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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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는 호가스 ‘셰익스피어 리톨드’ 시리즈. 기다렸던 책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시리즈 첫 권은 『겨울 이야기』를 개작한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이다. 셰익스피어의 후기 희비극으로 분류되는 이 작품은 사랑과 상실, 그리고 용서에 관한 이야기다. 셰익스피어 작품 읽기를 준비하는 동안 『겨울 이야기』에도 관심이 생겼는데, 그 이유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질투가 『오셀로』와 유사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점과 강력한 여성 캐릭터 파울리나가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 작품의 주인공인 페르디타와 작가 윈터슨의 개인사가 비슷하다니 『시간의 틈』에 더 관심이 갔다.


개작- 희곡을 소설로 옮기면서 얻는 효과는 시간과 배경의 제약이 사라지고, 동시에 논리적 설명이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레온테스가 폴릭세네스와 헤르미오네를 의심하는 이유가 실은 리오가 양성애자였기 때문이라거나, 안티고누스의 ‘곰에 쫓겨 퇴장한다’가 토니가 ‘베어 브릿지 아래서 사망’으로 대체되는 것들……. 소설이 시작되기 전, 희곡의 줄거리 요약을 삽입하고 있으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이해에는 큰 무리가 없다. 각 장의 제목은 희곡의 대사에서 가져왔으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성격도 희곡의 이미지와 대응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런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직한 리오는 시칠리아라는 헤지펀드를 운용하면서 자산을 쌓는다. 일에서의 성공과 달리 사생활은 평탄치 않다. 리오는 아내 미미와 죽마고우 지노의 관계, 그리고 복중태아까지도 의심한다. 리오는 아내의 침실에 설치한 웹캠을 보며 미미, 지오, 폴린 세 사람의 일상에 음탕한 프레임을 씌워 분노한다. 결국 질투에 눈이 먼 그가 미미와 지노를 죽이려 들고, 아내와 친구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일념 하에 벌어진 딸 퍼디타의 납치는 딸의 실종과 아들 마일로의 사망, 미미와의 이혼으로 끝난다. 16년 후, 뉴 보헤미아에서 솁과 클로의 보호아래 자란 퍼디타는 젤과 사랑에 빠진다. 젤의 아버지인 지노가 솁의 가게 플리스에 찾아오면서 출생의 비밀도 밝혀진다.


원작에서 레온테스는 뜬금없이 질투를 일으키는데 소설에서는 설명이 붙으면서 이야기가 아주 재밌어진다. 소년 시절 리오와 지노는 부모에 방치되었고, 자연스레 가까워진다. 어느 날 키스를 하고 얼마 후엔 몸을 겹치고 ‘특별한 사이’가 되지만- 리오의 실수로 지노가 절벽에서 떨어진 후 회복하는 동안 두 사람은 멀어진다. 서로를 원하면서도 모호한 우정으로 포장된 채 세월이 흐른다. 많은 사람들을 거쳤지만 두 사람 다 사랑에 빠지진 않았다. 그리고 미미의 등장. 특별한 미미, 그녀와 헤어진 1년. 사랑을 깨달은 리오는 지노에게 미미를 되찾아달라 부탁하고, 프랑스를 찾은 지노는 미미와 사랑에 빠진다. 지노는 호모섹슈얼이고, 미미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아내가 될 사람이다. 두 사람은 거기까지였고 리오와 미미는 결혼한다.


그렇다면 지노와 미미의 관계를 의심하고, 질투한 리오도 나름 합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리오의 열여섯, 지노를 잃을 뻔했던 공포. 그 트라우마가 미미를 잃을 수 없다는 광기로 발현된 것이다. 하지만 질투의 대상은 여전히 모호하다. 리오는 지노에게 질투한 것일까, 미미에게 질투한 것일까? 그렇게 세 사람의 관계는 16년 동안 동결된다. 리오와 미미의 사랑을 증거했던 아들 마일로가 사망하면서, 그리고 또 다른 증거인 딸 퍼디타가 사라지면서. 그리고 리오가 지노를 두 번째로 죽이려고 하면서……. 세 번째는 견딜 수 없다며 도망친 지노는 게임 개발에 매달린다. 언젠가 리오에게 이야기했던 꿈의 게임, 미미가 들려준 제라르 드 네르발의 꿈속에 나온 천사 이야기를 말이다. 사랑과 시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할 천사의 깃털을 모으는 게임. 그렇게 ‘시간의 틈’을 메울 수 있는 게임.


