는 여전히 사업에 빠져 있고 그 때문에 셰릴과 언쟁을 한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여자들과 많이 자라는 조언을 하고 올리브는 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 프랭크는 방치돼 있다. 그 와중에 미니버스가 고장 나는데 비용은 둘째치고, 대회일정 때문에 수리도 맡기지 못한다. 이제 가족들은 미니밴을 뒤에서 밀고 속력이 붙으면 차에 올라탄다.
 
리처드는 중요한 사업 계약을 맺는 것에 실패한다. 주유를 위해 들른 휴게소에서 프랭크는 전 남자친구와 맞닥뜨린다. 그는 프랭크의 라이벌이었던 교수와 희희낙락하는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모텔에서 마약 과다투여로 인해 사망한다. 장례 절차 때문에 대회에 갈 수 없자 가족들은 병원에서 시신을 탈취하다시피 한다. 차 안에서 드웨인은 자신이 색맹이라 조종사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좌절한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미인대회는 예상 밖이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인여성처럼 옷을 입고 장기를 뽐내는 모습은 역겹기까지 하다.

‘미인대회 수상자들은 뚱뚱하지 않다’는 아빠의 말에 상처를 입었던 올리브. 저는 루저가 되고 싶지 않아요, 라는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진짜 루저는 실패할까봐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가족들의 우려 속에 올리브는 무대에 오른다. 할아버지와 연습한 공연을 하기 위해서다. 〈Super Freak〉에 맞춰 추는 어설픈 섹시댄스의 속성은 저속해야할 것인데, 이 엉거주춤한 공연은 오히려 어린이의 성을 상품화하는 미인대회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계자들의 고성 속에 가족들은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추고 대회에서 쫓겨난다.

루저로 여겨지던 가족들이 자신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그들다운 방법으로 빅엿을 날리고 떠나는 후련함은 어쩌면 일시적일지 모른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인해 서로를 비난하기만 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이 여행에서 그들이 낙천주의자였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기어가 고장 나 차량을 뒤에서 밀다 올라타고, 클랙슨은 계속 빵빵 울리고, 에어컨도 안 되고 심지어 할아버지의 시신을 트렁크에 싣고 달려야 하지만! 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캐릭터들의 사랑스러움. 낙천주의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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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의 독서일기 2016-10-27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 리틀 선샤인. 저한테는 진짜 치유되는 영화였어요. 마지막에 가족들이 무대에 올라가서 팔짝거리면서 뛰어 다니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가 막 느껴졌어요.ㅎㅎ

에이바 2016-10-28 10:3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다시 봐도 좋더라고요. 예전에 멀뚱하게 봤던 장면들에서도 소소하게 터지고... 슈퍼프릭에 맞춰 춤추는게 진짜 통쾌하죠 ㅋㅋ

오늘도 맑음 2016-10-27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게 본 영화였어요~!!

에이바 2016-10-28 10:38   좋아요 0 | URL
정말 따뜻하고 좋은 영화예요. ㅎㅎ

다락방 2016-10-2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저도 개봉당시 극장에서 되게 재미있게 봤던 영화였어요. 그러고보니 이 영화속에 등장했던 꼬마가 이제 제법 자랐겠네요. 찾아봐야겠어요.

에이바 2016-10-28 10:40   좋아요 0 | URL
다른 영화에서 종종 보곤 했는데 최근엔 잘 모르겠어요. 마이 시스터즈 키퍼던가 그때만 해도 아직 앳된 모습이 있었는데요. ㅎㅎ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한 해
윌리 오스발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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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어떻게 말할까』는 ‘자유죽음’을 선택한 아버지와 함께 한 아들의 기록이다. 담담하지만 진솔하게 쓰인 글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들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자유죽음’의 정의를 짚고 넘어갈까 한다.

안락사는 고통 없는 안락한 죽음을 추구하고, 존엄사는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안락사는 약물 투입 등을 통한 적극적 안락사와 치료 중단과 같은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또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를 포함하며, 자유죽음과 DNR도 여기에 속한다. 자유죽음(Freitod)은 온전한 정신으로 적절할 때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유의지의 온전한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자살은 자유죽음에 비해 충동적이며 세상을 감당할 수 없다는 소극적 측면을 띠고 있으므로 이와 구별된다. DNR은 사전의사표시제도로, 심폐소생술 거부를 뜻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죽음은 존엄사에 해당하는 자유죽음이다.

존엄사는 인간에게 살 권리뿐 아니라 죽을 권리도 있다고 주장한다. 죽을 권리는 기본권으로서 죽음에도 전적인 자유의지를 발현하여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생애가 제한된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정서적·경제적 부담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존엄사에 반대하는 이들은 주로 생명 경시를 내세운다. 인간 생명을 끊는 것은 그 생명의 주체라 할지라도 인간 존엄성에 위배되는 행위, 즉 살인과 같다. 또한 환자의 의사에 반하는 등 범죄에 오용,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 의사의 오진도 무시할 수 없다.