두문불출하는 지오, 조각상이 된 미미, 괜찮은 듯 괜찮지 않은 리오. 게임 속에서 세 사람은 만나고 또 만나지 않는다. 소설의 전반부를 휘몰아친 상처가 치유되는 데에는 16년이 걸린다.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입양되어 사랑받은 퍼디타, 부모에게서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젤이 자라는 동안이다.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야기는 또 다른 구원의 계기를 얻는다. 원작과 다른 점은 지노가 폴릭세네스처럼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업둥이 퍼디타의 운명은 작가 지넷 윈터슨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윈터슨 역시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져 독실한 오순절 교회파 부부에 입양된다. (퍼디타를 기른 솁이 오순절 교회파 신자다.) 지넷의 열여섯에 찾아온 첫사랑은 리오와 지노, 퍼디타와 젤이 경험한다.


현대사회의 특징인 다양성도 빼 놓을 수 없다. (윈터슨의 삶처럼)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은 리오와 지노, 이후 등장할 로레인의 삶이 보여준다. 인종적 다양성은 원작과 달리 솁과 클로가 흑인이라는 점에서 또 그들 고유의 문화를 향유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왕과 신하, 백성으로 나뉘어졌던 신분제는 현대에 와 경제적 차이로 구분되지만, 솁과 리오의 대화에서 인간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종교 아래 자라난 지넷 윈터슨, 그녀가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경험한 자각은 첫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윈터슨은 『겨울 이야기』를 개작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준다.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작품 속에는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영어로는 fall, 불어로는 tomber. 가을이기도 하고 추락이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기도 하고. ‘시간’ 역시 중요한 키워드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다 생각하지만 과거가 바로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오고 있다.’, ‘일어난 일을 되돌리는 것’. 지노가 과거를 돌려보겠다며 게임에 매달리는 것은 어떠한가. 과거에 박제돼버린 미미와 과거를 회상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리오는 어떠한가. 지넷 윈터슨은 퍼디타의 입을 빌려 말한다. 역사는 반복되고 추락(fall, tomber)하지만 용서와 구원의 씨앗, 사랑은 우리 안에 있다. 그러니까 (폴린이 말한 것처럼) ‘시간에게 시간을 주어라.’


분노도 고통도 사랑도 구원도 모두 우리 내면에 있다. 셰익스피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도 로버트 그린의 『판도스토-시간의 승리』을 다시 썼고, 지넷 윈터슨도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다시 썼다. 윈터슨은 거기에 자신의 인생과 인생에서 얻은 깨달음도 함께 들려준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다시 쓰는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이야기의 힘, 그 영속성을 빛나게 하는- 이보다 더 적절한 ‘다시 쓰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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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7-1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제게는 버거울게 뻔한데 너무너무 읽고 싶게 만드는 에이바님의 이 페이퍼... 저는 그냥 웁니다 ㅠㅠ
저.... 개인 질문 하나들어갑니다.
에이바님~~~ 제가 로마의 일인자 2권까지만 읽고 3권에 중도하차 했잖아요~ 아시면서 ㅎㅎ 포르투나의 선택으로 바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니면 로마인이야기 3권부터 다시 시작해야할까요@@

에이바 2016-07-14 10:54   좋아요 0 | URL
이 책 뭔가 아침드라마 느낌으로 재밌어요 ㅋㅋㅋ 리오가 질투심 폭발하는 장면 정말 막장스럽고 대단합니다. 호가스 시리즈 소개글은 올리지 않았는데 2020년까지 쭉 예정돼 있어요. 라인업도 좋아요. 앤 타일러, 마거릿 애트우드, 요 네스뵈, 질리언 플린,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트레이시 슈발리에... 개인적으로 애트우드 작품 기대중이에요.

시리즈 쭉 보실거면 로마의 일인자 3권 읽으시길 추천해요. 마지막이 아마 술라가 파티하면서 끝났던 거 같은데... 시리즈 중 1부가 젤 재밌었어요. 2부 풀잎관 안 보고 3부 포르투나의 선택 보시게요? 근데 2부는 2부대로 리비아 드루사 얘기도 나오고 재밌는데요... ㅠㅠ 결론은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순서를 지켜 읽지 않아도 되지만 순서를 지켜 읽으면 더 재밌다! 입니다. 가문별 세력도 파악하기 좋고 여러가지로요.

단발머리 2016-07-16 17:58   좋아요 0 | URL
호가스 시리즈, 정말 대단하네요!!
모르는 작가들이 많지만^^ 에이바님 설명 들으니 기대가 됩니다~~ 셰익스피어 리톨드면 일단 셰익스피어 작품을 알아야겠군요. 흐흠~~
마스터스 오브 로마는.. 아하.. 그냥 직진으로 가는게 낫겠군요. 제가 뭐 안 읽으려고 그런건 아니구요. ㅎㅎㅎ 얼른 포르투나를 읽고 싶은 욕심에... 히힛!
친절 안내 감사해요~

다락방 2016-07-1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엇 이건 뭡니까! 아니 가뜩이나 사고 싶은 책이 많아서 속상한데 ㅠㅠ 어떤 책을 골라서 결제해야 할지 고민중인데 ㅠㅠ 이런 리뷰라니요 ㅠㅠㅠㅠㅠㅠ 아 너무나 흥미로울 것 같아요 ㅠㅠㅠㅠㅠ

에이바 2016-07-14 11:28   좋아요 0 | URL
리오 질투하는 부분 상당히 로맨스 장르소설같고 표현도 아주 거칠고 예... 번역도 찰지고.. 좋았읍니다... 쭉 시리즈로 나올 거라서요. 해당하는 셰익스피어 작품 읽으면서 같이 보면 더 재밌을 듯 해요! 저는 윈터슨 작품도 찾아 읽으려고요.ㅎㅎ

비연 2016-07-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주문했는데.... 또 지름신을 강림케 하는 리뷰를...ㅜㅜㅜㅜ

에이바 2016-07-14 11:28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셰익스피어 희곡 읽는 중이라 더 재밌었어요. 왜 겨울 이야기로 스타트를 끊었나 했더니 윈터슨의 삶이 겨울 이야기... 이름도 윈터슨...ㅠㅠ 나중에 희곡도 볼건데 소설에 비해 심심할까봐 좀 걱정이에요 ㅠㅠ
 
안과 겉 알베르 카뮈 전집 6
알베르 까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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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제 키요에 따르면, 『안과 겉』 재판에 붙일 서문은 적어도 1954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적은 부수의 초판을 절판시킨 뒤 20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글을 다시 읽고 펴내는 과정에서,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는 초심을 되새긴다. 더 일찍 재판하지 않은 이유는 카뮈에게도 ‘내글구려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러한 자기 성찰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세계가 계속해서 팽창하고 발전한 것이리라. 아무튼 이 서문이 정말 좋다. 서문을 거쳐 함께 실린 글을 순서대로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면, 그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


빛과 어둠, ‘안과 겉’을 품은 글의 구성은 이야기에서 사유로 발전한다. 에세이들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낯선 체험으로부터, 자신이 살아있음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낯설다는 것은 세계와 대면하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는 여행에서, 혹은 고독에서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된다. 일상적인 ‘이미지 하나하나가 제각기 하나의 상징’이 되고, 모든 산물에 민감해져 ‘명철한’ 도취감, 모순된 도취감을 느낀다. 이러한 체험은 스스로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스스로에게 가까이 접근시켜준다.