작가의 아버지는 호스피스(완화치료)와 자유죽음을 동시에 추구한다. 전반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감정의 골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작가는 준비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애쓴다. 여기에 형제의 상황,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기질과 모습에 대한 반항심도 보인다. 아버지 행동의 당위에 대해 수긍하지는 못해도 복종하는 모습이 보이며, 동시에 아버지의 결정에 상처를 받는다. 어쩌면 아버지와 보낸 1년은 강제적인 화해였다. 죽음의 시기를 정해두고 삶을 정리하는 입장에서, 남겨지는 사람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결국 아들의 노력이 더 필요한 것이다.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과정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똑같다 할지라도 그 과정이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인 동시에 특권이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은 고통 속에서 죽음에 가까워진다. 반면 부자(작가의 아버지는 성공한 기업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존엄한 죽음을 맞이한다.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끊는가하면 존엄성을 지키지 못해 생명을 끊기도 하니…. 2018년부터 시행되는 ‘웰다잉법’과 관련하여 우리에게도 존엄사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요구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어쩌면 논의가 아니라, 선택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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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6-10-26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자유죽음과 심폐소생술 거부가 포함되는 자유죽음 그리고 자살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다양하네요.
장기간 의식이 없는 환자의 가족이 환자의 산소마스크를 제거를 선택하는 것은 또 다른 개념일까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니, 말씀하신 내용들과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에이바 2016-10-26 21: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말씀하신 사례는 소극적 안락사이자 존엄사로 분류할 수 있는데... 본인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경우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와 법적 문제가 같이 대두되더라고요. 예전 김할머니 사건 같이요.

cyrus 2016-10-2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페미니즘이 많이 거론돼서 덜 알려졌서 그렇지 `죽음`을 주제로 한 책도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에이바 2016-10-26 21:28   좋아요 0 | URL
이 책은 2014년에 번역됐는데 스위스는 이미 앞서갔죠... 스위스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이들이 많다나봐요.

2016-10-26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6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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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많이 멕여야 돼….”

『고령화 가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소설에서 나오는 얘기는 아니고 《웰컴 투 동막골》에 나오는 대사인데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북한군이었나, 누가 동막골의 평화로움에 대한 비결을 물었더니 촌장님이 하신 말씀. 자고로 등 따시고 배 부르면 불만도 사그러드는 법이라 했다. 요순시대에는 백성들이 왕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하지 않는가. 동막골도 그러하였다. 그러면 이 대사가 『고령화 가족』 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천명관의 소설은 세 작품을 읽었다. 『고령화 가족』, 『고래』 그리고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이다.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예전에 펼친 기억은 있지만 제대로 읽지 않아 내용은 잘 모른다. 고작 세 편을 읽었지만 공통점을 꼽아 보자면 포토제닉한 장면 구성과 달변적 서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와 관련된 것이 등장한다. 『고래』는 영화에 대한 순정을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내어 구비문학처럼 느껴지는 경지에 오른 미증유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이소룡 키드, 잊혀진 작품과 배우들에 대한 회고로 느껴진다. 그리고 『고령화 가족』에는 충무로의 낭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마흔 여덟. 명작일 수 있었을 영화의 실패로 아내도 친구도 사업도 잃은, 술로 날을 지새는 오인모.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엄마네 집으로 들어간다. 낡은 연립주택에 와 보니 구성원들이 가관이다. 전과 5범의 오한모, 두 번의 이혼 경력에 화류계에 종사하는 오미연과 그녀의 딸 비행청소년 민경. 그리고 칠순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는 엄마. 먹물 꽤나 먹은 오인모는 투덜거리지만 금세 이 분위기에 적응한다. 어차피 콩가루였던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각자 저 잘난 맛에 살던 인간들인데 서로 정이라도 있으랴. 남보다 못하던 관계가 피가 엉겨 붙듯 조금씩 끈끈해지는 것이 『고령화 가족』의 주된 이야기이다.

그래서 뭘 많이 멕이냐면, 고기를 멕인다. 조카와 피자 가지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난리를 치고, 눈을 세모꼴로 뜨던 중년의 자식들은 삼겹살 굽는 냄새에 한 자리에 모인다. 젓가락을 다퉈가며 먹어대는 한심한 인생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은 그저 자애롭다. 자식들을 거둬 먹이는 엄마는 활기를 되찾고 자식들의 피부에는 기름이 돈다. 그렇게 잘 먹으니 마음도 너그러워지는지, 날 선 말투들은 둥글어지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들이 단번에 사그러들진 않지만 어떤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저 밖에 모르던 인물들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별한 소설은 아니다. 작가 특유의 마초적인 문장들은 예나 지금이나 적응이 안 되고 책을 덮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놓지 못할만큼 재미있다. 대중적 인기를 겨냥해 쓴 것인지, 다른 작품에 비해서도 뻔한 줄거리인데도 말이다. 얼마 전, 천명관의 새 소설이 나왔는데 제목부터가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끌리지는 않지만 이 작품 또한 흡입력있게 풀어냈으리라 짐작한다. 아마 읽을 일이 없겠지 싶다가도 작정하고 썼나 보다, 궁금해지는 것을 보면 천명관이라는 소설가의 독특한 매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뭘 많이 멕여야 불만이 없다. 그렇다고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어기란 소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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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2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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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2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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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2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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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2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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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0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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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0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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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1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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