당연히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그러한 체험은 절망이기도 하고 행복이기도 하다. 눈짓을 까닥하기만 해도 세계의 균형이 깨어져 무너져버릴 것 같은 불안전함, 그러한 단순함의 세계 속에서 스스로가 보잘 것 없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함이야말로 깊은 감동을 준다. 죽음에 대한 의문 앞에 대답을 얻는다. 그렇다. 삶을 그쳐야 할 이유가 없다. 카뮈는 절망에서 삶에 대한 사랑을 찾는다. 그는 태양 아래에서 두려움을 떨쳐낸다. 어두운 절망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위대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죽음을 내포하고 있지만 죽음이 두렵다고 삶에 대한 사랑을 잃어서는 안 된다. 카뮈는 모순에서 나오는 괴로움과 절망도 삶의 일부분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가면을 벗어던지는 해방이 가져다 줄 감동, 진실의 순간을 마주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려면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다시 서문으로 돌아와, 카뮈는 말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더한 절망도 겪었지만 삶에 대한 사랑과 의욕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고. 그 서투른 글에 배인 열정은 아름답고 그만큼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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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7-0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베송`의 [포기의 순간]이란 책을 읽으면요, 필립 베송이 자신의 책에 독자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불의의 사건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라는 글귀를 적어주었다는 구절이 나와요.

에이바님의 이 리뷰를 읽다보니, `에세이들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낯선 체험으로부터, 자신이 살아있음을 인식한다`란 문장에서, 문득 필립 베송의 저 구절이 떠오르네요.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요.

에이바 2016-07-07 10: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께서 말씀하신 그 문장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에 대한 인식, 삶이라는 무대 장치가 붕괴되는 순간인데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저는 스토너에서도 저런 향기를 느꼈습니다. 일상에 대한 권태와 낯섬,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떤 체험? 그런 것을요. 여기서는 오히려 어떤 의미를 찾았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필립 베송의 문장에 더 가까우려나요? 스토너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그 문단을 인용해볼게요.

***
한번은 저녁강의를 마친 뒤 늦게 연구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겨울이었는데, 낮에 눈이 내려서 바깥 풍경이 하얗고 부드럽게 보였다. 연구실 안은 지나치게 더웠다. 그는 사방이 막힌 연구실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도록 책상 옆의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하며 하얗게 변한 캠퍼스를 눈으로 방황했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책상 위의 불을 끄고는 덥고 어두운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다. 열린 창문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겨울밤의 침묵이 들려왔다. 섬세하고 복잡하며 조직이 성긴 눈(雪)이라는 존재에 흡수된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 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 무(無)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쩡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책상 위의 불을 켰다. 그리고 책 한 권과 논문 몇 개를 챙겨서 연구실을 나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제시 홀 뒤편의 널찍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그는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마른 눈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억눌린 듯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스토너 252,253쪽)
 
쇼팽 - 쇼팽의 삶과 작품을 총망라한 가이드북 피아노 작품 해설 시리즈 1
고사카 유코 지음, 박선영 옮김 / 음악세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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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삶과 음악』과 다른 점은 그가 남긴 작품에 대한 해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부제는 ‘쇼팽의 삶과 작품을 총망라한 가이드북’으로 아주 적절하다. 이 책은 일본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학자인 고사카 유코가 쇼팽탄생 200주년(2010년)을 기념하여 정리하였다. 조르주 상드의 『마조르카의 겨울』을 일본어로 옮겼을 정도로 쇼팽에 대한 애정이 깊으며, 이 책을 완성하고 나서는 악곡해설과 함께 실제로 연주를 듣는 렉처 콘서트를 열었다고 한다. 『쇼팽의 삶과 음악』이 음악가의 삶을 좀 더 자세하게 다룬다. 이 책은 작곡 당시 에피소드를 포함한, ‘쇼팽의 모든 작품’에 대한 해설집이다. 쇼팽은 작곡한 시기 순으로 작품 번호를 붙였기에, 순차적으로 그의 삶 또한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음악가의 삶과 교우 관계에 대한 정보들은 많으나 곡 해설은 유명한 작품에 그친다. 그렇기에 작품 번호, 제목, 작곡 연도, 출판 연도, 에피소드, 작품 해설(서주나 주제 악보)로 이루어진 이 책의 출간이 너무 반가웠다. 머리말에 언급된 다음 문장은 꼭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쇼팽의 매력에 빠져든 사람은 그의 피아노 독주곡을 차례차례 듣고 싶어지거나, 또는 직접 연주하고 싶어진다.” 클래식에 대한 무지는 쇼팽에 대한 편견을 심어 주었다. ‘너무 감성적이고, 유약하다.’ 그러나 다양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며 음악에 대해 알아갈수록 듣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주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던 것이다. 따라서 쇼팽의 음악에 매력을 느끼는 리스너, 플레이어 모두에게 유용하다고 하겠다.

 

재미있게 본 부분들을 소개하자면, 작품번호 7, 〈5개의 마주르카〉를 하나로 묶은 기준은 바로 조성이다. 이는 〈연습곡〉이나 〈전주곡〉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쇼팽의 연습곡은 작품 10, 작품 25이 있다. 그가 살던 시대는 피아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고, 연주기술 향상을 위해 연습곡이 많이 출간되었다. 대표적인 연습곡이라면 『하농』이 있는데, 필립 카사르는 무지막지한 음계가 반복되는 이 작품을 비판하며, 음악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유연함도 기를 수 있는 브람스의 〈연습곡〉과 비교하기도 했다. 쇼팽의 연습곡은 프란츠 리스트(작품번호 10)와 그의 연인이었던 마리 다구 백작부인(작품번호 25)에게 헌정되었다. 쇼팽의 연습곡은 아름다워 연주회에서 연주되기도 한다. ‘혁명’과 ‘겨울바람’이라 불리는 곡이 특히 유명하다.

 

쇼팽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인기가 대단했던 리스트는 곧 이 폴란드 음악가와 좋은 관계가 된다. 두 사람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는 것은 리스트가 마리 플레옐과 연애를 하면서인데, 밀회 장소가 쇼팽의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인 피아노 제작자 카미유 플레옐은 쇼팽 후원자이기도 했기에 아주 난처한 상황이었다. 쇼팽이 무척 사랑했던 이 피아노 브랜드는 최근 사업을 매각해야 했는데, 시장 상황의 악화와 영업 부진 때문이었다. 파리를 대표하는 콘서트 홀인 ‘살 플레옐’ 역시 이 회사에서 세웠는데 최근 개보수를 마쳤다. 이 곳에 상업시설이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겨우 살아남았다. 쇼팽은 이 마리 플레옐에게 작품번호 9, 〈3개의 녹턴〉을 헌정하는데 그 중 녹턴 2번은 쇼팽 하면 떠오르는 아주 유명한 곡이다. (녹턴 2번, op.9-2, E♭장조)

 

인상주의 음악의 예고처럼 느껴진다는 작품번호 45, 〈전주곡 25번〉과 쇼팽의 시작과 끝인 폴로네즈와 마주르카, 조르주 상드와 지내던 마조르카와 노앙에서의 열정적인 작곡 활동, 얼마 되지 않는 쇼팽의 표제곡들에 대한 설명도 도움이 되었다. 해설이 작품 번호 순으로 실려 있어 쇼팽의 작품이 발전하는 과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리뷰에서는 제인 스털링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음악가의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연주일정으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생각해서다. 그의 유품들은 스털링이 매수하였고, 레슨에서의 메모를 통해 쇼팽의 피아니즘을 후대에 전해준 아주 고마운 인물임을 짚고 넘어가려 한다. 조르주 상드에 대한, 이 책의 다소 온화한 시각도 눈여겨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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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휘트먼 시선 : 오 캡틴! 마이 캡틴!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11
월트 휘트먼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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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해보니, 월트 휘트먼의 시를 접한 것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명장면에서였다. ‘오 캡틴! 마이 캡틴!’ 곧잘 인생영화로 꼽히는 이 작품을 여태껏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리뷰를 쓰기 앞서 출연진을 찾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많다. 로빈 윌리엄스, 에단 호크, 조쉬 찰스, 로버트 션 레너드…. 시선집의 표제작인 「오 함장님! 우리 함장님!」은 링컨 대통령의 서거 이후 휘트먼이 쓴 작품이다. 오 함장님! 끔찍한 항해가 끝났습니다. 항구 쪽에서 종소리가 들려요, 일어나 저 종소리 좀 들어보세요. 오, 가슴이! 함장님의 가슴에 흐르는 붉은 핏방울이! 함장님을 부르는 함성과 꽃다발을….


월트 휘트먼은 1819년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나 브루클린에서 성장했다. 가정형편 상 열한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며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만난다. 인쇄공, 교사, 편집자로도 남북 전쟁 이후 미국 내무성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휘트먼은 생애 단 한 편의 시집 『풀잎』을 출간하는데, 1855년 초판에서 1892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거의 40년 동안 이 시집을 수정하고 증보했다. 자신이 썼던 시를 평생에 걸쳐 돌아보고 다듬고 추가하는 작업, 그 의지와 끈기 그리고 애정을 넌지시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듯하다.


시선을 읽으며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휘트먼의 『풀잎』과 아티초크의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여는 시, 「나 자신의 노래」다. 아티초크 시선은 총 52편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1∼6편, 51편, 52편을 골라 실었다. 나는 표지 디자인 A를 가지고 있는데, 표지를 보면 세 개의 말풍선이 있다. 휘트먼은 ‘I celebrate myself’, ‘I sing myself’라 하며, 아티초크 로고 부엉이 아테네의 말풍선은 이를 패러디한 ‘I artichoke myself’이다. 휘트먼의 대사는 이 시의 유명한 첫 소절의 일부이다. ‘나 찬미하노라 나 자신을, 노래하노라 나 자신을, 나를 이루는 모든 원자 그대를 또한 이루고 있음이라.’


『보르헤스의 말』에서 노작가는 휘트먼을 진정한 시인으로 꼽았다. 『풀잎』은 인간 휘트먼, 신화로서의 휘트먼, 독자라는 삼위일체 인물을 등장시킨 거대한 서사시라는 것이다. 번역가 해설을 보니, 「나 자신의 노래」 첫 행은 전통적 영시의 규격인 약강오보로 시작되며 그 아래 행부터는 형식의 파괴가 이어진다고 한다. 초판 출간 당시 시에는 제목이 붙어있지 않았고, 시인의 이름 없이 그의 모습을 그린 삽화가 포함되었다. 벌써부터 범상치 않다….


「나 자신의 노래」는 자연에 대한 찬미가 주를 이룬다. 휘트먼의 자연은 삶, 생명 그 자체이기에 본능 또한 긍정한다. 인간의 성(性)과 육체를 자유로이 풀어놓았기에 외설적이란 평을 받았고 이는 휘트먼이 국무부에서 해고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인상적이었던 5편의 일부를 옮겨본다.


그토록 투명했던 어느 여름 아침 우리 함께 누웠던 일을 나는 기억한다,

네가 나의 허리를 가로 베고 누워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나의 셔츠를 풀어 헤쳐 가슴뼈를 드러내고는 맨살이 드러난 가슴에 혀를 찌른 뒤,

손을 뻗어 내 수염을 더듬고, 다시 손을 뻗어 내 발을 잡았던 일을 나는 기억한다. (28쪽)


‘가슴에 혀를 찌르다’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는데 해설을 보니, 이 연인은 뱀파이어의 이미지라 한다. (『드라큘라』의 저자 브램 스토커가 휘트먼의 팬이었다.) 연인의 성별도 궁금하지 않은가? 나는 남성으로 읽혔다. 사랑과 뱀파이어, 연인…. 앞서 간 휘트먼 선생님…. 


이러한 관능은 ‘창포’ 편에 속한 시들에서 드러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칼라모스(창포)에서 비롯된 이 이미지는 동성애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에 대해, 휘트먼은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남성적인 사랑’으로 비유하고 ‘동료comrade’라는 시어를 사용하는데서 암시되는, 당시로서는 과격한 내용을 담은 휘트먼의 시. 작품에 흐르는 진보적 성향, 그리고 시인의 인생과 지인들을 더불어 생각하면 휘트먼이 퀴어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성애와 동성애가 혼재하는 꿈 이야기인 「지나가는 낯선 이여」에서는 플라톤의 『향연』중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휘트먼의 영향을 받았고, 그를 극찬한 작가들이 상당하다. 50년대 비트닉, 60년대 히피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항을 상징하며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영문학사에 드리운 거대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이름들. 휘트먼의 가치는 시대를 초월한 영속성에 있다는 서문을 쓴 D. H. 로런스, 뉴저지 캠든을 찾아와 우정을 나눴던 오스카 와일드, 휘트먼에 헌시를 바친 페르난두 페소아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율리시즈』와 『피네간의 경야』에서 그를 인용한 제임스 조이스,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 휘트먼을 번역한 정지용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까지….


「나 자신의 노래」로 돌아와, 이 시야말로 휘트먼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자연에 대한 예찬은 구체적이며, 그 아래 호흡하는 모든 것은 긍정적이다. ‘풀잎’에는 우주의 본질이 들어있으며 ‘죽음은 생명이 나타나는 순간 죽는다’. 시를 읽으며 죽음을 긍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세계의 확장까지 느껴진다. ‘나’로 시작하여 ‘그대’로 끝맺는 이 시를 비롯하여, 휘트먼 작품들의 화자를 보며 그가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인 이유를 알 듯 했다. 미국이라는 역사를 살아가고, 그 앞에 선 개인이기도 하고,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인들 그 자체이기도 한- 참여자이고 목격자이자 그 존재 자체인 인물.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나는 세상의 그 모든 불행을」과 「화해」, 링컨 대통령을 그리는 「오 함장님! 우리 함장님」 그리고 미국적 가치와 희망을 노래한 「인도로 가는 항해」. 사라지지 않는 별들보다 더 영원한 게 있다는「밤의 해변에서」. 그리고 이제 영혼의 자유로운 비상을 할 시간이라는 「맑은 한밤중」을 읽노라면 시대와 세대를 넘어, 휘트먼은 시간과 우주의 생살을 시로 썼다는 D. H. 로런스의 말을 알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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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트먼만 유일하게 읽은 외국시인이에요 ㅋ 워낙 시는 잘 못 읽고 확 오는 게 없어서요 그의 정신을 참 좋아합니다 자유롭고 강건한 그의 시를 읽으면 어떤 파도도 타고 넘을 용기가 생겨요 이런 책 사람들 별로 안 읽는데 대단하시네요 ㅋ

에이바 2016-06-25 21:15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시는 잘 읽지 않지만 아티초크에서 소개하는 시들은 덕심을 끓어오르게 하는 요소가 있어요. 소개하는 작가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함께 실린 자료랑 해설 읽다보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할까요? 표지 아트워크도 예술이고요... 저는 용기까진 안 생겼는데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루쉰P 2016-06-28 20:52   좋아요 0 | URL
흠 아티초크가 덕심을 끓어오르게 하는군요. ㅋ 안 그래도 저도 요즘 덕심을 폭발 시키면서 한 작가에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책을 얇게 읽다보니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덕심 있게 독서를 해 볼라고 계획 중이거든요 ㅋ

제가 좋아하는 취향의 소유자 이신 듯 싶어요 앞으로도 재미난 리뷰 부탁드려요 ㅋ

에이바 2016-06-29 10:46   좋아요 0 | URL
제 경험상 작가에 집중하면 그 사람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어 더 좋더라고요. 어떤 경우엔 실망도 하지만... 루쉰P 님도 즐거운 독서하시고 좋은 리뷰 부탁드립니다. ^^
 
쇼팽,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5
제러미 니콜러스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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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부터 쭉 클래식에 대한 서적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한동안 빠져 읽고서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니 기억이 휘발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하다. 왜냐하면 다시 책을 읽어도, 처음 느낌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에… 책을 다시 펼쳐도 처음 그 설렘보다는 그동안 이리저리 찾아본 정보들이 섞여 떠오른다. 별로다! 인덱스는 많은데 펼치면 왜 표시를 해둔건지 떠오르지 않는다. 어렴풋이 알 듯도 한데 말이다. 그래서 『음악의 시학』이나 『음악의 기쁨』같은 책들은 리뷰를 한참 뒤로 미뤄야한다. 한 번씩 꼼꼼히 읽기도 했거니와, 다시 읽을 땐 음악도 찾으면서 제대로 복습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혹 이 작품들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구입하시길 권한다.)


그런 의미에서 『쇼팽, 그 삶과 음악』 리뷰는 워밍업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가 음악을 담은 씨디를 포함하고 있어서 가격이 좀 있는 편인데, 씨디를 전혀 뜯지 않았음에도 나는 무척 만족하고 있다. 쇼팽의 피아노곡들은 각자 따로, 선호하는 피아니스트의 레코드로 가지고 있으므로 굳이 부록을 뜯지 않아도 되고, 낙소스 라이브러리에 접속할 수 있는 아이디가 제공되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가 없다. 아무튼 이 책으로 프리데리크 쇼팽의 삶을 한 번 제대로 들여다보았다는 것이 좋았다. 클래식 입문 서적이나, 낭만주의 음악가들에 대한 책들에서도 조금씩 언급된 일화들이 모두 모였기 때문에 이 위대한 작곡가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정리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쇼팽은 병약하고 예민하고 거만하기도 했지만 친절하고 사려 깊으며 센스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일생에 중요한 인물 셋을 꼽아보면 첫째로 비서 역할을 한 율리안 폰타나가 있다. 스스로 쇼팽에게 기대한 보상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뒤치다꺼리만 하다 결별하는데, 나중에 자살로 일생을 마감한다. 쇼팽의 유작을 정리해 출판한 것도 폰타나였는데 일화들을 읽어보면 호구 중에 호구다... 또 중요한 이는 쇼팽의 스승인 아달베르트 지브니이다. 보헤미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피아노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쇼팽의 재능(즉흥연주, 독창적 연주법)을 개발할 수 있게 한다. 어린 쇼팽에게 바흐, 모차르트와 같은 고전 음악에 대한 사랑을 심어준 인물이기도 하다. 지브니의 파격적인 수업이 아니었다면 위대한 인물의 싹이 잘 자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조르주 상드. 그녀가 얼마나 큰 애정으로 쇼팽을 보살폈는지 알 수 있었다. 상드와 지내는 동안 쇼팽은 엄청난 작곡열을 유지했으며, 걸작들이 나왔다. 전주곡, 폴로네즈, 즉흥곡, 야상곡, 소나타 등 쇼팽하면 떠오르는 작품들 말이다. 상드의 두 아이에 대한 쇼팽의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그리고 아이들로 인해 연인과 멀어지고 상처를 입는 과정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편으론 작곡가를 보살핀 상드의 애정이 꽤 오래 지속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쇼팽이 알캉과 친했다는 것, 그것도 내내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리고 그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슈만에 대한 냉정한 태도도... 자신의 천재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가진 거만함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점은 쇼팽의 제자들은 스승만큼 뛰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는 쇼팽의 피아니즘을 알 수 있는 레코드(녹음), 교수법을 전해 받지 못했다... (메모는 남아 있다) 쇼팽이 자신과 같은 천재라고 극찬했던 수제자 카를 필치는 폐결핵으로 요절하였고, 그의 문하에 필치만큼의 재능을 가진 이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쇼팽의 삶을 따라가면서 작곡 당시의 분위기를 잘 녹여내어 1830년대의 파리가 천재들의 요람으로서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초상화, 머물렀던 동네나 소지품, 데드마스크 등 이미지 자료와 작품 해설이 함께 실려 있어 대체로 만족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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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2016-06-17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은 읽자마자의 느낌이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이래저래 쓰는 시기를 놓치고 나면 헤어진 남친 다시 만나는 것처럼 설렘이 없어지고, 결국 안 쓰게 되더라고요^^

에이바 님 리뷰를 읽으면,

아.. 나도 열심히 읽어야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묵묵히 읽지만 마시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리뷰도 많이 써주세요ㅎ

에이바 2016-06-24 19:35   좋아요 0 | URL
그게 알면서도 잘 안 되더라고요. 항상 무언가를 읽고는 있지만... 리뷰 쓰려면 생각도 다듬어야 하고 무언가 압도되는 전율, 그런 걸 느껴서 일필휘지로 쓰는게 아니면 자꾸 미루게 돼요. 노력하겠습니당...ㅜㅜ

clavis 2016-09-25 23:09   좋아요 0 | URL
하하 표현이 넘나 재밌어요 헤어진 남친 만나듯 설레임이 사라진 리뷰쓰기..와 닿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7-1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억의 휘발 때문에 억지로라도 글 남기고 있습니다. 자주 글 뵙길 희망합니다. ^^